張裕
(? ~ 219)
후한 말의 인물. 자는 남화(南和). 단독으로 된 열전은 없고 주요 행적은 주군전에 언급된다.
유장 휘하에서 익주종사[1]를 지냈다. 장유는 점술에 밝으면서 관상을 잘 보았고 천부적인 재능은 주군을 뛰어넘었으며, 등지가 찾아오자 70세가 넘은 후에 대장군의 지위에 오르고 후에 봉해질 것이라 했다.
당초 유장이 유비를 부성에 만날 당시에 유비가 장유의 수염이 풍성한 것을 보고 과거에 자신이 탁현에 살 때 모(毛) 성을 가진 자가 특히 많았는데, 사방이 모두 모라는 집이 많아 탁현의 현령이 수많은 털이 탁을 에워싸고 산다고 말하는 것으로 조소[2]했다.[3]
그러자 장유는 유비가 수염이 없는 것을 이용해 과거에 상당군 노현의 장이었다가 탁현의 현령으로 승진한 자가 있었는데, 그는 관직을 떠나 집으로 돌아갔고 당시에 어떤 사람이 편지를 주었다고 한다. 거기에는 노현이라고 쓰면 탁현을 무시하는 것이 되고, 탁현이라 기록하면 노현을 무시하는 것이 되므로 노탁군으로 쓴다고 되어 있었다고 말했으며, 장유는 유비가 수염이 없었다는 것을 이용해 이런 방법으로 받아친 것이다.
219년에 한중 공방전 때 장유는 조조와 한중을 다툴 수 없다면서 군세가 반드시 불리할 것이라 했다. 유비는 장유의 의견을 듣지 않았는데, 땅을 얻었지만 백성들은 얻지 못했다. 또 장유는 사사로이 다른 사람들에게 경자년(220)에 천하는 조대로 바뀌고 유씨의 제위가 이미 다 할 것이라면서 주공(유비)이 익주를 얻은 이후부터 9년 후인 인년(222)과 묘년(223) 사이에 그것을 잃을 것이라 했는데, 어떤 사람이 장유의 말을 유비에게 보고했다.
유비는 항상 장유의 불손함을 미워하였는데다가 (당시 유비가 내세운 명분, 체제, 위신에 대해) 그가 실언을 한 것에 분노하였다. 그래서 이 때 장유의 한중 쟁탈에 관한 직언이 효험이 없었다는 것을 문제삼아 하옥시켰다. 제갈량이 장유의 죄를 용서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유비는 향기나는 난초라도 문앞에 돋아난다면 부득이 베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고 장유는 결국 저잣거리에서 사형당했다. 애시당초 비슷한 조언을 한 주군이 승진한 반면 장유는 하옥되었고 화양국지에 따르면 유비가 장유를 주살한 것은 이런 소리를 한 죄였다고 나오니 진짜 사형원인은 이쪽이었을것이다.
그의 예언대로 220년에 후한이 멸망해 조비가 제위에 올라 위나라가 건국하고 223년에 유비가 붕어했으며[4], 장유는 관상술에 밝아 항상 거울을 들고 자신의 얼굴을 볼 때마다 자신이 곧 죽게 될 것이라는 알고, 일찍이 땅에 거울을 던져 깨지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