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상의

全尙毅
(1576~1627)
조선 중기의 인물

1 일대기

1575년(선조 8년) 출생했고 본관은 천안(天安), 전용(全蓉)의 아들이다. 1603년(선조 36), 29세 되는 나이에 무과에 급제, 벼슬에 오르게 된다. 광해군 때에는 일본에서 정유재란 때 잡혀간 우리나라 사람들을 송환해 오기도 해 어모장군에 오르게 된다. 인조반정 이후, 개천군수로 강등, 후에는 구성부사로 다시 승급한다.
1627년 청 태종이 3만 군사를 이끌고 남하, 정묘호란이 발발했을 때 의주에서 이완(李莞)장군이 분사하고, 능한산성(凌漢山城, 오늘날의 곽산)이 함락되면서, 적군의 청천강 도하를 막기 위해 평안도의 병을 전부 안주(安州)로 집결시켜, 전투를 준비하는데 이 때 평안병사 남이흥(南以興), 안주목사 김준, 용천부사 이희준 등과 함께 전투에 참가한다.
수백의 군졸로 안주성 북문 앞에 있는 백상루 앞에 진을 치고 쳤으며, 후금군은 이를 보고 항복을 두 번이나 종용했으나, 이를 거부하고 이에 접전, 5일 동안 3번의 접전에 이르러 전세가 불리해 지자 전상의 장군은 목을 찔러 자살하고 만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1684년(숙종 10) 안주의 민충사(愍忠祠), 광주의 경렬사(景烈祠), 제주의 귤림서원(橘林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1903년(광무 7) 청원군 북일면 구성리(九城里)에 충신각(忠臣閣)을 세웠다. 1985년에 전상의 장군들의 후손과 유적보존회가 중심이 되어 충민사(안주 충민사의 이름을 따 왔음.)를 준공하게 된다.
후에 관한 전상의 장군에 관한 기록은 전상의 장군의 문집인 구성공실기(龜城公實記)에 잘 나타나져 있다.

2 후대 평가

전상의 장군은 광주 출신으로 광주 의충신 14인 중에는 나라로부터 정려를 받은 3명 중 한명으로 김덕령, 고경명 장군과 함께 광주3충신으로 불린다.
하지만 김덕령과 고경명 장군보다는 그다지 유명한 편이 아닌데,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

당시 인사동에 전상의 장군의 유적들이 몇 점 떠돌아 다녀 어떤 사람이 그것을 사들여 전두환 대통령의 동생인 전경환에게 바친 것이다. 왜 바쳤는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래서 전경환이 조사해 보았더니 아무 상관이 없는 쪽이여서[1]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한다. 그리고 충민사가 재건되어서 기념박물관을 세울 때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유물 몇 점을 보내주고, 기증자 이름을 전경환 이라고 해버린 것이다. 이게 왜 잊혀진 이유라고 말하냐면 당시 충민사 앞에 충민사 재건 참여 명단을 비석으로 만들어 세워놓았고 그 명단중 '전경환'이라는 이름이 들어감. 망했어요 덕분에 광주 시민들로부터 까임을 제대로 당해 평가를 받지 못하게 된다. [2] 후에 뉴스가 나면서 오명을 벗겼지만 너무 늦었다.
  1. 위에 언급되어 있듯이 전상의 장군은 천안이 본관이고 이 쪽은 완산 전씨이다. 시조는 같지만 문중이 서로 다르다.
  2. 이 분노가 어느 정도였냐면, 전두환 임기가 끝나자 마자 광주 시민들이 달려가 전경환의 이름이 새겨진 공적비를 부셔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