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지향과 관련된 이성애는 해당 항목 참조.
70년대 말, 일본에서 한류를 몰아친 가수
한국에서 저평가 되어있는 가수
1 탄생 후 데뷔초기
1952년 7월 29일 서울 출신으로, 수도사대부속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단국대학교 사학과에 재학중 1971년 1월 '사랑의 오두막집'이라는 노래로 데뷔했다.[1]
키 169cm에 당시로서는 시원한 외모를 가진 허스키한 목소리[2]의 가수로 점점 인기를 얻어, 1973년 '기다리는 마음'이라는 곡으로 MBC 10대가수상 여자신인가수상, KBS 10대가수상 신인상, CBS 10대가수상 신인상을 수상한다.[3]
하지만, 불렀던 곡들이 대부분 번안곡이었고, 1973년 이후 한국 음반 시장에서 크게 히트한 앨범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
2 일본진출, 그리고 성공
1977년 남진의 노래인 '가슴 아프게'를 일본어로 번안해 부른 것이 대히트를 친다. 일본에 진출한 가수로 흔히 계은숙이나 김연자 등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1970년대 일본에 진출하여 큰 성공을 거둔 가수는 바로 이성애였다.
인기가 어느정도였냐면, 그 당시 일본에서 대유행하던 '8트랙가라오케'[4]에 당당히 수록[5]될 정도였고, 무려 후지TV의 밤의 히트 스튜디오[6] 에 출연까지 한다.#
앨범은 EMI로부터 발매된 총 4장의 싱글과 5장의 LP, 카세트테이프까지 해서 6억 5천만엔!!!!의 매출고를 올렸다고 하니, 당시 인기가 얼마나 많았는지 실감이 된다.[7]
3 결혼, 그리고 은퇴
이렇게 인기 절정의 가도를 달리던 이성애는 1978년 돌연 결혼 발표를 한다. 상대는 당시 미국에서 대학교수로 재직하던 한국인[8]이었고, 은퇴 리사이틀을 연 후, 은퇴한다.#[9]
이후 1979년 백년가약을 맺고 평범한 가정주부로 생활하다가, 2000년도 초반 CCM가수로 앨범을 냈다.[10] 또한, 2005년 10월에는 18년만에 일본에서 신곡을 레코딩해 음반이 발매되었는데, '한일복지교류자선공연'의 테마곡이었던 '눈물은 사람을 위해'와 '마음의 여로'를 불렀다.
2006년과 2007년에는 과거 히트했던 곡들을 모아 골든앨범을 일본에서 발매하기도 했다.- ↑ 위키피디아나 다른 검색엔진에서는 1953년생이라는 기록이 있으나, 1973년 오아시스레코드사에서 발매된 '이성애 디럭스앨범'에 보면 상술된 것과 같이 소개되어 있다.
- ↑ 목소리가 당시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패티김과 비슷하다고 하여, '패티김을 이을 가수'라는 평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 ↑ 당시 MBC를 필두로 여러 방송사들이 10대가수상을 기획하여 방송했었다.
- ↑ 앰프 기계에 1개 100엔인 노래반주 테이프를 재생해 부르는 것으로, 노래방기계의 시초 되겠다.
- ↑ 이후 일본의 노래방에 한국어 가사로 된 한국 가요가 무리없이 불리게 될 정도였다고 한다.
- ↑ 줄여서 '요루히토'라 불리던 후지TV의 음악방송으로, 1968년 11월 4일 시작해 1990년 10월 3일에 종영한 인기 절정의 프로그램이었다. 백미는 오프닝에 출연진들이 서로의 노래를 바꿔부르는 것과, 전화번호를 무작위로 골라 경품을 주는 이벤트였다.
- ↑ 일본의 평론가들이 '엔카의 원류를 한국의 이성애로부터 찾았다.'라고 평할 정도였다.
- ↑ 충남대 사학과에서 교수로 재직했던 차상철 교수님이다. 2014년 퇴직 후 보수적 성향이 강한 행사에 강사로 많이 초빙된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초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 ↑ 은퇴 리사이틀 앨범 일부이다.
- ↑ 대전지역의 교회에 가끔 찬양집회에 초대되어 CCM을 불렀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