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선도


고산 윤선도 孤山 尹善道
1587년 7월 27일, 음력 6월 22일 ~ 1671년 7월 16일, 음력 6월 11일

1 기본 정보

조선 후기의 유명한 시인으로 남인 학자이자 문신, 정치가, 작가였다. 그리고 조선 후기의 최고의 문제적 인물의 한사람으로 저명한 시인, 불운한 시인으로 알려졌지만 일부는 조선시대의 논객이라고 하기도 한다.[1][2]

예송 논쟁에서 당대 당의 싸움을 넘어서 살육극으로 확산되는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조선후기 최고의 문제의 인물. 전적으로 그의 책임이라 모는 것 자체는 어폐가 심하지만 워낙 전투적인 그가 사건을 터트리고 다녔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사실 이런 기질은 젊어서부터 이미 보였는데 광해군 시절 세도가 하늘을 찌르던 이이첨과 대북 일파를 통렬히 비판하는 상소를 써서 유배를 간 전적이 있다. 애당초 상소문에 날 죽이든 말든 마음대로 해도 되는데 아버지 만은 죄주지 말라고 적어놓을 정도로 간이 컸고 이이첨은 그의 상소를 보고 거의 식겁하여 한동안 죽어지냈다고 할 정도다. 어차피 젊어서 죽었어야 할 몸이니 늙어서는 더 두려울게 없었다는 건가? 여기에 인조반정 이후 서인들의 독주까지 지켜보면서 생긴 분노가 그의 투쟁심을 더더욱 키웠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광해군 때 똑같이 이이첨정인홍 그리고 상궁 김개시의 지나친 권력행사를 비난했으나 송시열은 바른 말을 했다고 표창을 받고, 윤선도는 유명수가 사주해서 한 일이라는 이유로 인정받지 못하고 폄하당했다.[3]

2 송시열과의 논쟁

효종현종 두 임금의 스승으로 대군 시절의 효종과 세자 시절의 현종을 세자시강원에서 각각 가르쳤다. 그러나 같이 효종과 현종을 가르친 송시열은 승승장구 종1품까지 출세한 반면 윤선도 자신은 정3품 승지, 참의에 그쳤는데 이건 그가 인조반정 이후 서인 세상이 된 조정에서 여당인 서인과의 투쟁에 앞장섰기 때문이다. 거기에 병자호란 당시에 강화도로 가다가 그냥 집으로 가버린 사건이 있어서, 그 일로 죽을 때까지 씹히고 씹히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또 씹혔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서인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는데 효종 때도 송시열 이하 산당들을 씹어내리는데 열중하였다.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효종에게 자신이 올린 두 번의 상소가 첫 번째 것은 네 번이나 두 번째 것은 열세 번이나 퇴짜당한 사건을 지적하며 명색이 대부(大夫)인 내 상소도 밸꼴린다고 내치는데 초야의 백성들의 말이 올라올 리가 있나요? 라고 분통을 터트린 일이 있다.[4]

그 외에 효종 3년(1652년)에는 예조 참의에 임명되었는데 그 해 11월에 서인의 거두 원두표를 자리에 부적합하다는 이유로 해임시키라는 상소를 올렸다가 삭탈관직당하고 고향 해남으로 낙향했으며, 효종 9년에는 공조 참의에 제수되었는데 산당계에서 비방이 일었고 윤선도는 자신들을 씹은 자들을 씹는 상소를 올리는가 하면 승정원을 매우 혹독하게 씹었는데 효종이 윤선도를 강하게 옹호하여 별일은 없었다.

하지만 효종 때의 행보는 훗날 제1차 예송 논쟁에 비하면 커피에 불과했다.

송시열은 조선의 왕족도 일반 사대부와 비슷한 사대부가로 보고 장남 이외에는 서자라는 규정을 적용하고 왕위는 효종이 계승했지만 정통성은 소현세자에게 있다고 보았다. 송시열과 맞짱을 뜨던 허목은 왕실의 법도는 특별한 법도이며 장남인 소현세자가 죽게 됨에 따라 효종이 왕위를 계승했으니 적장자라 주장한 것이다.

예송논쟁의 발단을 상세히 말해보자면 그 당시까지만 해도 상복을 입는 제도를 잘 지키기 않았는데 예학의 대가인 윤휴가 효종께오선 정통성을 이어받은 임금이시니 마땅히 3년복을 입어야지 않느냐고 주장하면서인데 그때까지만 해도 의견제시에 가까웠고 정작 윤휴는 예송논쟁에서는 선왕께 허물이 되지 않는 선에서 알아서 하라고 발을 빼버렸다. 당시에 영상 정태화, 이시백 등은 소현의 아들이 살아있는데 그런 주장이 나오는 것에 대해 불안하게 생각했고 송시열과 논의했는데 송시열은 효종은 체이부정에 해당하는 분이니 따지면 기년복을 입어야지 않겠냐는 말을 했다. 정태화는 그거 잘못했다간 소현의 아들을 왕으로 만들자는 소리가 될 수 있다면서 그냥 옛날에 기년복 입었으니 옛 방식을 따르는 식으로 기년복을 입자고 마무릴 짓자고 했고 송시열도 이에 동의하면서 일이 끝나는가 했는데...허목이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면서 일이 커졌다. 급히 송준길이 반박했으나 허목에게 발리고 말았고 원두표를 비롯한 일부 서인 대신들이 허목을 지지하기 시작하면서 3년복으로 기우는가 했는데 다시 송시열이 상소를 올려 기년복을 입어야 하는 이유를 주장하며 허목의 주장을 발라버렸고 다시 분위기는 기년복으로 흘렀다.

윤선도가 상소를 올렸다.[5]

그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적통을 이어받은 아들은 할아버지와 체가 되니 아버지가 적자의 상에 참최 3년을 입는 것은 자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조종, 적통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효종대왕은 선조대왕, 원종대왕, 인조대왕의 적통을 이어받은 왕이시다. 그러니 3년복을 입어야 한다.(추신으로 3년복 입자 한 허목은 이래서 충신이다.)

그런데 송시열 이 자식이 기년복 입자는 실수를 저질렀으면 이황이 기대승에게 그랬던 것처럼 잘못을 인정해야지 변명을 주저리주저리 쓸데없이 많이 하면서 죄를 무겁게 했다.

시열은 '아비가 자식을 위해 참최복을 입는 이유가 오로지 할아버지와 체가 되기 때문이다'라고 했는데 이 인간 이거 예경을 읽기나 했는지 모르겠다. 거기에 성인이 예를 엄정히 한 이유는 대통과 종묘사직을 이어받는 것도 있는걸 왜 모르나?

시열이 차장자는 서자가 아니란 기록을 찾아야 3년복을 입을 수 있다 했는데 웃기지 말라 해라. 옛날부터 차장자에게도 3년복 입었으면 됐지 웬 개소리냐?

까놓고 말해서 죽은 놈이 어떻게 적통을 지냐? 옛날부터 형이 죽어 대신 즉위한 놈들은 죄다 섭정이냐? 종통은 왕에게 돌리고 적통은 죽은 세자에게 돌리자는 거냐? 그럼 우리 임금님은 소현 아들에게는 왕 노릇 못하겠네?

송시열 너 대왕대비께서 소현의 상에 장자복 입었으니 이제와서 효종대왕의 상에 장자복 못 입는다고 했지? 소현을 위해 3년복을 입었든 기년복을 입었든 효종대왕이 종묘사직을 이으셨는데 3년복을 입어야지.

태자, 세자는 그 자체가 할아버지와 체가 되었다는 소린데 적, 장보다 등급이 높은 것이다. 그런데 세자되고도 장자라고 못하는게 말이 되냐? 그럼 우리 효종대왕은 서자냐?

불이참 드립 자제하셈. 예경의 불이참은 그냥 존자가 둘 있을 수 없다는 거거든? 우리 효종 대왕께선 세자가 되었을 때부터 이미 소현과 장과 존에서 동등하셨고 왕까지 되셨으니 소현 따위 못 덤비는 정통성을 가지셨다. 근데 소현에겐 3년복 입어놓고 효종대왕을 위해 3년복 못 입는게 말이 되냐?

그리고 송시열, 효종대왕이 대왕대비께 군신의 의리가 있으니 대왕대비는 기년복만 입어도 된다 했는데 왕이 세자를 위해 참최복을 입고 아비가 장자를 위해 참최복을 입는게 왕이 세자의 신하라서 그러냐?

애당초 성인이 아니고서야 다 맞는 말을 하는건 아니지만 누가 봐도 이치에 맞으면 따르는게 옳잖냐? 그러니 효종대왕을 위해 3년복을 입는게 어디가 문제란 말이냐?

실제로도 이 말투로 되어있다고 생각하면 심히 골룸하다

실제로는 왕에게 이래서 송시열의 주장이 틀린 겁니다. 라고 강변한 것이고 말투도 매우 공손했다.
하지만 송시열을 효종을 왕취급도 안하는 역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이 상소에 조정은 발칵 뒤집혔고 승지들은 이 새끼 이거 예 핑계대면서 허풍치는거 좀 보십쇼! 라고 반발했으며 현종은 상소를 돌려주라고 명령하면서 전 참의 윤선도가 음험한 상소로 상하를 이간질했으니 그 죄가 빠져나가기 어렵겠다 라고 평했다.

물론 송시열을 위한 립서비스에 가까웠고 현종은 윤선도는 마땅히 중히 다스려야겠지만 효종대왕의 사부인 만큼 특별히라는 명분으로 삭직하고낙향시키는 정도에서 사건을 조용히 덮으려 했으나 산당에선 윤선도를 반좌의 율로 다스리라고 난리가 났다.

서인 학자 유계는 그의 상소문을 불태워야 한다고 계속 우겼고 그렇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함경남도 삼수[6]로 유배되었다가 유배지가 너무 변방의 외지라는 이유로 다시 고향 해남 근처인 전라남도 광양으로 옮겨졌다. 이후 유배지를 전전하면서 울적한 심사를 달래며 시를 짓고 글을 가르치다가 81살때인 1667년에서야 석방되고 그후 4년을 더 살다가 삶을 마감한다.

그런데 조정은 매우 시끄러워졌으니 송시열의 친구인(!) 권시가 윤선도가 말은 험하게 했어도 그의 주장에 죄줄 것이 없다고 나섰고 대신 원두표가 윤선도의 주장을 옹호하면서 일이 커진 것이다.

이유태 등의 산당 인사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정태화, 이시백 등의 대신들은 3년복을 입은 적이 없는데 굳이 입을 거 있나요? 라고 소극적으로 송시열을 지지했고 윤휴는 예에 맞게만 입으면 되지요. 라고 발을 빼버렸다. 그래서 기년복으로 일단락이 되긴 했는데 남인 대신 조경, 수찬 홍우원, 김수홍[7] 등이 잇달아 상소를 올리면서 윤선도를 지지했고 전통적으로 남인세가 강한 영남에선 윤선도를 지지하는 연명상소가 올라오기도 했다. 사건이 너무 커지자 현종은 예송금지령을 내리며 다시 이 일을 거론하면 죄를 주겠다고 하여 일단락되었지만 결국 현종 말년에 2차 예송논쟁 사건이 터지고 만다.

기나긴 유배기간동안 해배 성사 직전까지 갔던 때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서인의 견제로 오히려 형이 더 가혹해졌다고 한다. 참고로 4번에 걸쳐 무려 25년동안 유배당해야 했다. 그렇긴 해도 만 84살로 조선시대, 아니 세계적으로 장수했다. 특히 윤선도가 죽은 1671년은 유례 없는 대기근으로 조선 전역에 헬게이트가 열렸던 때였다. 그런 걸 감안하면 상당히 경이적인 장수를 누린 셈.

상복 몇 년 입는지 같은 사소한 문제로 치열하게 싸웠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조선이 왕조국가임에 기인한다. 왕조국가에서 국가의 힘은 왕의 정통성에 의해 결정된다. 왕이 적장자, 적통이 아니면 왕권도 약하고 국가의 힘도 자연스레 약해져 외세에 휘둘리기 쉽기 때문이다. 이성계와 정몽주 등이 신돈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우왕을 폐위했듯이 적통이 아니면 언제든지 왕권을 위협받을 수 있다(물론 다른 여러 복합적인 요소들이 병존한다). 당시 백호 윤휴와 고산 윤선도 등 남인은 왕권을 강화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서인은 그 반대였다. 특히 서인의 수장인 우암 송시열은 왕(효종)과 독대할 정도의 엄청난 권력자로(왕조국가에서 왕과 신하가 독대할 정도면 그 신하가 상당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한반도 역사상 왕과 독대한 신하는 손에 꼽는다 - 기해독대, 신유독대) 신권강화에 중점을 두며 왕권강화를 추구하는 남인과 정반대의 길을 갔다. 따라서 송시열과 서인은 기년설을, 윤휴와 윤선도 및 남인은 3년설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사실 일반적인 노론사관에서 알려진 대로 송시열이 충신이 아니라, 효종을 제대로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견해도 있다. 효종은 아버지 인조의 복수를 하기 위해 북벌을 강력히 추진하려 했으며, 이 과정에서 조선의 뇌관인 군역제도를 건드리려 했다. 양반이 사실상 군역을 수행하지 않기에 강한 군대를 만들기 어렵자 효종이 양반 기득권층에게 세금을 부과하여 강군을 육성하려 시도했고, 이를 송시열과 서인들이 반대하면서 사이가 틀어졌다는 것. 이후 지속적인 마찰을 빚다가 효종이 급사했기에, 송시열을 위시한 서인들이 기년설을 주장하였다 보는 관점도 있다.

효종과 송시열의 마찰, 백호 윤휴의 북벌론에 관해서는 링크로 대체한다.http://m.blog.daum.net/_blog/_m/articleView.do?blogid=0GScD&articleno=7018586

3 사후

강렬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성격 탓에 남인 내부에서도 적을 만들었는데[8] 1675년 갑인예송으로 서인이 몰락하고 남인이 집권하자 숙종은 그를 특별히 의정(정승)으로 추증해야 한다고 했고, 허목윤휴가 계속 추천하여 그를 의정 벼슬 중의 하나를 추증하려 했으나 허적, 권대운 등 탁남파의 반대로 실패하고 결국 이조판서에 추증된다.[9]

4 기타

효종의 묘자리 선정을 '수원'으로 짚었는데 서인의 반대로 무산되고 구리로 정해지자 "10년이 채 안가 변고가 발생해 묘를 다시 쓸것이오. 나는 이를 못보지만 제공들은 이를 볼것이오. 그때 가면 내 말이 생각나리다."라고 했고 그 말처럼 효종의 릉은 붕괴사고가 발생하여 여주로 옮겨지게 된다. 윤선도가 짚었던 명당자리는 윤선도의 풍수지리를 신봉했던[10] 정조에 의해 사도세자릉이 들어서게 된다.

첩을 몇 명 두었는데[11] 송시열허목, 윤휴와의 화해를 주선한 서인 온건파인 윤선거[12] 조차도 그를 음탕하고 사악한 인물이라는 악평을 편지와 공식 문서에 남기기도 했다. 다만 윤선거가 송시열과는 절친한 사이였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조선 중,후기 호남의 3대 갑부로 꼽히고 있다.[13]. 소유한 경지 면적이 부의 척도였던 조선시대에, 조선에서 가장 경지면적이 넓은 해남군의 경작지의 반 이상을 그가 소유하고 있었고, 그 위세는 윤선도가 죽은 이후에도 대단해서 해남에 부임한 현령들은 아침마다 해남윤씨 가문에 문안인사를 올리러 가는 것이 관례였다. 그래서 실록의 서인 사관들은 윤선도 그 인간 그거 돈을 밝혀서 나댄거라고 두고 두고 씹어댔으나 송시열에게 덤볐다는 이유로 과장된 면도 크다. 참고로 나머지 인물들은 광주의 박광옥과 보성의 안방준.

안가인 녹우당(사적 167호)은 원래 효종이 윤선도를 위해 지어준 집이었는데 이를 고향에 그대로 옮겨왔다고 한다. 녹우당의 원래 크기는 집은 1만평에 주변 정원과 비자나무 숲을 합치면 50만평에 이를 정도로 거대한 저택이었다.과연 갑부 조선 후기 상류층의 가옥 양식을 엿볼 수 있으며, 지금도 해남 윤씨 종가로서 어부사시사를 비롯한 각종 친필을 비롯해 증손인 윤두서 자화상(국보 240호)[14]과 고려시대 이두문으로 쓰여진 노비문서(보물 483호) 등을 보관하고 있다.

완도군에 속한 섬인 보길도에는 그가 조성했다는 원림과 세연정을 비롯한 몇 개의 누각이 남아있다. 섬이다보니 대중교통수단의 미비로 찾아가기는 좀 힘들지만 보길도의 청정한 자연 경관과의 훌륭한 조화가 일품인 곳이니 만약 전라남도에 관광하러 갈 일이 있다면 둘러보고 오는게 좋다.

아들 윤인미(尹仁美)는 학식도 높고 재주도 뛰어났지만 윤선도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과거 시험에 급제했는데도 좋은 관직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연좌제에 걸려 금고형만 13년 살다가 아버지 사후 3년만에 69세의 나이로 불운한 생을 마쳤다. 남인 집권 이후(1675년) 종4품 조봉대부에 올랐으나 곧 사망했다.

증손자인 윤두서는 다산 정약용의 외조부로 윤선도는 정약용에게는 5대조 조부가 된다.
윤관대법원장은 윤선도의 12대손이다.

선조 대의 정철과 함께 국사보다는 국어 시간에 유명한 인물이다. 시조 부문에서는 甲인 인물로 어부사시가 등을 남겼다.
  1. 허목이 송시열에게 논리적으로 발리면서 거의 꺼져가던 예송논쟁에 핵폭탄을 던져 대형참사로 키운 사람이지만 그의 작품 어부사시사가 1970년대 국어 교과서와 국사 교과서에 실리는 바람에 못마땅하지만 좋다좋다며 띄워주고 있다. 다만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저 어부사시사 자체가 윤선도의 가렴주구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시라.
  2. 근데 딱히 윤선도만을 아가리파이터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만한 아가리파이터는 사실 많았다. 송시열이나 송준길도 있었고, 같은 남인 중에도 아가리파이터로 유명한 허목과 윤휴가 있었다.
  3. 이 비판은 그가 살아생전 당했다기 보단 죽은 다음 실록의 사관들이 비아냥거리는 투로 재기된 것이다.
  4. 솔직히 효종 때는 왕명이 집행되지 않을 정도로 산당이 설쳤으니 그의 비판이 논리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다.
  5. 여담으로 굳이 짚고 넘어가자면 효종이 죽은 이후 윤선도가 지관들과 상의하여 고른 장지가 있었는데 윤선도가 천하의 명당이라고 극력 추천했음에도 송시열이 그 자리는 민가가 많아 민폐가 된다고 그럼 애민군주이신 선왕을 욕되게하는 일이라고 반대해서 무야된 일도 있었기 때문에 마침 기분도 더러운 찰나였다. 그런데 송시열의 주장으로 옮긴 묘는 부조물이 함몰될 정도로 지반이 안좋아서 별수 없이 묘를 다시 옮겨야 했고 이 일로 송시열은 제법 까였다.
  6. 예로부터 삼수갑산으로 유명한 오지 중의 오지. 이곳으로 유배되어 살아 돌아온 사람이 거의 없음에도 이 양반은 74세의 노령에 가서 살아남았다. 근성가이 윤선도
  7. 이 사람은 산당계 인물이다.
  8. 이건 송시열도 마찬가지라서 서인 내부에 송시열의 적이 많이 생겼다.
  9. 허적과 권대운은 서인과 타협을 주장하던 인물로 당대에도 변절자 취급을 받았다. 더구나 허적의 고모가 서인 이광정 가문에 시집갔고 그때문에 민유중, 민정중 형제는 그의 고종 조카가 되는 것 때문에 같은 남인들로부터 서인들과의 화합을 주장하는 진정성을 의심받았다.
  10. 고려때 들어온 풍수지리는 조선시대에 와서 해석론에 따라 여러가지로 갈라진다
  11. 덕분에 후손이 많다. 해남윤씨의 대종을 이을 정도.
  12. 파평윤씨로 해남윤씨인 윤선도와는 친척이 아니다. 윤선거는 윤증의 아버지이다.
  13. 고조 할아버지때부터 갑부였다고 한다. 지금으로 치면 재벌 5세?
  14. 다만 국보다 보니 관람객을 위한 유물관에는 진품이 아닌 복사된 모조품이 전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