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펑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
3대 자오쯔양4대 리펑5대 주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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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鹏 (이붕)

(1928~ )

1 개요

중국의 정치인이다. 중국 제3세대 정치인의 대표적 주자로서 장쩌민시절 국무원 총리를 지냈다. 천안문 6.4 항쟁때 진압을 떠맡아서 중국 민주화운동가들에게는 학살자로 불리기도 한다.

2 생애

쓰촨 성 청두에서 중국 공산당 초기지도자 리옌쉰(李硯勛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1928년 장제스국공합작을 깨고 벌인 4.12 상하이 쿠데타 때문에 공산당원을 학살할 때 리옌쉰은 처형되었고, 리펑은 고아로 떠돌았다. 하지만 공산당은 이렇게 희생당한 당원으 유족을 찾아내 당시 대장정을 마친 공산당이 건설한 옌안으로 도피시켰고, 리펑도 옌안으로 와서 자라나게 되었다.

이렇게 옌안에 온 혁명 유자녀 고아들은 여럿 있었는데, 마침 자식이 없던 저우언라이과 덩잉차오가 입양해 키우게 되었다. 그리하여 리펑도 저우언라이의 양자가 되어 태자당의 일원이 된다.

리펑은 그 양자녀중에서도 가장 똑똑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1945년 17살의 나이로 공산당에 가입했고, 공산당의 차세대 엘리트로서 키워지게 되었다. 아직 국공내전이 끝나지 않은 1948년 모스크바 전력 공학원에 유학을 갔다. 박사학위를 받고, 1949년 공산당이 국민당을 패퇴시키고 대륙을 장악했고, 1955년 리펑은 소련에서 학위를 받고 돌아와 신중국에서 기술관료로 계속 출세했다.

처음에는 만주지역으로가서 발전소 건설 부문에서 일하다가 1966년부터 1980년까지 베이징 전력 공급국 (北京供电局)의 국장으로 일하게 된다.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외국에서 공부한 지식인이었기 때문에 홍위병에게 박해를 당하기 딱 알맞았으나, 양아버지가 저우언라이라는 무시무시한 거물이었기 때문에 무사히 피해갔다.

이어 이렇게 전력계통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중앙정무직으로 발탁되어 1982년에는 당 중앙 위원에 전력부장(장관)에 임명되었고, 그 이후 자오쯔양 총리 밑에서 부총리를 맡았다. 1985년에는 정치국원이 되었다. 1987년에는 중앙 정치국 상무 위원 및 총리를 맡아 최고 지도자의 자리에 올라섰다.

하지만 개혁초기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학생들이 봉기한 천안문 6.4 항쟁에서 진압 작전을 지휘했기 때문에 악역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이는 사실 리펑이 주동된 것이라기보다는 덩샤오핑을 비롯한 8인 원로회의(이 원로들은 아무 직함이 없었다!) 가 이미 결정해놓고, 리펑을 비롯한 실무진에게 집행을 떠넘긴 것이었다. 그렇기 떄문에 일부 민주화운동가들에게는 "학살자"라는 비난을 듣기도 한다.

이렇게 원로들에게 충성을 다했지만, 웬일진지 덩샤오핑자신 대신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은 리펑 대신 당시 상하이 서기였던 장쩌민을 중앙정계로 불러들여 그를 후계자로 삼고 국가주석 및 당총서기로 임명한다. 웬지 양아버지콩라인이 연상된다. 리펑은 1998년까지국가주석 양상쿤(1993년까지) 장쩌민 (1993년부터 2003년까지) 밑에서 총리역을 하다가, 10년 임기에 걸려 장쩌민보다 먼저 퇴임했고, 그를 이어 주룽지가 총리에 오른다.

1994년에는 중국 총리 최초로 방한하기도 했다.

퇴임후에는 여러 상징적인 지위를 맡으면서 조용히 살고 지내는듯. 하지만 강경진압에 앞장섰기 때문에 민주화운동가 및 반중인사들에게는 극악인 평가를 받고 있다.

2008년부터 건강 이상설이 제기가 되어서 그런지 꾸준히 사망설이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