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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
1960년 3월 6일 ~ 2008년 2월 14일
1 소개
음악의 존엄성이란 음악을 만든 이와 듣는 이가 같이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만든 이 따로, 듣는 이 따로인 음악은 내팽개쳐진 음악일 뿐. 그런 것은 없다. - 이영훈[2]
필요에 의해 곡이 척척 나오고, 노력 좀 한다고 해서 가사가 술술 나오면 차라리 벽돌을 찍어내고 말 일이다. 신성한 노동이 나에게는 더 편할 텐데 몇 년에 걸쳐 한 곡을 완성하려고 왜 애를 쓰겠는가. 또한 몇 년에 걸쳐서 한 곡을 완성한들 누가 알아줄 것인가? 어차피 유행가로 치부될 것인데 말이다...(중략)...사실 음악은 그 자체가 사랑이다. - 이영훈[3]
이영훈선생이 그렇다고 발라드를 발명한 건 아니다. 그는 없는 것을 창안해낸 게 아니라 있어온 것을, 있어야 할 것을 비로소 있게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난 아직 모르잖아요', '사랑이 지나가면', '그女의 웃음소리뿐', '광화문연가',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등과 같은 낯선 패턴의 선율이 어찌 그토록 통렬한 전파대첩을 일궈냈겠는가. 당시 한 여기자는 말했다. '바라던 노래가 이제 비로소 나온 것'이라고...(중략)...1980년대 말에 와서는 급기야 가요와 팝의 위대한 역전이 이뤄졌다. 이영훈선생의 업적 중의 업적은 서러움과 멸시의 굴레에서 허덕이던 가요가 당당하게 대중음악의 주체로 상승하게 된 밑거름을 제공했다는데 있다. 만약 새로운 패턴의 발라드 곡 쓰기가 그의 개인적 성공이라면 팝과 가요의 우선순위 바꿈은 그가 쾌척해낸 사회적 성공일 것이다. -대중음악 평론가 임진모
1980년대 발라드의 대명사라 불리는 작곡가로 원래는 연극,방송,무용음악을 작곡하다가 1985년에 가요 작곡가로 데뷔하게 된다. 신촌블루스의 엄인호의 소개로 이문세를 만나게 되었고 이를 통해 내놓은 노래가 바로 "난 아직 모르잖아요". 이 노래와 "소녀"의 잇다른 히트로 이영훈은 80년대를 대표하는 작곡가로 부상하게 된다.
절정은 1987년에 나온 이문세의 4집앨범으로 여기서 그 유명한 "사랑이 지나가면","그녀의 웃음소리 뿐", "이별 이야기" 등 앨범의 거의 모든 곡이 히트, 무려 285만장이 팔리는 대기록을 세우게 된다. 1988년에 나온 이문세의 5집 앨범은 그야말로 이영훈이 자신의 모든것을 쏟아부었다고 할 정도의 곡들이 나왔는데 "광화문 연가","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붉은 노을"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그러나 이문세와의 갈등으로 이문세는 8집을 이영훈이 아닌 다른 작곡가와 작업을 했고, 둘은 1995년 발매된 9집에서 재회하게 된다[4]. 9집은 예전처럼 전곡을 이영훈이 맡았는데, 이 앨범이 다소 부진한 뒤, 10집과 11집에서 이문세는 이영훈의 곡을 한 곡 씩만 불렀다[5][6]. 또 다시 전곡을 작곡하게 된 이문세 12집에서 이영훈은 87년부터 만들기 시작해 2001년에야 발표하게 된(가사를 쓰기 전 이미 연주곡으로는 한 차례 발표했었다), 스스로 꼽는 최고의 작품 '슬픈 사랑의 노래'를 발표한다[7]. 이영훈은 이 시기부터 이문세와의 작업외에도 드라마, 영화의 음악을 담당하고 이문세의 곡을 편곡, 관현악 앨범들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후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아바의 히트곡으로 구성된 뮤지컬 맘마미아 처럼 자신의 히트곡들로 구성한 광화문 연가라는 뮤지컬을 구상했지만 대장암 판정을 받은후 투병하다가 2008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 뜻은 나머지 제작진들이 이어 받아 2011년 세종문화회관에서 막을 올렸다.
고인은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몇 편의 글을 남겼는데(본문도 그 글을 많이 참고했다), 생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글을 첨부한다.
제목 : 또 일주일...작성자 : 작곡가이영훈
작성일 : 2007-12-20 17:20
아마 몇 일간 내 모습이 궁금들 하지 않았어?
퇴원하고 닷새 만에 또 입원했다가 그저께 퇴원했습니다.
나도...
할 말이 없어.
지쳤구.
지겹구.
한편으론 웃기기도 하구.
그러다가도 고통이 밀려 오면 ..
아무소리 , 못하지. ^^
병원에서도 마찬가지 모습이야.
나를 보는 사람들이 또 얼굴 본다해서...반갑다고 웃을수도 없고
병원에선 서로 가 다시는 보지 말자고들 다짐들 하고 퇴원들 하잖어.
그러다가 뜻밖에 또 얼굴을 보게 되니 얼마나 민망들 하겠어? ^^
아...
이제 병원 좀 제발 안갔으면 좋겠다.
내가 이렇게 약한 말 하고
이렇게 약한 모습 보이는 것 처음이지?
이제 많이 힘이 드는구나.
1980년대 이문세와의 공동작업을 통해 이룩한 그의 노래들은 한국 가요사에 길이남을 걸작들로 칭송받는다. 유재하와 함께 통칭 발라드라 불리는 한국적 팝음악의 시대를 연 인물로 평가된다. 특히 작곡뿐만 아니라 직접 작사까지한 노래들은 신세대 가수들을 통해서도 리메이크 되어서 지금까지도 불려질 만큼 생명력을 가졌다고 평가받는다[8].
대중음악 평론가 임진모가 이영훈 생전에 했던 인터뷰가 읽어볼 만 하다.
인터뷰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이영훈이 강박에 가까운 태도로 작곡을 했다는 사실이다. 하루 종일 피아노 앞에만 앉아 커피 40잔, 담배 4갑을 피우며 밤을 새가면서 곡을 써냈다는 이야기만 봐도 알 수 있는데, 그는 이런 행동이 건강에 크게 해롭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작곡에 대한 일념으로 몸을 해치며 곡을 써 냈으며 결국 49세라는 짧은 생을 대장암으로 마치는 데도 이 점이 분명히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2 뮤지션으로서의 이영훈
2.1 작곡가 이영훈
악상은 영화적으로 잡아요. 뭔 곡을 써야 되겠다싶으면 피아노 앞에 앉아서 담배 피우고 커피 마시면서 명상을 하죠. 어느 장면을 생각할까, 젊었을 때 대학로나 시청 앞에 섰을 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 버스를 타고 이런 구체적인 장면을 생각하면 그 배경음악이 떠올라요, 그럼 그걸 바로 쓰는 거죠.
[9]
이영훈의 작법에 대해 한국인 특유의 일명 '뽕끼'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비판도 있으나, 오히려 클래식적인 작법을 대중음악에 훌륭하게 접목시킨 데다가 당대에도 히트할 정도로 시대 흐름과도 맞아떨어진 곡을 써 낸 훌륭한 작곡가라고 평가하는 것이 정당하다. '뽕끼'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이라고 명확하게 정의하기는 어려우나 이영훈의 음악이, 특히 초기에 그런 멜로디적 특성을 가졌다는 점에는 많은 공감이 있다[10]. 그렇지만 그가 스스로 대표곡으로 삼는 '슬픈 사랑의 노래'에 이르면 그런 점도 많이 희석되고 순수한 이영훈의 색깔이 더 잘 드러나게 된다. 물론 여기에는 유재하의 영향도 컸으리라 짐작되지만 유재하의 음악이 시대를 앞서간 음악이었다는 점을 가지고 이영훈의 트렌디함을 평가절하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당대의 맥락으로는 이영훈의 작법이 예술성과 대중성 모두에 호소력 짙은 방법론이었음을 평론이나 음반 판매량 모두가 입증해 주고 있다.
말년에 그가 밝힌 바로 그의 음악적 지향점은 클래식과 대중 음악 사이의 빈 자리를 메우는 음악이었다고 한다. 이문세가 밝혔듯 이영훈의 음악은 보컬이 빠지고 오케스트라만 들어오면 그대로 클래식이며, 이문세라는 보컬의 독보적인 음색과 기교를 빼고 부르는 창법이 더해지면서 대중음악의 영역까지 넓어지는 음악이라는 점에서 이영훈은 자신의 의도한 바의 음악을 해 낸 것이다.
2.2 작사가 이영훈
작곡가로서의 이영훈이 이룬 성과도 어마어마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의 작사가로서의 재능이다. 작사적인 탁월함이라는 면에서도 이영훈이 유재하와 공통점을 보인다.
이영훈의 공식 홈페이지에 가면 그가 생전에 남긴 자기 곡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아쉽게도 '옛사랑'의 가사에 대한 평가는 없으나 그의 치열한 작곡 과정이나 삶에 대한 생각 등 여러 가지를 엿볼 수 있는 좋은 글들이다. 이영훈의 가사에 대해서는 작사가 스스로의 평가처럼 '옛사랑'을 듣고 읽는 것이 가장 정확한 길일 것이다.[11].
2.3 유재하와의 비교
유재하가 현대의 한국의 발라드 작곡가에 끼치는 영향도 어마어마하지만 유재하 음악경연대회를 제외한 작곡/작사가로서의 유재하와 비등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 이영훈이다. 비슷한 나이[12], 비슷한 활동 시기, 클래식적인 독특한 작법, 작사가로서의 뛰어난 재능 등 유재하와 여러 모로 비교될 만하며 어떤 면에서도 여타의 작곡/작사가들에 비해 압도적인 결과물을 보여 준 인물들이다.
물론 유재하의 활동 시기가 너무 짧은데다가 유재하가 재평가되기 시작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갑작스런 사망 이후라 이영훈과 직접적으로 비교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또한 두 뮤지션은 비슷한 점 만큼이나 다른 점도 많다. 성향도 약간 다른데, 유재하는 다룰 수 있는 악기도 많고 작법에서도 참신하고 창의적인 방안을 만들어내고, 편곡까지 도맡아 하는 등 전형적인 천재형 음악가인데 비해 이영훈은 깊은 성찰을 거쳐 피땀을 짜내듯 가사를 써낸다거나, 피아노 앞에 담배와 커피만 가득 놓아둔 채로 밤새워 곡을 써낸다거나 하는 등 수양에 가까운 작곡을 해 내는 인물이었다.
3 페르소나 이문세
이문세와의 관계가 어떠했는가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다. 심지어는 이런 의견도 있다. 사실 이 의견에는 객관적인 내용이 거의 없고 단 하나의 논거(이영훈이 돌려 말한 것을 이문세가 알아 들었음에도 무시했다), 그나마 추측이 많이 섞인 논거에 카더라 통신(이영훈 부인이 이문세를 싫어한다더라)이 덧붙여져 신빙성이 매우 떨어진다.
이문세가 인터뷰나 라디오, 예능 프로그램 등에서 이영훈을 언급할 때마다 좋게 보면 담담하고, 나쁘게 보면 잘 말하지 않으려는 느낌을 주는 것은 사실이고 위에 링크한 이영훈의 인터뷰에서도 이문세에 대한 인간적 평가는 거의 없어서 둘 사이의 관계가 인간 대 인간으로 크게 친밀한 관계는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무엇보다 윤도현 등, 두 인물 모두와 친분이 있는 인물들이 제법 있어 어느 한 쪽이 인격적으로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추측은 좀 무리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문세가 이영훈 작고 직후 기획하고 실행한 이영훈 추모공연에 참석한 가수(정훈희, 한영애, 김현철, 이승환, 윤도현, 김장훈, 노영심, 박완규, 서영은, 전제덕, 성시경, SG워너비, 버블시스터즈 등)들만 보아도 이문세의 인격이 심각하게 문제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성시경이나 SG워너비야 그렇다 쳐도 정훈희나 한영애 같은 가요계 대선배가(이들은 이문세와 데뷔연도가 같거나 한해 빠르고 이문세보다 각각 8살, 4살 연상이다) 이문세의 영향력 때문에 추모공연에 참여했다고 보기는 매우 어렵다.
따라서 이문세와 이영훈 사이에 눈에 띄는 문제는(최소한 이 공연에 참여한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둘 사이의 사적인 관계를 명확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은 아직 없다.[13]
임진모가 직접 인터뷰한 이문세 인터뷰를 읽어 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참고로 이 인터뷰는 이영훈 생전인 2005년에 이루어진 인터뷰이다).- ↑ 서울시 중구 정동에 위치한 이영훈 노래비.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훈씨! 이제! 우리 인생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은 영훈씨의 음악들과 영훈씨를 기억하기 위해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당신의 노래비를 세웁니다. 영훈을 사랑하는 친구들이. 2009. 2. 14."
- ↑ 2003년 5월 2일 일기
- ↑ 홈페이지에 2001년 12월 22일 남긴 글, '그 춥던 겨울 날' 중에서(문체, 오자 등 수정)
- ↑ 이 점에 대해서도 단순한 인간적인 화해라는 의견, 이문세가 이영훈 없이 상업적 실패를 겪고 계산적으로 화해했다는 의견 등이 있다.
- ↑ 참고로 이 때는 이문세가 솔로예찬, 조조할인 등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했던 시기다. 1, 2집 때의 이문세의 음악을 생각해 볼 때, 조조할인이나 알 수 없는 인생 등 템포감 있는 팝이 이문세의 다른 쪽 스펙트럼이라고 볼 수 있다. 반대쪽 스펙트럼은 물론 이영훈류 발라드.
- ↑ 이문세의 앨범은 이영훈이 빠졌거나 적은 참여도를 보인 경우와 이영훈이 거의 전 곡을 다 맡은 경우에 있어 컨셉이 완전히 바뀐다. 밝고 템포감 있는 노래를 타이틀로 하고 약간의 익살스러움(이문세가 예능에 나와 곧잘 보여주는 캐릭터와 맥이 닿아 있는)이 더해진 컨셉의 전자와 무게감 있는 발라드 보컬로서의 컨셉이 살아 있는 후자인데, 과연 이 컨셉의 차이가 기획 단계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이영훈+이문세의 정체성과 이문세 개인의 정체성 사이의 차이인지도 흥미롭다.
- ↑ 원곡은 이문세와 이소라의 듀엣, 이영훈 '옛사랑' 앨범에서는 김연우와 이소은의 듀엣으로 들을 수 있다. 두 곡 모두 필청.
- ↑ 임진모는 더 나아가서 아직도 이영훈의 노래는 제대로 평가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영훈을 추모하는 글에서 임진모는 언젠가 이영훈의 남은 노래들도 재평가될 날이 올 것이라는 글을 썼다.
- ↑ '작곡가 이영훈 1주기' 중에서, 임진모 글
- ↑ 이영훈과 유재하가 고평가되는 이유가 사실 여기에 있다. 임진모가 남긴 글처럼, 이영훈 이전에는 팝이 고퀄리티의 음악인 데 비해서 가요는 기껏해야 트로트적인 느낌(이것이 속칭 '뽕끼'다)으로 전통적인 감성에 호소하지 않으면 안되는 2류 음악으로 취급되었던 것이다. 그런 인식구조를 뒤집어엎은 것이 이영훈이고, 임진모가 그런 이영훈을 일종의 혁명가로 평가하는 것도 그런 데서 비롯된 것이다. 유재하나 이영훈은 모두 기존의 가요 작법도, 조영남처럼 스탠다드 팝을 번안하거나 팝의 흐름에 따라가는 작법도 아닌 독창적인 형태의 음악을 시도했다. 유재하의 음악을 이영훈보다 높게 평가하는 쪽에서는 유재하의 음악이야말로 순수하게 기존 한국 가요의 반복구조를 탈피했다는 점에서 그런 평가를 내리고, 이영훈을 더 높게 평가하는 쪽에서는 서양음악적 구조를 대중음악에 천재적으로 녹여낸 유재하에 비해 기존 가요와 클래식 모두에서 장점을 고루 취한 이영훈의 특징에 높은 평가를 내린다.
- ↑ 이영훈이 스스로 가사에 대해 가장 만족하는 곡이 '옛사랑'이다. 생전에 그는 "'옛사랑'의 가사를 써 낸 뒤 더 할 말이 남지 않은 것을 알고 만족했다."라고 회고했으며 그런 생각에 따라 그의 장례식장에도 옛사랑의 가사가 붙어 있었다.
- ↑ 유재하는 1962년생, 이영훈은 1960년생이다. 유재하가 요절한 탓에 젊은 유재하의 이미지만 남아 있어 유재하가 한참 어린 것처럼 느껴지지만 의외로 나이 차이는 적다.
- ↑ 위의 임진모 인터뷰를 보면 자신의 리메이크 앨범에 참여한 윤도현에 대해 이영훈이 '연습을 좀 더 했으면 했다'라고 대놓고 이야기하는 점도 인상 깊다. 다만 윤도현의 경우 이영훈이 윤도현의 스케쥴을 살펴보자 연습량에 대해 납득했다는 말도 덧붙였고 해당 앨범에서 가장 많은 노래를 불렀다. 마음에 들어했으나 언급했던 단 한 곡은 마뜩찮았다고 보는 편이 맞다. 그 전에 자신의 곡들을 리메이크한 앨범 '옛사랑'을 만들면서 "(정훈희가 사랑이 지나가면을 불렀는데)최근 많은 여가수들이 이 곡을 불렀지만 늘 언짢았었는데, 이제 안심하는 마음으로 즐겁고 기쁘게 이 곡을 세상에 보낸다."라고 솔직한 평가를 내리는 것 또한 그의 일면을 보여주는 점이다. 어떻게 보면 좀 유연하고 사회적인 성격인 이문세와는 성향상 약간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런 면이 성격적으로 맞지 않았을 가능성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