髙敬命
(1533년 ~ 1592년)
조선 임진왜란기의 의병장.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霽峰)·태헌(苔軒), 본관은 장흥(長興)이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1533년 광주 광산구 압보촌[1]에서 출생해 어릴 때부터 재주가 많아 칭송을 들었다. 20세에 사마시(司馬試)에 수석을 하고 26세에는 문과에 장원 급제했다. 그 뒤 호당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기도 했다.
그 뒤 교리·전적을 거쳐 울산군수로 임명됐다. 그러나 부임하지 않고 고향으로 내려와 은거했다. 이때 무등산을 올라 산중의 수려한 경관을 읊어 ‘유서석록(遊瑞石錄)’이라는 기행문을 남겼다. 또 당대의 수많은 문인들과 교류하며 임억령ㆍ김성원ㆍ정철과 더불어 ‘식영정(息影亭) 4선(仙)’이란 칭송을 들었을 정도로 명망있는 시인이자 문장가였다. 이후 49세에 영암군수로 다시 관직에 나가 변무사 서장관을 거쳐 직강ㆍ지평ㆍ서산군수ㆍ동래부사를 지냈다.
한편 정3품 통정대부 겸 동래부사를 지내던 중, 같은 서인인 정철이 일으킨 건저 문제와 엮이면서 파직되어서 낙향한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일본군의 진격 속도가 빨라 5월에 왕도 한성마저 함락당하고 선조는 북쪽으로 피란하는 등 최대의 위기 상황이었다.
6월 1일 담양에서 출병한 고경명은 각 도의 수령과 민중에게 격문을 돌려 30일 만에 6,7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진용을 편성했는데, 이는 의병군 중 단일부대로는 가장 대규모의 부대이다. 당시는 용인 전투의 패전으로 관군들이 신망을 잃은 상황이었고, 이 때문에 오히려 중앙 유력자 였던 고경명이 오히려 신망을 얻으면서 의병들은 속속 고경명에게 모여들었기 때문에 고경명의 병력이 이치 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운 관군보다 오히려 더 큰 규모가 될 수 있었다. 고경명은 원래 김천일과 함께 뜻을 모아서 한양 진격을 노리고 있었다[2]. 하지만 고경명 부대가 은진까지 진군했을 때 적이 금산을 넘어 전주까지 침략할 것이라는 소문이 들려왔다. 이에 “전주는 호남의 근본인데 먼저 흔들리면 적을 제압하기 어려우니 먼저 본도부터 구해야 옳다”고 판단한 고경명은 계획을 바꿔 호서 의병장 조헌(趙憲)에게 서신을 보내 금산의 일본군을 공격할 것을 제의하고, 자신은 태인과 전주를 거쳐 9일 금산으로 진격했다. 이곳에서 방어사 곽영이 이끄는 관군과 연합부대를 편성한 뒤 제1차 금산 전투를 도모했다.
1592년 7월 9일, 고경명은 중앙에서 정예 기병 수백 명을 거느리고 성을 공격했는데, 방어사 곽영은 우익을 담당했다. 이 시기 일본군은 1차 웅치 전투를 치르고 급히 퇴각한 직후, 혹은 1차 웅치 전투에 참여한 병력들이 빠져나가고 남은 잔존병력들만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고바야카와 타카카게가 이끄는 일본군은 짧은 치고빠지기를 반복했고, 고경명은 선봉대를 앞세워 공격했다가 실패히고 저녁에는 오히려 결사대 30명을 파견해서 비격진천뢰 등을 사용한 공격을 하는 등의 방법으로 대치가 이뤄지면서 하루가 흘렀다.
이 때 곽영은 웅치 전투를 통해서 일본군이 전주로 나가려는 의도가 막혔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후퇴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고경명은 꾸준한 공격만을 주장하였고, 더 많은 병력을 이끌었던 명사 고경명의 주장이 받아들여지면서 포위가 계속되었다.
10일 새벽, 고경명은 관군과 연합해 재차 공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군세가 약한 관군이 일본군의 수차례 집중공격으로 무너져 패주하자 의병들의 사기도 점차 떨어져 전열이 붕괴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막료들이 후퇴한 뒤 전열을 가다듬어 재공격하자고 했으나 고경명은 “패전장수로서 죽음이 있을 뿐이다”며 밀려오는 적과 맞서 분전하다가 아들 고인후, 유팽로ㆍ안영 등과 함께 최후를 맞았다.
선조가 의주로 피난갔을 때 고경명의 거병 소식을 듣고 공조참의를 제수하고 교서를 내려 그를 위로하려 했으나, 교서가 도착했을 땐 이미 그가 전사한 후였다. 사후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여러 서원들에 배향되었다.
이 전투는 임진왜란 초기 관군이 연패를 거듭하던 상황에서 의병이 주축이 돼 일본군 주력을 상대로 싸운 최초의 전투였다. 비록 패했지만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군대에 역공을 가함으로써 일본군의 전주 공격을 저지했다는 점에서 그 전략적 의미가 존재한다. 또한 고경명이 순절한 이후 큰아들 고종후를 비롯해 휘하의 최경회, 임계영, 변사정 등이 계속 의병을 일으켰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문제는, 6천명 이상의 대군을 이끌었던 고경명의 군대가 단 이틀만의 전투로 완전히 붕괴되면서 이후에 일어난 의병들은 의병을 모으는데 엄청난 고생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고경명 이후로 호남 지역 의병들은 단 1천의 병력도 제대로 이끌지 못했다. 고경명과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던 조헌과 영규의 병력이 1천이 넘기는 하지만, 이들은 군량부족과 윤선각의 방해로 각각의 병력은 1천에 못 미치는 상황에서 2차 금산전투를 치뤄야 했고, 고경명의 패전 이후의 호남의병인 보성의 전라좌의병 임계영은 700, 광주의 전라우의병 최경희는 800명[3] 만을 모을 수 있었을 뿐이다. 이들은 장흥이나 남원 같은 상당히 큰 지역에서도 거의 병력을 모으지 못했고, 1천을 간신히 넘긴 이후에도 군량부족에 시달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고경명의 6천 의병은 호남이 모을 수 있었던 최대규모 의병이었으나 이들을 고스란히 날려버렸다는 것이 아쉬운 점이다. 특히 전주 성을 수비하기 위해서 이치 전투와 웅치 전투에서 사투를 벌인 관군과 협력하지 않고, 자의만으로 금산성으로 돌진한 것은 의기를 떠나서 군사적 역량부족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광주광역시 남구에는 고경명과 그 아들들, 조카, 함께 전사한 노비 등을 기리는 사당인 포충사가 있다. 또한 광주역에서 남광주역을 잇는 도로인 제봉로는 고경명의 호를 따와 지은 것이다.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이치전투 부분에서 일본군을 후퇴시키기 위해 금산성을 공격했다는 해설밖에 안나왔다. 또한 고경명 역할의 단역배우가 꽤 젊어서 역덕들이 벙쪘다는 후문이...[4]
징비록에서는 다행히 중견배우인 유승봉씨가 맡았으며 권율이 연하자라 부사!라고 존칭까지 날리지만 결국 아들인 고인후와 함께 전사한다. 근데 문제는 이치전투로 추정되는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