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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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들을 봐도 알겠지만 유재하가 유난히 목이 굵고 길었다고 한다. 보통 목이 짧고 굵은 사람이나 얇고 긴 사람은 많아도 목이 굵으면서 긴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문세가 실제로 유재하를 처음 봤을 때 무척 신기해했다고.

柳在夏. 풍산 류씨, 그러니까 원래는 류재하가 맞는 이름이지만 당시에 두음법칙에 의한 이름인 유재하로 대중적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그의 부친도 언론에 소개될 때는 류씨라고 표기했었다. 항렬로는 류시원의 조카뻘이다.

1962년 6월 6일 ~ 1987년 11월 1일
대한민국 남자 싱어송라이터.

1 소개

한국 발라드의 아버지

대한민국 대중음악사상 손꼽히는 전설적인 천재 가수

1962년 6월 6일 경상북도 안동시 하회마을에서 태어났다. 서울 대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1년 한양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정재형, 김형석,우순실과 같음)에 진학하였다.

순수음악을 전공했다. 한양대학교 재학 시절 과제로 제출하기 위해 작곡한 곡을 보고 교수가 아무리 급해도 모차르트를 베껴 오면 어떻게 하냐고 혼을 냈다는 일화가 있다. 그의 음악이 모짜르트만큼 훌륭한 나머지 교수가 착각했다는 뜻이다. 그의 데뷔 앨범 5번째 트랙인 Minuet는 아예 고전 음악이다. 대중 음악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작곡과 작사, 편곡 외에도 바이올린, 피아노, 기타, 키보드 등 여러 악기의 연주에 능통했던 그는 대학 졸업을 앞둔 1984년 클래식과 재즈를 대중 가요에 접목하는 음악적 지향점을 세웠다.

한양대 재학 중에 '조용필위대한 탄생'의 키보디스트로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이때 조용필은 나중에 유재하의 대표곡이 되는 '사랑하기 때문에' 를 자신의 7집 앨범에 먼저 취입했다. 이후 조용필의 일본 공연 동행에 필요한 학교의 허가를 받지 못하여 위대한 탄생에서 탈퇴하게 된다.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시절(왼쪽에서 두번째. 유재하 오른쪽은 김광민과 송홍섭).

한양대 졸업 후 1986년에는 김현식봄여름가을겨울에서 활동하였으며 1987년 8월에는 자신의 데뷔 앨범이자 유작 앨범이 된 '사랑하기 때문에'를 서울음반을 통해 발표했다.

최고의 히트곡이자 명곡인 <사랑하기 때문에>는 사실 조용필 앨범에 먼저 수록되어있다. 사실 7집이 발매되기 약 반년 전인 1984년 11월 일본에서 발매된 조용필의 <아시아의 불꽃> 앨범에 한국어 버전과 일본어 버전('芙蓉の花のように') 두가지로 먼저 실린다. 이것은 유재하의 곡 중 최초로 레코딩 된 버전이다. 하지만 양인자 작사 조용필 작곡으로 표기된 건 안 자랑

7집 발매 당시인 1985년 '위대한 탄생' 의 멤버였던 23살 새파란 청년 유재하의 재능을 꿰뚫어본 조용필"너 곡 좀 써봐라" 라고 이야기하고 유재하가 감격해서 10곡 이상을 작곡했는데 <사랑하기 때문에> 한 곡만 쓰여서 유재하가 실망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당시 위대한 탄생의 리더였던 송홍섭은 이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했다. 송홍섭이 유재하의 집에 방문하게 되었을 때 자신의 노래를 조용필이 부를 수 있도록 소개해달라고 부탁했고, 악보를 전해 받은 조용필 역시 당시로서는 드물었던 장조 발라드의 유재하 곡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녹음을 했다는 것이다. 당시 유재하가 조용필에게 준 곡은 '사랑하기 때문에'와 '우리들의 사랑'(본문의 악보가 바로 조용필에게 주었던 버전이다.). 이후 유재하는 조용필이 녹음한 '사랑하기 때문에'가 본인의 정서와 맞지 않아 아쉬워했다고 한다.

이후 유재하가 참여한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에서도 똑같은 에피소드가 있다. 3집을 준비중이던 김현식이 멤버들에게 곡 좀 써오라고 하니까 그때 조용필에게 주었던 자작곡 10여곡을 다 가져다 줬다. 그런데 형평성 맞춘다고 멤버당 한 곡씩만 넣어서 유재하가 삐져서 <봄여름가을겨울>을 나갔다고 라디오 스타 김현식 특집에서 <봄여름가을겨울> 멤버들이 밝혔다. 이때 김현식이 받은 곡도 희대의 명곡이자 유재하 1집의 수록곡인 <가리워진 길>(추가하자면, 김현식은 <그대 내 품에>도 받아서 수록했다.). 그리고 유재하의 대타로 급히 영입된 박성식이 김현식 3집때 내놓은 곡 또한 희대의 명곡인 <비처럼 음악처럼>. 그런데 이 이야기가 잘못됐다는 말이 있다 유재하가 밴드에서 나간 뒤에도 김현식과 유재하는 같이 술친구로 잘 지냈었다고 한다.

어쨌든 자신만의 음악을 추구하고 싶었던 유재하는 돈 800만원을 들여서 자신이 모든 곡의 작곡, 작사, 편곡을 한 앨범 사랑하기 때문에를 내놓는다. 사실 이 앨범이 처음 나왔을 때도 이래저래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가창력 미달을 이유로 출연 금지를 당하기도 했다. 당시의 평론가들은 클래식과 가요를 접목한 유재하의 앨범을 높게 평가하지 않고 "이상한 노래" 정도로만 치부했다. 당시에 라디오 프로그램이나 TV 가요 프로그램에 나가기 전에는 PD들에게 사전에 테스트를 받는 제도가 있었는데 그 테스트에서도 가창력 미달을 이유로 번번히 통과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노래는 라디오를 통해 청취자들의 큰 반향을 일으키며 인기를 모으기 시작했다. 당시 이문세가 진행하는 MBC FM의 '별이 빛나는 밤에'에서는 한 주간의 신청 엽서와 방송 횟수를 집계해 가요 순위를 선정하는 '별밤 차트'란 코너가 있었는데 '지난날'이 기록적으로 장기간 1위를 질주하기도 했었다.

한편 당시에는 팝송이나 클래식 음악을 고상한 문화예술로 치는 반면 가요는 대중 오락의 한 종류로만 치부하는 분위기였고 클래식 전공자들 입장에서는 클래식 음악을 전공했던 유재하가 대중 가요를 만든다는 건 고상한 문화 음악을 포기하고 질낮은 가요로 투신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유재하는 학교를 그만둘 생각도 했었다고 한다. 그 여성의 증언에 의하면 "학교 때려칠까..." 라고 유재하가 말하기도 했었다고한다. 유재하가 1집을 녹음하기 직전 지인들이 유재하에게 작곡한 음악을 들려달라고 부탁하여 유재하의 음악을 들을 때면 항상 유재하는 자신의 음악을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 "알아요 형편없죠…" 하며 푸념을 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여러 에피소드가 있다. 유재하의 앨범 녹음 과정을 참관했던 여성의 증언에 따르면(명작스캔들 참조) 무척 수줍어하고 조용한 인상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술을 조금 들어가면 말이 많아지면서 쾌활해지는 성격이었다고. 유재하는 술만 마시면 말도 많아지고 피아노가 있는 술집에 가면 끝도 없이 즉흥 연주를 계속했다고 한다. 주인들이 나중에 참지 못하고 나가라고 할 때까지…

한편 김현식의 소속사 사장이자 유재하를 데뷔시킬 뻔 했던 동아기획의 김영 사장은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유재하의 성격을 개그맨에 비유할 정도로 밝고 쾌활한 타입이라고 소개했고 잘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주위 사람들이 처음 보면 '바람둥이'같이 보일 것이라는 표현을 할 정도로 여성들에게 많은 인기를 끌었던 면모를 소개하기도 했다.

천주교 교회에 다녔는데 교회 앞에 레코드 가게 주인에게 당시 유재하가 앨범 내기 전에 데모 테잎을 들려주었다고 한다. 가게 주인은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이 가장 괜찮다고 했고 유재하도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이 가장 좋았다고 한다. 참고로 유재하는 사후 용인시 오산리 천주교 공원묘지에 묻혔다.

그러다 1집을 발표한 직후인 1987년 11월 1일에 웬일인지 잘 가지 않던 동창회를 갑자기 간다고 나섰다. 술 취한 친구가 몰던 차를 얻어타고 돌아오다가 차가 중앙선을 침범하여 마주 오던 택시와 정면 충돌하는 바람에 향년 만 25세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유재하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그를 만났던 사람에 의하면 유재하는 1집의 완성도에 아쉬워했고 2집 앨범은 더 좋은 앨범을 만들겠다는 그의 강한 의욕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텔레비전에 출연한 것도 바로 아래의 KBS의 젊음의 행진에 나와 1집 앨범 수록곡인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을 부른 영상이 전부다.



젊음의 행진에 나온 처음이자 마지막 방송 모습. 방송에 꼭 나가고 싶어했던 유재하는 알고 지내던 한영애에게 "누나 나 방송 나가!" 라고 자랑했다고 한다. 한영애는 유재하 자신에 앨범에 싣지 않은 2곡을 받은 뮤지션 중 하나. 나머지 한 곡은 이문세가 받았다.

'사랑하기 때문에'의 기타 연주는 유재하가 한 것이다. 동갑내기 친구였던 김종진에 의하면 원래 유재하는 기타를 칠 줄 몰랐고 본인이 먼저 기타를 배웠다고한다. 그런데 나중에 배운 유재하가 기타 실력이 엄청나게 늘어나서 주위 사람들이 당황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악보가 없는 외국 기타리스트의 기타 연주를 순전히 하루만에 귀로 캐치해서 연주했다고 한다.

보컬은 약간 음정이 불안정하고 어눌하긴 하지만 그것조차 매력이라고 평가받는다. 유재하의 노래를 처음 듣는 사람들은 '에이, 이 정도는 나도 부르겠다' 식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직접 불러보면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 유재하 특유의 어눌하고 담백하고 순수한 느낌은 잘 찾아보기 힘든 특이한 노래 방식이기 때문. 이에 대해서 가수 박정현도 유재하의 음악을 듣고 단지 기교가 전부가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앨범 사랑하기 때문에에 실린 곡들은 사실 유재하 자신의 자전적인 사랑 이야기로 유재하가 곡을 바친 주인공은 바로 해당 앨범의 기악 파트 중 바이올린, 오보에, 플루트을 담당한 김애란이라는 여성 연주자라고 한다. 대학교 1학년 때 그녀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했다고 한다. 유재하가 죽자 당시 사귀는 중이었던 이 여성은 충격을 받고 한동안 잠적하며 은둔 생활을 하며 슬퍼했다. 그렇게 몇 해동안 살다가 보다 못한 부모가 해외 여행이라도 하며 안정을 취하게끔 했다고한다. 스위스로 여행가서 한 카페에 들렀는데 난데없이 카페에서 유재하 노래가 나와서 기겁했다고. 카페 주인에게 이 노래에 대하여 묻자 한국인 여행자가 준 음반인데 가수나 가사는 몰라도 너무 애절하여 종종 틀어준다는 답변을 했다고 한다. 이 여성은 나중에 다른 사람과 결혼하여 잘 살고 있다고.

유재하 사망 당시 65세였던 아버지 유일청 씨나 61세이던 어머니 황영 씨도 큰 충격을 받았다. 나이를 보면 알겠지만 유재하를 늦둥이로 얻었는데 아들이 음악 좋아하여 연주하는 걸 시끄럽다고 꾸짖은 게 두고두고 한이라고 1988년 한 월간지에서 어머니는 인터뷰했다. 당시 아들의 생전 음반 연주 사진을 방구석에 두고 말없이 쳐다보던 아버지 사진이 이 잡지를 보던 유재하 팬들을 가슴 아프게 했다.

그야말로 대한민국 대중음악사에 큰 족적을 남긴 위대한 인물. 지금 나오고 있는 발라드는 모두 유재하 모방이라는 평까지 듣는다. 1집이자 유작인 사랑하기 때문에는 지금 들어도 놀라울 정도로 세련되고 단아한 앨범이다. 어눌하지만 솔직한 보컬, 절제를 아는 악기, 가슴 시릴 정도로 쓰라리고도 담백한 가사가 인상적이다. 2012년 12월에 새로 리마스터링되어 재발매되었다. 2001년 리마스터판은 기존 표지를 사용하지 않았고, 소리도 원곡의 분위기를 훼손했다는 말이 많았다. 그런데 오히려 이 2001년 리마스터링이 원곡에 더 충실하다는 말이 나왔다!

MBC 창사 47주년 특집 MBC FM4U의 '한국 대중 음악, 시대를 걷다' 에서 음악 평론가 임진모는 "대한민국의 발라드는 이영훈에 와서 문이 열리고 싱어송라이터의 세계, 즉 창작과 작곡 편곡의 세계로 발라드의 지평으로 올린 사람이 유재하이다" 라고 평했다.


수록곡 중 하나인 '우리들의 사랑' 악보, 현재 불려지는 가사와는 다른 부분이 보인다.

당시까지 작곡, 작사를 맡는 싱어송라이터들은 흔했어도 편곡까지 혼자서 맡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신중현이나 조용필 같은 거장들도 하기 힘든 작업을 한 앨범을 통째로 만 25세의 남자가 해버린 것이다. 게다가 유재하는 오케스트라 반주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악기를 혼자서 연주했다. 피아노, 기타 등 혼자서 연주할 수 있는 악기를 거의 혼자 맡았다.

오늘날 유재하가 수많은 후배 가수들의 존경을 받는 이유는 이런 예술 작품을 만드는 정성스러운 자세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오케스트라 반주 역시 유재하가 대학교를 다니면서 알게 된 후배들이나 지인들을 섭외해 녹음을 했다고 한다. 당시 유재하 앨범의 반주를 연주했던 후배들은 처음에 대중 음악의 반주를 녹음하게 될 줄은 몰랐다는 듯. 그래서 '이런 거 해도 되나? 걸리면 학교에서 짤리는 거 아냐?' 식으로 걱정도 많았다고. 유재하는 그런 후배와 지인들을 다독여주면서 앨범 녹음을 끝냈다.

명곡 <사랑하기 때문에>의 중간에 들어가는 깔끔하고 가슴 쓰라린 기타 연주나 <우울한 편지>의 우울한 피아노 간주는 2016년 지금 들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 조용필, 이문세, 김현식 같은 선배들이 가수들이 왜 그렇게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 했는지는 앨범 한 장으로 명료하게 드러난다.

김현식 등 당대 음악 선배들이 유재하를 그토록 아꼈던 이유는 당시 기준으로 대중음악계에서 최초의 음대 출신(게다가 명문대) 음악가 후배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대중음악계의 환경이라는 건 개인의 음악성과 음악을 만드는 기본기는 전혀 딴판이어서 대부분의 대중 가수들은 일부를 빼놓고는 악보를 그려서 작곡할 수 있는 이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악보를 제대로 볼 줄 모르는 가수도 있었던 시대였고 제대로 된 음악 교육 기회 없이 그저 개인이 가지고 있는 '삘'로만 음악을 해야 했던 이러한 현실에서 한양대 음대 작곡과 출신이 대중 가요를 한다고 나타났으니 선배들 입장에서는 대중음악계에 큰 기대주였던 셈이다.

특히 김현식같은 경우는 아주 유재하를 무척 아꼈다. 김현식은 후배들을 주먹으로 조지면서 이끄는 스타일이었는데, 김종진이나 전태관 등 당시 봄여름가을겨울 멤버였던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유재하는 항상 그 구타와 집합의 대상에서 열외였다고 한다. 평소 가요계 군기반장이자 성질 있기로 유명한 김현식이 얼마나 유재하를 높게 평가했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김현식은 기묘하게도 딱 3년 뒤1990년 11월 1일에 병으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는데, 이는 김현식이 유재하가 세상을 떠난 이후 슬픔에 빠져 을 가까이 하다가 간경화를 얻었다는 이야기도 있기 때문이다.

즉, 김현식과 유재하의 기일은 같다. 이 두 뮤지션에게 바치는 헌정곡으로, 2004년 에픽하이가 '11월 1일'이라는 노래를 자신들의 정규 앨범에 수록했다. 두 뮤지션의 기이한 인연을 모르는 젊은 음악 팬들도 해당 곡을 듣고 비화를 알게 된 케이스가 상당히 있었다.

유재하 사망 직후 라디오에서는 갑자기 '사랑하기 때문에'와 '지난날'이 정말 물릴 정도로 많이 나왔다. 생전에 크게 대중적인 주목을 받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사망 이후 오히려 인지도가 올라가며 뒤늦은 인기를 얻었다는 것이 더욱 사실에 가깝다.

그리고 신승훈이나 윤종신, 김현철 같은 가수들이 유재하의 영향을 받아 그의 음악을 재발견하기 시작했다. 이문세의 경우에는 유재하가 생전에 전혀 유명한 가수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망 소식을 듣자마자 라디오 방송에서 울면서 뉴스를 전했다.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유재하 노래 <지난 날>에서 이문세가 바로 코러스로 참여하기도 했고, 유재하는 죽기 전에 이문세에게 노래를 한 곡 써주었다. 나는 아직 모르잖아요가 실린 이문세 3집에 그대와 영원히가 그 노래이다. 20대 중반밖에 되지 않았던 작곡가에게 당대 최고의 가수였던 이문세가 곡을 받았다는 사실이 그의 능력을 대변해준다 3집 녹음 당시 이문세는 당대 최고 가수가 아니라 1, 2집의 실패로 인한 아쉬운 가수였다. 이문세의 히트가 3집 이후이니 이문세의 황금앨범(3, 4, 5집)대열에 그대와 영원히라는 뛰어난 곡으로 서막을 여는데 참여했다고 보는 게 맞다.

대한민국 대중음악사가 유재하 이전과 유재하 이후로 나뉜다는 말은 바로 이러한 그의 음악적 배경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음대 작곡과 출신답게 그의 음악은 기존의 대중음악과는 사못 다른느낌을 주는데 쉽게 말해 기존 대중가요가 일률적으로 가졌던 소위 '뽕끼' 가 그의 음악에서는 완전 사라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노래 대부분이 다소 슬프고 애잔한 느낌을 주지만 이전의 가요처럼 신파조는 아니다. 오히려 슬프지만 무언가 깔끔한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다. 한국 가요 발라드계의 양대 원조격인 이영훈의 음악들조차 사실 저 '뽕끼' 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뽕끼' 라는 것이 다소 신파적인 멜로디를 선호하는 한국인들의 특성에 기인한 것으로 순전히 단점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그러나 유재하의 경우 한국 가요계의 흐름과는 전혀 다른 장르를 그 어린 나이에 새롭게 길을 텄다는 점이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이다. 단순하게 봐도 조용필이라는 전무후무한 황제가 압도적으로 지배하던 가요 지평에 1980년대 후반 이후부터 이어지던 발라드의 두 시초라는 것에 대단한 점이 있다. 이문세-변진섭-신승훈으로 이어지는 발라드 계보의 스타트는 이영훈과 유재하라는 의견도 존재한다.

후배 가수들, 특히 발라드 가수들에게 끼친 영향이 상당하다. 한국적 발라드는 거의 대부분 그의 영향을 받은 셈. 위에도 언급했지만 사실 한국의 소위 발라드는 지금도 유재하 1집과 이영훈이 전곡을 작사/작곡한 이문세 4집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이문세 4집의 편곡자는 김명곤이다. 김명곤은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까지 대한민국의 수많은 명반을 만들어낸 인물이다.

  • 이적은 작곡, 작사, 음악을 대하는 자세 등 거의 모든 부분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가수 중 하나가 유재하라고 한다.
  • 유희열이 클래식 음대를 진학하게 된 계기가 유재하라고 한다. 게다가 유재하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위치에 있지 못했으리라고 그에게 존경심을 표시하기도 했다.
  • 유영석은 유재하에 대해서 놀라움 질투와 존경을 한 번에 느낀다고 한다.
  • 김동률은 유재하의 죽음으로 한국 발라드 계열의 음악은 100년은 퇴보되었다고 말할 정도고 신승훈은 그를 추모하기 위해 일부러 11월 1일을 자신의 데뷔날로 잡았다.
  • 윤종신라디오 스타에서 '이 사람의 노래를 듣고 음악을 하겠다고 마음 먹었고 마음 속의 라이벌로써 그를 따라가려고 했지만 특히나 작사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 는 이야기를 하였다.
  • 이상은도 유재하 노래를 상당히 좋아해서 특히 라디오 방송 같은데서 '사랑하기 때문에',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등을 자주 부르곤 했다. 이문세가 내 노래중에 어떤 곡을 제일 좋아하냐고 이상은에게 물어본 적이 있는데 '그대와 영원히(유재하 곡)'라고 답했었다.

단, 상대적으로 음악적 성과가 적기 때문에 (1집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뒤에 기량이 떨어진 가수들과 비교되며) 아쉬움이 더해진 약간의 과대평가를 받고 있다는 비판을 듣기도 한다. 그러나 개인 활동 이전부터 조용필, 김현식 등 거장들의 인정을 받았다. 그런 그가 겨우 1집밖에 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으니 당연히 동료 가수들의 아쉬움이 더해졌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외에도 작곡/작사 능력에 비해 가창력이 아쉽다는 평도 있는데 늘 같이 묶이는 가수가 가창력 본좌김현식김광석이라 상대적으로 묻히는 감이 있다. 특히 이 둘은 힘있는 보컬의 인상이 너무 강해서 유재하와 대비되는 면이 있다. 물론 유재하의 보컬 능력도 매우 좋다. 지른다고 다 잘 부르는 게 아니고, 유재하처럼 노래 부르는 가수는 지금까지도 얼마 없다.

그가 세상을 떠난지 10년이 지난 1997년, 조규찬 등이 참여한 그의 추모 앨범인 "다시 돌아온 그대를 위해"가 제작되었다.

2003년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에 '우울한 편지' 가 실리면서 다시 주목받았다.

군사정권 시절에는 유재하의 앨범이 '가창력 미달' 로 금지곡이 된 적이 있다고 한다.#

2010년 10월 10일 1박2일 방영분을 통해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이 방송되었다(한국 위키 참조 및 인용했다).

2011년 MBC 우리들의 일밤나는 가수다의 5월 26일 방송분에서 박정현이 유재하의 "그대 내 품에" 를 불렀다. 나는 가수다 스포로 그녀가 이 노래를 선택했다는 사실이 알려져서 우려의 목소리가 많았지만 잔잔하게 이 노래를 소화해내 좋은 평가를 받았다. 박정현은 한국에 와서 제일 먼저 선물받은 것이 <유재하 1집> 이었고 그때 많은 영향을 받았었다고 <나는 가수다> 방송 중의 인터뷰에서 언급하기도 했다.

2011년 6월 28일 KBS의 명작스캔들에 유재하편이 방송되었다.

2012년 11월 2일 방송된 KBS의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는 <땡스 투 유재하> 특집을 방영하여 유재하와 관련 있는 가수들을 초청해 유재하가 만든 노래 전곡을 TV 방송 최초로 공연했다. 이 방송에 출연한 이적의 말에 따르면 라디오 방송을 제외하고는 TV에서 유재하의 노래 전곡을 방영한 적이 없다고 한다.

2013년 7월 20일 KBS의 불후의 명곡 전설을 노래하다에서 유재하 특집을 방영하였다. 문명진이 '사랑하기 때문에'를, 조원선이 '우울한 편지'를, 홍경민이 '지난 날'을, JK김동욱이 '가리워진 길'을, 하동균이 '그대 내 품에'를, 원모어찬스가 '그대와 영원히'를 불렀다.

2014년 10월 29일 라디오 스타(황금어장)/2014년 하반기에서 유재하를 주제로 한 유재하이기 때문에 특집을 방영했다. 일단은 토크쇼가 베이스다 보니 친구들(김광민, 장기호)이 들려주는 그 에 관한 트리비아(EX: 목소리가 맹구같았다.)들과 나머지 게스트 (조규찬, 박원)들이 들려주는 유재하에게 영향을 받은 점 + 바치는 노래까지 해서 재미와 감성을 둘 다 잡는데 성공했다.

2 앨범 목록

2.1 1집 사랑하기 때문에

2.2 추모 앨범

1997년 김현철의 프로듀싱으로 추모 앨범인 "유재하를 추모하는 앨범 1987 다시 돌아온 그대 위해"가 발매되었다. 음악 포털 등지에서 1997, 1987을 혼용하고 있는데 이는 1987의 8을 9와 8을 동시에 표현하는 문자로 디자인해 1997년에 1987년의 유재하를 추모한다는 의미의 앨범 타이틀이였다. '~그대를 위해' 등으로 기재된 곳도 있으나 이는 맞춤법에는 맞으나 원 앨범 제목과는 거리가 있다. 김현철이 전체 프로듀싱을 하고 그야말로 후덜덜한 라인업이 가창과 편곡으로 참여한 앨범. 김현철의 프로듀싱 치고는 과소평가받는 앨범이지만 추모 앨범에서 흔히 일어나기 마련인 '보컬/편곡 미스매칭' 이 거의 눈에 띄지 않을 뿐더러 전체 프로듀싱을 한 명의 프로듀서가 담당함으로써 전체적인 완성도도 높다. 다른 추모 앨범들이 편곡에 힘을 쏟지 않았거나 음악적 역량이 떨어지는 일부 아이돌 내지 댄스 가수를 섭외로 의한 OME 트랙을 꼭 포함했던 걸 보면...

같은 해 발매된 신중현 헌정 앨범과 더불어 대한민국 대중음악 헌정앨범의 효시격인 앨범으로 꽤 괜찮은 앨범으로 평가받는다.

  • 트랙리스트
  • 다시 돌아온 그대 위해
배훈이 작사작곡한 오리지널곡. 여러 뮤지션들이 소절을 나누어 부른다. 출연순으로 김현철, 나원주, 유영석, 한동준, 신해철, 일기예보, 김동률, 정재형, 김광진(더 클래식), 이적, 여행스케치, 이소라, 고찬용, 조규찬. 맨 마지막은 역대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출신들의 합창으로 이루어졌다.
  1. 지난 날 (유영석)
  2. 그대 내 품에 (나원주)
  3. 텅빈 오늘밤 (신해철)
  4.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더 클래식)
  5. 가리워진 길 (일기예보&여행스케치)
  6. 우울한 편지 (고찬용)
  7. 우리들의 사랑 (이적&정재형)
  8. 비애 (권혁진&한동준)
한영애 2집 '바라본다(1988)' 에 실린 유재하의 곡. 이문세의 '그대와 영원히' 와 더불어 유재하가 쓰고 1집에 실리지 않은 두 곡 중 하나다.
  1. 그대와 영원히 (이소라)
이문세 3집 '난 아직 모르잖아요(1985)' 에 실린 유재하의 곡. 한영애의 '비애' 와 더불어 유재하가 쓰고 1집에 실리지 않은 두 곡 중 하나다.
  1. Minuet (인공위성)
연주곡이였던 'Minuet' 을 인공위성의 아카펠라로 연주.
  1. 사랑하기 때문에 (조규찬)
  2. 재하를 그리워하며
색소폰으로 연주된 '사랑하기 때문에' 가 배경으로 흐르는 가운데 조용필, 봄여름가을겨울, 이문세 등 여러 뮤지션들이 유재하를 그리워하며 한 마디씩 녹음했다.

2.3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유재하음악장학재단 홈페이지

사후 유족들은 1집인 "사랑하기 때문에" 의 수익금을 이용해 유재하 음악 장학회를 세우고 1989년부터 유재하 음악경연대회를 개최하기 시작했다. 2005년에는 재정 문제로 중단되었으나 2006년에 싸이월드의 후원으로 재개되었다. 2013년 역시 스폰서를 구하지 못해 경연대회 개최가 힘들었으나, 100명에 가까운 이른바 '동문(역대 수상자들)'의 힘을 모아 겨우 개최가 가능하게 되었다. 근데 후원단체가 고정되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 힘들어질 상황이다.

유재하 음악경연대회는 그동안 수많은 음악인들을 배출해냈다. 단순히 음악인이 아니라 한국 음악계의 최전선에서 활동하고 있는 인물들. 그 라인업이 ㅎㄷㄷ한데 조규찬, 유희열, 고찬용 등이 대표적 인물이며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유재하 음악 경연대회가 배출한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