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의 전투 목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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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포 해전(1592년 9월 1일)
</br>적의 본진, 부산을 공격한다
</br>백성들의 통곡이 들렸다
</br>지금 아름다운 것은 싸우는 것이니
</br>크고 깊은 분도로
</br>적의 심장부를 쳐라
</br>ㅡ 불멸의 이순신 부산포 해전 예고1, KBS
바다 위에 머물 곳은 없다
</br>물러서지 않는다
</br>생명 부서지는 소리
</br>울음은 울어지지 않았다
</br>파도처럼 달려드는 고통을 베고
</br>세상을 살리기 위해
</br>ㅡ 불멸의 이순신 부산포 해전 예고2, KBS
부산포 해전 | ||
날짜 | ||
1592년 9월 1일 | ||
장소 | ||
조선 경상도 부산포 | ||
교전국1 | 교전국2 | |
교전국 | 조선 왕국 | 쇼쿠호 일본 |
지휘관 | 충무공 이순신 원균 이억기 정운† | 불명 |
병력 | 전선 166척(판옥선 74척, 협선 92척) | 최소 8,000여명 전선 430여 척 |
피해 규모 | 정운 등 6명 전사, 25명 부상 | 전선 128척 격침 3,800여명 전사 |
결과 | ||
조선 수군의 승리. |
1592년(선조 25) 9월 1일 이순신 등의 조선군 수군이 부산포[1]에서 일본군과 싸운 전투.
1 꽁꽁 문을 걸어잠근 일본군
왜 수군은 한산도에서 참패를 당한 7월 중순 이후 약 1개월간 남해안 일대에서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은 채 침묵을 유지했다.
그러던 중, 8월 중순에 이르러 일본군은 한성에 주둔하고 있던 가토, 기무라, 오카모토 등의 부대를 경상도 지방으로 이동하도록 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일본군은 대부분의 병력을 김해에 집결시키는 한편, 군수 물자를 부산으로 운반하였다.
당시 부산포에서는 하시바군 주력부대와 본국에서 증원된 수군 8,000여명이 함선 430여 척을 보유하고 해안 요충지를 지키고 있었다.
2 이순신의 출전
조선은 일본군의 이런 움직임을 본국으로 철수하려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경상우도순찰사 김수가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이순신에게 "위로 침범한 적도들이 낮에는 숨고 밤에 행군하여 양산(梁山), 김해강 등지로 잇달아 내려오는데, 짐짝을 가득 실은 것으로 보아 도망치는 낌새가 현저하다." 라고 하여 해상도주통로를 차단해 줄 것을 요청했고,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원균 (8월 25일 합류)의 함대와 합류하여 판옥선 74척, 협선 92척 등 총 166척으로 통합 함대를 편성하여 출진하였다.
이순신은 낙동강 하구를 거쳐 9월 1일 부산포로 향하던 중 화준구미·다대포·서평포·절영도·초량목 등지에서 산발적으로 기습을 시도한 적선들을 번번히 물속에 처박으며 총 37척을 격침시키면서 부산포 앞바다에 이르렀다.
3 쑥대밭이 된 부산포
부산포 앞바다의 절영도[2] 부근으로 진출한 조선 수군은 부산포 동쪽 산기슭 해안에 일본 수군 선단 사백여 척이 집결해 있는 가운데, 다수의 육군이 해안선에 진지를 구축하여 조선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음을 탐지하였다.
조선군은 장사진을 펼치면서 종대 대형으로 부산진 포구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조선 수군에 압도된 일본 수군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달아나 육군 병력이 방어하고 있는 해안진지에 뛰어들어 필사적인 저항을 시도하였다. 이에 조선 수군은 해안진지에서 저항하는 일본군에게 활을 쏘아 견제하는 가운데, 포구에 방치된 일본군 전함을 향해 각종 총통 사격을 집중하였다.
양 함대의 전선수를 비교하면 약 3대 1의 비율로 조선 수군이 열세이었고 지리 조건도 일본군들은 언덕을 의지하여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향하여 공격하지만 조선 수군은 해상에서 완전히 노출되어 공격군에 매우 불리한 여건이었으나, 일본군이 조선 수군에 겁을 먹고 사기가 떨어졌다는 점이 이런 불리한 면을 보완하였다.
일본군이 사기가 높았다면, 옥포 해전 당시 도도 다카토라나 한산도 대첩 당시 와키자카 야스하루처럼 전 함대를 동원해서 조선 수군을 공격해왔을 것이다. 그러나 상당수 병력이 해안과 산 언덕에 숨어서 바다로 나오지 않고 조총과 활 그리고 노획 및 보급등으로 확보한 각종 화포로 공격을 했다는 것은 그들이 해전을 두려워했다는 증거이다. 이미 앞서 소규모 해전에서도 일본군은 조선 수군과 맞닥드리자 배를 버리고 섬으로 도망가기 바빴던 것이다.
부산포 해안에서 적선 100여 척을 격침시키는 등 큰 전과를 올렸고 부산성을 목전에 뒀지만 이순신은 육지로 일본군을 추격하거나 부산성 탈환 시도를 하지 않았다. 이른바 "단병접전", 즉 현대어로 표현하자면 "근접 백병전"에서 조선군의 기량이 일본군에 비해 불리했으며 많이 지쳤고 병력 수도 육전을 하기에는 너무 열세였다.[3]. 거기다가 조선군은 당시 일본군과 달리 말이 없었다.[4]
그외에 의병들이 왜군에 맞서 왜군 3,800명을 죽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수군의 피해는 녹도만호 정운을 비롯하여 전사 6인, 부상자 25인이었으며, 전투 후 이순신은 가덕도에 이르러 3도수군을 해진하고 그날로 귀항하였다. 특히 녹도만호 정운의 전사는 특히 큰 타격이었는데, 그 이유는 개전 이후 처음의 장수의 전사라는 의미도 있었지만 정운은 조선수군 제일의 맹장이자 늘 돌격대장을 맡아온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웅포 해전에 그가 살아있었다면 그의 활약으로 상륙해 웅포를 점령할 수 있었을 거라는 의견도 있다.
4 해전의 의의
이 해전으로 일본군의 수군 활동은 잠잠해졌고 조선 수군은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평양에 주둔한 고니시 유키나가가 그대로 평양에 주저 앉아 있다가 조명연합군에 밀린 것도 이순신에 의해 해상 보급로를 차단당한 때문이었다. 또 호남 역시 일본군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할 수가 있었다. 이 교훈을 일본군은 진지하게 받아들여 정유재란 때에는 전혀 다른 전략을 세우게 된다.
이 해전의 승리를 기려, 1592년 음력 9월 1일을 양력 10월 5일로 환산하여 부산광역시는 10월 5일을 '시민의 날'로 지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