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체코어: Socialismus s lidskou tváří
슬로바키아어: Socializmus s ľudskou tvárou

1 개요

사회주의는 단순히 착취 계급의 지배로부터 노동자들을 해방시키는 것 뿐만 아니라, 부르주아 민주주의보다도 인간적으로 더 나은 풍요로운 삶을 제공해야 한다.

- 1968년 4월 발표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기본계획 중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는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알렉산데르 둡체크가 내세운 자유화 정책의 표어이다.
역사적인 관점에서는 주로 1968년 둡체크가 주도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민주화 정책을 가리킨다. 정치적으로는 고르바초프가 추진한 글라스노스트 정책이나 중국의 민주화 운동 등 민주적 사회주의 운동 또는 개혁을 일컫기도 한다.

2 역사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체코슬로바키아에는 민주국가가 수립되었다. 하지만 1947년 2월, 공산당이 주도하던 의회 쿠데타를 통해 공산당이 집권, 본격적인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다.
1960년대 체코슬로바키아는 소련식 경제와 같은 중공업화를 추진했다. 하지만 체코슬로바키아는 이미 2차대전 전부터 공업이 발달한 국가였고, 이 때문에 소련식 경제정책은 생각보다 저조한 효과를 내면서 체코슬로바키아인들의 많은 불만을 낳았다. 또한 1960년 헌법을 개정하면서 연방제에 대한 별도의 언급을 하지않아 중앙정부에 대한 슬로바키아인들의 불만이 높은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1968년 1월 5일, 슬로바키아 공산당 제1서기였던 둡체크가 안토닌 노보트니를 대신해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제1서기로 선출되었다.[1] 둡체크는 당시 국민들의 불만을 해결하기 위해 언론, 출판, 표현의 자유를 완화시켰고, 공산당에 대한 자유로운 비판을 허용했다. 특히 이 시기 정치범으로 투옥되었던 요세프 스므르콥스키(Josef Smrkovský)[2], 즈데넥 믈리나르(Zdeněk Mlynář)[3], 구스타프 후삭[4] 등의 저명인사들을 석방시키기도 했다.
둡체크는 여기서 더나아가 체코슬로바키아 내 다당제를 허용하고 비밀경찰의 권한을 약화시켰다. 당시 체코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별도의 당을 설립하기도 했으며, 프라하에서는 공산당을 비판하는 토론이나 출판이 활발하게 늘어났다. 이러한 개혁에 당시 체코슬로바키아가 추진한 개혁에 헝가리 서기장이었던 카다르 야노시 등은 지지를 표명했다.

하지만 레오니드 브레즈네프를 필두로 한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은 체코슬로바키아식 개혁이 자국 내 지도력를 약화시킬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던 중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개혁정책에 불만을 품고있던 보수파들은 비밀리에 소련에 군사적으로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다.[5]
이에 소련군은 다른 바르샤바 조약기구 군대와 함께 1968년 8월 20일 체코슬로바키아에 진입, 둡체크, 류드빅 스보보다(Ludvik Svoboda) 등 개혁파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소련군의 개입에 반발하는 시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이후 공산당 서기장이 된 구스타브 후삭이 정상화 정책을 펼치면서 둡체크의 개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3 의의

비록 실패했지만, 사회주의를 보다 더 민주적으로 바꾸려던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개혁은 당시 스탈린주의로 대표되던 억압적이고 권위적인 현실사회주의를 개혁하려 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었다. 이러한 시도는 현실사회주의에 염증을 느끼던 서구 지식인들에게 여러모로 큰 인상을 주었다. 이후 서구 좌파는 정치적으로 소련식 사회주의를 벗어나 티토주의, 민주사회주의, 유럽공산주의(유로코뮤니즘), 제3의 길 등 현실사회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대안을 모색하기도 했다.

또한, 체코슬로바키아의 이러한 개혁은 사회주의권에도 영향을 미쳐 고르바초프의 집권 당시 글라스노스트 정책과 1989년 동유럽 혁명 이후 개혁파들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특히 소련에서는 1989년 11월 26일 소련 서기장이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프라우다지 논설을 통해 체코슬로바키아의 무력진압을 잘못되었다고 인정하면서 이 단어를 사용, 소련 내에서 재평가받게 되었다.[6]
  1. 당시 개혁파였던 그가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총수가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출신배경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 둡체크는 어렸을 때부터 소련에서 자라고 교육을 받았던 만큼 당시 공산당 내에서 소련 출신 엘리트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이때문에 처음 둡체크가 제1서기에 선출되었을 때 체코슬로바키아 국민들 사이에서는 단순히 내부적 인사교체라는 회의적인 여론이 높았다. (출처: 동유럽의 민주화,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2004년)
  2. 둡체크와 함께 프라하의 봄을 이끌었다.
  3. 이후 체코슬로바키아 인민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가 소련군 개입 이후 스웨덴으로 망명한다.
  4. 훗날 프라하의 봄이 진압된 이후 서기장이 되어 정상화 정책을 펼친다.
  5. 특히 1992년 러시아 이즈베스티야지를 통해 당시 간부회 후보였던 안토닌 카팍이 레오니드 브레즈네프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정치적 위상은 완전히 추락해버렸고, 이후 체코슬로바키아 내에서 활동이 완전히 금지되었다.
  6.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