1 머리를 깎는 것
理髮
이발을 하는곳을 이발소라고 한다.
하다보면 엉덩이가 근질거릴 때가 있다
1.1 군대
1.2 학생
2 조선 중기의 문신
李潑
(1544~1589)
호는 동암이다. 호남의 명문가 광산 이씨 집안 출신으로 전라남도 함평에서 출생해 최영경 등과 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1568년, 과거에 급제해 관직생활을 시작했고 여러 관직을 거쳐 1584년에 대사간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동서분당 사태가 일어난 때 이조정랑(인사를 책임지는 요직)에 기용되어 자신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을 다수 기용하여 자연스럽게 동인의 지도자가 되었다. 동인이었지만 후일에 서인의 거두로 추증되는 이이를 무척이나 존경하여 이이와의 사이가 각별했다. 이이는 이발과 정철을 불러 손을 맞잡게 하고 화해를 주선하기도 했다.
하지만 동서 분당의 감정의 골은 두 사람의 표면적 화해 정도로 끝날 수준이 아니었고 동인 중에서도 최고 강경파인 정인홍이 이발, 이이[1][2]와 함께 심의겸을 탄핵하는 과정에서 이게 다 서인놈들이 소인배라 그렇다란 말을 멋대로 하는 바람에 선조가 분노하고 이이도 분격하는 사태가 벌어져 이에 책임을 지고 이이, 정철, 정인홍이 모조리 사직해버리는 사태가 벌어졌다.[3]
본인 역시 동인 중에서도 강경파인 인물이라 심의겸뿐 아니라 박순, 송익필, 이항복을 탄핵하였고, 이는 자신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1589년, 정여립의 난이 일어나자 이발은 정여립과 공모했다는 의혹을 받아 체포되어 종성으로 유배되었다. 그러다가 다시 문초과정에서 정여립과의 연루 의혹이 재등장하자 한양으로 다시 끌려와 고문끝에 사망하고 말았다. 이발 뿐만 아니라 이발의 가족 모두 끌려와 혹독한 고문끝에 사망했는데, 이발의 80세 노모는 맞아 죽었고, 이발의 어린 아들들은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자세한 것은 정여립의 난 항목 참조) 압슬형을 받다가 사망했다.
정철과 워낙 앙숙지간이었던 탓에 사람들은 정철이 자기 원한을 풀기 위해 이발과 이발의 일가를 처참하게 몰살시켰다고 보았다. 이발의 가족이 모조리 잡혀가기 직전에 이발은 자신의 아들과 종의 아들의 옷을 바꿔 입혀서 아들 하나는 살아남게 했다 한다. 종 하나는 억울하게 죽었다 그래서 겨우 이발의 가계는 이어질 수 있었다. 오늘날에도 이발의 후손들은 제사를 지낼 때 고기를 다지며 "정철정철정철..."이라며 중얼대는데(전라도 억양과 약간 섞여서 '증철증철증철...'이라 들리기도 한다. 또는 그냥 '철철철철...'이라 중얼대기도 했다고.) 정철에 대한 원한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4] 하지만 정작 정철은 이발의 죽음에 관여한 바가 없다. 역모죄는 법에 구애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죄없는 가족들까지 수사하여 죽게 만든 것은 선조 본인의 의지였다.
KBS 한국사전에서 정철을 다룰 때 이발의 가문인 광산 이씨 종가를 찾아가서 이 의식(?)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 집안에 시집 온 한 여성과 인터뷰를 했는데 그 여성 역시 이 주문의 내력을 알고 있었고 주문에 대해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오늘날까지도 이럴까"라는 감상을 말했다.
야사에는 이발의 방계 집안에 어쩌다가 정철의 방계 집안 출신 며느리가 시집오게 되었는데 집안 여자들이 '정철정철정철...'거리며 고기를 다지는 소리를 이 며느리도 멋모르고 따라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를 보다 못한 시아버지가 며느리에게 직접 '아가, 너는 그거 따라하지 마라'고 말했다는 일화도 남아 있다. 역시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
- ↑ 동인 세력을 달래주기 위해 이이는 심의겸 하나를 탄핵하는 걸로 서인과 동인이 화해한다면 그도 어쩔 수 없다고 이발의 설득에 심의겸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린다.
- ↑ 여담으로 심의겸의 형수는 이발의 딸이었다.
- ↑ 야사에는 율곡의 중재로 둘은 서로 호기롭게 술을 마셨는데 술버릇이 개였던 정철은 술김에 이발의 얼굴에 침을 뱉어 둘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고 한다.
- ↑ 또한 이발은 후에 남인의 거두가 되는 윤선도의 고모부이기도 하여서, 이발의 사사는 윤선도로 하여금 정철과 서인에 대한 증오를 불타오르게 했다. 참고로 기축옥사 당시 윤선도는 2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