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문포 해전

이순신의 전투 목록
제2차 당항포 해전
(1594년 3월 4일)
장문포 해전
(1594년 9월 29일)
영등포 해전
(1594년 10월 1일)
부산포 전투
(1597년 2월 10일)

1 소개

임진왜란 기간에 이순신이 9차례 출전해 총 17회에 걸쳐 벌인 크고 작은 해전 가운데서 가장 성과가 작았던 해전이다. 1594년(선조 27) 9월 29일부터 10월 4일까지 행한 수륙 합동작전으로, 3회의 전투가 벌어졌다. 제1차 장문포해전, 영등포(永登浦)해전, 제2차 장문포해전으로 세분하기도 한다.

2 전투 전개

2.1 전투 개시(10월 1일)

아군 함선 50여 척, 일본 수군 함선 117척이 서로 대치하였다. 10월 1일 조선 수군은 새벽에 거제도 장문포 앞바다에 머물다 영등포로 들어가 왜군에게 싸움을 걸었다. 그러나 왜군은 바닷가에 배를 대놓은 채 항전하지 않았다. 해질 무렵 장문포 앞바다로 돌아와 뭍에 배를 매려 할 즈음, 적의 포격을 맞아 배에 불이 붙었으나, 번지기 전에 진화하였다.

2.2 소강 상태(10월 2일 ~ 3일)

이후 10월 3일까지 왜군이 항전하지 않는 바람에 소강 상태가 지속되었다.

2.3 수륙양면작전(10월 4일)

10월 4일에는 의병장 곽재우·김덕령과 함께 수륙 합동작전을 전개하기로 하고, 먼저 군사 수백 명을 뭍으로 올려 보내 싸움을 걸었다. 이어 저녁 무렵 수륙 합동작전을 벌여 적을 혼란에 빠뜨린 뒤, 돌아와 칠천량에 진을 쳤다.

2.4 일본군 퇴각, 통제영 복귀(11월 17일 ~ 18일)

11월 17일 다시 장문포를 공격했으나, 일본군은 명나라와의 화친을 논의 중이니 싸울 수 없다는 팻말을 꽂은 채 도주하고 말았다. 이에 이순신은 11월 18일 수륙군을 해체하고 다음 날 한산도 통제영으로 돌아왔다.

3 전투 이후

총 6일 동안 치른 수륙 합동작전에서 아군은 왜선 2척을 격침시켰다. 아군 피해는 없었으나, 왜군이 항전하지 않아 전과는 미미하였다. 그러나 이 해전의 영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순신과 조선 수군은 이 해전으로 인해 일대 위기를 맞는다.

장문포해전은 원래 이순신이 계획한 것이 아니라, 경상우수사 원균이 도체찰사 겸 좌의정 윤두수에게 건의해 윤두수 자의로 행한 수륙 합동 작전이었다. 뒤에 영의정 류성룡 등에 의해 선조의 재가를 받아 작전 중지 명령이 내려지기는 했지만, 명령이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작전이 전개된 상태였다. 결국 수륙 합동작전은 성공하지 못하고, 2척의 적선만을 격침시키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장문포 해전의 원래 목적은 거제도 북단을 봉쇄하여 고립된 일본군을 섬멸하는 것이었으나, 적의 도주로 그들의 해상 출현을 막는 것에 그쳤다. 원균의 패전과 장문포 해전 실패 등이 한 원인이 되어 조정이 혼란에 빠졌고, 이 위에 조정에서는 북인과 서인 사이에 당쟁이 일어났다. 한편 일본군 요시라의 간첩행위[1]로 이순신 장군이 정부에 불복종하였다고 하여 처벌되었다. 이로써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의 휘하로 들어가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장문포해전은 임진왜란 기간에 전황과 조선군의 지휘체계가 흔들리게 하는 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4 일본 위키백과의 반달리즘

여담이지만 일본 위키에는 이 해전에 대하여 이순신이 후쿠시마 마사노리나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격퇴당했다고 왜곡하고 있는데, 애당초 조선 수군의 피해가 전무한 상태에서 왜군들이 극력 전투를 회피하여 교전다운 교전 한 번 없었는데 어떻게 격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는지가 의문이다. 교과서나 위키나 판타지소설. 레닌:내가 받을 비난을 적에계 돌려라. 도요토미 히데요시망령이 위키에서도 지랄이네

5 대중매체

징비록(드라마)에서 다루었다.

초반에 이순신을 막으라는 명령에 당황하는 가토와 막판에 가토를 조롱하는 고니시가 깨알같이 뀌는 방귀가 개그 포인트. 으핫핫핫핫핫핫핫(뿌~웅!) 그 직후에 뚜껑이 열릴대로 열린 가토의 샤우팅이 걸작. 우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으하핳핳하하핳으아아아아!!!!!!!!!!
  1. 허위 군사 정보로 조선 조정을 오판하도록 유도하여 이순신을 궁지에 빠지게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