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오쯔양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
2대 화궈펑3대 자오쯔양4대 리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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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紫陽(조자양)

1919년 10월 17일 ~ 2005년 1월 17일

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의 3세대 정치인이다. 덩샤오핑의 후계자로 유력하게 거론되었고, 국무원 총리에 올랐으나, 천안문 6.4 항쟁시에 시위대에 동정적이었다는 이유로 실각한 후 야인으로 지냈다.

2 생애

2.1 초기이력

허난 성 [河南省] 궈셴현[渦縣] 출생. 중소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슈예(修業) 고등학교는 후베이 성 우한에서 다녔는데, 이때 이름을 쯔양으로 개명했다. 1935년 중국공산당의 청년조직인 공청단에 가입하였고, 홍군에 가담하였다. 1938년 정식당원이 된다.

국공합작이 이뤄지자 홍군은 8로군으로 개편되어 중일전쟁에서 일본군과 싸우게 되었고, 자오쯔양은 류보청-덩샤오핑이 지휘하던 129사단에 가담하게 되어 그 능력으로 주목을 받았다.

2.2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1945년 일본군이 항복하고 곧 국공내전이 재개되자, 자오쯔양은 공산군이 점령한 해방구에서 토지개혁 담당을 맡아 공산당이 농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때문에 자오쯔양의 상관인 덩샤오핑은 자오쯔양을 "토지개혁 전문가"로 공개적으로 칭찬할 정도였고, 덩샤오핑 사단의 핵심인물이 된다.

공산당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자, 자오쯔양은 군직을 나와 광둥 성의 농업담당자가 된다. 1959년 대약진운동 때 중앙에서 내려온 명령을 수행하다가 광동성에서 수백만의 인명을 아사시키는 참극이 벌어지게 된다. 이런 사태에 책임을 통감한 자오쯔양은 좀 더 실용적인 스탠스를 취하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1965년에는일약 46세의 나이로 광둥성 당서기로 승진했다. 하지만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여러 다른 고위직 처럼 공직에서 쫓겨나서 4년간 공장에서 일하게 된다. 1971년 복권되어 다시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다. 이어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1979년 자오쯔양의 후견인인 덩샤오핑이 화궈펑을 실각시키고 대권을 장악하자, 자오쯔양은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다.

2.3 덩샤오핑 집권 이후

1980년부터 87년까지 국무원 총리로 재직했고, 이후 2년 동안 중국공산당의 당수격인 총서기로 재임했다. 덩샤오핑과 함께 중국이 70년대 문화대혁명의 상처를 딛고 80년대 경제가 발전하는데 크게 일조했고, 90년대 경제 발전의 밑거름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4 천안문 사태


톈안먼 사태 때의 모습. 그리고 옆에 검은 옷을 입은 남자는 훗날.....

그러나 천안문 사태 당시 덩샤오핑(鄧小平)의 무력진압 지시에 정면으로 맞서다가 실각하였다. 덩샤오핑의 집권기인 1980년대를 통틀어 국무원 총리, 공산당 총서기 등의 요직을 거치며 덩샤오핑의 유력한 후계자로도 거론되었지만, 결국 천안문 사태의 대응을 놓고 덩샤오핑과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으며, 그 때문에. 권력에서 멀어졌다.이후 사망때까지 계속 가택연금 상태 있었다.

2.5 실각 이후

이런 감시상태에서, 언론기관과 접촉하거나 공개 석상에 나오는 것은 금지되었고, 감시원이 따라붙기는 했지만, 삶 자체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전직 고위 관리들이 지내던 베이징의 호화 주택을 배정받고 거액의 연금을 받았으며, 가끔 골프 라운드를 도는 등, 유유자적하며 지냈다. 또한 당직은 박탈되고 대권의 길은 막혔지만, 공산당에서 추방되지 않고 당원 자격은 죽을때까지 유지되었다.

그러니까 당 차원에서는 "그가 과오를 범하기는 했지만, 딱히 사법적인 책임을 질만큼 큰 잘못을 저지른건 아니다"라는 입장이었다.

가택 연금기간동안 회고록을 구술했고, 삼엄한 감시하에 살고 있었으나, 손자의 장난감에 테이프를 숨겨 국외로 반출, 흐루쇼프 처럼 국외에서 회고록을 출판하였다. 한국에서도 "국가의 죄수"라는 이름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이렇게 지내다가 2005년 사망한다.

3 평가

중국당국은 그의 부음기사를 통해 "2005년 1월 신화통신을 통해 "당과 인민사업에 유익한 공헌을 했다. 하지만 1989년 정치적 풍파 속에 엄중한 잘못을 저질렀다"고 상반된 평가를 동시에 내린 이래 단 한 번도 자오쯔양을 공개 거론한 적이 없다. 인민일보 자매지 환구시보(環球時報)는 이날 자오쯔양 관련 기사에서 "중국당국은 자오쯔양 10주기에 대해 그 어떤 평가도 내놓지 않았다"며 "침묵 역시 일종의 태도 표명"이라고 전했다.

중국이 이처럼 자오쯔양을 금기시하는 이유는 그가 덩샤오핑에 의해 쫓겨난 인물이고 그에 대한 재평가가 톈안먼 사태에 대한 재평가와 관련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중국 지도부는 '의회민주주의 도입' 등을 주장한 자오쯔양에 대한 재평가나 섣부른 언급이 공산당 지도체제의 근간과 관련된 논쟁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우려한다. 그 때문에 매장도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성지가 될까봐 허락하지 않다가 2015년 4월 시진핑 주석이 매장을 허락했다. 단 장소는 공개하지 않았다고

중국의 민주화운동가들에게는 무력진압을 반대하고, 자유화를 촉진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