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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란한 한 때 세상에서 제일 어색한 사진
1945년 8월, 중일전쟁 종료 직후 천하반분을 위해 충칭에서 만난 두 사람. 이 때 쌍십협정(雙十協定)이 체결되어 평화가 오는 듯 했으나, 둘 다 추스르는 시간을 벌기 위한 기만술이었을 따름이다. 물론 선빵은 전력이 유리했던 장제스가 날렸으나...
1 개요
중화민국 당시 국민당과 공산당이 협조체제를 구축하여 하나의 적을 토벌하자는 일본을 공격한다 취지에 이뤄진 협정.
2 제1차 국공합작
위안스카이 사망 이후 쑨원은 서남군벌과의 연합으로 1917년 9월 제1차 광동 군정부를 수립하였으나, 권력 투쟁에 밀려 상해로 밀려나게 되었고, 1920년 푸젠군벌 진형명과 연합해 제2차 광동군정부를 수립하게 된다.
한편 러시아 10월 혁명의 성공에 자극받은 중국의 지식인들은 사회주의를 수용하여 중국 공산당을 결성한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국가의 프롤레타리아 운동과 피억압 민족의 민족해방 운동의 결합 가능성을 제기하며 공산주의자와 부르주아 민주주의 세력의 동맹을 강조한 레닌의 '식민지 민족 문제에 관한 테제'의 영향으로 소자본가 계급과의 연합전선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또한 5.4운동으로 중국 민중의 동원력을 재고하게 된 쑨원은 비밀결사형식이던 중화혁명당을 발전시켜 중국 국민당을 수립한다.
쑨원은 제정 러시아와 중국 간의 불평등 협정의 폐기를 뜻하는 '카라한 선언'에 대한 호의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의 수용은 거부했다. 그러나 군벌과 연합하는 방식으로는 혁명의 완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공산당과의 일시적 합작에 동의하게 된다. 이후 중국 공산당이 '당내 합작' 형식의 연합전선을 받아들이고, 진형명의 배반으로 근거지를 상실함에 따라, 공산당원의 입당을 허용하고, 선전을 강화하는 '개진(改進)'을 단행했다.
1924년, 양자 간의 접근은 마침내 '연소(聯蘇, 소련과 연대하고), 용공(容共, 공산주의를 인정하며), 부조공농(扶助工農, 공업과 농업에 있어 서로 도움)'으로 요약되는 (국민당) '개조(改造)'로써 결실을 맺었고, 공산당은 국공합작 체제 안에서 급격히 세력을 키웠다. 하지만 공산당의 목적은 중국 국민당의 세력을 흡수하는 것이기에 국민당측의 반발을 불러올수밖에 없었다. 결국 쑨원 사후 양측의 대립이 생겼고 북벌 과정에서 장제스의 쿠데타 및 무한 국민정부와의 마찰로 제1차 국공합작은 붕괴된다.
3 제2차 국공합작
1차 국공합작이 붕괴되고, 공산당은 장시 성 을 거점으로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장시 소비에트, 장시 해방구)'을 건설해 국민정부를 타도할 것을 결의한다. 이에 장제스는 5번에 걸친 초공(剿共, 공산당을 박멸함) 작전으로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을 붕괴시킨다. 이후 공산당은 대장정을 통해 간신히 옌안에 정착하지만, 국민혁명군은 그곳까지 토벌군을 보낸다. 당시 산시(섬서) 성에 주둔한 홍군은 겨우 3만 명에, 통치 지역도 겨우 4개 현에 불과했다. 이에 공산당은 지방 언론을 이용해 '장제스는 일본의 침략은 무시하고 내전에만 광분한다'는 프로파간다로 초공 작전의 중단을 시도해 보지만, 장제스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한 번 추격을 시작했다면 공산당도 뿌리뽑히기 일보 직전인 상태에서 일대 반전이 일어난다.
그 이후 쌍방간의 적대행위를 중단하기로 구두로 합의하고, 1937년 일본이 침공을 감행하면서 공산당이 국민당에 복종한다는 조건으로 본격적인 합작에 들어갔다. 물론 공산당은 국민당에 형식적인 충성을 맹세했으나, 이를 씹고 대대적인 세력 확대에 돌입했다.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양측은 국공내전에 돌입했고, 결국 국민당은 1949년 대륙을 잃고 타이완으로 옮겨갔다. 이 모든 것이 국공합작의 결과.
4 제3차 국공합작(?)
공식적인 용어는 아니고, 2005년 이후 중국 국민당과 대륙 공산정권 사이의 관계 개선, 협조 관계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다.
본격적인 계기는 2005년 4월말 롄잔(連戰) 당시 국민당 명예주석이 국공내전 이후 국민당 당수로는 처음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후진타오 당시 국가주석(공산당 총서기 겸임)과 회동하고, 56년만에 국공 양측의 적대관계가 종식되었음을 공식 선언한 것을 기점으로 한다. 당시 국민당은 1년 전 총통선거에서 대만 분리독립을 지지하는 민진당의 천수이볜 총통에게 패배한 바 있었고,[1]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회복할 계기를 모색하고 있었다. 중국 공산정부 역시 분리독립을 공공연히 추구하던 천수이볜 당시 천수이볜 총통과 민진당이 눈에 가시였고, 2005년 3월에는 "비평화적 수단(즉, 군사적 수단 포함)을 통한 대만 통일 가능성"을 명시한 <반분열국가법>을 제정하기까지 했다.
결국 군벌(제1차), 일본(제2차)에 이어 새로운 공동의 적수(대만 독립진영)의 등장으로 국공 양측이 56년만에 다시 합작을 모색하게 된 셈이었다. 국민당은 민진당을 누르고 정권을 탈환하기 위해, 공산당은 대만의 분리독립을 막기 위해. 이후 2008년 마잉주의 총통 당선으로 국민당이 재집권한 후, 양안간의 우편-왕래-무역을 전면 개방하는 대삼통(通三通)이 성사되고[2], 2010년에는 양안간 자유무역협정에 해당하는 ECFA 체결로 이어졌다. 아울러 국민당 주석이 대륙 정부 수뇌부와 일종의 영수회담을 개최하는 일도 늘어났다. 이는 마잉주 총통이 "국민당 주석이 아닌 중화민국 총통 자격을 인정받아야만 중국과의 정상회담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견지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2015년 5월 회동한 주리룬 중국 국민당 주석(왼쪽)과 시진핑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오른쪽). 가장 최근에 열린 국공 수뇌부회담이다. 하지만 2015년 현재 들어서는 마잉주 총통과 국민당이 주도하는 대중국 화해, 협력 정책이 도리어 중국에 대한 종속도를 높이고, 타이완의 자주성을 침해한다는 비판이 고조되어 국민당의 입지를 좁히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대만 내부의 여론은 2014년 말 홍콩 민주화 시위에서 드러난 중화인민공화국의 자기 중심적 일국양제 강요, 지방선거에서 국민당의 대패로 입증된 바 있다. 다만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미 적대관계 종식을 선언한 국공 양측의 공식적, 비공식적 협력 체제 자체가 무너지는 가능성은 당분간 희박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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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양안 정상의 악수
2015년 11월 7일 마잉주 중화민국 총통과 시진핑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 간에 회담이 진행되었다.기사 시진핑의 싱가포르 공식 방문 일정에 맞춰, 리셴룽 싱가포르 수상이 시진핑과의 만찬에 마잉주 총통을 초청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일단 '중화민국 총통'과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이라는 직함 대신 서로 '선생'으로 호칭했지만, 국공내전 이후 66년만의 양안 정상간 만남이라는 점에서 세계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막내가 고립된 큰형과 힘센 둘째 형을 만나게 하고 자기는 쏙 빠졌다.
5 인터넷에서의 국공합작(…)
어떤 이슈나 사건에 대해, 좌파성향 네티즌과 우파성향 네티즌이 한 목소리를 내거나 공동행동을 하는 상황을 가리키기도 한다.
예) 여성부의 병크에 대항하는 경우, 올림픽, 한일전
좌파와 우파를 대표하는 두 논객이 사이좋게 올림픽 선수들을 응원하는 훈훈한 광경.
사실 우리나라 같으면 민족 유일당 운동이나 좌우합작운동이 더 적합한 드립이겠지만, 단어가 길어서 그런지 아니면 상대적으로 덜 유명해서 그런지 국공합작 드립이 더 많이 쓰인다. 비슷한 표현인 위 아 더 월드 항목도 같이 참조하자.
6 기타
중국근현대사에서 XX합작은 국공합작이 유명하지만 사실 그외에도 합작이 많다. 1927년 우한 국민정부와 난징 국민정부가 합친 영한합작, 1930년대 후한민과 장제스의 장호합작, 1932년 장제스와 왕징웨이의 장왕합작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