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컨트롤에서의 모습. 샘 라일리가 이안 커티스 역을 맡았다.)
Ian Kevin Curtis
이안 커티스
1956년 7월 15일 ~ 1980년 5월 18일
19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 활동했던 영국 맨체스터 출신 4인조 포스트 펑크 밴드 조이 디비전의 보컬.
1 유년시절
이안 커티스는 랭크셔에서 태어나 체셔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어린 시절에는 시 쓰는 것에 소질을 보였으며, 11세 때 Macclefield의 킹즈 스쿨에서 장학금을 받을만큼 성적이 우수한 편이었으나 학업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이런 이유로 그는 중등교욱을 마친 뒤 학업을 중단했다.
학교를 그만둔 이후 이안은 예술, 문학, 음악에 몰두하기 시작했으며 [1], 직업 상담센터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975년 이안은 학교 친구였던 데보라 커티스와 결혼하였다. 당시 이언 커티스의 나이는 19세, 데보라 커티스는 18세에 불과했다. 그들은 1979년 딸 나탈리를 낳았다. [2]
2 조이 디비전
1976년 섹스 피스톨즈의 공연에서 이안은 버나드 섬너와 피터 훅을 만나 밴드를 결성, 작사가 겸 보컬리스트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스티븐 모리스가 최종 멤버로 합류하기 이전까지 그들은 드러머를 뽑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조이 디비전의 시작이다.
초기 밴드 이름은 '바르샤바(Warsaw)'였으나, 다른 밴드 'Warsaw Pakt'와 겹친다는 이유로 '조이 디비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 이름은 소설 'The House of Dolls'에 등장하는 나치 캠프의 위안부 이름을 따온 것이다. 조이 디비전의 첫 번째 EP 앨범 'An Ideal For Living'에는 버나드 섬너가 그린 소년 히틀러가 드럼을 치고 있는 그림이 있으며, 나치 리더였던 루돌프 헤스의 삶을 노래하는 곡인 'Warsaw'가 수록되어 있다. 이 때문에 파시즘을 예찬하는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일기도 했는데, 그들은 파시즘 자체에 끌렸던 것은 사실이나 이를 예찬할 의도는 전혀 없었다며 적극 부인했다.
1979년 조이 디비전은 섹스 피스톨즈가 출연하기도 했던 지역 뉴스 'Granada Reports'에서 토니 윌슨이 그들의 EP 'An Ideal For Living'을 소개하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전과는 달리 조이 디비전은 달랑 앨범만 소개하고 출연 제의는 하지 않았는데, 이안이 이에 대해 따지자 [3] 조이 디비전을 출연시키기로 하였다. 조이 디비전은 방송에서 'Shadowplay'를 비롯한 두 곡을 공연했으며, 이후 윌슨의 팩토리 레코드와 계약했다.
조이 디비전으로 활동하는 동안 이안 커티스는 특유의 어딘가 어색한 듯한 태도와 독특한 춤동작으로 이름을 알렸다. 이 춤은 그가 앓고 있었던 간질병에서 영감을 얻어 시작한 것이다 [4] [1]. 실제로 공연 도중에 간질로 인한 발작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3 죽음
미국 진출을 하루 앞두었던 1980년 5월 18일 이안은 자택의 부엌에서 목을 매어 자살했다. [5] 다음날 아침 그의 아내가 이안의 시체를 발견했다. 이안의 아내였던 데보라 커티스는 그의 사후 이안의 삶을 기록한 'Touching from a Distance'를 출판하였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이안이 아닉이라는 저널리스트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그녀와 아내 사이에서 갈등한 끝에 죽음을 택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2010년 아닉은 이안과는 불륜 관계가 아니었으며, 두 사람은 플라토닉한 사랑을 나누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 무렵 이안은 우울증과 간질병 증세로 건강이 악화되어 있었다. 또한 어린 나이에 결혼해 가장으로서의 책임감과 음악가로서의 야망에 균형을 맞추는 데에 큰 부담을 느꼈고, 그로 인해 자살을 결심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안이 죽고 2개월 뒤 조이 디비전의 마지막 정규 앨범 'Closer'가 발표되었다.
이안의 묘비에는 그의 대표곡의 제목인 'Love Will Tear Us Apart'가 새겨져 있었는데, 2008년 도난당했다. 이후 같은 글귀가 새겨진 묘비가 다시 세워졌다.
이안이 사망한 뒤 남은 조이 디비전의 멤버들은 새로운 밴드를 결성했는데, 그것이 바로 뉴 오더이다.
4 읽을거리
- - 노래할 때와 달리 평소 그의 목소리는 오히려 테너에 가까웠다고 한다. 바르샤바 시절의 EP를 들어보면 정규 앨범에서의 목소리와는 사뭇 다르다.
- - 어린 시절 술, 담배, 음반을 구할 돈이 부족했던 탓에 동네 가게에서 음반을 훔쳐 외투에다 숨겨 가곤 했다고 한다.
- - 버나드 섬너가 신디사이저를 연주할 때는 직접 기타를 연주하기도 했다. 초기에는 섬너의 기타를 연주했으나, 1979년 9월 이후 자기 기타를 마련했다.[6] 뉴 오더의 초창기 시절 섬너는 이안의 기타를 종종 사용하기도 했다.
- - '컨트롤'은 이안 커티스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이다. '컨트롤'을 제작한 감독 안톤 코르빈의 경우 젊은 시절 조이 디비전의 사진을 촬영한 적이 있다.
- - 2집 'Closer'의 수록곡 중에는 그의 죽음을 암시하는 가사들을 여럿 발견할 수 있다. 조이 디비전의 멤버들은 이안이 죽고 난 뒤에야 그의 가사 내용을 제대로 읽어보았다고 말했다.
- - 이안 커티스가 쓴 가사와 메모들을 모은 책인 'So This is Permanence'가 출간되었다. [2]
- 1집 'Unknown Pleasures'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돈벌이가 충분하지 않았기에 공연이 끝나고 나면 공연장 청소를 해서 돈을 더 받기도 했다.
- - 이안은 햇빛 알레르기가 있어 햇빛에 장시간 노출되면 살갗이 발갛게 부어올랐다고 한다. 그래서 이안은 작업실 내부에 햇빛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검은 커튼을 쳐놓아야 했다.
- - 1980년 이안 커티스가 미국 진출을 앞두고 BBC에서 했던 인터뷰가 유투브에 공개되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