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우

이름곽재우(郭再祐)
자(字)계수(季綬)
망우당(忘憂堂)
시호충익(忠翼)
생몰1552년 8월 28일 ~ 1617년 4월 10일
본관현풍(玄風)
출생지경상도 의령현(宜寧縣) 세간리(世干里).

뜻대로 싸우고, 뜻대로 살다간, 우리 역사에 드문 쾌남아[1]

1 소개

郭再祐. 조선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자는 계수(季綬), 호는 망우당(忘憂堂), 시호는 충익(忠翼). 조선의 토니 스타크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 하늘에서 내려온 붉은 옷의 장군)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하다. 신출귀몰한 전술 및 붉은옷의 장수같은 신기한 이미지덕분인지 임진왜란 의병장중에서도 대중적인 인지도가 가장 높은 편이다.

2 생애

인간 곽재우의 삶은 실록, 첩 이씨의 아버지 이로의 용사일기, 외손자 신시망이 지은 문집과 지인 배대유가 쓴 전기에 흩어져 있다.

2.1 집안내력

외조부 강응두는 진주 강씨의 일원으로 의령 세간리에서 누대에 걸쳐 살아온 부호로 김해 허씨, 의령 남씨, 의령 심씨, 의령 옥씨, 의령 여씨, 담영 전씨, 고성 이씨 등과 함께 의령 일대에 강력한 재지 기반을 갖고 있었다. 일찍이 의주목사, 황해감사등을 역임한 바 있는 아버지 곽월은 강씨와 혼인하면서 본래 살던 현풍현을 떠나 처가가 있는 세간리로 이주했다. 강씨가 무남독녀였기 때문에 그는 친정의 가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을 수 있었다. 곽월의 두번째 부인인 허씨 부인은 이황의 첫번째 부인 허씨와 4촌간으로 그녀의 아버지 허경은 막대한 토지와 노비를 소유한 의령 최고의 부호였다. 허씨 부인도 강씨와 마찬가지로 무남독녀라서 곽월의 재산은 더욱 불어났다.

이런 지방 유력가들과 혼맥으로 이어진데서 알 수 있듯이 곽재우의 집안 역시 지역에선 알아주는 명가였다. 현풍의 현풍곽씨는 고려때부터 현풍 지역에 뿌리내린 토호집안으로 고려때엔 현풍이 밀양부의 아래에 있었던 까닭에 밀양에서 가장 강한 토호집안인 밀양 박씨와 혼맥으로 이어져 위세를 단단히 했다. 현풍 곽씨 중시조 곽안방은 이시애의 난 평정에 공을 세워 적개원종공신이 되었고 이는 지방세력을 누르려 했던 새왕조 조선에서 현풍 곽씨가 굳건히 뿌리내리는 기반이 되었다. 곽안방의 아들 곽승화는 선산 김씨의 딸과 결혼했는데 이 선산 김씨는 바로 그 김종직의 가문이다. 곽승화 본인도 김종직의 제자이자 훗날 조광조의 스승이 되는 한훤당 김굉필과 절친해서 지역 유림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의 아들 곽위는 현감 벼슬을 지냈고 평산 신씨 신승준의 딸과 혼인했는데 그녀는 밀양 지역의 유종 송계 신계성의 고모였다. 곽위의 아들 곽지번은 처음으로 문과에 급제했고 양천허씨 허린의 딸과 혼인했는데 허린은 이 가문은 중앙에 기반을 둔 가문으로 장인 허린은 중종반정 핵심공신 박원종의 외사촌이었다. 곽지번의 둘째 아들이 곽재우의 아버지 곽월로 그는 문과에 급제해 관찰사까지 올라갔다. 이외 곽재우의 매부 허언심도 의령에서 알아주는 자산가였으며 사돈인 창녕 성씨 성천지, 성천유 집안 또한 고려때부터 창녕, 의령에 큰 부를 자랑했다.

2.2 왜란 이전

1552년 경상도 의령현 세간리에 있는 외갓집에서 태어났다. 친어머니 강씨는 3남 곽재우가 3살때 세상을 떠나고 어린 곽재우는 계모 허씨의 보살핌 아래 성장했다. 허씨는 자신이 낳은 세자녀(아들 둘, 딸 하나)는 물론 전처 소생의 네 자녀(아들 셋, 딸 하나)에게도 아낌없는 사랑을 쏟았고 곽재우는 이런 의붓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다고 한다.

곽재우는 10대 중반에 의령과 가까운 경남 산음(오늘날 산청군) 에 정착한 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그리고 16세때 창원과 단성에서 막강한 재지기반을 가진 상주김씨 집안 여식과 혼인했다. 부인 김씨는 만호 김행의 딸로 조식의 외손녀이기도 했으며 이 혼인 역시 조식의 주선으로 이뤄졌다고 한다. 역시 조식의 손녀와 혼인한 동강 김우옹과는 동서지간이 되었다. 덕분에 곽재우는 경상 우도 사대부들과 쉽게 연계할 수 있었다.

전기에 의하면 그는 19세때부터 무업(武業)에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곽재우가 유독 특별했던것은 아니며 당대 지방 사족 자제들의 시류에 따른 것이었다. 대과에 급제해 중앙에 나아가는 방법이 가장 좋지만 지방출신이 한양에 터잡은 쟁쟁한 집안들과 경쟁하는게 결코 쉬운일이 아닌 만큼 보다 기준선이 낮은 무과를 노리거나 군역을 통해 정병으로 복무하다 군관이 되는것이 출세의 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장인 김행이 무관 출신이어서 그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26세때 동지사가 된 아버지를 수행해 명에 다녀왔고 34세인 1585년 소과에 응시해 2등으로 합격했으나 합격자들의 답안에 문제가 있어 전체 파방이 되는 아픔을 겪었다. 선조를 비판해 노한 선조가 탈락시켰다는 말이 있으나 이는 신시망과 배대유의 곽재우 전기에서 정시 2등이라고 적은걸 대과로 착각하여 생긴 오류다. 광해군 일기에선 곽재우가 이때 본 과거가 진사시, 즉 소과임을 밝히고 있으며 이는 임진년 6월 실록기록에서 그의 직역이 유학(幼學, 소과 응시생 내지는 백수)이라고 밝힌것으로 교차검증 된다. 세상에 어느 할일없는 왕이 영남유생 소과보는 곳까지 와서 시험지를 하나하나 다 확인한단 말인가?

1586년 부친 곽월이 사망해 3년상을 치뤘고 이후 임진왜란 이전까지 의령에 눌러앉아 지냈다. 은거하며 지냈다는 야사도 있지만 그 역시 후손들이 지은 전기 기록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으로 광해군일기에선 농업경영에 힘써 매우 많은 재산을 모았다고 적고 있다. 임진년에 반협박으로 의병에 끌어들인 그의 매제 허언심도 상당히 부호였고 곽재우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조정에 그의 능력을 천거한 김성일과 그를 비판한 김수의 장계 모두 곽재우의 재산이 많았다고 언급해 광해군 일기의 기록을 뒷받침하고 있다.

또한 소과에 낙방하고 향교에 교생으로 등록되어 있지도 않아 군역이 나왔기에 세상일 잊고 초야에 묻히는건 불가능했다. 나이로 볼때 20년을 넘겼을 복무기간은 훗날의 의병활동에 보탬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3 의병활동

흔히 임란 최초의 의병장으로 알려져 있다.[2] 사실 의병장하면 가장 먼저 거론되는 유명세에 비해 의병활동 사항은 불분명한 부분이 상당히 많다. 김덕령처럼 아무런 공적 없이 이름만 높았기 때문은 아니고 공이 있으나 당사자가 기록을 남기는데 크게 신경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광해군 7년까지 살았던 사람이라 기록을 남길 여유는 충분했음에도 전투일지는 고사하고 말년에 회고록 하나 남기지 않았다.

임진왜란 의병연구에 곧잘 쓰이는 사료는 이탁영의 정만록, 오희문의 쇄미록, 정경운의 고대일록, 이로의 용사일기가 있지만 그 중에 곽재우의 의병활동을 상세하게 기록한 사료는 없다. 이탁영은 김수를 수행한 아전이었기 때문에 김수가 윤석각, 이광과 삼도근왕군을 편성해 북상하기 위해 경상도를 떠난 5월 16일부터 용인 전투에서 패하고 6월 17일 이전까지 경상도 지역에 대한 정보는 소략한데 이 시기가 하필 곽재우 의병부대가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한때였다. 용사일기의 저자 이로는 곽재우의 첩장인으로 가까운 사이이긴 하나 개전 당시 한양에 올라가 있었고 이후론 초유사 김성일을 수행했기에 용사일기는 김성일의 행보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곽재우의 행적에 대해서는 정암진 전투를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키 바로 다음에 벌어진 일로 착각하는 등의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쇄미록과 고대일록은 곽재우에 대해 전해들은 말에 의거한 단편적인 서술만을 남겼다. 곽재우에 대한 기록이 가장 풍부한 사료는 조경남의 난중잡록이다. 관청서기로서 각종 공문서를 손쉽게 열람할 수 있었던 조경남은 자신이 보고 듣고 겪은 모든 일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출처를 남겼는데 그 중에 곽재우의 의병활동에 대한 내용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곽재우의 거병 일자는 4월 20일설(선조실록 권 32, 25년 11월 25일), 4월 22일설(난중잡록), 4월 24일설(선조실록 권 27, 25년 6월 28일), 4월 27일설(이긍익, 연려실기술 권 16, 선조조 고사본말 임진의병 곽재우)로 나뉘는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22일설을 지지하고 있다. 그 이유는 곽재우가 경상감사 김수와의 갈등을 조정에 해명하기 위해 올린 자명소(自明疏)에서 자신의 거병 일자를 22일로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곽재우는 심대승, 권란 등 평소 알고지내던 장정 10여명과 그들이 거느린 노비들을 합쳐 50여명 정도의 조촐한 병력으로 의병장으로의 첫발을 내딛었다. 그가 거병한 22일까진 왜군의 손길이 의령에 닿지 않았다. 경상좌도 지역을 지난 왜군은 신속하게 한양을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다.

왜군이 경상 우도로 넘어오기 시작한 것은 탄금대 전투 하루전인 4월 27부터였다. 창원에 잔류하고 있던 소규모 왜군이 피난민들을 쫒아 의령 속현인 신반현으로 들어와 관아와 성문을 불사른후 삼가와 합천을 지나 고령쪽으로 사라졌다.(난중잡록 임진년 4월 27일조.) 곽재우는 비어있던 초계와 신반현의 관청 창고를 뒤져 무기와 군량을 확보하고 강에 버려져 있던 세곡선의 세곡을 가져다 군량에 보태었다. 물자를 확보한 곽재우는 적은 병력이나마 이끌고 왜군과 교전에 나섰다.

곽재우 의병대의 전투는 임진년 5월 초부터 확인된다. 초유사 김성일에게 통유문을 받은 직후 보낸 답신에서 5월 초 4일에 부장 4명과 함께 낙동강 하류에서 왜선 3척을 공격했고 초6일에는 13인을 거느리고 같은 장소를 거슬러 올라오는 왜선 11척을 공격해 쫒아내었다고 알렸기 때문이다.(쇄미록 권1, 임진남행일기, 임진 5월) 의령에 접경해 있는 낙동강 지류는 기강(岐江)이라 불리는데 낙동강과 남강의 합류 지점이었다. 당시 왜군 주력부대는 한양으로 진격한 상태였으니 손쉬운 승리에 안심하고 별다른 경계없이 움직이던 왜군 수송선을 공격해 물러가게 만든것으로 추정된다. 난중잡록에선 곽재우 의병대의 분전으로 의령, 삼가, 합천 등지에서 노략질을 일삼던 왜군 소부대가 이동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적고 있다.(임진년 5월 4일조) 즉, 곽재우는 전쟁 발발후 불과 열흘도 되지 않아 의병을 일으키고 소규모 의병대를 이끌고 왜군의 수송선을 공격해 적은 수였지만 경상우도를 약탈하던 왜군들이 물러나게 만들었다. 물론 이는 왜군이 본격적으로 전라도 공략을 위해 경상우도로 향하기 전이기에 가능했다. 임진년 6월 이전까지 경상우도의 왜군은 작은 무리를 이뤄 노략질하는 정도에 머물렀다.

문제는 이 시점까지 곽재우 의병대는 국가의 지시도, 관의 요청도 없이 사적으로 군사를 일으킨 상황에서 관청 창고의 물자와 세곡미를 전용했다는 점으로, 도적 내지는 전란을 틈탄 반란세력으로 의심받을 소지가 있었다. 어느 정도 폐단을 감수하고 수령고소금지법까지 만들어 적용시킨 조선 정부는 사족들이 중앙의 허락도 없이 자유롭게 무장하도록 내버려 둘 정도로 관대한 집단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곽재우와 같은 지역에서 정대성이란 사람이 의병을 모집한답시고 장정들을 모아 도적질을 하다 합천군수 전현룡에게 잡혀 참수되는 일이 있었다. 전현룡은 관물남취사건을 일으킨 곽재우도 의심해 경상우병사 조대곤에게 보고했고 조대곤은 곽재우를 도적으로 오인하고 체포령을 내렸다. 후술할 이유로 전쟁 전부터 지역사족층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경상감사 김수 역시 곽재우의 행적이 미심쩍었는지 구명을 해주지 않아 궁지에 몰린 곽재우는 거느린 병사들을 해산시키고 지리산에 은둔하려 했다.

그렇게 도망자가 되어 사라질 뻔한 곽재우를 구원해준 것은 초유사 김성일이었다. 이황의 제자로 영남 민심에 정통하며 인적 네트워크도 충실했던 그는 5월 4일 함양에 도착해 조종도와 이로에게 곽재우의 일을 전해들었다. 김성일은 곽재우에게 죄가 없음을 짐작하고 도민들에게 초유문을 작성해 고시하고 곽재우에겐 공문으로 통유문을 발송했다. 이는 곽재우 의병대의 활동을 국가에서 인정한 조치로서 곽재우 의병대는 명실공히 의로 일어난 군대로 인정받았고, 합법적으로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곽재우의 문집 망우집에선 5월 11일에 통유문을 접수했다고 적고 있다. 곽재우는 5월 중순 단성에서 김성일을 만나 진주까지 동행한 후 의병을 재건했다.

그 유명한 정암진 전투[3]는 곽재우 의병대가 간신히 재정비를 마친 시점에서 벌어졌다.

01_01_06_map.jpg

곽재우의 전과 중 가장 유명한게 정암진 전투지만 정암진 전투의 정확한 날짜와 전투내용은 불분명한 점이 있다. 용사일기에는 정암진에 이른 왜군이 의령쪽으로 더 나아가지 못했다는 짧은 기록만 존재한다. 선조실록도 마찬가지이며(임진년 6월 28일 기사, 수정실록 임진년 6월 1일 기사) 쇄미록에는 곽재우가 정암에 진을 치니 왜적이 김해로 돌아갔다는 전투를 했다는 것인지 않았다는 것인지 분간하기 힘든 애매한 기록만 전한다. 정암진 전투를 기록한 사료 중 가장 접하기 쉬운 사료는 난중잡록으로 5월 26일 의령의 정진(鼎津)으로 쇄도하는 왜군을 곽재우가 의병을 매복시켜 격퇴했다고 짤막하게 기록되어 있다. 의성출신 의병장 신흘이 남긴 난적휘찬(亂蹟彙撰)에선 보다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전라순검사라고 칭하는 왜적이 정암진을 건너야겠다는 격문을 돌렸는데, 그 격문에는 맞이하는 자는 안전하고 항거하는 자는 죽으리라고 씌여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어쩔줄 모르며 항간의 의견이 통일되지 않았다. 이에 곽재우가 분연히 크게 꾸짖기를 "감히 말하노니, 적을 맞이하는 자는 죽으리라"하고 적에게 보내는 격서를 쓰기를, 천자께서 네 놈들이 우리나라를 침범하려 한다는 사실을 들으시고 미리 홍의장군을 보내어 정예병을 거느리고 도중에 습격하도록 하셨노라 하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한 사람에게 붉은옷으로 갈아 입혀 산 위에서 내달리게 하고, 또 다른 한 사람에게 같은 색깔의 옷을 입혀 말을 타고 산 위로 치달리도록 하여, 서로 바라보이는 땅을 달리게 하였더니 능히 산골짜기를 날아 넘는 듯 했다. 저쪽에서 사라지면 이쪽에서 나타나고, 이쪽에서 사라지면 저쪽에서 나타나는 왕래 동작이 깜짝할 사이인지라, 왜적이 몹시 이상하게 여기다가 마침내 놀라 흩어져 강을 건너지 못했다.

이탁영의 정만록에서도 이와 유사하면서 보다 세밀한 전황을 기록하고 있다. 정만록에 의하면 곽재우는 10여명의 장사를 뽑아 자신과 똑같이 붉은옷을 입히고 백마를 태워 매복시킨 다음 스스로 미끼가 되어 왜군을 유인했다. 10여리 쯤 왜군을 유인했을때 화살로 신호를 보내자 곽재우와 같은 복장을 한 10여명의 장사가 불시에 튀어나왔다. 하우스 파티 프로토콜?! 놀란 왜군이 혼란에 빠지자 숲에 숨겨두었던 강노를 쏘아 왜군을 공격했다. 왜군은 강기슭으로 달아났는데 이는 곽재우가 의도한 것으로 그는 물이 잔잔한 곳에 장애물을 설치해 놓았다. 곽재우는 장애물에 막힌 왜군을 급습해 많은 전과를 올렸다.(水爲不流 其設機應賊 以小擊中多如此)

난적휘찬과 정만록의 기록은 공통적으로 정암진에서 붉은 옷을 이용한 기만술을 사용해 왜군을 혼란시켰다고 적고 있다. 숫자가 적은 곽재우 의병대는 임진왜란기 대부분의 의병대가 보여준 매복 후 궁시공격으로 교전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여기에 곽재우 특유의 기만전술이 더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정암진 전투 내용은 곽재우 사후 편찬된 문집인 망우선생문집에 포함된 용사별록과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홍의장군전에 서술된 기록이다. 망우선생문집이 1636년(인조 14년) 둘째 사위 성이도 주도로 편찬되었고 조카 곽유, 곽륭이 좀 더 양을 늘려 재판한게 1689년(숙종 15년)인데 이때가 곽재우가 죽은지 73년 후다. 사건발생 연대와 시간 차이가 너무 길고 곽재우가 소과 파방후 은둔해서 살았다고 적고, 곽재우와 김성일같은 남인계 관료들의 관계를 축소하는가 하면, 정암진 전투가 첫 전투인걸로 적는 등 오류가 적지 않다. 청장관전서는 그보다 더 지난 1795년(정조 9년)에 출간되었다. 즉, 우리가 알고있는 왜군이 남긴 표식을 바꿔서 혼란시키고 기습했다는 이야기는 후대의 윤색일 가능성도 있다.

초유사 김성일은 운봉현감에게 보낸 왜군동향 기밀문서에서 5월 22일 김해의 왜군이 전라감사, 어사, 도사, 찰방을 자처하며 전라도로 간다는 통문을 함안, 의령, 삼가, 단성, 산음, 함양 등 경상우도 여러 고을과 남원, 전주같은 전남 일대에 보내고 있으며 이들이 이미 함안, 의령, 정진에 도달했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전했다.(난중잡록 5월 20일조) 이 기록을 신뢰한다면 정암진 전투는 5월 22일 이후에 벌어졌을 것이다. 아무튼 정암진을 건너 삼가, 함양을 지나 전라도로 진출하려는 시도가 저지되자 왜군은 북상해서 다른 길을 찾았다. 왜군을 인솔한 안고쿠지 에케이는 전라감사의 행사를 자처하며 영산과 창녕을 거쳐 기강을 건너려 했다. 신속히 이동한 곽재우군은 산속에 숨어있던 백성들을 불러내 타이르고 창고의 곡식을 풀며 방어태세를 다잡았다.(난중잡록 임진년 6월 5일조) 이에 안고쿠지 군은 다시 현풍의 쌍산역(雙山驛, 현풍 북쪽 15리)을 거쳐 뱃길로 경북 성주로 향했으나 거기까지 추격해온 곽재우군과 소규모 교전을 벌이고 퇴각했다.

곽재우가 왜장 안국사와 강을 격하고 서로 맞서자 왜적은 강을 건너지 못하여 강을 따라 위로 올라갔다. 재우 역시 서로 바라보며 쫒아 올라가 성주 안억역로에 이르자 정병을 거느리고 가까이 나가서 교전했으나 적은 많고 아군은 적어, 겨우 몇 급의 목만을 얻고서는 물러났다. -난중잡록 임진년 6월 19일조-

난중잡록에선 쌍산역에서 안고쿠지 군을 태운 배가 18척이었다고 적고 있는데 이 수치가 정확하다면 안고쿠지 군은 많이 잡아도 2천 미만이다. 물론 계사년에 세가 크게 불어난 상황에서도 2천에 불과했던 곽재우 의병부대에 비하면 월등히 많은 숫자였을 것이다. 곽재우와 안고쿠지 에케이 군대의 전투는 정암진 전투 하나만 알려져 있지만 실제론 5월말부터 6월초까지 낙동강 지류를 중심으로 벌어진 경사 우도 방어전으로 정암진 전투 외에 최소 한번의 전투가 더있었다. 이로써 경상우도로 통해 전라도로 진입하려는 왜군의 시도는 일단 좌절되었다. 경상 우도의 저항이 만만치 않다고 여긴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방향을 바꿔 무주, 금산 방면에서 전주로 내려가려 했으나 이치, 웅치, 금산 전투에서 전라도 의병과 관군에게 저지당했다.

안고쿠지 군을 물리친 다음에도 곽재우 의병부대는 의령, 삼가 지역에 머무르며 낙동강 유역에 출몰하는 왜선과 왜군을 공격했다. 이중 구체적으로 전적이 전해지는 것은 난중잡록 6월 19일조의 기록이다.

낙동강의 적선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려오다 2척은 침몰하고 한 척은 노를 풀어 두고 내려갔다. 곽재우가 전선을 포획하여 27급을 목 베었다. 배에 실려 있는 것이 모두 궁중의 보물이었으며, 태조가 신었던 신발도 또한 있어 곧 이것을 초유사에게 보내었다.

난중잡록에선 19일에 실었는데 난중잡록 7월 3일에 김성일이 곽재우와 김면에 되찾은 궁중유물을 남원에 옮겨 보관토록한 기사가 나오는것을 보아 실제론 6월말이었을 수도 있다. 위 전투는 신흘의 난적휘찬에서도 확인되는데 난적휘찬은 6월 18일조에 기록했다.

성공적으로 왜적을 방어한 곽재우는 이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고 용인전투 패배로 위신이 떨어져있던 김수를 강하게 공격했다가 하마터면 위험인물로 조정에 찍힐 뻔 했다. 조정과 곽재우 사이의 오해를 풀어주고 우도 감사가 된 김성일은 삼가현의 윤탁 의병대를 곽재우에게 배속시켜 곽재우의 군세를 크게 불려주었다. 곽재우는 이 병력을 의령과 삼가에 나눠 주둔시키고 왜군의 침입에 대비했다.

임진년 7월 1일, 김수에게 현풍, 창녕에 있던 왜군의 움직임이 심상찮으며 대규모의 왜 선단이 낙동강 하구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온다.(정만록 7월 1일) 이 첩보에 등장한 왜선 70여척은 의령에 상륙하려 했으나 곽재우 부대의 공격에 일단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했다.(고대일록 7월 2,3일조)

왜군의 도하시도를 저지한 곽재우는 왜군에 항복하여 길잡이 노릇을 하던 공휘겸을 매복작전으로 생포하여 처형했다.(수정실록 7월 1일) 수정실록에선 간략하게 복병으로 사로잡았다고 묘사하고 있는데 난적휘찬에선 보다 자세한 전말이 전해진다. 영산의 영반이었던 공휘겸은 왜란이 발발하자 한양으로간 다음 집에 편지를보내 경주부윤이나 밀양부사 정도는 될 수 있을거라며 국왕에 대해 불경한 발언을 쏟아내었다. 왜군의 침입으로 혼란한 틈에 역모를 꾀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소식을 접한 곽재우는 공휘겸이 영산에 돌아온 걸 기회로 삼아 그를 죽이려 했다, 공휘겸과 동향사람으로 친분이 있던 훈련봉사 신초와 접촉한 곽재우는 그에게 공휘겸을 끌어오게 했다. 사람을 모았으니 같이 모의를 하자는 신초의 말에 넘어간 공휘겸은 순순히 그를 따라 나왔다 숨어있던 곽재우의 부하들에게 사로잡혔다. 곽재우는 그의 팔 다리 하나씩을 자른 다음 참수했다.

임진년 7월 이후 곽재우는 왜군이 점령한 창녕, 현풍, 영산 3개현 탈환작전에 참여한다. 고령, 합천, 초계 지역 의병들까지 소집해 진행된 이 작전은 조경남의 난중잡록 기사와 김성일의 장계, 고대일록, 정만록을 모두 종합해서 살펴볼 필요성이 있다.

난중잡록 7월 9일조에서 전하는 현풍. 창녕, 영산 탈환전은 다음과 같다. 곽재우가 정예부대 수백명을 거느리고 현풍에 주둔중인 적을 유인하려 했으나 적이 반응하지 않자 밤중에 산에 산에 올라 가지가 5개 달린 횃불을 들어 수가 많은것처럼 속이고 함성과 포성으로 왜군을 심리적으로 공격하자 이튿날 왜군이 달아났다. 5일 뒤 창녕의 왜군이 그 소문을 듣고 역시 달아났다. 이후 김성일에게 보고하고 영산 공략에 나서니 윤탁이 지휘한 합천, 삼가지역 의병들도 지원왔다. 적진과 마주보는 산 봉우리 위에 진을 치고 대치했는데 왜군 기병 100여명과 교전을 벌이기도 했으나 역시 다음날 조선군이 만만치 않음을 본 왜군이 퇴각하면서 영산까지 수복했다.

그런데 김성일이 8월에 조정에 올린 장계에 의하면 창녕은 탈환되었고 현풍과 영산은 여전히 왜군의 수중에 있었고 초계, 합천, 고령의 병력으로 현풍의 적을 공격하고 창녕과 의령 병력으로 영산을 공격하는 탈환 작전이 논의중에 있었다. 곽재우는 윤탁, 전 목사 오운과 함께 창녕, 영산, 현풍 및 낙동강을 왕래하는 왜군을 감시하고 있었다. 이 장계는 난중잡록 8월 4일조에 실려있다. 조경남은 왜군의 이동이 일정치 않아 그런것이라고 논평하고 있으나 정만록 7월 18일 기사에 창녕, 영산의 왜군이 의령, 초계 방면으로 침입하려 한다는 대목이 있어 최소한 7월까진 영산과 현풍, 창녕이 왜군의 점령하에 있었고 이후 탈환작전이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고대일록 9월 16일자 기사에 곽재우가 의령과 창녕 군사를 이끌고 영산의 왜적을 토벌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김성일이 장계에서 밝힌 의령과 창녕 병력으로 영산을 탈환한다는 작전계획과 일치한다. 이를 보아 영산 탈한이 9월 중순에 이뤄졌으며 비슷한 시기 현풍 탈환도 이뤄진것을 짐직할 수 있다. 즉, 난중잡록 기사는 조선군의 작전 시기를 두달 이상 당겨지고 순서도 현풍-창녕-영산 순으로 바뀐채 잘못 기록되었음을 알 수 있다.

10월에는 진주대첩에 원군으로 참여했다. 왜군이 진주를 노린다는 첩보를 입수한 김성일은 곽재우, 윤탁, 초계의 정언충, 합천의 김준민, 고성의 김준민, 전라의병장 최경회 등에게 급히 진주를 구원하란 영을 내렸다. 이때 지시를 받은 장수들의 행동을 보면 윤탁과 정운충은 각각 2백, 1백의 병사를 거느리고 마현(馬峴, 진주시 옥봉동)에서 왜군과 교전하다 군사를 모두 잃고 돌아왔다. 김준민은 결사대 80명을 꾸려 단계현(丹溪縣 산청 일대)에서 관사에 불을 지르고 약탈하던 왜군을 급습해 공을 세웠다. 곽재우는 이들과 달리 직접 교전을 회피하고 심대승에게 산에 올라 횃불을 밝히고 포성을 울리며 전라의병 1만과 홍의장군이 내일 도착해 왜군과 싸울것이라 소리치는 심리전을 벌였다.(선조실록 임진년 12월 5일)

곽재우가 지속적으로 공을 세우자 조정은 관직을 내려 치하하였다. 1592년 6월 29일 유곡찰방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8월 16일, 비변사에서 큰 전공을 세우고도 이를 내세우지 않은 점을 고려해 5품 벼슬을 제수할 것을 건의함에 따라 형조정랑에 임명되었다. 10월 23일에는 김면이 당상관에 제수되었으니 곽재우도 올리는게 좋겠다는 선조의 뜻에 의해 정3품 통정대부에 제수되었다. 12월 9일 비변사에선 곽재우 의병대를 불러 올려 근왕임무에 투입하자는 건의를 내기도 했다. 이 건의는 실제 시행되진 않았으나 계사년 1월 기준으로 곽재우 의병대가 2천명이었던(선조실록 계사년 1월 11일) 곽재우 부대에 조정이 거는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준다.[4]

1593년 4월 15일 성주목사에 임명된 곽재우는 함안, 의령 등지에서 활동하는 왜군의 동태를 파악해 보고하고(계사년 7월 12일) 도체찰사 류성룡의 지시를 받아 정암진을 방어했다.(계사년 9월 2일) 선조 역시 신뢰를 내비치며 9월 8일 목사로만 두지 말고 조방장을 겸임케 하란 지시를 내렸다. 곽재우는 전쟁이 장기화 될 기미를 보였던 1593년 말부터는 경상도 지역의 산성 수축과 정비에 많은 공을 들였다. 임진왜란 초창기 전면패주의 원인 중 하나가 평지의 읍성 위주로 짜여진 방어계획이었는데 곽재우는 전쟁초기부터 산성위주의 방어전략을 구상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계사년 12월 19일 기사 참조) 비변사에서도 그의 주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삼가, 의령, 단성, 고령 등 낙동강 일대의 주요 산성들을 수축, 관리하는 일을 총괄케 하였다.(계사년 12월 21일) 허가를 받은 곽재우는 경상도 각 지역을 순시하며 가야산의 용기산성, 지리산의 귀성산성 같은 방어거점으로 적합한 산성들을 보고하고 수축을 전담했다(갑오년 2월 27일) 휴전협상 기간인 1594년 10월 윤두수의 강력한 주장으로 시행된 장문포 해전에 참가, 김덕령과 함께 육군을 맡았으나 적이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처음부터 무리수가 많은 작전이었던지라 실패했다. 그 해 12월에는 진주목사에 임명되었다. 이때도 성주 목사 시절과 마찬가지로 조방장을 겸한채 경상우도 군무와 산성수축 임무를 계속 담당했다.

1594년까지 열성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던 곽재우는 1595년 말 돌연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사직 기사나 사유는 실록에 전해지지 않으나 1595년 12월 5일 기사에서 이덕형이 강화협상에 불만을 가져 떠났다고 언급한다. 조정에선 그를 재등용하려 했으나 그는 정유년까지 거의 2년을 초야에 묻혀서 지냈다. 도체찰사 이원익이 격서를 보내 2~3 차례 부른바 있었으나 병을 핑계로 응하지 않았다.(1596년 3월 1일 기사) 이로인해 선조의 곽재우에 대한 신뢰도 흔들리기 시작한다. 왕명의 대행자인 도체찰사의 지시에 불응한 자를 등용할 수는 없다는 논리였다. 설사가상 이몽학의 난에 김덕령, 홍계남과 함께 이름이 거론되어 형장에 끌려갈 위기를 맞았으나 의심은 많아도 바보는 아니었던 선조는 김덕령을 제외하곤 대부분 불문에 붙였다.

1596년 11월 비변사에서 다시 한번 곽재우의 재등용을 건의했고 이때는 선조도 반대하지 않아 경상좌도 방어사에 제수되었고 정유재란때 가토 기요마사의 공격을 막아 화왕산성을 수비했다.[5] 이때 서기로 인연을 맺은 이가 뒷날 역모에서 그를 구해주고 그의 전기를 쓴 배대유였다. 그러나 재출사 기간은 1년이 되지 않았다. 1597년 8월 계모 허씨가 사망하자 사직하고 계모의 묘가 있는 울진에 머물렀다. 조정이 수차례 기복명령을 내렸으나 모두 사양하고 왜란이 끝날때까지 재야에 머물렀다.

2.4 만년 - 강직한 재야 지식인

정유재란이 끝난 이후 곽재우는 1599년 2월 진주목사, 9월에 경상좌병사에 임명되어 영남 지역의 군무를 총괄하게 되었다. 10월 임지에 부임한 곽재우는 12월 장계를 올려 영남 방어대책을 건의했는데, 핵심은 과거에도 주장했던 산성을 거점으로 한 방어였다. 그러나 불과 4개월 만인 1600년 2월 한 장의 장계를 선조에게 올려 당대 정치와 군정의 문제점을 지적한 후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이 장계에서 그는 엄청난 피해를 복구하고 전후 복구사업에 매진해야 할 시점에서 조정 신하들은 붕당을 나누어 서로 대립하고 배척하기만 하며 국내에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일본과 화의가 필요함에도 일본과의 화의를 반대하고 사신을 구금해 일본을 자극하는 외교적 미숙함, 이원익 같은 경륜을 갖춘 명신을 뚜렷한 이유도 없이 정승직에서 몰아내는 인사, 수군만 중시하고 육군을 등한시해 산성 수축과 방어체계 수립에 소홀한 군사정책 등 국정 전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쏟아내었다.(선조실록 1600년 2월 20일)

일본과의 화의를 주장하는 등 장계내용도 큰 문제였지만 왕명을 기다리지도 않고 자기 마음대로 낙향해 버린게 더 큰 문제였다. 곽재우가 왕명은 기다리지도 않고 낙향해 버렸다는 경상감사의 보고를 들은 관료들은 당장 곽재우를 체포해 추국할 것을 주장했다. 자신의 권위가 실추되었다고 생각한 선조의 분노는 대단했다. 즉시 형별이 논의되었고 의금부에선 대명률에 따라 장 100대에 변방으로 보낸 군역을 지게한다는 조항이 있음을 보고하자 선조는 그 정도론 안된다며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이후 곽재우가 받은 형벌은 선조실록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곽재우의 문집인 망우선생문집에 수록된 연보(年譜)에는 전라도 영암으로 유배되었다가 1602년에 풀려났다. 이 유배는 곽재우 인생의 큰 전기가 되었는데 이때부터 도가의 영향을 받아 벽곡찬송(곡식을 끊고 솔잎을 먹으며 수행함)을 시작했다.

1600년 6월 ,1601년 3월 곽재우를 다시 서용하는 방안이 논의되었으나 선조는 단호히 반대했다. 이는 공신책봉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는데 공신도감에서 경상우도를 보전한 공을 들어 곽재우를 공신으로 책봉하자 건의하자 조선군의 공적 자체를 폄하하고 의병은 아예 없었던 사람 취급해 거부의사를 밝혔다.[6] 그렇다고 곽재우의 공적을 무시할 수 없었던 공신도감은 1603년 4월 공신에 책봉될 만한 장수 26명을 선발해 보고할때 곽재우의 이름을 넣어 두었다. 그러나 결국 선무공신에는 들지 못했다. 직접적으로 묘사되진 않지만 신하들이 이렇게 까지 하는데 들어가지 못했다면 누구 탓이겠는가?

유배에서 풀려나고 2년이 지난 1604년 곽재우는 다시 관직에 나아갔다. 찰리사에 임명되어 원수 지휘하에 경상도 지역의 방어와 군사훈련 등의 군무를 담당하였는데 이때도 변함없이 산성의 수축과 관리에 집중했다. 선조실록 1604년 4월 14일 장계에서 그는 안동의 천생산성은 그 형세가 험난한 곳으로 전에 이시언이 수축공사를 시작하여 대강 수선을 마쳐 놓았으므로 자신이 직접 가서 형세를 살펴보고 미진한 부분을 보수하여 수축을 마무리 짓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를 곱지 않게 본 대북의 비방을 받아 1년을 채우지 않고 친가의 고향 현풍에 낙향해 망우정을 짓고 벽곡을 하며 지냈다. 곽재우의 벽곡에 대해선 조정에서도 비판이 일었다. 1607년 5월 4일 사헌부에선 곽재우를 탄핵하여 벽곡은 도가의 방술로서 유교적 교화에 장애가 되니 곽재우를 서용하지 말고 선비들 중에 벽곡을 따라하는 자를 적발하여 과거를 보지 못하게 할것을 청했다. 곽재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선조지만 벽곡에 대해선 그런걸로 죄를 주겠냐며 각하하고 이후 재론하지 말게 했다. 남명 조식의 제자인 사람이 도가의 수련방법에 심취한걸 두고 이래저래 말이 나왔는데 윤근수는 김덕령이 누명을 쓰고 죽은것을 보고 자신에게도 화가 미칠까 두려워 세상에서 도피하기 위한 방법이라 해석했다.(광해군일기 즉위년 8월 13일)[7] 그러나 김덕령과 곽재우의 교분이란곤 1594년 장문포 해전에 함께 참전했던 것 뿐이고 김덕령이 옥사한 후에도 3번이나 더 관직에 나갔다는 점을 고려하면 도가쪽에 관심이 생겼다고 보는게 더 설득력있다.

조식의 제자로 정인홍같은 북인계 인사들과 학맥은 같았지만 정작 정치적 지향이나 관직생활은 남인에 가까웠다. 창의 초기에 초유사 김성일에게 큰 은혜를 입었고 1593~6년엔 영의정 류성룡, 1597~8년엔 체찰사 이원익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이들 외에 그를 추천한 김응남, 정구, 김우옹(이쪽은 동서지간), 이덕형, 이정형은 모두 남인계 중신이었다. 서인과도 사이가 나쁘지 않아 윤두수-윤근수 형제도 그를 높이 평가하고 중용할 것을 주장했다. 반면 집권당인 대북과는 원수나 다름 없었다. 대북은 주화론을 빌미로 류성룡을 탄핵했는데 곽재우는 1600년 상소를 올려 주화론을 강력하게 주장했고 남인의 중신 이원익을 정승직에서 체직한 것을 비판했으며 대북계 대사헌 홍여순의 탄핵을 받아 귀양을 갔고 해배후엔 벼슬자리를 얻었을때도 근거없는 소문에 마음고생을 해야했다.[8] 사적으로 절친했던 동강 김우옹과 한강 정구는 북인에 의해 몰락해 김우옹은 고향에도 돌아가지 못한채 인천과 청주를 전전하다 생을 마감했고, 정구는 대구 칠곡에 죽은듯 은거했다.

그 많던 재산은 의병활동에 다 털어넣었고 전후에는 경제활동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 1608년 광해군이 즉위했을 무렵에는 단벌옷에 선전관이 보낸 교지에 답서를 보낼 종이 한장도 없는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를 높이산 광해군에 의해 등용되어 경상우병사, 삼도수군통제사, 함경감사, 전라병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등 무관 고위직에 차례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대북과 척을 진 관직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그는 관직에 임명될 때마다 상소를 올려 자신의 주장을 개진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낙향하는 생활을 계속했다.

그의 정치생명은 1613년 영창대군 사사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림으로써 끝났다. 이 상소에 그나마 그에게 우호적이었던 광해군도 등을 돌렸고 기회를 잡은 대북은 1614년 5월 터뜨린 자작 역모극에 곽재우를 집어넣어 죽이려 했으며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장령 배대유의 변호덕분에 간신히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사건을 끝으로 그는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했고 1617년 4월 10일 망우정에서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일세를 풍미한 의병장이 남긴 것은 단벌옷에 거문고, 낚싯배 한척이 전부였다.

3 곽재우 의병활동의 이모저모

3.1 전술 및 특이사항

전투시 아버지 곽월이 명에 갔을때 가져온 붉은 비단으로 만든 철릭을 착용해서 적아를 막론하고 홍의장군(紅衣將軍)이라 불렸다.[9] 난중잡록에선 붉은 생초(紅綃)에 안을 댄 옷을 착용하고 당상관(堂上官)의 입식(笠飾 장식)을 갖춘 갓을 쓰고,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을 칭했다고 적었다.

난중잡록에선 곽재우의 전술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는 정보수집과 정찰을 중시해 아군 진영에서 왜군 진영까지 2, 3식경(食頃)의 거리마다 척후소를 세워 적의 동향을 은밀히 보고하도록 조치해 왜군의 움직임을 사전에 파악하고 최대한 여유있게 군사를 운영하려 노력했다. 긴요한 지형에는 정예병력을 숨겨두었다가 안심하고 다가오는 적을 활로 저격해 진격 의지를 꺾었고 적의 수가 많다 싶으면 적진이 잘보이는 산기슭에 가지가 5개 달린 햇불을 든 군사들을 배치하고 소리를 지르게 해 아군의 숫자가 많은 것처럼 속였다고 한다. 적이 대담하게 나오면 쓸수 없는 계책인데 앞서 언급한 세심한 정찰로 적의 움직임을 파악하는게 중요했을 것이다. 나타날 때는 신속했지만 움직일때는 요란하게 북을 치며 여유있게 움직여서 적이 아군의 숫자를 짐작하기 힘들게 만들기도 했다. 이순신과 마찬가지로 수급을 베는것보다 적을 한명이라도 더 살상하는데 중점을 뒀으나 수급을 얻어 공을 알릴수 있게 해줘야 사기를 높일수 있다는 김성일의 충고를 듣고 방침을 바꾼다.


간혹 지나칠정도로 강직한 성품이었고 왜군에 대한 적개심, 투쟁심도 엄청났지만 지휘관으로선 지는 싸움, 공연한 인명손실을 철저하게 피하는 유연함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그가 불리한 상황에서 정면대결을 불사한건 성주에서 안고쿠지 에케이 군과 싸울때 단 한번 뿐 이었다. 그외에는 철저한 기만전술과 매복, 사전정찰로 최대한 유리한 전장환경을 조성해 놓고 싸웠다. 1차 진주성 전투때는 윤탁, 정언충처럼 숫적으로 월등한 적에게 정면 승부를 거는대신 심리전만 수행했고 2차 진주성때는 구원에 나서라는 체찰사 한효순의 지시를 딱 잘라 거부했다. 산채로 심장을 구워먹는다고 일컬어질 정도로 가슴이 뜨거웠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전투에 임할때는 아군의 현실을 파악하고 그에 맞춰 움직이는 냉철함이 있었다. 한 마디로 게릴라 지휘관의 모범.

3.2 김수와의 갈등

굉장히 강직한 성격이었고 가끔은 그게 지나쳐 경솔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 대표적인게 경삼감사 김수와의 갈등이다.

사실 김수와 곽재우는 전쟁 이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김수는 개전전 열성적으로 전쟁대비를 했는데 그중 하나가 읍성 중심의 축성작업 이었다. 김수는 축성에 필요한 인력을 충당하기 위해 향교 유생을 뽑는 고강을 다른때보다 엄격하게 실시한 후 떨어진 유생(낙강유생)들을 축성작업에 투입시켰다. 이에 지역 사족층은 격렬하게 반발했고 합천지역 유지였던 문덕수가 선봉에 서서 지방관들이 탐학을 일삼고 김수는 실정을 거듭한다며 비판하고 나섰다. 이에 김수는 문덕수를 잡아가두는걸로 대응하여 지역 사족층의 불만은 더 커졌다. 이 문덕수의 구명에 힘쓴 그의 외조카가 곽재우의 첩장인인 이로였다.[10] 전국에서도 사족의 세력이 특히 강했던 경상도에서 전쟁에 대비하라는 중앙의 지시를 이행하려는 지방관과 기존 이권을 지키려는 지역 사족층이 충돌한 사례인데 곽재우 역시 지역 사족의 일원인 만큼 김수에게 좋은 감정을 갖긴 어려웠을 것이다.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킨 초기에도 둘 사이에는 앙금이 있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처음 의병을 일으켰을때 물자를 충당하기 위해 의령 속현인 신반현의 관청 창고에 있던 곡식과 초계 관청의 병기와 군량, 기강 기슭에 버려져 있던 조세선의 세미를 가져다 썼다. .[11] 합천군수 전현룡과 경상우병사 조대곤은 이런 곽재우의 행동을 화적질로 오인하고 체포령을 내렸다. 전쟁 전 지역사족층과 대판 충돌했던 김수도 별다른 조치를 취해주지 않아 궁지에 몰린 곽재우는 병사들을 해산시키고 지리산에 은거하려 했다. 이후 김성일의 도움으로 공식의병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다는 점은 이미 전술했다.

이광, 윤석각과 함께 용인전투에 참전했다 패배하고 돌아온 김수는 6월 17일 함양으로 귀환했다. 귀환 후 김수는 경상도내 의병부대를 흡수하여 감사와 병사를 중시으로 통합된 지휘체계를 구축하려 했는데 이는 필연적으로 의병지휘관의 반발을 불러왔다. 그래도 김면과 정인홍, 손인갑 등 대부분의 지휘관들이 연락망을 구축하고 협조적으로 나온것으로 보이나 곽재우는 대놓고 반발했다.(난중잡록 6월 17일조) 그리고 김수의 죄목을 열거하며 그를 당장 참해야 한다는 격문을 경상우도 전역에 돌렸다. 전쟁 준비 과정에서 김수와 충돌이 있었던 지역 유림은 곽재우에게 동정적이었으나(용사일기, 고대일록, 난중잡록) 전쟁 중에 아군끼리 자중지란을 초래하고 무직자에 불고한 그가 한 도의 감사를 죽이라고 주장한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는 행동이었다. 쇄미록의 저자 오희문은 곽재우의 전공을 인정하면서도 이런 점을 들어 곽재우를 비판했다.

곽재우를 지속적으로 옹호하고 지원해준 김성일 조차 조정에 올린 보고에서 패주한 수령이나 변장의 이야기만 들으면 참수를 주장하고 감사와 병사에게까지 불손한 말을 늘어놓아 미친 도적이란 비방을 받는다며 그 성품에 대한 우려를 드러냈다.(선조실록 임진년 6월 28일.) 김수는 즉시 조정에 장계를 올려 곽재우를 강하게 공격했다. 김수의 장계를 본 선조는 곽재우가 자기 군세를 믿고 딴 마음을 품은게 아닌가 하고 의심을 품게되었다. 곽재우 의병부대의 두번째 위기였다. 이번에도 구원투수는 김성일 이었다. 김성일은 조정에 전후사정을 설명해 오해를 풀고 곽재우의 잘못을 지적하면서도 그의 능력이 꼭 필요함을 역설했다. 또 곽재우에게도 따로 서신을 보내 달래고 김면같은 다른 의병장에게도 서신을 보내 관군과의 협력을 거듭 강조했다.

전모를 파악한 조정은 논의끝에 김성일을 우도 감사로 삼고 김수는 한성판윤으로 전임시켜 사건을 일단락 지었다. 김수도 중앙에 가선 앙금을 털어버렸는지 선조에게 곽재우의 공과 능력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때 곽재우가 가진 왜군에 대한 적개심을 왜군을 잡으면 심장을 구워먹는다고 표현했다.

4 그 외

군인으로서 전공으로보나 지휘력으로 보나 가장 거품이 없는 의병장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보고들은 모든일을 꼼꼼히 기록한 조경남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난중잡록이 아니었다면 곽재우는 실록의 긍정적인 평가와 후손이 지은 화려한 행장에 비해 실체가 없는 장군이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김덕령, 정기룡과 도매금으로 묶였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곽재우의 평가는 높을 수 밖에 없는데, 서인들이 선정한 임진사충신[12]에도 포함되고, 동인들이 선정한 임진왜란 3대 의병장[13]에도 포함된다. 같은 당색에 포함될 동인들이 띄워주는 것이야 당연하지만, 서인들이 뽑은 충신 명단에도 포함되는 것은 물론 곽재우가 왜란 이후에 정치적으로 뭘 하지 않은 것도 있겠지만 그 활약상을 무시할 수 없었다는 점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여러 책에서 자주 언급되는 일화로 화왕산성 전투를 할 때 곽재우가 여기에다 일부러 병사가 적은 것처럼 왜적들을 속인 다음 거기에다 상자 몇 개를 놓아 두었다. 왜군들은 화왕산성을 침략하려고 할 때 나무 상자가 있는 것을 보고 상자를 열었는데 거기에서 벌떼들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왜군들이 크게 혼이 난 틈을 타 매복해 있던 의병들이 왜군들을 크게 무찔렀다. 그 뒤 퇴각한 왜군들이 상자를 보고 이것도 벌통이 아닐까 싶어 불을 질렀는데 거기에는 화약이 들어있었으니...이런 식으로 해서 화왕산성 전투에서 완승을 거두었다는 일화가 있다.[14]

파일:Attachment/곽재우/ch01.gif
오늘날에도 의령군에서는 마스코트로 사용하고 있다. 마스코트 이름 역시 의장군 곽재에서 따온 '홍우'.

대구광역시 동구 효목동에 곽재우의 동상이 있는데 동상이 있는 공원의 이름은 곽재우의 호 '망우당'에서 딴 '망우공원'이다. # 이 곳은 1971년 4월 22일 곽병원[15]의 창립자 故 곽예순 박사가 조성했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대암리에 홍의장군 곽망우당묘소가 있는데 본인과 부인 김 씨의 합장묘이다. 대구국가산업단지 서남편에 있는데 대중교통으로는 절대 쉽게 올 수 없으니[16] 방문할려면 반드시 자가용을 이용하도록 하자. 묘소 앞에 주차장이 있고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자가용 이용에 불편할게 없다.

네이버 웹툰 조선왕조실톡에선 조선판 토니 스타크로 묘사되었다. 부자라는 점과 붉은 옷을 즐겨입은 점을 보면 확실히 비슷한 부분이 있긴 한데..막말도 빼놓을수 없다 또 자신과 같은 옷을 입힌 장사들로 하우스 파티 프로토콜을 구현했다. 얘들아 잔치를 벌이자꾸나. 잔칫집 계획을 실행할까요, 장군님?

게임 임진록 시리즈에서 임진록 2부터 등장하는데, 여기서 곽재우는 분신술이라는 스킬을 사용하는 장수로 등장한다. 이유인즉 위 항목에 서술된 '장사 10명을 뽑아 자신과 똑같은 홍의를 입혔다'에서 유래한 듯.

참고: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1. 김성한의 소설 7년전쟁에서 그를 가리켜 작가가 남긴 말.
  2. 최초의 의병장으로 거론되는 또 다른 사람은 김해성 전투에서 활약한 '송빈'이라는 사람이다. 김해성 전투가 4월 19일에 벌어졌기에 일단 시기상으로 며칠 앞서긴 한다. 하지만 김해성이 하루만에 함락되고 송빈도 전사했기 때문에 유명하지가 않다. 사후 김득기, 이대형, 류식과 함께 김해를 지키다 순국한 4충신으로 떠받들어졌으며 김해시에서는 당연히 이 사람을 최초의 의병장으로 적극적으로 밀고 있다.
  3. 현재의 의령군 정암리 남강변에 위치한 나루터, 일제시대에도 거창, 함양, 산청의 물산이 이 곳을 통과했으며 지금도 79번 국도가 지나고 있다.
  4. 관직임명, 날짜, 건의사항의 출처는 모두 선조실록이다.
  5. 자세한 시기는 불명이지만 1597년 4월 26일 기사에 방어사 곽재우가 찾아왔다라는 대목이 있는것을 보아 그전에 경상좌도 방어사로 임명되었음을 알 수 있다,
  6. 이 와중에 공이 있는 장수라고 거론된 사람중에 원균이 있었다... 차라리 동생 원연 이라면 몰라도!..
  7. 윤근수나 그 형 윤두수는 곽재우를 높이 평가해 중용할 것을 선조에게 건의한 바있고 곽재우 본인도 학맥만 같을 뿐 북인과는 거리가 있었기에 곽재우를 부정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한 말은 아니다.(선조 28년 12월 28일, 광해군 즉위년 8월 13일 기사 참조)
  8. 선조 37년 8월 8일 기사에 의하면 조정에서 곽재우를 마뜩찮게 여긴다는 소문이 떠돌아 곽재우를 괴롭혔다고 한다.
  9. 선조실록 임진년 6월 28일
  10. 이로는 축성작업에 불만을 품고 알고 지냈던 류성룡에게 도대체 이런 태평성대에 왜 성을 쌓고, 왜적이 어떻게 경상도 깊숙한 지역까지 들어오겠냐며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11. 물론 곽재우 입장에서도 변명의 여지가 있었던 게 관군이 식량과 물자들을 죄다 버리고 급박하게 후퇴했는데 그걸 가져다 쓸 수 있게 누구에게 허락받을 때까지 기다릴 상황도 아니었고 그걸 허락할 권한이 있는 조정은 한양을 버리고 몽진한 상태였다. 만약 의주까지 몽진한 조정에 쫓아가서 허락받고 다시 돌아오는 삽질을 한다면 그 사이에 이미 적에게 물자를 모조리 탈취당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현대 국군도 청와대와 국방부, 참모본부의 명령을 기다릴 수 없는 급박한 상황시에는 현지 지휘관에게 일정 수준의 재량권을 행사하게 한다. 부산을 공격하라는 어명이 말도 안 된다고 판단한 현지 지휘관 이순신의 의견을 무시하고 해임한 후 원균에게 부산을 공격하게 한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보면 알 수 있다. 문제는 곽재우가 이순신과 같은 정규군 지휘관이 아닌 일개 민간인 의병장이었다는 거지만...
  12. 고경명, 김천일, 조헌, 곽재우. 이중에서 곽재우를 제외하면 모두 서인출신이며 전공이나 의병장으로서 능력에 거품이 많이 끼었다.
  13. 정인홍, 김면, 곽재우
  14. 판본에 따라 왜군이 또 다른 상자를 발견했을 때 여기에도 함정이 있을 거라 생각해서 도망쳤다는 이야기도 있다.(사실은 빈 상자임)
  15. 대구 중구 수동 서성네거리에 있는 병원으로 1952년 4월 10일 설립했다. 현재는 곽예원 박사의 삼남 곽동협씨가 병원장을 맡고 있다.
  16. 가장 가까운 시내버스 정거장이 2km 정도 떨어져 있고 인도 없는 위험한 길을 걸어야 하며 거기다 농촌 특성상 시내버스도 하루에 몇 번 운행되지 않는다. 굳이 시내버스를 탈려면 현풍시외버스터미널에서 달성7번을 타고 북쪽의 내2리새마을회관이나 남쪽의 대암2리에서 내리면 된다. 둘 다 거리는 비슷하지만 내2리새마을회관 쪽이 조금 더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