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정유재란에서 넘어옴)
임진왜란, 정유재란
壬辰倭亂, 丁酉再亂
300px[1]
날짜
1592년 5월 23일(음력 4월 13일) ~ 1598년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장소
한반도
표면적 명분
일본의 정명가도(征明假道)[2] 의사를 조선이 거부
실질적 이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륙 진출 야욕,
센고쿠 시대를 거치며 축적된 무력의 국외 발산
교전국조·명 연합군


조선


도요토미 정권 하 일본
지휘관조선
정부 수반
국왕 선조
왕세자, 분조 광해군
지휘부
영의정 이산해류성룡
좌의정 윤두수
우의정 이항복
도체찰사 류성룡이원익
도체찰부사 병조판서 김응남
중앙군
도원수 김명원권율
도순변사 신립
삼도도순찰사 김여물
순변사 김성일(→경상우병사) → 이일
지방군
좌방어사 성응일
우방어사 조경
경상도순찰사 김수
전라도순찰사 권율(→도원수)
경상좌도병마절도사 이각고언백
경상우도병마절도사 김성일조대곤
김해부사 서예원
동래부사 송상현
밀양부사 박진
안동부사 정희적
부산첨사 정발
다대포첨사 윤흥신[3]
경주부사 윤인함변응성
경주판관 박의장
진주목사 김시민
양산군수 조영규†
울산군수 이언성
조방장 홍윤관†, 유극량, 변기, 박종남
대장(代将) 송봉수
군관 이대수, 김효우
수군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원균† → 이순신
경상좌도수군절도사 박홍(→병조참판)
경상우도수군절도사 원균(→ 전라병사
→ 삼도수군통제사)
권준배설무의공 이순신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이순신(→삼도수군통제사)
원균† → 이순신
전라우도수군절도사 이억기
김억추안위
충청도수군절도사 최호† → 권준오응태
의병
곽재우
조헌
사명당
김덕령
원연[4]
정인홍
고경명


정부수반
황제 만력제
지원군
병부상서 석성
경략조선군무사 병부상서 양호
총독군문 병부상서 형개
경략군문 병부시랑 송응창
제독군무방해어왜총병관 도독동지 이여송
제독한토관병어왜총병관 도독동지 유정
도독 정왜대장 마귀
전군도독부 도독 진린
유격장군 심유경
우군 유격장군 오유충
좌협군 사령관 양원
우로군 사령관 장세작
중협군 사령관 이여매
우군 부총병(요동군) 조승훈
중로군 사령관 동일원, 이여백
병참 천만리
일본
정부 수반
태합, 태정대신 도요토미 히데요시
관백 도요토미 히데츠구
지휘부
대로 마에다 토시이에
대로 도쿠가와 이에야스
봉행 이시다 미츠나리
봉행 아사노 나가마사
봉행 마시타 나가모리
봉행 나츠카 마사이에
봉행 마에다 겐이
총대장
일본군 총대장
겸 8군 사령관 우키다 히데이에
제1군
1군 사령관 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시
마쓰라 시게노부
아리마 하루노부
오무라 요시아키
고토 스미하루
제2군
2군 사령관 가토 기요마사
나베시마 나오시게
사가라 요리후사
제3군
3군 사령관 구로다 나가마사
제4군
4군 사령관 모리 요시나리
시마즈 요시히로
다카하시 모토타네
아키즈키 다네나가
이토 스케타카
시마즈 토요히사
제5군
5군 사령관 후쿠시마 마사노리
도다 가즈타카
쵸소카베 모토치카
하치스카 이에마사
이코마 지카마사
도쿠이 미치유키
구루시마 미치후사
제6군
6군 사령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모리 히데카네
다치바나 무네토라
다카하시 무네마스
츠쿠시 히로카도
제7군
7군 사령관 모리 데루모토
제8군
우키다 히데이에
제9군
9군 사령관 도요토미 히데카츠
나가오카 다다오키
수군
하야카와 나가마사
모리 다카마사
모리 요시야스
히토츠야나기 나오모리
가토 요시아키
도도 다카토라
핫토리 가즈타다
구키 요시타카
와키자카 야스하루
결과
노량 해전을 마지막으로 조명연합군의 승리[5]
영향
조선 : 국토 대부분이 초토화. 전후 복구에 국가 역량을 집중.
일본 : 도요토미 가문 세력 위축. 도쿠가와 이에야스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에도 막부 수립.
 : 대규모 원정으로 인해 누적된 피로가 다른 내외적 요인과 겹쳐 국력 쇠퇴.
후금 : 명의 쇠퇴를 기회로 빠르게 성장.
병력[6]조선
동원:18만 8천여 명
왜란투입병력: 6만여 명, 재란투입병력:37600여 명
손실:약 7만여 명

동원:22만여 명
왜란투입병력:7만 4천여 명, 재란투입병력:11만 7천여 명
손실: 8만 3700여 명
일본
동원:47만여 명
왜란투입병력:197,700명, 재란투입병력:14만 1400여 명
손실:11만 6800여 명

1 개요

한자壬辰倭亂
영어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 1598)[7]
중국어萬曆朝鮮之役 , 万历朝鲜之役 (만력조선지역)[8]
일본어(1910년 이전) 豊太閤の朝鮮征伐 (호타이코의 조선 정벌)[9]
(1910년 이후) 文禄・慶長の役 (분로쿠・케이쵸의 역) [10]

1592년(조선 선조 25년 임진) 음력 4월 14일부터 1598년(선조 31년 무술년) 음력 11월 19일까지 7년간 조선명나라, 일본 사이에서 일어난 국제 전쟁.

흔히 조선시대 전기와 후기를 구분하는 경계로 이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한국사에 중대한 분수령이며, 일본의 정권교체와 장기적으론 중국대륙의 왕조교체까지 동북아 삼국의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전쟁이다.

일본 입장에서는 '조선 정복' 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진 못했지만, 백강 전투 이래 천 년 가까이 이어진 열도 고립을 깨고 오랜만에 외부 세계에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했던 전쟁이었다. 동아시아에서 절대적인 패권국가였지만 슬슬 몰락해가던 명, 그리고 명과 더불어 동북아 세계관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오랜 평화로 인해 국가 기강이 무너지던 조선, 사회 전반에 걸쳐 상승세에 있던 일본의 대비를 보여준 전쟁이기도 하다. 실제로 전국 통일과 임진왜란을 계기로 조선인들은 물론 명나라인들도 '일본은 무시 못할 나라'라는 공포감과 존재감을 얻었다. 또한, 도자기 기술 약탈 등 문화적 성과 역시 있었다.

전화를 고스란히 당한 조선은 전 국토가 초토화되었다. 이후 급부상한 청나라의 침공, 삼전도의 굴욕을 겪고 북방 여진족들이 조선과 명의 지배로부터 떨어져나갔으며 특히 명은 이자성의 내란과 북방의 여진족으로 나라가 망했다. 반면 일본은 패전을 하긴 했지만 전란이 끝나고 그로 인한 피해는 경제 활성화 등에 따라 거진 순식간에 복구하다시피 했으며[11] 오히려 겐로쿠 시대 등의 전성기를 겪게 되었다.

그러나 명나라의 쇠망 혹은 멸망이 임진왜란이라는 단일한 사건만이 중대하게 작용하여 일어났다는 해석은 임진왜란의 여파가 일본에는 상대적으로 작게, 타국에는 상대적으로 과장하여 크게 일어났다고 보는 일본 중심 사관이 뿌리뽑히지 못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임진왜란 패퇴 직후 도요토미 정권이 1,2년도 채 안되어 붕괴되었지만, 명나라는 임진왜란 이후에도 50여년 가까이 유지되었다.

2 명칭

흔히 임진년에 일어난 군과의 사이에서 일어난 리라고 하여 임진왜란이라 부른다.하지만 본격적인 전쟁 기간은 2년에서 2년 반 남짓이다. 임진왜란-정유재란으로 나눠 부를 때도 있는데, 전쟁 발발 1년만에 한동안 전쟁이 잠잠해지자 명-일 간의 평화협상이 열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1597년에 협상이 결렬되어 일본군은 다시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의 수군을 박살내며 재침을 시작하니 이를 정유재란이라 부른다. 크게 보면 정유재란은 임진왜란의 일부로 볼 수 있으므로, 이 문서에서는 정유재란까지 같이 다룬다.

일본에서는 전통적으로는 연호를 따서 분로쿠(문록)의 역(文禄の役 ぶんろくのえき), 정유재란은 케이초(경장)의 역(慶長の役 けいちょうのえき)이라고 불렀고 이후에는 조선정벌 혹은 조선출병이라고 부르며, 애초에 명을 친다는 것을 명분으로 하였으므로 대명정벌(大明征伐)이라고 부르기도 하나, 이는 오버스러워 보인다. 옛날부터 쓰이는 표현으로는 히데요시가 '중국(唐)'에 '들어가려는(入る)' 시도였다고 해서 카라이리(唐入り)라고도 한다.[12]

이를 두고 '임진왜란은 분로쿠, 케이초 텐노 시절에 일어났다'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분로쿠, 케이초는 둘 다 코요제이 텐노(後陽成天皇) 시절의 연호이고, 중간에 후시미 대지진 등 자연재해 때문에 악운을 떨쳐내는 의미에서 한 차례 연호를 바꾼 것이다. 일본에서 '한 임금에 하나의 연호만을 사용하는' 일세일원제가 확립된 건 메이지 이후.

중국에서는 '만력조선역(萬曆朝鮮役)', '항왜원조전쟁'(抗倭援朝-), '임진위국[13]전쟁'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항왜원조란 조선을 도와 일본에 대항한다라는 뜻으로, 한국전쟁은 항미원조전쟁이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조선[14]을 도와 미국에 대항한다는 뜻. 조선을 돕기 위해 명나라는 국가 예산을 엄청나게 소모하여 원군을 파견했기 때문에, 신종 만력제 당시 나라를 멸망의 길로 몰았던 대원정인 만력3정의 하나로 꼽는다.

7년 동안 일어났다 하여 백년전쟁처럼 7년 전쟁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다. 국내 게임인 임진록2에서는 영어로 Seven Years War라고 표기했다. 영어권에서는 일반적으로 Japanese invasions of Korea in 1592(1592년 일본의 한국 침공)라고 표기하나 Imjin War라고 표기하는 사례도 간혹 있다. Korean-Japanese Seven Years War라고 표기하는 사례도 소수 있지만 명칭도 길고 서양에서 7년 전쟁이라 하면 18세기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관련된 7년 전쟁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런 표현은 서양에서 거의 쓰이지 않는다.

재미있게도 영미권에서 임진왜란에 관한 가장 유명한 책은 Stephen Turnbull이 쓴 The Samurai Invasion of Korea 1592-98과 Samuel Hawley가 쓴 The Imjin war인데 Turnbull은 일본쪽 자료를 주로 인용해서 제목을 사무라이로 지었고, Hawley는 한국쪽 사료를 주로 인용해서 임진전쟁이라 제목을 지었다. 다만 96페이지에 불과한 Samurai Invasion보다 600페이지가 넘는 Imjin war쪽이 더 내용이 충실한건 당연한지라 자연스럽게 Imjin war라 부르는 서양인이 늘었다.

이외에도 임진-정유재란을 통틀어 조일전쟁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게 따지면 명나라도 막대한 비용을 들여 참전한 전쟁이기에 동아시아 대전이란 표현을 써야 더 적당하다는 의견도 있다.

위키피디아 기준으로는 위의 1592년 '일본의 한국 침공'이란 표현과 우리나라의 임진왜란에서 따온 '임진전쟁' 두 개가 이 전쟁을 나타내는 표제어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동아시아사 교과서에서는 임진왜란을 임진전쟁이라 부른다.

2.1 전쟁의 배경

2.1.1 일본의 상황

sokentenshu-sw-full3(600).jpg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절의 오사카 성[15]

1592년 일본 전국을 통일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국내의 불만 등을 억누르고 대륙을 차지하고자 하는 야심을 품고 조선을 상대로 일으킨 전쟁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는 오래 전부터 생각된 허무맹랑한 꿈이었다. 도요토미는 1585년 7월 간바쿠 취임 직후부터 대륙 침략을 언급하였는데, 그는 9월 히토츠야나기 스에야스에게 보낸 서신에서 명을 정복하겠다는 언급을 한 바 있다. 그 이후로도 도요토미는 전쟁 때마다 자신의 어머니와 일가친척에게 '우리는 이제 곧 한양에서 매년 여름을 보내고, 베이징에서 매년 겨울을 보낼 것이다'라고 호언장담했다고 한다. 이런 대륙 침략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전 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오다 노부나가가 여러 번 언급했다고. 이런 언동은 초기엔 그저 말뿐이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노부나가의 유력 가신인 히데요시가 이에 충분히 영향을 받을 만 했다.

1587년 6월, 하카타에서 쓰시마 도주 소 씨(宗氏) 부자를 만난 도요토미는 조선과의 교섭을 명령했다. 일본이 통일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조선 국왕을 불러와 자신을 알현토록 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기한을 1588년까지로 못박았다. 또한 불응할 경우에는 조선을 정벌하겠다고 말하였다. 이에 대해 쓰시마 도주는 조선으로부터 거부당할 것이 뻔한 선조의 입조(入朝) 대신 인질과 공물을 요구하자고 제안했지만, 도요토미는 선조의 입조를 고집했다. 결국 쓰시마 도주는 가신인 타치바나 야스히로(橘康廣)를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로 파견, 일본 국내사정의 변화를 설명하고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1587년인 선조 20년, 이 일본의 사신은 교섭이 여의치 않으면 병화가 일어날지 모른다고 암시하였다. 하지만 조선 신료들은 ‘교화가 미치지 않는 야만국의 사신을 제대로 접대할 수는 없으며 바닷길이 험해 통신사도 보낼 수 없다’라는 답변을 하며 통신사 파견을 거부하였다.

타치바나 야스히로는 실록이나 조선측 기록에서 귤강광이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당시 반백이 넘은 나이로 사신을 빙자해 조선에 많은 어그로를 끈 인물이었다. 조선에 머물면서 지리를 정탐했고 여러 에피소드를 남겼다. 유명한 예로 조선군의 창을 보고 너희들 창자루가 너무 짧구나 라고 비웃었다거나, 연회 도중 소매에서 후추를 던지자 악공과 기생, 노비들이 앞다투어 정신없이 후추를 줍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보고 '너희들 기강이 엄청 해이하니 국운이 망할 징조.'라고 깔보았다는 얘기가 있다. 그러나 이렇게 거만하던 야스히로는 조선 교섭 임무를 실패해 귀국 직후 히데요시의 화를 사 자신을 비롯한 온 가족이 몰살당했다.

이렇게 도요토미의 첫번째 외교가 실패하자 그는 1589년 여름까지 조선 국왕을 입조시키라고 쓰시마를 다시 채근했다. 따라서 조선에 1588년 10월과 1589년(선조 22) 6월, 쓰시마에서 두 차례에 사신이 왔다. 1589년 6월엔 신임 쓰시마 도주 소 요시토시는 도요토미의 거듭되는 독촉과 조일 양국 충돌시 겪게될 고통을 우려하여 1589년 6월 하카타 쇼후쿠사(聖福寺)의 승려 겐소(玄蘇)와 함께 직접 조선으로 건너왔다. 그 만남에서 쓰시마 도주는 조선 조정에 통신사를 파견해주도록 다시 간청한 뒤, 바닷길을 자신이 직접 안내하겠다고 나섰다. 조선과 도요토미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소 요시토시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이며, 대표적인 반전파였다. 종전 후 조일 외교관계를 완화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다. 물론 소가 천사표라서(…) 그런 건 아니고, 쓰시마의 이익을 위해서란 점이 더 크다.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실리를 추구하는 쓰시마 입장에선 양국이 친선을 도모하는 것이 더 유리하기 때문.

조선 조정은 조건을 제시했다. 본래 전라도 진도군 출신으로 왜구에 투항하여 노략질에 앞장섰던 사을화동(沙乙火同)이란 인물을 잡아 보내면 통신사 파견을 고려하겠다는 것이었다. 쓰시마는 사을화동은 물론 왜구에게 잡혀갔던 조선인들까지 송환했다. 그리하여 결국 류성룡이덕형의 주장으로 조선은 1589년 9월 일본의 통일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통신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늦게나마 일본의 변화된 정세를 탐지하기 위한 목적도 지니고 있었다. 통신사는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서장관 허성 등으로 구성되었다. 황윤길은 서인, 김성일은 남인, 허성은 북인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황윤길 일행은 1590년 3월 서울을 출발하여 7월에 교토에 도착했다. 하지만 일행은 도요토미를 바로 만나지 못하고 11월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가 원정에 나아가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1월 7일 통신사 일행을 접견했던 자리에서 도요토미가 보인 태도는 방약무인 그 자체였다. 그는 황윤길 일행을 자신의 전국 통일을 축하하려고 온 대등국의 사절이 아니라 속국의 사신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또 통신사 일행이 가져온 선조의 국서에 대한 답서를 제때 주지 않는 무례를 저질렀다.

귀국길에 받은 답서의 내용을 본 조선 통신사 일행은 경악했다. 도요토미가 자신을 '태양의 아들'이라고 칭했는가 하면 '나라로 건너가 400여 주를 정복하겠다'고 운운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선조를 전하(殿下)가 아닌 합하(閤下), 조선이 보낸 예물을 조공물을 뜻하는 방물(方物), 통신사의 일본 방문(來日)을 입조 등으로 서술했다. 이런 것들은 조선을 속국으로 여기는 듯한 무례한 문구들이었다. 통신사 일행은 격분하여 수정을 요구했지만 일본 쪽은 제대로 고치지 않았다.

게다가 히데요시는 회견장에서 자신의 아들 도요토미 쓰루마쓰를 안고 데리고 오는 무례를 범했다. 아래 영상과 실록의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아기가 오줌도 지렸다고 한다. 좀 과장해서 현대와 비교하자면 한일 회담에서 일본 총리가 자기 자식을 끌어안고서 한국 외교사절들과 만난 셈이다. 게다가 정치인들이 사진 찍으려고 아기를 안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는 현대와 달리, 당시는 아동이 제대로 된 인간으로 존중받지 못하던 시대라는 것을 감안하면 더더욱 무례하게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이 장면을 일본 사극 NHK 대하드라마 고우 ~공주들의 전국~ 24화의 한 장면을 통해 보자.


[16]

일본측 인물들의 표정이 더 심각해진다. 참고로 동영상에서 보면 통신사중 한 명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관백전하의 존안을 뵙게되어 영광입니다."라고 하는데, 이 사람이 황윤길로 추정된다. 대표로써 통신사로 가장 안쪽에 앉아있고 예를 표했기 때문. 가운데 앉은 사람은 사신 일행중 부사를 맡은 김성일로 추정.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들어올때 츠루마츠를 대동하고 오니 심히 불쾌한 기색을 나타내고 있는데 실제로 애시당초 일본에 예를 표할 필요가 없다고 한 동인으로써의 특성도 나오고 서열상 두번째였기 때문이다. 파란옷은 서장관을 맡은 허성. 반대쪽 자리에 앉은 일본 사람들 중 왼쪽은 이시다 미츠나리, 중간에 두건을 쓴 사람이 바로 히데요시의 명참모였던 구로다 간베에다. 조선 사신들이 물러간 뒤 히데요시에게 너무 경솔하게 처신하셨다고 직언을 하지만... 오른쪽은 히데요시 누나 닛슈의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츠구. 훗날 할복으로 사망한다.

이건 일본 애니메이션 효우게모노에서 묘사된 장면

저 영상의 오줌 운운은 과장이 아닌 것이, 실록에도 기록이 나온다.

秀吉容貌矮陋 面色皺黑 如猱玃狀 深目星眸 閃閃射人 紗帽 黑袍 重席地坐 諸臣數人列侍 使臣就席 不設宴具 前置一卓 熟餠一器 瓦甌行酒 酒亦濁 三巡而罷 無酬酢拜揖之禮 有頃 秀吉入內 在席者不動 俄而便服 抱小兒出來 徘徊堂上而已 出楹外招我國樂工 盛奏衆樂而聽之 小兒遺溺衣上 秀吉笑呼侍者 一女倭應聲出 乃授其兒 更他衣 皆肆意自得 傍若無人 使臣辭出 不復再見

수길의 용모는 왜소하고 못생겼으며 얼굴은 검고 주름져 원숭이 형상이었다. 눈은 쑥 들어갔으나 동자가 빛나 사람을 쏘아보았는데, 사모(紗帽)와 흑포(黑袍) 차림으로 방석을 포개어 앉고 신하 몇 명이 배열해 모시었다. 사신이 좌석으로 나아가니, 연회의 도구는 배설하지 않고 앞에다 탁자 하나를 놓고 그 위에 떡 한 접시를 놓았으며 옹기사발로 술을 치는데 술도 탁주였다. 세 순배를 돌리고 끝내었는데 수작(酬酢)하고 읍배(揖拜)하는 예는 없었다. 얼마 후 수길이 안으로 들어갔는데 자리에 있는 자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후 편복(便服)차림으로 어린 아기를 안고 나와서 당상(堂上)에서 서성거리더니 밖으로 나가 우리나라의 악공을 불러서 여러 음악을 성대하게 연주하도록 하여 듣는데, 어린아이가 옷에다 오줌을 누었다. 수길이 웃으면서 시자(侍者)를 부르니 왜녀(倭女) 한 명이 대답하며 나와 그 아이를 받았고 수길은 다른 옷으로 갈아 입는데, 모두 태연자약하여 방약무인한 행동이었으며, 사신 일행이 사례하고 나온 뒤에는 다시 만나지 못하였다.

ㅡ 《조선왕조실록》 선조수정실록 25권(선조 24년, 1591) 3월 1일 세 번째 기사[17]

실록에 나오는 도요토미의 답서도 직접 살펴 보자.

日本國關白 奉書朝鮮國王閤下 雁書薰讀 卷舒再三

일본국 관백(關白)은 조선 국왕 합하[18]에게 바칩니다. 보내신 글은 향불을 피우고 재삼 되풀이하여 읽었습니다.

吾國六十餘州 比年諸國分離 亂國綱 廢世禮 而不聽朝政 故予不勝感激 三四年之間 伐叛臣 討賊徒及異域遠島 悉歸掌握
우리나라 60여 주는 근래 제국(諸國)이 분리되어 나라의 기강을 어지럽히고 대대로 내려오는 예의를 저버리고서 조정의 정사를 따르지 않기 때문에 내가 분격을 견디지 못하여 3∼4년 사이에 반신(叛臣)과 적도(賊徒)를 토벌하여 먼 섬들까지 모두 장악하였습니다.

竊諒余事蹟 鄙陋小臣也 雖然 余當托胎之時 慈母夢日輪入懷中 相士曰 日光所及 無不照臨 壯年必八表聞仁聲 四海蒙威名者 何其疑乎 依此奇異 作敵心 自然摧滅 戰必勝 攻必取 旣天下大治 撫育百姓 矜悶孤寡 故民富財足 土貢萬倍千古矣 本朝開闢以來 朝政盛事 洛陽壯麗 莫如此日也
삼가 나의 사적(事蹟)을 살펴보건대 비루한 소신(小臣)이지만, 일찍이 나를 잉태할 때에 자모(慈母)가 해가 품 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상사(相士)가 '햇빛은 비치지 않는 데가 없으니 커서 필시 팔방에 어진 명성을 드날리고 사해에 용맹스런 이름을 떨칠 것이 분명하다.' 하였는데, 이토록 기이한 징조를 인하여 나에게 적심(敵心)을 가진 자는 자연 기세가 꺾여 멸망하는지라, 싸움엔 반드시 이기고 공격하면 반드시 빼앗았습니다. 이제 천하를 평정한 뒤로 백성을 어루만져 기르고 외로운 자들을 불쌍히 여겨 위로하여 백성들이 부유하고 재물이 풍족하므로 토공(土貢)이 전보다 만 배나 늘었으니, 본조(本朝)가 개벽한 이래로 조정(朝政)의 성대함과 수도(首都)의 장관(壯觀)이 오늘날보다 더한 적이 없었습니다.

人生一世 不滿百齡焉 鬱鬱久居此乎 不屑國家之遠 山河之隔 欲一超直入大明國 欲易吾朝風俗於四百餘州 施帝都政化於億萬斯年者 在方寸中 貴國先驅入朝 依有遠慮無近憂者乎 遠方小島在海中者 後進輩不可作容許也 予入大明之日 將士卒望軍營 則彌可修隣盟
사람의 한평생이 백년을 넘지 못하는데 어찌 답답하게 이 곳에만 오래도록 있을 수 있겠습니까. 국가가 멀고 산하가 막혀 있음도 관계없이 한 번 뛰어서 곧바로 대명국(大明國)에 들어가 우리나라의 풍속을 4백여 주에 바꾸어 놓고 제도(帝都)의 정화(政化)를 억만년토록 시행하고자 하는 것이 나의 마음입니다. 귀국이 선구(先驅)가 되어 입조(入朝)한다면 원려(遠慮)가 있음으로 해서 근우(近憂)가 없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먼 지방 작은 섬도 늦게 입조하는 무리는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대명에 들어가는 날 사졸을 거느리고 군영(軍營)에 임한다면 더욱 이웃으로서의 맹약(盟約)을 굳게 할 것입니다.

余願只願顯佳名於三國而已 方物如目錄領納 且至于管館 國政之輩 向日之輩皆改其人 當召分給 餘在別書 珍重保嗇 不宣
나의 소원은 삼국(三國)에 아름다운 명성을 떨치고자 하는 것일 뿐입니다. 방물(方物)은 목록대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국정(國政)을 관장하는 무리는 전일의 사람들을 다 바꾸었으니 불러서 나누어 주겠습니다. 나머지는 별지에 있습니다. 몸을 진중히 하고 아끼십시오. 이만 줄입니다.

天正十八年庚寅仲冬日秀吉奉復書
천정(天正) 18년[19] 경인 중동(仲冬) 일(日) 수길(秀吉)은 받들어 답서함

ㅡ 《조선왕조실록》 선조수정실록 25권(선조 24년, 1591) 3월 1일 네 번째 기사[20]

쉽게 말해, 일본을 통일한 나는 킹왕짱. 중국도 정복하려는데 너네가 협조 좀 해야겠음. 편지랑 주는 거 잘 받았음. 정도의 매우 거만한 답서였다는 얘기. 위의 번역도, 사실은 답신 내의 거만한 행간을 생각하면 아랫사람에게 반말투로 하대하는 쪽으로 읽는 게 더 사실에 가까워 보인다.

2.1.2 조선의 대응

경복궁 근정전
왜인들이 명나라를 침범하고자 한다는 말이 류큐국까지 번져 있고 조선도 이미 일본에 굴복하여 삼백 명이 투항해 가서 길을 인도하기 위한 배를 만들고 있다는 말이 퍼져 있었다.

- 선조실록 1581년 10월 23일

이런 일을 겪은 뒤 귀국한 조선 조정은 일본이 전쟁 준비 중이라는 사실을 간파했으나,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극렬한 대립 중이던 조정은 당파간 세력다툼으로 인해 일본이 침략하느냐 아니냐조차 의견이 갈렸으며 당시 집권당이었던 동인 측의 판단이 맞는 것으로 사료되어 일본은 침략할 가능성이 없다고 결론났다고 배웠을 것이다. 만약 옛날, 즉 최소 제6차 교육과정 이전 국사 시간에 역사 교사의 개인적 지식 또는 그 당시 학계의 다수설을 들었거나 국사를 수능 등의 이유로 대충 배웠다면 말이다.

필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며 풍신수길의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듯 하였습니다.",

ㅡ 황윤길(黃允吉. 정사 正使, 서인)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사의에 매우 어긋납니다. 풍신수길의 눈은 쥐와 같으니 족히 두려워할 위인이 못됩니다"
김성일(金誠一. 부사 副使, 동인)
김성일이 말을 마치자 류성룡이 김성일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황의 말과 고의로 다르게 말하는데, 만일 병화가 있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오?"라고 하니, 김성일이 말하기를, "나도 어찌 왜적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겠습니까. 다만 온 나라가 놀라고 의혹될까 두려워 그것을 풀어주려 그런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ㅡ 《조선왕조실록》 1591년 3월 1일 기사

김성일과 류성룡의 대화는 훗날 동인의 실책을 덮기 위해 가필되었다는 설도 있다. 일본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한 이 발언 때문에 류성룡과 퇴계 이황의 수제자 자리를 다투던 거유인 김성일은 두고두고 당파싸움에만 집착하여 나라의 흥망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간신으로 욕먹는다. 이 발언이 실상 조선의 전쟁 대비와는 별 상관도 없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고 임진왜란 기간 중 보여준 탁월한 수완과 업적조차 폄하된다. (김성일이 아니었으면 홍의장군 곽재우는 지리산 은거기인이 되거나 역적으로 죽었을 것이다.) 일반인들의 역사 인식과 달리 조정은 1555년의 을묘왜변 이후 일본의 침략 위험성을 인식하고서 꽤 많은 대책 마련을 했고 1592년 개전 직전까지 쉴새없이 진행시켰다.

특히 왜군을 직접적으로 상대할 남부 지역의 방어에 공을 들였다. 경상감사 김수와 전라감사 이광, 충청감사 윤석각은 각기 성곽을 전면적으로 보수하고 군비를 확충했다. 특히 김수가 두드러졌는데 영천, 청도, 대구, 성주, 부산, 동래, 진주, 안동, 상주와 경상 좌우병영성이 모두 증축되거나 새로 쌓았다. 단순한 왜구의 노략질 정도로 보지도 않았다. 기존 왜구는 대마도를 거점으로 섬이 많은 경상 우도와 전라도 지역을 침탈하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만약 왜구의 침탈 정도로 생각했다면 경상 우도와 전라도 지역을 집중적으로 강화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정은 왜구의 주 공격루트가 아니었던 경상좌도 방어에도 심혈을 기울여 2개의 첨사진만 있던 부산-동래 방면에 1개 만호진을 통합시키고 6개 만호진을 이전시켰다.

김수는 축성 인원 확보를 위해 백성들 뿐 아니라 유생들까지 동원했다. 향교 교생을 뽑는 고강을 엄격히 실시하여 낙강유생들을 모조리 충군시켰고 이로인해 지역 사족층과 크게 충돌하기도 했다. 선조는 재위기간 내내 방군수포의 폐단을 잡으려고 적잖이 노력했다. 이로 인해 1570년대부터 부족한 군액을 보충하는 작업이 행해졌고, 1590년대에는 30만 이상의 군액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한 백성들이나 식자층의 시각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김수는 사족층과 사이가 틀어지면서 전쟁 발발 후에 곽재우와 크게 충돌했고 선조는 성을 높일수록 민심이 피폐해졌다며 전쟁 준비로 인한 민심 이반을 인정했다. 의병장 곽재우의 첩 장인인 이로는 동년배 친구였던 류성룡에게 서신을 보내 "우리 고을 앞에 정암진이 있는데 왜적이 어찌 날아서 쳐들어올 수 있겠나?"며 축성에 반대했다.[21] 전근대 시대의 대규모 토목 공사가 민간에 끼치는 피해를 감안하면 김성일의 주장은 당대의 여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조정은 꿋꿋이 전쟁 준비를 진행시켰고 이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조선이 반격을 감행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임진왜란 초기에 맥없이 무너졌다는 이유로 조선이 찌질하다고 비판하는 사람 중에 초기 전역을 면밀히 살피고 여타 전쟁사와 비교해본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조선의 진짜 문제는 왜군의 규모를 기껏해야 1만에서 수만 정도로 예상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 당시로선 이는 어쩔 수 없었다. 당시 조선 조정이 참고할 수 있는 사례는 1555년의 을묘왜변에 크게 거슬러 올라가도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었다. 역사를 통틀어봐도 거의 20만에 육박하는 대규모 침공은 고려 초 거란과의 전쟁이 가장 최근이었다. 그 이상 올라가면 삼국시대 수당과의 전쟁이다. 중국을 지배한 유목민족 몽골조차 여몽전쟁 때 이 정도 대군을 파병하진 않았다. 게다가 왜구의 노략질 수준이 아니라 일본의 중앙 정권이 작정하고 바다를 건너서 대규모 병력을 한반도에 보낸 사례는 731년 신라 성덕왕 때 후지와라 나카마로가 이끄는 300여척의 일본 함대가 신라를 공격했다가 격퇴당한 게 마지막이었다.

이이의 십만양병설이 유명하지만, 현재로서는 실제로 이이가 이런 주장을 했는가에 대하여 의문이 많다. 나중에 서인이 정권을 잡은 뒤에 개수한 실록에 "이이가 십만을 양병하자고 했으나 류성룡이 반대하였다."라는 단 한 줄만 적혔다. 게다가 당대 기록에는 나오지 않고 후대의 이이의 제자들이 제기한 설이었다. 더욱이 병농일치제였던 조선은 편제상 10만 이상의 군대를 전시에 징집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개전 1년 후 조선이 정규군만 17만 이상을 동원한 걸 보면 10만 양병설의 진의는 더욱 미심쩍어진다. 현재 국사편찬위원회에서도 이런 주장을 회의적으로 본다. 오히려 이 분야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민덕기 교수는 이이의 발언 시점(1580년대)을 주목하며 이 당시에는 남쪽의 왜구보다 북방의 니탕개를 위시한 여진족의 위협이 더 위협적이었다는 점을 들어 십만양병설이 임진왜란을 겨낭하고 제안한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이이의 십만양병설에 대한 논란은 이이 항목을 참조하기 바란다.

2.1.2.1 조선 육군

당시 조선군은 실제로 군대에 가서 복무하는 정군들의 대거이탈로 이름만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나마 정원이 실제 복무하는 군인과 일치하는 병영은 중앙의 근위대, 신립이 이끌던 북방기병대, 4군 6진과 평양을 지키던 북방군뿐이었다. 이외에도 약 6만~8만명의 5위군이 있었지만, 이들은 훈련을 받지 못하고 놀고있은지 오래였고, 사실상 조선의 육군은 북방기병대, 북방군과 근위대뿐이었다.

국정의 혼란과 군역의 문란으로 조선군의 병력은 줄어들었긴 했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조선은 상당수의 정예병력을 거느리고 있었다 임진왜란의 전투기록으로 보건데, 조선군은 약 8천명의 신립의 정예기병대 (북방에서 전투경험보유), 1만여명의 북방군, 8천여명의 충청도 야전군단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 같다. 보통 조선군이 병농일치였다고 하지만 이들은 직업군인이었으며, 여진족과 왜구를 상대로 상당한 실전경험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외에도 3금청 (내금위, 우림위, 금군)의 근위군과 근위기병대인 겸사복등 약 4천명의 근위군까지 합하면 조선의 정예군은 2만까지 늘어난다. 북병사 한극함이 거느리고 있던 6진의 궁기병들과 팽배수들까지 합하면 조선은 무려 3만8천여명의 실전경험이 있는 정예병력을 거느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전쟁초기의 탄금대 전투, 평양성전투, 임진강 전투 등에서 전멸(...)해 버려서 전쟁내내 조선왕조는 정예병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2.1.2.2 조선 수군

수군은 상황이 조금 나아서 5만 4,000명의 정원중 절반이 넘는 3만명이 복무중이었고, 전선도 충실히 갖춰저 있었다원균이 있었을 뿐이지. 특히 경상좌수영과 우수영은 도합 180척의 판옥선을 보유하고 일본에 침입에 대비하고 있었고, 전라좌수영과 우수영도 약 70척의 판옥선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박홍의 도주와 원균의 수군해산으로 인하여 조선수군은 전체수군의 2/3을 날리게 되었고, 이런 젠장 전쟁발발 2주후엔 전투가능한 수군이 겨우 1만, 군선 150척이 되는 형편이된다. (군선이라고 썼지만, 판옥선을 포함한 연락선, 보조선을 다 더한 수치다.) 불행중 다행으로 조선 수군은 전라좌수사 이순신, 우수사 이억기, 군관 나대용등 유능한 장교들을 대거 보유중이었으며, 좌수사 이순신의 노력으로 1만의 수군들도 모두 노련한 정예군이었다.

2.1.3 일본의 내부 사정

21941_14034_2919.jpg
▲ '조선정벌대평정도', 가운데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양쪽으로 조선 침략에 참여한 각 지방 영주들이다.

히데요시의 막료 이시다 미츠나리는 전국 통일 후 무사들의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부하 제장들의 여력을 해외에 사용하기 위해서 조선 침공을 계획했다고는 하나 그 역시 성공 가능성에 의문을 표했고, 고니시 유키나가 등 참전 주요무장도 회의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히데요시 만큼은 늙은 모친에게 "올해 가을은 명의 황궁에서 보내실 수 있을 겁니다." 라고 말하는 등, 전쟁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은 면이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애초에 실패와 패전을 염두에 두고 계획을 짜는 사람은 드물다. 그렇다면 히데요시의 의도는 정말로 조선과 명을 정복하는 것이며, 성공하면 일본 내에서 자신에게 반항적인 군벌 따위는 무시해도 좋을 정도의 국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목적이었을 것이다. 만약 성공했다면 그대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아예 일본 본토 따위는 신경 쓸 필요가 없어질 정도로 말이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히데요시가 조선 침공을 발표했을때 도요토미 히데츠구 이하의 군대는 오슈진압[22]에 동원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즉 일본의 통일도 다 이루어지지 않았을때 조선 침략을 계획한 것으로 이는 소속 무장이나 동맹 다이묘에게 상당한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조선에 파병된 군대는 히데요시파 군대가 중심이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처럼 대표적인 히데요시 다음가는 대영주 이에야스에게는 아예 병력을 요청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임진왜란에서 입은 타격은 나중에 히데요시파가 도쿠가와파에게 패배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때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억지로 참전시키려 했다면 일본 내부에서 내전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일단 최선임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였으나 병력의 근간이 되는 고쿠다카는 오히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30~40만석이 더 많아서 도요토미가 도쿠가와를 힘으로 찍어 누를 수 없는 형국이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무엇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에게 전쟁에서 이기고 외교로 패배해서 히데요시에게 동조했을 뿐이다. 즉 히데요시에 대항하여 오다 노부카츠를 오다 가문의 후계자로 내세우고 이를 명분으로 하여, 킷포시를 오다 가문의 후계자로 내세우고 이를 명분으로 삼은 히데요시 군에게 코마키 나가쿠테에서 대승하고 히데요시 측의 이케다 츠네오키를 전사시키기까지 하며 아예 바른다. 그런데 루이스 프로이스에게 지능이 모자르다는 평가까지 받은 오다 노부카츠가 히데요시 편으로 들어가면서 전쟁의 명분이 사라지고, 히데요시 측에서 자신의 여동생과 자기 어머니를 인질로 바쳐가며 동맹을 맺은 것. 즉 애초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가 건드릴 수 없는 세력이었다. 게다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는 당대 최강이라는 장수인 혼다 타다카츠등의 도쿠가와 사천왕으로 대표되는 명장들도 수두룩했다.

그 이외에도 북륙지역의 강력한 다이묘였던 우에스기 가문 역시 히데요시가 직접 가서 동맹을 권고한 세력이었지 패배하고 항복한 것이 아니며 히데요시 마저 크게 두려워했을 정도로 강한 세력이다보니 역시 건드릴 수 없었기에 사후 임진왜란에는 개전하자마자 3개월 정도 나오에 카네츠구를 대표로 하여 적은 병력만 보내어 웅천 왜성 하나 쌓고서 3개월만에 퇴각한다. 그리고 조선에서 책이랑 사람들 납치해 간다, 동북의 모가미 역시 히데요시에게 패배한 적도 없고, 강력한 세력이다보니 군량만 보내고 역시 임진왜란에 참전하지 않는다. 북륙의 마에다 가문 역시 어느 정도는 우에스기를 견제하는 의미도 있었지만 역시 마찬가지. 다테 같은 경우에는 어쨌든 패배했다고도 볼 수 있는 세력이라 소수의 병력만을 요청했는데 다테 마사무네가 자발적?? or 히데요시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다수 병력을 보낸다.[23] 반면에 동북 지역이라도 난부나 츠가루 같은 경우에는 히데요시에게 패배한 애들이라 다수 병력을 동원. 즉 결론적으로 엄밀히 말하자면 모리든, 시마즈든, 우키타든 히데요시에게 패배하고 항복하여 종속됐던 세력들만 임진왜란에 참전시킬 수 있었던 것이지, 히데요시에게 전쟁으로 패배해서 항복한게 아닌 대등한 다이묘들은 참전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조선통신사가 귀국한 직후인 1591년 9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조선 침략의 기일을 정해 통보했다. 그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원정이 성공하면 명나라 땅 가운데 20주를 주겠노라"고 약속하기도 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1년 규슈의 북단 나고야#s-2(名護屋)에 조선 침략을 위한 전진기지를 건설하는 공사에 돌입한다. 거리나 지형으로 볼 때 조선으로 가는 침략군을 실어 나르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그는 규슈의 다이묘들에게 기지를 건설하라고 명령하고 가토 기요마사를 축성 책임자로 삼아 속도전을 벌였다. 1591년 10월에 시작한 공사는 2달 남짓 만에 끝났다. 그동안 병력과 물자 수송에 필요한 큰 배를 건조하고 승조원들을 차출하고 군량을 운반하는 작업이 병행되었다.

당시 히데요시의 동원 명령으로 나고야에 결집, 후에 조선에 침략한 일본군의 주 병력 편제 및 참전 장수들의 목록. 흔히 세간에는 20만이 침략에 동원됐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16~17만 정도. 호왈해서 부풀렸을 가능성이 짚다. 당시 일본에서 히데요시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약 30만 정도였다고 추정하는데 그 중의 절반의 병력이 동원됐다는 것은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에 나름대로 사활을 걸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24]

아래 편제를 보면 서일본 내의 주요 무장들은 거진 다 참가 했으나 동일본 내의 무장들의 참여도는 비교적 낮다. 하지만 개중에도 참전했거나 하다못해 군량이라도 댄 케이스는 적지 않다. 서일본에서 주요무장은 주코쿠 지방의 모리 가문, 간사이 지방의 우키다 히데이에, 큐슈 섬의 시마즈 가문, 시코쿠 섬의 초소카베 모토치카인데 이들은 전부 참가했다. 그러나 동일본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필두로, 호리 히데하루, 마에다 토시이에 등 빠진 이들이 적지 않다. 다만, 다테 마사무네, 우에스기 카케카츠[25], 난부 노부나오[26] 등은 이후에 참전한 것으로 나와 있다. 다만 우에스기 카케카츠는 본인이 아닌 나오에 카네츠구 휘하 일부 병력만 보낸다. 모가미 요시아키는 참전하지 않았으나 군량을 내놓아야 했다. 가모 우지사토[27]는 병 때문에 빠졌고 왜란 중에 죽었다. 나중에 히데요시의 유언 집행인으로 유명해진 오대로의 참전 여부만 보자면 서일본의 모리 테루모토, 고바야카와 다가카게, 우키타 히데이에는 참전했으나, 동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마에다 토시이에가 빠졌다. 다만, 훗날의 에도 막부[28]와는 달리 히데요시 정권 하[29]에서 다이묘 간 영지 격차는 그리 크지 않았다.

또 다른 특징은 히데요시의 시종 출신들이 선봉장을 맡은 것이다. 아버지의 신분조차 불분명한 히데요시는 가문 대대로 충성을 바치는 가로들이 없었다. 때문에 시종들을 중용했는데, 서일본을 평정한 이후 이렇다할 공로가 없는 시종들에게 서일본의 영지를 나누어 주고 다이묘로 신분을 격상 시켰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즐비한 네임드 무장들을 배제하고 이들 시종 출신 다이묘에게 선봉장을 맡기거나 기타 주요한 자리를 주었다. 히데요시의 시종 출신 다이묘들은 히데요시의 처조카인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필두로 가토 기요마사, 가토 요시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가등청정이라는 한자이름으로 실린 가토 기요마사의 명성이 조선에서는 더 높지만,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히데요시의 처조카이다. 카토 기요마사와는 이미 출발부터 다르다. 실제로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나이도 더 많고 힘도 쎄서 시종 시절부터 두목급이였다. 시즈카다케 전투로 처음 다이묘로 임명될 때부터 후쿠시마만 영지 5천석이 주어지고 가토 기요마사를 포함 나머지는 죄다 3천석. 임진왜란 이후에도 후쿠시마가 이들 시종출신의 리더로 활약한다.

이들은 위에서 언급한 네임드급 무장에 비해 영지도 작고 듣보잡에 가까웠는데 히데요시는 이들에게 선봉장 자리를 주며 키워준다는 의미가 강하다. 1군 대장 고니시 유키나가와 3군 대장 구로다 나가마사는 그들의 아버지가 히데요시의 부하로 활약했고, 임진왜란때야 처음으로 중요한 역할을 맡은 젊은이들로 역시 히데요시의 직계 부하를 키워주기 위한 배치다. 즉 1,2,3,5군 대장은 일본내에서는 네임드 무장이라고 할 수 없는 무명의 젊은 장수들이다. 심지어 우키다 히데이에는 가문빨은 상당하지만 히데요시의 양자 버프로 10대 중반의 어린 나이로 8군 대장이자 총 사령관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사정을 알턱이 없는 조선에서는 가토 기요마사고니시 유키나가가 일본을 대표하는 장군 정도로 착각을 하였다. 이 때문에 일종의 외교사절인 사명대사가 가토 기요마사에게 "네가 히데요시를 죽이고 왕을 하라!" 라고 설득하게 된 것이다. 가토 기요마사가 "천황은 만세일계이기 때문에 내가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라고 하자 사명대사가 "히데요시가 왕이 아닌건가? 천황은 또 누구고?"라고 하는 촌극이 일어났다.인용 오류: <ref></code> 태그를 닫는 <code></ref> 태그가 없습니다와 쇼군 또는 관백과의 관계에 대하여 비교적 정확히 알고 있었으며 이를 참람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사명대사는 국제관계에 대하여 잘 모르는 중이기에 이러한 정보를 접하기 어려워서 이런 오해를 할만한 개연성이 충분하다.</ref>

2.1.4 일본군 병력 구성

부교로 끝난게 아니라 실제 전투에도 참전했다. 그게 행주대첩.
히데요시의 명으로 주요 성곽의 수호 등과 제2차 진주 성 전투에 참가하여 고토 모토쓰구(後藤基次)가 개발한 귀갑차의 설계에도 참여했으나, 이시다 미쓰나리와의 불화로 귀국했다.

후속부대가 16군까지 있었으나 절반은 본토에 남아 만약의 상황을 대비했고 그 중 일부는 쓰시마와 이키 섬에 주둔해있었다.

일본의 지역을 보면 서쪽부터 큐슈, 시코쿠, 주코쿠, 간사이, 주부, 간토, 도호쿠, 홋카이도 지역등 8분할 된다. 그런데 위의 1군~9군의 지역을 보면 서쪽 지방의 다이묘들만 참전했다. 동부 지역의 다이묘들은 10군~16군 등으로 예비대로 편성되었고, 뒤이어 참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3 전쟁의 경과


임진왜란 당시 조선, 명, 일본 각국의 갑옷 무장 비교

그러나 우리나라 사극에서 주로 묘사되는 명나라군은 중무장 병사이고, 아시가루들은 경무장 병사이며, 조선군은 잡병에 전립만 썼다.

3.1 전쟁의 시작

결국 일본은 침공했다. 그동안 조선이 비변사를 세우고, 성곽을 수리하는 등 대비책이 없진 않았으나 이 정도의 대규모 침공을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파일:YiXc5KJ.jpg
1592년 4월 13일(양력 5월 23일)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 700척 18,700명(경상우수사 원균은 90척, 경상감사 김수는 400척으로 보고)을 이끌고 제일 먼저 침공했다. 갑작스레 적의 대군을 맞은 부산진 첨사 정발은 매뉴얼대로 백성들을 성안으로 대피시키고 배 3척을 자침시킨(전선, 중선, 방패선 각 1척) 다음 600이 채 안되는 병력으로 끝까지 싸우다 전사했다. 개전 직전 서평포(부산 사하구 일대)와 통합된 다대포진 군사들도 첨사 윤흥신의 지휘아래 14~15일 이틀에 걸쳐 싸우다 전멸했다. 남동부 방위 중심지인 동래성에는 개전 하루도 채 되지 않은 4월 14일 경상좌병사 이각과 양산군수 조영규, 울산군수 이언성의 병력이 집결했다. (경주판관 박의장과 밀양부사 박진은 도착하기 전에 동래성이 포위되었다.) 경상좌수사 박홍도 군사들을 소집해 육전에 나섰다. 왜침이 대비한 매뉴얼이 사전에 있었고 급박한 상황에서도 작동한 것이다. 문제는 왜군은 너무 많고, 또 강했다. 동래성도 하루를 버티지 못했고 동래성 북쪽 소산역에 진을 친 박진의 500 군사도 압도적인 숫적 열세에 손쉽게 무너졌다.

경상좌수사 박홍은 동래성 구원에 실패한 후[33] 경상좌수영의 함선을 자침시킨 후 경주로 퇴각했고 경상좌병사 이각은 자신이 지휘해야할 울산의 경상좌병영 군사들을 내버린 후 북쪽으로 달아나 버렸다.

분군법에 따라 동래성을 지키러 떠난 양산군수 대신 양산을 지키던 영산현감 강효윤은 4월 17일 일본군 선봉대의 공격을 받자 북문으로 빠져나와 밀양으로 퇴각했다. 4월 18일 고니시군의 본대가 양산에 입성했다. 1차 방어선이 무너지자 박진은 영남에서 북상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하는 낙동강변 험로 황산과 작원 잔도에 2차 방어선을 쳤다. 진주에서 개전 소식을 접한 경상감사 김수는 4월 16일 낮 밀양에 도착해 도내 총동원령을 내리고 진주와 함안의 군사들을 동원해 박진을 지원하고자 했다. 당시 박진이 거느린 군사는 너무 적어서 황산과 작원 잔도 전체 구간을 방어하긴 무리여서 작원 잔도 끝부분만 차단하고 있었다. 황산잔도를 건넌 고니시군 선봉대는 작원에서 박진군과 교전을 벌였다. 전투는 상당히 치열했는데 선두가 차단된 고니시군 선봉대는 주력 일부를 금병산 능선으로 우회시켜 조선군의 배후를 차단해 포위섬멸을 시도했다. 허를 찔린 박진군은 무너지고 박진은 간신히 빠져나와 밀양성에 불을 지르고 가족을 대패시킨 다음 빠져나왔다. 이로서 영남의 2차 방어선도 무너졌다. 4월 17일 영산으로 물러났던 김수는 18일 박진의 패전 소식을 듣고 초계로 물러났다.

경상우도는 4월 19일 구로다 나가마사와 모리 요시나리의 3번대, 4번대 485척이 김해 죽도에 상륙하면서 본격적인 전란에 휩싸였다, 김해성은 하루동안 치열하게 저항해 4차례 공격을 막아내었으나 초계군수 이유검이 먼저 서문으로 달아나버렸다. 김해부사 서예원이 이유검을 붙잡으려고 성을 나갔다 그대로 진주로 도망치면서 사기가 급격하게 떨어져 밤에 동문을 넘어온 왜군에게 함락되었다. 창원에 있던 경상우병사 조대곤이 지원하려 했으나 급하게 모은 200여명의 병력으로는 성에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초계군수 이유검은 4월 26일 김수에게 참수되었고 병력 운송중에 사고가 생겨 아예 지원도 못간 의령군수 오응창 역시 6월 처형되었다.

한편 유사시 비상연락망으로 쓰이던 봉화가 전달되지 않았다. 선조수정실록 4월자에 실린 경상좌병사 이각의 장계에는 봉수군 오장이 왜선 400척을 목격하고 즉시 보고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봉화 체계가 완전히 작동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34] 그러나 당일 저녁에 한양으로 들어와야 했던 봉화는 들어오지 않았고[35], 여러 설이 있지만 가장 유력한 것은 봉수군이 실수로 반대 방향으로 봉화를 올렸다는 것. 한양의 조정은 4월 17실 신시, 저녁 무렵에나 상황을 파악하였다. 그리고 이 속도는 그냥 마편으로도 도달 가능한 속도인 만큼, 봉화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이 맞다.

제승방략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의견도 있는데 중앙에서 경장을 파견하는 건 진관체제도 똑같다. 진관체제는 소규모 병력이 각지에서 분산되어 방어하게 되어있고 각 진관이 윗선의 허가없이 타 진관을 지원하는 일은 성종대에 법으로 금지되었다. 즉, 일개 고을 내지는 도 단위로 감당할 규모를 넘어선 대규모 공격에 대한 고민이 매우 부족했다. 그런 사태가 일어나면 1~2개 도에서 병력을 모으고 중앙에서 파견한 경장이 이들을 지휘하는게 일반적이었다. 진관체제라고 현지 지휘관에게 대규모 병력 지휘권을 주진 않았다. 그런 면에서 북방 지역은 현지 병사가 지휘하게 하고 남방도 지방군과 중앙군의 역할을 나눠 상당부분 재량권을 부여해 병력을 집결시키고 다중으로 방어선을 구축한 제승방략은 상당히 진보된 제도였다. 왜침이 전례없는 대규모에 속도가 빨랐기 때문이지 제승방략이 병력 모아놓고 경장만 기다리는 제도라서 무너진게 아니다.

또한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군은 오위진법을 기본 전법으로 채택하고 있었는데 이는 북방기마민족과의 투쟁에 적합하도록 고안된 대기병전술로 보병 중심인 왜군을 상대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다. 이 문제는 전쟁 후 명의 절강병법을 받아들인 후에 개선되었다.

4월 18일에는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제2군 2만 2000여 병력이 부산에,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제3군 1만 1000여 병력이 다대포를 거쳐 김해에 상륙, 침공을 개시하였다. 이와 함께 구키 요시다카(九鬼嘉隆),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 등의 9,000여 수군 등 총병력은 약 17만이었다.

3.2 정규군의 붕괴와 파천

상황이 그 상황인데도 당시 조선 조정은 삼포왜란 같이 가벼운 왜구들의 준동으로만 파악하고 있었고, 조선 최고의 명장 중 하나라 칭송받던 이일을 내려보내 간단히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일의 군대가 먼저 상주에서 가토에 의해 패배하였고, 당황한 조정은 북방에서 명성을 날린 신립을 보내나, 그 역시 탄금대 전투에서 패하고 자결했다.

신립이 이끌었던 북 기병의 수효는 사료에 따라 다르나 5천에서 1만 정도로 보이고, 대략 8천으로 보기도 한다. 이 부대는 창기병 편제가 거의 없는 궁기병 위주였다. 궁장 경기병으로 유명한 몽골군이 병력의 5분의 2는 항시 중기병으로 무장한 것을 생각하면, 조선군 기병의 충격력은 상당히 빈약한 상태였다. 조선의 편제상 창기병은 반드시 일정 비율을 갖추어야 했지만, 세조 대에 조선군의 인사고과가 철저히 궁시 위주로 재편되면서 창검의 운용은 사실상 잊혀졌고, 창기병 역시 모조리 궁기병으로 대체됐다.

신립은 전투에 앞서 넓은 들판으로 적을 끌어내어 기병전을 벌이려고 하였으나 패배했다. 신립이 그러한 탄금대를 전장으로 선택한 것에는 여러가지 설이 분분한데, 당시 신립이 지원받았던 병사들의 기량 문제가 크며, 병사들의 기강이 해이하고 심지어 행군중에도 탈영할 정도였고, 이러한 병사들을 이끌고 싸우기 위해 신립은 배수진을 선택했다는 주장이 있다. 반면에 신립이 북방유목민(주로 여진족)과의 기병 전투에서 승리하며 명성을 날린 것을 고려할 때 기병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평지를 고르다 보니 전투장소가 탄금대로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36] 하지만 탄금대 전투 당일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바람에 질척거리는 땅 때문에 기병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어 신립은 지리멸렬하게 패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비가 오면 조총을 잘 쏠 수 있는 것인가?[37][38]

백병전이 전투의 승패를 가른것이 아니다.
조선과 일본 역시 투사무기와 이를 막아내는 대형방패같은 수단을 최전방에 세우고 전열전을 펼치며 싸웠다.
투사병기의 인원중에 20%인지 전체 병사중에 20%인지는 모르겠지만 전체병사중의 20%라는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근거를 기준으로 잡게되면 일본군의 화력이 더 강력할 가능성이 크다.


다만 신립이 받았던 병사들이 저질이라는 말은 연려실기술에만 나오는 말로, 선조수정실록에는 이들은 한양을 지키던 중앙군과 군적에 올라간 병사들로서, 전마를 지급받은 기병 8천여명으로 구성된 부대였다. 거기에 경기도와 충청도의 정병 8천과 합한 1만 6천의 대병력이었다. 따라서 신립의 과오 덮어주기용이다, 기병은 급조해서 만들어지는 병종이 아니다라는 말도 있지만 조선전기 중앙군이란 것이 이 수준임을 생각하면 중앙군부터가 제대로 된 군대가 아닌 오합지졸일 가능성이 크다. 조선군이 저리 된건 오랜 평화와 세조 때 이뤄진 군제 개악이 합쳐져서 이뤄진 결과다. (다만 북방에 있던 조선군의 경우는 여진족들이랑 허구한날 싸웠기 때문에 정예였다.)

신부 프로이스의 일본사에 이 탄금대 전투가 묘사되어있는데, 조선군이 8만이라는 점은 의구스러우나 반월진으로 돌격한 조선의 기병대가 양익에 조총사격을 받고 후퇴했다가 1-2차례 재공격을 가했으며, 일본군이 붕괴하지 않고 창검 따위로 조직적으로 대응하자 조선군이 붕괴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탄금대 전투에 대한 자세한 서술은 #

신립의 공격은 3차에 걸쳐 진행되었으나 1, 2, 3차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조선군은 탄금대에서 대패했으며, 일본측 기록에서는 수급 3천개의 전과를 올렸다. 이로서 한양과 왜군 사이를 가로막는 야전군은 사라졌고 방법이 없어진 선조는 수도 한성을 버리고 북으로 피난을 택한다.

조정은 적군의 수도 공격에 대비하여 우의정 이양원(李陽元)을 수성대장(守城大將)으로 삼아 도성의 성곽을 축성하게 하는 한편 전 북병사(北兵使)였던 김명원(金命元)을 도원수(都元帥)를 삼아 한강을 수비하게 하였으나 실패하고 20일 만인 5월 3일 서울이 함락되었다.

한편 고니시 유키나가를 비롯한 일본군은 최단시간내에 한양을 점령할 수 있었으나 선조를 잡지 못한지라 왕을 사로잡아 전쟁을 빨리 끝낸다는 목적은 실패했고, 최단 시간 한양 점령만을 목표로 하면서 제껴두었던 다른 지역들을 근거로 관군과 의병의 저항이 일어나면서 전쟁의 양상이 달라지게 된다. 특히 경부가도에서 비껴있어서 초기에 아무런 피해를 받지 않았던 조선 최대의 곡창지대 호남이 아래 서술하는 반격의 근거지가 된다.


부산에서 한양까지의 일정

선비 한양 과거 보러 가듯이
중부내륙고속도로

3.3 반격의 시작

그러나 전라도를 중심으로 재야 인사 곽재우, 김덕령, 60세의 고령인 고경명 등이 이끄는 의병이 활발히 일어나고[39] 일본으로부터 건너오는 일본군의 물자와 병력을 수송하던 해군을 이순신 장군이 번번히 격퇴하자 전황은 고착된다. 이순신 장군의 활약과 의병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도 다 아래에서 설명할 권율 장군과 김시민 장군의 활약으로 육로에서 전라도를 잘 버텨냈기 때문에 수군기지도 운용 가능했던 것.

이 과정에서 광해군이 급히 세자로 임명되어 분조를 이끌며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몸소 보여줘, 광해군의 인기가 상당히 올라갔다. 반면 임해군의 경우 부하였던 국경인이 임해군의 처신[40]에 불만을 가지고 임해군을 넘겼을 정도이니 말 다했다. 당시 선조는 분조를 맡긴 자기 아들 광해군마저 경계하는 형상을 보인다.[41]

왕이 몽진하자 도성에 분노한 민중이 들이닥쳐 방화와 약탈이 발생했다.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방화의 주체를 간민과 난민으로 지목하고 있다. 불은 장예원[42]에서 시작해 곧 전체 궁궐을 태워버렸다고 한다.[43]

의주로 피난간 선조는 조선을 버리고 요동으로 망명가려고 수 차례 요동 총독에게 가서 요청하였으나, 너무 빨리 도망쳐오니깐 오히려 일본과 합세해서 중원을 침공하려는걸로 의심한 명이 수행원을 100명으로 제한(사실상 오지말란 소리다)하고 배를 전부 자기들 쪽으로 가져가 버리자 뜻을 단념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요동에서도 조선의 왕이라는 놈이 자기 나라를 버리고 도망간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때 여진을 이끌고 세력을 넓힐 기회를 노리던 누르하치가 입지를 넓히기 위해 몇 차례 원병을 제안했으나 선조는 이를 거절했다. 누르하치가 여진 족 전체를 통일한 것은 1613년의 일이고 대칸의 직위에 오른것, 즉 완전 평정이 끝난것은 1616년의 일이나, 로마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이 때의 누르하치는 약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로 이미 이성량 등의 지원을 받아 거병한지 10년이 넘은 다음 으로, 1586년에 벌써 원수인 니칸 와이란을 죽이고 건주 여진을 완전히 통합하여 건주 여진의 칸이 되었고, 건주 여진의 수도까지 새롭게 축성할 정도로 강한 세를 키운 상태였고, 여진 족 중 가장 강한 라이벌이었던 예허 부와는 사돈 관계를 맺고 동맹을 맺어 사실상 여진족 최강자로서 주변에 대적할 자들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급하다지만 질적으로나 수적으로나 뭐로보나 믿을수가 없는, 임진왜란 이전 최고 주적이었던 여진족에게까지 손을 벌릴 정도로 조선 조정이 분별이 없진 않았으며, 또한 실제로 여진 족에 대한 위협은일본 과는 다르게 자세한 정보 수집을 통해서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으며, 누르하치가 정말 엄청나게 위협적인 인물이라는 것도 이미 파악이 끝난 상태였기에 원병을 거절한다. 일본에는 마상에서 돌격하는 기병이 없으며 가토 기요마사 역시 함경도 이북에서 오랑캐들에게 발려서 진군을 그만 둔 기록이 있으니 원병이 왔다면 도움이 되었을 지도 모르겠지만. 남의 나라 전쟁에 과연 제대로 싸우기는 했을지가 의문이니 선조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고 본다. 당장 연운 16주와 석경당만 봐도...

반면에 누르하치 쪽에서도 파병을 하지 못한게 신의 한수가 되었는데, 파병 제안 다음 해에 사돈 관계를 맺었던 하다 부족과 예허 부 등이 누르하치를 견제하기 위하여 누르하치의 뒤통수를 쳐서 각 여진 부락을 규합, 무려 9개 부족이 연합하여 건주 여진을 침공하는 전쟁이 벌어진다. 이 전쟁에서 대 승리하며 넘볼 수 없는 여진 부족의 부동의 No.1 세력이 되었고, 그를 견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이성량과 명나라는 이미 조선에 파병하고 벽제관 전투로 주력이 터진 상황이라 누르하치를 전혀 견제하지 못하고 오히려 1595년 용호장군으로 봉하며 누르하치를 지원해준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야 명은 그제서야 누르하치를 견제하고자 하였으나 그 때는 이미 늦어버린 상황.


고니시의 부대는 평안도, 가토의 부대는 함경도, 구로다의 부대는 황해도로 진격, 강원도와 황해도 방면으로 모병하러 간 두 왕자인 임해군순화군은 왕자들을 맞이하는데 음식과 물목이 부족하다며 행패를 부리다 같은 조선인의 배반으로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가토의 부대는 이 시점에서 한발 더 나아가 본격적인 중국 침공의 맛보기(?) 차원에서 두만강 너머의 여진족들까지 공격하고 그들의 성 하나를 점령했지만[44], 그 후 여진족의 강렬한 반격을 계속 받자 피해를 최소화 하자는 차원에서 바로 후퇴하고 조선에만 집중하기로 결정한다.

3.4 명의 참전


자금성 태화전

3.4.1 명군의 참전 이유

파일:명나라군대.png

파일:명나라군대2.jpg
(명나라 군대 기록화)

명나라가 임진왜란에 참전한 이유에 관해서는 명백한 사료가 남아있지 않다. 그런고로 여러가지 잡스런 야사들이 많지만 이 전쟁의 목적이나 전략적인 시각에서 보나 참전할 필요성은 명백했다.

우선 상술한 내용을 보면 알다시피, 당장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쟁을 일으킨 궁극적인 목적은 명나라를 정복하여 중국 대륙에 진출하는 것이었지 조선을 정복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본래 조선에 통보한 요구사항도 '조선으로 하여금 일본에 복속할 것과 명나라를 치는데 앞잡이가 될 것' 이었고, 이런 불손한 내용을 그대로 전달했다가 문제가 발생할 것을 우려한 대마도주가 온건하게 돌려 말한답시고 바꾼 것도 '명을 치러 가는데 조선은 명으로 침공할 길을 빌려달라'는 내용이었으므로 어느 쪽이든 일본이 명나라를 침공하겠다는 의사는 분명했다.

또한 당시 명나라는 북쪽에는 북원과 적대적이라 토목의 변이 일어난 적도 있고, 남쪽 국경에는 베트남과도 전쟁을 치뤄 점령했다가 물러난 적도 있다. 게다가 이때까지는 큰 위협은 아니었지만 여진족도 있다. 이런 판국에 일본은 명나라를 정벌하겠다고 대놓고 적대적인대다가 20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데, 조선을 집어삼키면 국력이 더 커지고 명나라와 국경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러면 명나라의 동북 국경에 못해도 수십만 병력을 상시 주둔시켜야 하고 이 막대한 비용을 두고두고 감당해야 한다. 게다가 일본이 북원과 손을 잡고 명나라를 침공한다면 아무리 명나라라도 간단히 막아내기는 힘들 것이다. 반면에, 조선은 건국이후 명나라에 침략은 커녕 절대적인 우호국이었으니, 당연히 조선을 살려두는게 명나라에 이득이 된다. 온 사방이 적국으로 둘러싸이는 건 명나라로서도 결코 바라지 않는 일이었을 것이다.

만약 명나라가 무너지지 않았다면 수백년간 수십만 대군을 주둔시킬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으니 단기적으로는 임진왜란에 참전하는게 명나라 재정에 큰 부담을 주었을지라도 장기적으로는 참전하는 편이 훨씬 이득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임진왜란은 만력제가 동의한 것도 사실이나 더 중요한건 당시 명나라 병부상서인 석성의 적극적인 참전 주장때문이었다. 석성은 홍순언과의 야사가 유명하지만 종계변무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야사는 야사. 실제로는 저런 야사때문에 조선을 도운게 아니라 병부상서를 맡았던 인물인 만큼 당시 명나라의 국제정세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3.4.2 명군의 참전과 역할

아무튼 그 사이 조선의 연이은 요청으로 도 심각성을 느끼고 대규모의 병력을 보내 참전했다. 참전 초기에는 빠르게 일본군을 밀어내며 금세 일본군을 몰아낼 줄 알았으나 오히려 일본군이 종전 협상을 요청할 때마다 그걸 들어주느라 시간을 끌어서 전쟁이 7년이나 지속되게 된 큰 이유가 되었다. 조선군이야 어떤 방법을 쓰던 당장 일본을 몰아내고 싶었겠지만, 명군은 일본이 한반도 전역을 차지하지 못하게만 하면 된다는 입장이였기 때문에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싸우지 않고 공을 세울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을 것이다. 게다가 외교를 담당한게 심유경인 게 문제.[45]

제1차 조승훈의 5천명은 평양성 공격에 실패(7월), 제2차 이여송이 이끄는 4만명이 12월 압록강을 건너 다음해 정월 최신 대포로 포격해 평양성을 탈환(1593.1.27)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무리하게 남하하다가 고양 벽제관(碧蹄館)에서 매복에 걸려 패배하였고, 개성으로 퇴각한 뒤 전선은 임진강을 경계로 교착상태를 벌인다. 그 뒤 일본군은 행주 대첩에서 패배, 북쪽으로는 명군 남쪽으로는 조선군으로 쌈싸먹힐 위기에 처하였고, 명나라와 교섭을 진행하여 결국 한양을 포기하고 후퇴하였다.(1593.5.18)

6239g0y.jpg
하지만 명군의 참전은 분명히 의의가 있었고, 벽제관 전투, 사천성 전투와 같은 몇몇 패배한 전투가 있기는 하지만 평양성 전투, 직산 전투처럼 승리한 전투도 있는 것을 보면 명군이 아예 못싸운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명군이 형편없는 군대였다면 전쟁 중 조선에서 명군의 편제와 교리, 무기를 다급하게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특히 이여송이 평양을 우수한 화력과 기술력, 전략으로 점령했을 때, 일본군은 정말 심각한 패닉에 빠졌고 조선군의 사기는 고조되었다. 게다가 일본군은 야전에서 명군과 붙을때마다 박살이났기에 상대가 명군이라서 도망치는 경우도 많았다.[46]. 당장 고니시가 평양 점령 후 선조를 추격하지 않은 원인의 근본 원인은 공세종말점에 도달한 고니시 군의 상태이긴하나 명군의 참전에 대한 소문이 심리적으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아마 고니시군이 지치지 않고 명의 참전에 대한 소문도 없었으면 이순신이나 조선 육군의 활약도 의미 없이 전쟁이 끝났을 지도 모른다.

결론적으로 명군은 그럭저럭 제 역할을 해냈으며,[47] 전란중 각지에서 명군과 조선군이 연합해서 활약했다. 명군의 참전으로 인해 조선군의 사기는 크게 올라갔다. 그러나 전쟁 막바지에는 유정과 같이 명 육군이 전투를 회피하는 일이 빈번히 생겨 이순신 장군이 조금 고생하기도 한다. 반면 명 수군을 이끌던 진린은 유정과 달리 이순신 장군에게 끌려다니며 같이 싸우긴한다.

더불어 명군이 대규모의 육군을 파병하게 되면서 조선은 그때까지 유지하던 군인들을 고향에 돌려보내며 숫자를 줄이게 된다. 병농일치제인 조선에게 있어 생산 가능 인구를 군대에 잡아두는건 국가 생산력에도 영향이 미칠 수밖에 없는 부담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란으로 조선 경제는 굉장히 피폐해진 상태여서 군인들을 고향에 돌려보내어 농사짓게 하는일이 급했다. 한때 17만에 육박했던 조선군은 명군의 참전 이후 크게 줄어든다.

따지고 보면 임진왜란 당시의 명군은 후반의 조선 조정의 주요 딜탱 역할을 수행한 셈이고, 조선의 수군, 근왕병, 의병이 서폿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정유재란 즈음에는 숫적으로 명군이 주력이 되었다.[48] 임진왜란 당시에 조선군은 최대 17만, 명군은 약 5만이었지만 정유재란 당시에 조선군은 약 3만, 명군은 최대 11만에 달했다.

이 외에도 명군이 아니라 명나라가 조선에 큰 도움을 준 바가 또 있다. 가령, 임진년 이후부터 명나라는 산동 등지에서 군량을 조달하여 현지의 명나라 병사들과 조선인들에게 뿌렸는데, 이 덕에 전쟁과 기근[49]에 따른 조선의 식량사정이 나아졌다. 사실 명나라 역시 자국 군대가 조선에 끼친 바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배려하는 의미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때 지원한 식량은 후일 조선에서 환대미라 하여 다시 상환했다.) 이것만 보더라도 명의 지원은 2차대전 당시 미군랜드리스에 버금간다고 볼 수 있다.

선조는 이후 재조지은이라며 명군을 드높이는데 이는 명군의 역할이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으나 당시 선조가 조선군의 업적을 깡그리 무시한데는 정치적 입장도 반영되어 있다.[50]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준할 레벨이다. 한국의 TV 드라마나 미디어에서는 민족주의+근대 이후로 중국을 멸시하게 된 풍조+사대주의에 대한 반감 등으로 명군의 활약을 묻어가는 경향이 강한데, 백성에 대한 횡포와는 별개로 명군은 분명 왜군을 격퇴하는데 어마어마한 도움을 줬다. 그리고 백성에게 패악질을 한게 잘한건 결코 아니지만, '끝까지 저항한 지역은 민간인까지 학살하는게 기본 옵션인[51] 왜군'과 '구성원 개개인의 도덕적 해이와 일탈로 패악질을 하는 명군'을 같은 레벨로 볼 수는 없다.[52] 게다가 명군 개개인 단위의 횡포와는 별개로, 명나라 조정은 정확히 말하면 만력제 공식적으로 조선에 식량까지 지원해줬다. 또한 징비록에서는 백성들이 굶어죽어가자 자기네 군량 50석을 내어줬다는 기록도 있다.[53]

명나라는 피해를 준 부분이 있지만 분명 도움이 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선조가 재조지은을 외친데에는 전란으로 인해 왕권이 땅에 떨어졌다는 점을 유의해야한다. 선조는 전란극복의 공을 자국의 전쟁영웅이 아니라 명나라에서 찾았는데 그 이유는 명나라를 높이 세우면서 명군을 요청한 자신의 공을 인정해달라는데 있다. 이후 조선 조정은 청조의 감시까지 피해가면서 경복궁 뒤뜰에 대보단을 만들어서 새벽에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명군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이기도하지만, 이것 역시 인조가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면서 청나라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하자 청에 대한 반발 심리 역시 적용된 것이다.

3.4.3 명군이 악평을 들은 이유

이처럼 참전한 만큼의 몫을 톡톡히 해준 명군이지만 후대에 이르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고 민폐만 끼친 양 묘사되기도 한다. 이는 명군의 입장상 적극적인 전투 참여가 적었고[54] 벽제관 전투에서 패전하여 전선을 고착화시킨 것도 있지만, 명군의 심각한 약탈과 엉망진창인 군기의 역할이 컸다.[55][56] 그리고 수천 문의 화포를 동원해 성 안에서 방어만 하고 있어도 적 지휘관이나 부대를 전멸시키던 과거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쇠퇴하고 있었다.[57][58]

게다가 징비록 등 여러 신뢰할 만한 사료에서는 명군의 장수들이 조선의 장수와 관료를 폭행하거나 무례하게 군 일이 많아서[59] 애를 먹게 했다고 기록돼 있는데[60], 이렇게 명군이 장수와 병사 할 것 없이 조선의 조정, 백성들에게 일관되게 나쁜 모습을 보여준 탓에, 명은 멸망의 원인이 됐을 정도로 성심껏 자국의 역량을 다 들어바쳐서 조선을 도와주고도 비난받는 꼴이 됐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중국인들은 임진왜란 관련 창작물에서 명군이 나쁘게 나오는 걸 보고 도와주러 온 자국 군대를 욕하는 한국인들이 뻔뻔하다며 비난할 정도다. 당시의 명군은 기강이 엉망이었고, 여러 지방에서 온 장수들이 군벌처럼 병사를 거느린 탓에 상호 협조나 전략적 교류가 제대로 되지 않는 문제점이 있었다. 실제로 몇 년 안가 모문룡 같은 막장스러운 장수[61]가 나타난 것도 명군의 말기적 상태를 보여주는 좋은 예.

약탈과 보급상 무리수가 발생한 이유를 살펴보자면, 명나라 군대의 규모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명나라 군대도 사람이니까, 식량은 먹어야 살기 때문이다. 명나라 군대가 식량을 조달할 방법은 2가지가 있는데, 조선에서 돈을 주고 사먹는 방법과 중국에서 조선까지 식량을 운반하는 방법이다.

첫번째 방법이 불가능한 이유는, 명군의 식량 보급이 명의 은본위제를 이용해 식량을 구매해서 사용하는 방식에 상당부분 의존했는데 조선은 이때까지도 화폐경제가 발달하지 않아 그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명은 중기 이후로 식량을 직접 운반하는 방식을 포기하고 민간 상인을 이용해 식량을 운반하도록 하는 체제를 구축했다. 즉, 명의 중앙정부가 직접 군량을 군대가 있는 곳까지 수송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 상인들이 군량 수송을 맡겨서 병졸들에게 은을 지급하여 이것으로 알아서 식량을 사먹도록 한 것이다. 이는 명이 은본위 경제체제를 구축한 것과 맞물려서 상당히 효율적으로 돌아갔고 상업을 활성화시키는 부수적인 효과까지 얻었다.[62] 그러나 이러한 명의 병참체계는 조선에서는 활용할 수가 없었다. 조선은 아직 현물경제체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63]

결국 두번째 방법인 직접 수송을 시도했는데, 이것은 실로 엄청난 노동력을 요구하는 힘든 작업이었다. 명은 자국 상인들을 끌어들여 보급을 해결하려 했지만 조선까지는 너무 멀었기 때문에 협조를 많이 얻지 못했다. 거리가 너무 멀었기 때문에 수지타산이 맞지 않고 위험요소가 많았기 때문에 협조하는 상인들이 적었던 것이다. 협조하는 상인들도 이제까지 하던 대로 요동까지만 식량을 수송해 놓아서, 결국 요동에서부터 조선까지 식량을 운반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러한 문제는 조선에게도 존재했다. 조선의 수송체계는 수운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수운체계 하에서 명군의 주요 기지인 평안도는 예외였기 때문에(공교롭게도 '명의 사신을 맞이할 때를 위해서' 라는 이유였다) 수운이 제대로 형성된 지역이 아니었고[64], 따라서 기껏 요동까지 식량을 실어와도 이걸 수운을 통해 전선까지 운반할 능력이 마련되지 않은 것이다. 황해도 일대에서 배를 끌어왔지만 이것도 수량이 부족했다. 결국 육상으로 병참을 대야 했는데, 그 결과 수십만의 조선군 및 백성들이 식량을 나르다 지쳐서 죽는 상황이 전개되어 버린 것이다.[65] 임진년 17만에 달하는 군대를 동원했던 조선이 이후 동원력이 점점 떨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조선은 말 그대로 필사적으로 식량을 공출했지만 그 식량을 제대로 실어 나르기가 너무나 힘들었고, 후방 거점에 쌓여서 제대로 수송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명군 참전 이후 의병들이 줄어든 것은 이런 사정도 있는데, 상당수의 의병들도 이 수송작업에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현지보급을 통해 병참을 수행하는 것이 현실적이지만, 이미 임진년 전란을 거치며 관야에 비축한 식량은 남아난 게 없었다는 게 또 문제. 약탈없이 현지보급이 이루어지려면 사회지도층 내지는 관야에서 식량을 제공해야 하지만 이미 그런게 남아난 상황이 아니었다. 여기다 상국의 구원병이라는 오만함까지 있었기 때문에 약탈에 가까운 현지조달이 일상화되었다.

명은 조선에게도 식량을 사들일 것과 은광을 개발해 은을 채굴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전란으로 혼란스러운 조선 입장에서 이를 해결하는 것은 무리였다.[66] 여기에 이런 군량 수송을 맡은 명 상인들이 식량을 착복하는 행위가 자행되어 보급문제를 심화하기도 했다.[67]

여기에 명군의 군기마저 매우 나빠서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 당시 명군은 내몽골만주와의 국경을 지키는 몽골인여진족 그리고 다우르족(거란잔존세력) 혼성부대인 북병과 조총홍이포로 무장한 남병이 있었다. 북병은 주로 기병이었고 거의 주축은 몽골기병이었으며 남병은 보병포병이었다. 여기서 북병은 대부분이 말도 안 통하던 오랑캐 출신들로 기강이 엉망이었으며 되려 평양을 몽골 기병대가 약탈하기까지 했다. 실제로 조선은 명군에 대해 그나마 군기가 살아있던 남병은 선호했으나 북병은 약탈이 너무 심하다면서 남병 중심으로 지원군이 왔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유성룡도 이 부분을 징비록에서 수시로 불평하고 있다. 조총홍이포 그리고 불화살 등의 화약으로 무장한 명나라 남방군은 승률도 높고 조선군과 같이 싸우는 데 적극적이었던 데 반해 정작 이여송이 직접 통솔하는 북군은 전투를 회피했다는 것이다.[68]

이런저런 이유로 명군은 약탈을 자행했고, 이것이 명군에 대한 이미지를 극히 나쁘게 하여 후세에는 한것도 없이 짐만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약탈의 정도만 따지면 일본군이 심하면 심했지 당연히 덜하진 않았다.[69]

물론 이에 대해서 명군을 그럼 배제하면 되지 않느냐는 의견도 있긴 했지만, 그럼 전쟁은 조선이 패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의병들은 일본군을 상대로 일정 수준 이상의 활약을 기대하기 어려웠고[70], 정규군도 개편이 이뤄지기 전까지는 수성전에 치중했다. 그렇다 보니 조선으로서는 명군을 어떻게든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사실상 의병들보다 정규군이 주전력이자 활약을 많이 하였는데 정규군마저 사기와 훈련도가 그렇게 높지 않아서 조선이 자력으로 일본군을 이길 수 있을지는 의문인 상황이었다. 단적인 사례로 고대일록(孤臺日錄) 1592년 6월 15일을 보면

○ 6월 15일 계묘(癸卯) 충청도 순찰사(忠淸道巡察使) 윤선각(尹先覺)ㆍ전라도 순찰사(全羅道巡察使) 이광(李洸)ㆍ경상도 순찰사(慶尙道巡察使) 김수(金睟)의 군대가 수원(水原)에서 궤멸되었다. 군대가 패배하던 날은 6월 초순이었지만 도로가 막히는 바람에 전갈이 비로소 도달했다. 이에 앞서 이광은 스스로 근왕(勤王)을 칭하며 군사 5천여 명을 거느리고, 윤선각은 수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김수는 50여 명을 거느리고 수원에 진을 쳤다. 일본 기병 여섯이 깃발을 세우고서 일본도를 휘두르며 오자, 1만여 명의 조선 군인들은 겁먹고 무너져 갑옷과 활을 내팽겨치면서 달아났다. 버려진 양식과 궁시(弓矢)ㆍ깃발ㆍ북 등의 물건이 산처럼 쌓였다. 그 외에 상실(喪失)한 것은 파악조차 할 수가 없었다.

보다시피 제대로 된 전투 병력이라 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진 병사들도 있었다. 그리고 가뜩이나 바다에서 제해권을 뺏겨 보급이 힘든 일본군 입장에서 명군의 참전은 일본군이 조선 정복에 회의적으로 변하게 만들었다. 물론 이는 전선에 있던 일본 장수들의 의견이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아니었다. 참고로 고대일록은 공문서나 사문서를 참고해 비교적 객관적·사실적으로 역사를 전하고 있으며, 특히 1592년부터 1593년까지의 임진왜란 초기 사회에 대한 기록이 상세하게 들어 있고 임진왜란 당시 사대부들이 겪은 애환과 향촌사회 연구에 도움이 되는 내용들 또한 다수 포함하고 있어 높은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3.5 교착 상황과 강화회담

일본군은 임란 최대의 분수령인 이치 전투에서 권율 장군의 조선군에게 패배하고, 김시민 장군이 진주성을 지켜내어 진주성 함락이 수포로 돌아가자 조선의 전라도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실패한다. 그러다보니 일본군 내부에서도 더이상 진격하기 힘드니 물러서자는 분위기가 되었다. 진주성이 함락되었던 2차 진주성 전투(1593년 6월)는 그 물러나는 가운데 히데요시의 김시민에 대한 분풀이와 일본군의 세력과시를 위해 벌어진 전투다.[71] 주로 조선군은 진주대첩 때의 두 배 정도인 6~7천여 병력으로 방어전에 나섰으나[72] 9만 명이 넘는 적[73]을 상대로 9일동안이나 항전했으나 황진 등이 전사하고 갑작스런 폭우로 성벽 일부가 무너지면서[74] 성이 함락되고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학살되었다. 하지만 일본군 역시 성을 함락한다고 피해가 심각했다.

또한, 김덕령, 곽재우, 정문부 등의 의병들과 정기룡 같은 정신차린 관군들이 반격을 시작했고, 사명당이 승군을 조직하며 일본군을 곳곳에서 격파하고 향토의 방위를 책임진다.[75] 이 과정에서 의병 중 다수가 경험 부족과 전략적 결함으로 전사하기도 했다. 조헌과 고경명이 그 예. 물론 조헌은 양면 포위 매복을 깨부숴주면서 데뷔하고 훨씬 딸리는 물량으로 급습해 청주성을 점령하고 포위공격으로 다굴까는 압도적인 적을 상대로 전라도 공격을 좌절시킬 정도로 (1차 금산전투가 있었지만) 피해를 입힌 분쇄왕이셨다는건 알아두자.

1593년이 되어 행주 대첩의 승리로 한양을 되찾고 전선이 안정화되자 조선은 의병, 수군 제외하고 13만 대군을 뽑는 기염을 토한다.[76][77] 그러나 평화협상이 질질 늘어지고 소강상태가 계속되다 보니 17만 5천의 군사는 3만 5천 정도로 줄어드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다른 주장이 있다.

  • 전쟁의 양상이 경상도 남해안에 한정된 국지전으로 변모해서 대규모 병력이 불필요했다.
  • 선조는 명군에게 전투를 맡기고, 조선군 병력은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서 재건을 서두르고 싶었다.
  • 선조는 계속된 명군의 삽질 때문에 명나라에 대해 원군을 요청한 결정 자체도 삽질이 아니냐는 눈초리를 불식시키기 위해서 명군에게 기회를 많이 주고 싶었다.
  • 선조는 군대가 비대해지는 것이 불안했고, 따라서 어차피 전쟁이 끝나면 돌아갈 명군에게 전투를 맡김으로서 조선군을 줄여 군의 규모를 통제가능한 수준으로 제한하려 했다.

그러는 사이 일본의 대표적 반전파인 고니시 유키나가와 명의 장군 이여송, 심유경 등이 주축이 되어 평화협상을 벌이는데, 명에서는 협상의 대가로 도요토미를 일본의 왕으로 삼고 그 입공(入貢)을 허락한다는 봉공안(封貢案)을 보냄으로서 국면을 해결지으려 했으나 히데요시의 요구 사항이 너무 터무니없었다. 히데요시는,

1. 명나라 황녀를 일본 천황의 후궁으로 삼는다.
2. 무역증서제를 부활한다.
3. 일본과 명나라 양국 대신이 각서를 교환한다.
4. 조선8도 가운데 4도를 일본에 이양한다.
5. 조선의 왕자와 신하를 볼모로 일본에 보낸다.
6. 포로로 잡고 있는 조선의 두 왕자를 석방한다.
7. 조선의 권신이 일본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한다.

사실상 일본의 승전을 의미하는 거나 진배없는 협상이다. 히데요시가 단순히 '정치적 이유'로만 이 전쟁을 벌인 것은 아니라는 것, 특히 굵은 글씨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당시에 얼마나 현실을 모르고 허황된 망상을 품고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당연히 이 조건을 보고 심유경과 고니시는 경악을 해서 이런 조건으로 어떻게 협상하냐며 한탄했다.

명나라의 조건은,

1. 조선에서 완전히 물러갈 것.
2. 조선의 두 왕자를 송환할 것.
3.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번 전쟁을 공식적으로 사죄할 것.[78]

심유경은 일본의 개념상실한 요구를 명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알고 더군다나 이 개념상실한 요구를 명이 알았다가는 명나라가 어떤 패닉 상태에 빠질 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측의 반전파와 협의해 거짓으로 본국에 보고하여 명은 봉공안에 의해 1596년 도요토미를 일본 국왕에 봉한다는 칙서와 금인(金印)을 보냈다.
고니시 등은 이를 다시 한 번 '일본측의 요구를 적극수용'하는 것으로 위조해 도요토미의 허락을 구하는 단계까지 나아가나, 위조한 내용대로 글을 읊기로 한 승려 사이쇼 죠타이(西笑承兌)가[79] 명의 봉공안을 그대로 읽어버렸다. 당연히 히데요시는 분노했고 사신들을 추방함으로써 화의는 결렬되었다. 화의를 주선한 심유경은 죽을것이라는 것을 알고 일본으로 귀화하기 위해 남쪽으로 도주하다가 의령 부근에서 명나라 장수 양원에게 잡혀 국제사기죄로 압송되어 목이 잘린다. 고니시도 히데요시한테 책임추궁으로 개죽음 당할 뻔했으나 이시다 미츠나리의 만류로 다시 전장에 복귀했다. 그리고 이듬해(1597) 정유년, 일본군은 재차 침입하게 되었다.

3.5.1 강화에 대한 새로운 학설

위의 내용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이지만 최근의 연구에서는 부정되고 있다. 다음은 최근의 논문을 요약한 것이다. [80]

명의 참전으로 전황이 악화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다음의 조건을 명의 강화사에게 제시한다.

1. 평화조약을 보증하기 위해 명나라 황녀를 일본 천황의 후궁으로 삼는다.
2. 무역을 재개한다.
3. 일본과 명나라 양국 대신이 각서를 교환한다.
4. 조선8도 가운데 4도를 일본에 이양한다.
5. 조선의 왕자와 신하1~2명을 볼모로 일본에 보낸다.
6. 포로로 잡고 있는 조선의 두 왕자는 평화협정을 위해 석방한다.
7. 조선의 권신이 일본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한다.

이러한 조건을 제시한 히데요시는 외교를 전담하던 오선승(五禪僧, 외교담당 승려)을 통해 명의 강화사인 사용재와 서일관에게 물었으나 이대로는 전할 수 없고 첫 번째 조건은 절대적으로 불가하다고 하였다. 이에 무엇으로 증거를 삼을 것인가라고 질문하자 순의왕(알탄칸)의 예가 있다면서 증거는 필요 없으니 조건을 삭제해달라고 하였다. 히데요시는 ‘명국 공주와 천황의 결혼, 조선왕자의 인질이라는 조건이 아니면 4개 도를 반환할 수 없다’고 명확히 하며, ‘일본과 명의 관계가 끊긴지 오래이기에 조선을 통해 관계를 개선하려 했지만 조선이 시간만 끌고 속이기에 징벌하게 되었다. 이제 명의 사절이 왔으니 사절이 우리의 요구조건을 잘 전달해 달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논의 끝에 고니시 유키나가와 심유경에 의해 가짜 항표문(항복문서)가 명 조정에 전달이 된다. 히데요시의 요구는 명의 책봉과 조공무역을 원한다는 것으로 바뀌었고 책봉을 원하는 무장의 명단까지 제출되었다고 한다. 이에 명의 조정에서는 책봉은 허가하지만 조공무역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입장으로 정리되었고

1. 조선에서의 전면적인 철군
2. 히데요시를 일본국왕에 책봉하나 조공무역은 허락하지 않음
3. 조선과 수호(修好)를 하고 명의 번속국으로써 조선을 함부로 침범하지 않음.

을 조건으로 제시하였다. 이후 명의 책봉사가 부산에 도착하여 일본군의 완전 철수를 요구하며 일본에 가기를 거부하자 히데요시는 새로운 3가지 조건을 제시하였다.

1. 조선의 왕자를 자기에게 데려오면 일본이 가지고 있는 조선의 4개 도를 반환한다.
2. 왕자가 고니시의 진영이 있는 웅천까지 오면 진영 15개중 10개를 소각하고 일본군이 철수한다.
3. 명의 황제의 부탁 때문에 조선을 사면하는 대신 명의 칙사가 조문을 가져오고 무역의 재개를 바란다.

이후 책봉정사였던 이종성이 도망가는 등의 사건을 겪다가 책봉부사였던 양방형이 정사에 심유경이 부사가 되어 일본으로 출발한다. 심유경은 정사보다 먼저 도착하여 히데요시를 만나는데 심유경의 행렬에는 '명나라 황제가 히데요시를 일본국왕에 임명한다'는 내용의 판자까지 있었다고 한다(프로이스의 기록). 이후 책봉장에서는 다른 다이묘들이 배석한 가운데 금인과 관면을 받았다고 한다. 이 다음의 기록은 여러 가지인데 다른 다이묘들도 관복을 받고 입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히데요시는 입었다는 기록(겐소의 선재고(仙巢稿), 프로이스의 기록, 황신의 일본왕환일기)과 입지 않았다(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조덕수가 참석자에게 들은 바를 보고)는 상반된 기록이 존재한다. 책봉사와의 대담 이후 히데요시는 전쟁의 재개를 선언하는데 그 주요한 이유는 인질인 조선의 왕자가 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히데요시는 회담결렬의 이유로 세 가지를 드는데

1. 조선이 일본의 입장을 명에 전하지 않았음
2. 심유경의 중재로 조선을 용서하였으나 사례가 없었음
3. 조선이 명와 일본을 이간질하였음

의 세 가지이다. 책봉은 받겠으나 조선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고 일방적 철군을 하면 자신이 손해 보는 장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로 강화는 실패하게 되고 심유경은 강화 실패의 책임을 물어 처벌을 받게 된다.

3.6 정유재란과 전쟁의 종결

파일:천조장사전별도.jpg

(천조장사전별도{天朝將士錢別圖} 중 일부)[81]
정유재란에서 일본은 총병력 14만(특히 수군이 강화되었다)의 군세로 다시 조선을 침공했다. 조선에서도 하삼도를 청야하며 명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수군을 보내 배후를 차단하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그 때 일어난 것이 칠천량 해전(…). 자세한 건 해당 문서와 원균 참고. 조선 수군이 없어지자 일본군은 바람같이 진격해서 한 달만에 남원과 전주를 함락시키고 좌군은 전라도 전체를 점령하기 위해 남하하고 우군은 충청도로 북상한다.

  • <정유재란 당시의 군편성>
    • 제1군 고니시 유키나가 14,700명
    • 제2군 가토 기요마사 10,000명
    • 제3군 구로다 나가마사 10,000명
    • 제4군 나베시마 나오시게 12,000명
    • 제5군 시마즈 요시히로 10,000명
    • 제6군 쵸소카베 모토치카 13,300명
    • 제7군 하치스카 이에마사 11,100명
    • 제8군 모리 히데모토,우키타 히데이에 40,000명

이 때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코 베기가 시작됐는데, 남원성 전투 전후로 일본군 장수들이 바친 코 숫자가 3,500개가 넘는다. 자세한 건 귀무덤 참조. 장수들도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죽이지는 않고 코를 베기도 했고, 할당량(?)을 채운 후에는 식량을 주고 안전을 약속하는 등 백성들에게 미화적인 모습을 보인다. 난중잡록을 보면 이것 때문에 항복한 백성들이 상당히 많았다고. 더불어 조선의 백성들이나 관리들을 많이 잡아갔는데, 아무래도 조선에서의 지배가 오래 가지 못할 거라고 판단한 데다 노예 장사나 착취를 해서라도 전쟁에서 들어간 비용을 벌충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조선군은 흩어지거나 산성에 틀어박혀서 고립되어서 전멸을 당하는 편이고, 명군은 남원, 전주, 충주 등에 분산돼 있다가 각개격파 당하거나 후퇴했다. 이렇게 순조로운 진군이 가능했던 것은 임진왜란과는 다르게 강으로 보급이 가능했기 때문. 이에 맞설 명군은 고작 5천 안팎으로 적이 경기도를 노리는 상황까지 가자 명군은 기병 4천 명을 출격시키는데 이것이 직산 전투다. 이때 명군이 적을 크게 격퇴했다고 하는데, 압도적인 병력의 차이로 실록을 보면 그 이후에도 일본군이 직산 근처에 남아 있거나 오히려 진격해 와서 조정이 혼란에 빠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82] 아무튼 직산 전투가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시킨 것은 확실하며 9월 중순에 적이 갑작스럽게 후퇴하자 조정은 유인이 아니냐며 다시 혼란해 할 정도였다.

일본군이 정확히 무엇 때문에 후퇴했는지는 논란거리지만, 대체적으로 직산 전투로 인해 다시금 명 기병의 위력을 보았고, 명군이 빠르게 집결하기 시작했으며, 히데요시의 명령에서 한양을 무조건 공격할 필요는 없다고 한 것 등으로 짐작된다.[83]

당시 종군승이었던 케이넨의 일기에는 한양을 치기 위한 회의를 했다, 한양으로 가는 길이 즐겁다 같은 말이 나오고 9월 중순부터 "항구"로 가기 위한 후퇴를 하는 모습도 나온다. 즉 이 때 일본군의 후퇴에는 해상으로의 보급이라는 이유가 있었고, 보급만 잘 된다면 한양을 노릴 수 있는 전력이었다. 그러니까 그놈의 보급만 잘 된다면.

일본 수군은 육군의 진격에 맞추어 서해로의 해상 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해 진격하는데, 바로 이 때 벌어진 세기의 전투가 바로 그 이름도 아름다운 명량 해전. 이미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정예 병력을 궤멸시킨 일본 수군은, 압도적인 수군 병력의 우세를 바탕으로 서해 진출을 시도했으나 돌아온 조선 수군의 먼치킨 장수에게 처참하게 박살이 나고 만다. 이걸로 서해로의 보급 가능성은 완전히 끊기고 일본 수군은 무안까지 살짝 진출했다가 후퇴한다. 육군도 보급 가능성이 완전히 끝났으니 역시 그대로 후퇴한다.[84]

결국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로 퇴각하여 왜성을 쌓고 농성전에 들어가고, 이후로 전쟁은 대치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 와중에 가토 기요마사울산에서 조명 연합군에 의해 엄청난 손실을 입기도 했다.[85] 그 외에도 일본군이 자기들이 조선 남부에 쌓은 왜성들 속에 농성을 하여 조명연합군이 공성 과정에서 피해만 크게 보고 함락도 못하였기에 명군도 필사적으로 싸우려는 의지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결국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일본군이 본국으로 급거 귀국하게 되고, 고니시 유키나가 등의 철수를 차단하려는 조명 연합수군과 일본군의 전투인 노량 해전과 일본군이 본국으로 철수 한 후 잔존 일본군을 소탕한 남해안 전투를 끝으로 전쟁은 종결됐다.

4 임진왜란의 이해

이 일련의 사태를 이해하려면 아래와 같은 지식이 필요하다.

1. 당시 일본의 정부 체제는 조선이나 명나라 같은 중앙집권식이 아닌, 힘 있는 영주들의 이해관계가 맞물린 연합 성격이 강하며, 그중 제일 강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령을 내리긴 했지만, 군사력 역시 통합체제로 동원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병사들은 각자 자신의 영주와 직속 상관에게만 충성했으며, 협력과 협조보다는 서로 반목하는데 더 능했을 정도다. 그로 인해 조선정벌에 나선 병력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직속병력들로 대략 20만 내외로 추산되며, 그나마도 이 20만조차 1군과 2군으로 나뉘어 서로 협력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은 이 짓거리를 400년 후다시 거하게 벌이고 망한다. 아마 일본의 징크스인 듯[86] 총대장 우키다 히데이에는 개무시당하고, 1군 선봉이던 고니시 유키나가와 2군 선봉이던 가토 기요마사의 반목은 매우 극심했으며[87],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결국 편을 갈라 전쟁을 하는 지경에 이른다. 가토 기요마사 등은 서군 실세가 이시다 미츠나리라는 이유로 동군에 참가. 실제 서군의 대장은 흔히 알고 있는 이시다 미츠나리가 아니라 모리 데루모토였다. 그러나 실세가 이시다 미츠나리인 이유는 모리 데루모토는 말 그대로 바지 사장이기 때문. 자세한 내막은 관련 인물들을 볼 것.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그 이후 벌어질 파워 싸움을 예측하고 전 병력을 물린 덕에 조선은 살아난 한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결과적으로 자기 살을 깎아먹은 탓에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대를 만들어준 꼴이 돼버린다. 임진왜란의 최종 승자는 다름아닌 도쿠가와 이에야스인 셈.

2. 명나라는 조선을 돕느라 막대한 전비와 군사력을 동원해 이후 멸망한 것으로 세간에 알려져 있으나, 사실 멸망까지는 몇십년의 세월이 더 소요되었다. 물론 수많은 원인 중에 하나이긴 하다.

  • 만력 3대정'이라고 해서, 당시 명나라가 치렀던 3개의 큰 전쟁이 있었고, 명나라가 조선에만 군사를 파견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이 시기에 커다란 전쟁 3개가 겹치고 줄줄히 출현한 암군들의 막장 행보로 명나라가 심각한 재정문제를 겪게 된 것은 사실이다.

3. 의병이라고 불리는 민병대가 독자적으로 작전을 입안, 실시했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있는데 이는 오해. 의병들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정부의 명령을 받아 활동했고, 전쟁 초기의 혼란기가 지나간 뒤에는 사실상 관군이나 다름없었다. 애초에 상당수의 의병군은 전쟁 초기에 흩어진 관군 병졸들을 모집하는 것으로 기반을 쌓은데다가, 관에서 식량, 무기, 때로는 병력을 지원했기 때문에 사실상 준(準) 관군으로 봐도 무리가 아닐 정도이다. 의병을 일으킨 주체도 의병이 아닌 지방에 있던 전현직 관리와 토호들이었으며 이는 민중 봉기의 측면보다는 기득권층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측면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88] 무능하기 짝이 없는 정부용감하고 굳센 의병이라는 널리 퍼진 통념과도 달리 전쟁은 어디까지나 정부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의병부대의 구조가 그대로 유지된 것은 선조가 의병장들에게 정식으로 벼슬을 주고 지휘권을 인정해주면서[89] 자연스럽게 관의 영향하에 끌어들였기 때문인데 이 때문에 정식 공채로 관직에 있던 무관들과 전란 중에 무공으로 관직을 받은 의병장 출신 무관들의 알력이 발생하게 된다. 이것이 첨예화되어 폭발한 것이 김덕령 사건.

임진왜란때 정부측(특히 선조)이 잘싸우는 장수들을 갈궜다는 이미지가 있어 왜란 당시 조선 조정에 대한 현대인의 인식은 매우 나쁘다. 심지어 이순신 관련 교육만화만 보면 류성룡은 왠지 이순신 장군과 친한데 들러리, 윤두수는 지 친척 승진시키려고 잘싸우는 사람 잡아먹으려는 찌질이 정도로 표현되는 수준이니 말 다했다. 참고로 저 두사람은 다수 매체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무능하거나 탁상공론만 했던 인물들이 절대로 아니다.[90]

4. 전쟁의 원인에는 앞서 언급했듯이 히데요시의 정복욕이 주된 요인이지만, 조선과 명이 삼포왜란 이후로 가뜩이나 부족한 면포 수출량을 더욱 통제하자 일본의 면포값이 뛰었고, 그것이 전쟁의 원인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추측도 있다.


5. 일부 대중들에게 임란 당시 조선 정규군은 이순신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한 것이 없고 육군 중서도 권율과 같은 몇 인물을 제외하고 무능했다는 인식이 있지만 이는 실제와 다른 것으로 조선 관군은 비록 임란 초기 때는 상당히 무력한 모습을 보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괜찮은 전적을 보여주게 된다. 당장 조선 전역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소규모의 유격전. 공성전 등의 승리는 관군이 이루어낸 것이며 의병과 관군은 자주 힘을 합쳐 활동했다. 사실상 이순신이나 권율 같은 눈에 보이는 큰 승리만 없다뿐이지 일본군과 충돌하며 많은 피해를 입히고 받으며 피를 흘린 것은 관군들이였다.


임진왜란이 주는 교훈은 정말 간단하다. 전쟁의 위협은 언제든지 존재하며, 따라서 평화를 위해서는 그걸 지킬 수 있는 힘과 준비된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91]

5 전후

임진왜란은 분명 조선이 승리한 전쟁이다. 일본의 전략적 목표는 엄연히 조선을 교두보로 삼은 명 침략 → 조선의 영토 획득[92]이었고, 조선의 전략목표는 일본군을 자국의 영토에서 격퇴하는 것이기 때문에, 임진왜란은 전략 목표를 전혀 달성하지 못한 일본의 명백한 패배이고, 희생을 치르기는 했으나 일본군을 한반도에서 완전하게 격퇴하는 데 성공한 조선의 승리다. 전술적인 싸움에서의 결과가 어떠했든 간에 전쟁은 승패는 결국 전략적 목표의 달성여부에서 갈릴 수밖에 없다.[93] 전후 처리나 결과 측면에서도 조선은 분명히 일본에게서 침략행위에 대한 사죄와 포로 쇄환 등을 받으며 국교를 회복했고, 조선은 전후 300여년간 더 지속되었으나 도요토미 정권은 전쟁 종결 후 17년만에 멸망하였다.

그러나 피해는 당연히 전장이 된 조선이 가장 컸고, 이후 조선은 인구수와 농지가 대폭 감소한다. 특히 농업국가인 조선은 농지가 무려 66%나 감소했으므로 국력에 상당한 타격을 입었으며, 인적 손실도 몹시 다대했다. 이 전쟁 최대의 수혜자는 어부지리를 얻은 후금의 누르하치와 도요토미 정권을 없애고 260년의 에도시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 인생은 이에야스처럼게다가 이에야스는 틈을 노려 사죄 퍼포먼스를 보여줌으로서 조선에서 히데요시보다 약간 나은 평가를 받는다.[94]

대신 조선은 일본과 명분상 비교적 만족할만한 내용으로 국교회복에 성공하고, 명이 멸망하고 청이 들어서자 여러 사정상 청-일 간의 직접 교역이 이뤄지지 않게 되어 양국 간의 육로무역 중개[95]를 통해 실로 막대한 무역흑자를 누리게 되었으며[96] 전란으로 인한 농업생산력의 파탄이 역으로 대동법 개혁이 추진되는 계기로 작용해서 17세기부터는 가파르게 국력이 성장하게 된다. 조선측이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국가적 재난으로 인해 조선이라는 국가체제가 재정비되는 계기가 마련된 셈.

20세기까지도 조선시대를 임란을 기점으로 전/후기로 나누었던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최근의 한국사학계는 사림이 중앙 정치를 주도했던 16~17세기를 하나의 시기로 간주, 조선 시대를 전/후기의 양분하기보다는 전/중/후기로 나누어 보는 시기구분론을 채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왜냐하면 중기에는 임진왜란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변화가 그다지 없기 때문이다. 서울대학교 사학과를 중심으로 조선을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전후로 나누는 대신 관학파/사림파/일당독재의 3단계로 구분하는 구분법을 주장하였고, 현재 국사교과서도 이를 따르고 있다.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에 의한 전체적인 국력소모도 명과 조선에 비교해서 적은 편이고, 그냥 히데요시 집권기의 분탕질 정도로 생각하기에 임진왜란, 그러니깐 케이쵸의 역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물다. 일본 전국시대를 다룬 작품에서도 이 부분은 이순신만 짧게 언급하고 히데요시의 삽질이라는 것만 언급하고 넘어가는 등, 동아시아의 국제정치적 측면에서도 엄청나게 큰 의미를 갖고, 일본의 정치사회적 격변의 시점이 되는 사건임에도 인지도가 매우 낮다.

조선에서 엄청난 수의 포로가 끌려 가 포르투갈의 노예상인들에게 팔리거나 일본에 정착하는 등 조선은 인적자원 면에서도 다대한 피해를 보았는데, 일본이 끌고 간 포로들 중에는 도자기 장인이 많았고, 덕분에 일본의 도자기 공업이 급성장하여 세계 도자기 시장에서 중국을 밀어내고 1위를 석권했으며, 유럽과 아라비아에서 큰 위세를 떨쳤다. 곧바로 명청 교체기가 도래하면서 유럽인들은 더 이상 전란으로 혼란한 중국에서 도자기를 수입할 수 없었다. 때문에 대체 공급처를 필사적으로 찾았고 여기에 일본의 이해가 맞아 떨어져 일본 도자기가 유럽에 수출되게 된다. 일본은 임진왜란으로 확실한 이득을 누렸다. 단, 임진왜란을 노동력 획득을 위한 '노예 전쟁' 혹은 '도자기 전쟁'으로 부르면서 일본의 승리라고 억지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으나, 엄연히 전쟁의 주체인 도요토미 정권이 전쟁의 여파로 인해 멸망했으며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으므로 일본은 '승전국'이 절대 아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한중일 동아시아 3국 모두에게 큰 영향을 끼친 국제 전쟁인 것이다.

이후 조선은 "쇄환사"라하여 포로 귀환에 힘썼으며, 이 과정에서 사명당이 활약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바로 직후에는 성사되지 않고 쓰시마를 통해 제한적으로 돌려받다, 1609년 기유약조 이후 조선과의 관계 정상화에 힘쓴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본격적인 포로송환이 이루어졌다. 이 작업은 1655년 효종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일본 영주들은 미녀나 장인의 경우 쇄환사가 일본에서 조선백성들을 찾기 위해 찾아오면 고의로 이들을 감추고 조선포로들에게도 이 사실을 숨겼다. 조선에서 끌려온 도공들은 아직도 고향을 그리며 바다를 향해 제사를 지내는 풍습을 지키고 있다. 또한 메이지 유신 전까지도 조선식 성씨를 썼다고 한다.

유명한 인물 중엔 사쓰마 번, 가고시마 현 출신 도고 시게노리라는 2차 세계대전 때 일본 외무대신을 지냈던 사람이 있다. 조선식 이름으론 박무덕. 아버지, 어머니 모두 끌려간 도공 집안이었고 박무덕이 도쿄제국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진 계속 박씨 성을 유지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메이지 시대가 되면서 소수민족에 대한 병합정책에 못 이겨 사무라이 가문의 족보를 샀다고 한다. 가고시마 현 뿐만아니라 가토 기요마사가 번주였던 구마모토 현에는 울산에서 살던 사람들이 끌려와 집성촌을 형성해서 지금도 울산町이라는 마을이 있다.

그런데 일본으로 잡혀간 포로들 중에는 조선에 돌아오기 싫어해 일본에 정착하며 살고싶어 한 사람들도 있었다. 링크 실제로 고향을 그리워한 사람도 있었지만 반대로 돌아가길 거부한 사람들도 있어서, 조선통신사들의 기록을 보면 쇄환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현지 정착 포로들을 보며 통신사들이 분개하거나 어이없게 생각한 경우도 많이 보인다. 도공들 중에서는 이러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고 하는데, 각 다이묘들은 이들을 장인으로써, 솜씨 좋은 기술자는 사무라이'급'으로 후하게 대접해줬기 때문이다. 그걸로 끝이 아니라 아예 뛰어난 도공에게 자기 딸을 내주며 사위로 삼아 친인척을 만들어버린 경우까지 있었다. 그래서 현대에 와서도 일본 전역에 조선 도공의 후예로 자처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데 한국 언론에도 소개된 사람으로는 심수관 씨가 있다.#

메이지 유신 이후 폐번령이 내려져 다이묘의 비호를 받지 못하게 된 상황을 맞이했어도 너무 세월이 흐른 탓에 차별은 커녕 그 지역 장인이자 유지로 굳어진 상태라서 계속 대를 이을 수 있었다. 그래서 관동 대지진 당시 일부 폭도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도공 후손이 사는 마을로 쳐들어갔다가 동네 주민들한테 몰매를 맞기도 했다. 역관광

하지만 좋은 취급은 도공 같은 특수 기술자들한테 한정될 뿐, 그 이외의 조선인들이 받은 대우는 당연히 좋지 못했다. 일본이 서양 상인들에게 노예로 판 조선인들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 특히나 당시 최고의 해상 네트웍으로 리즈시절을 맞았던 포르투갈 상인들에 의해 유럽으로 팔려나갔다고 한다. 일본학자들에 따라서는 팔려간 노예의 단위는 만(萬) 단위로 보기도 한다. 선교사들은 이런 비인도적 행동을 몹시 나쁘게 생각해서 파문하겠다 위협하는 등 노예상인들에게 경고했지만 실효는 미미했다.

일본학자들의 표현에 의하면, 동아시아의 노비는 일종의 소작인같은 개념으로 결혼, 출산, 일부 재산소유가 허용되는 지위였지만, 서양에서의 노예는 그냥 물건 취급받아 결혼과 출산은 물론 어떠한 인간관계도 허락되지 않았고 그냥 죽도록 일시키다 그냥 죽게 했다고 한다. 실제로도 그랬고.

세계사적으로 봤을 때 상기했던 포르투갈 상인에 의해 노예무역이 빈번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던 때가 바로 임진왜란을 전후했던 때였다. 특히 서아프리카 출신 흑인들이 노예로 팔려나가 유럽, 남미 등으로 팔려나갔던 시기가 바로 이 시기.

이 당시 조선인들은 아프리카인들보다 헐값에 판매되었는데, 당시 기준으로 쌀 2가마 4말에 해당하는 2.4 스쿠도였으며 참고로 아프리카 노예 가격이 170여 스쿠도에 이르렀다. 이들은 마카오 · 인도 고아항 · 유럽 대륙으로 나갔다.

2014031912366721.jpg
이러한 조선인 노예에 대한 이야기는 토스카나 공화국의 페르디난도 1세 밑에서 공직을 맡았던 프란체스코 까를레티가 1701년 에 공식 출간한 《동서인도 여행기》이 대표적으로 나온다. 한편,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그림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기적>의 밑그림 중 포함된 동양풍 복식을 한 남자의 그림(한복 입은 남자)을 통해 당시 유럽으로 유입된 조선인의 존재를 엿볼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소설가 오세영 씨가 이 그림을 토대로 상상력을 발휘해 만든 소설 '베니스의 개성상인'이 시중에서 큰 인기를 모은 바 있다).

6 일본에서의 평가

일본에서 임진왜란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서애 류성룡이 쓴 징비록이다. 에도 시대에 유학이 번성하면서 징비록도 일본에 건너갔는데[97] 현재까지 일본인들의 연구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일본은 임진왜란을 히데요시가 개인적으로 일으킨 전쟁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며 사실상 이순신 같은 일부 인물들 외에는 조선에서 명의 원군과 싸웠다는 서술이 많다. 의병들의 활약 같은 것들은 일본 기록에 나오지 않은 것들도 있어서 상당히 과장되었을 확률도 있고 사실 수전과 일부 방어전을 제외하고 수월하게 연승하며 점령하다가 중간부터 굵직굵직한 육전은 명군이랑 상당히 많이 싸우면서 진격이 멈추었으니 일본 사람들은 그렇게 볼 수도 있다.[98] 당장 전국시대 관련 드라마만 봐도 명과 싸우러 간다고 하지 조선과 싸우러 간다는 말은 하나도 없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그렇게 유명한 전국시대에서 임진왜란은 흑역사급으로 취급받는다. 기껏 얘기를 할 경우에 하는 말은 '필요 없는 전쟁이었다' 정도. 창작물에서도 "히데요시가 명을 치려다가 조선과 전쟁을 했다. 근데 졌다. 끝" 정도.[99] 크고 아름다운 영웅들의 일대기를 그리는데 자세하게 하기도 힘들었을 듯. 최소한 미화는 하지 않으니 다행이긴 하다. (그렇지도 않은게 순왜 문서를 보면 우익들이 순왜를 근거로 일본이 조선 백성을 구원했다고 왜곡하고 다니기도 한다.) 가토가 호랑이 잡았다, 고바야가와가 벽제관에서 명군을 조졌다, 시마즈가 사천에서 명군을 조졌다, 노량해전에서 시마즈가 이순신을 저격했다 정도.

야마오카 소하치도쿠가와 이에야스(소설)는 무려 32권짜리 역사 소설임에도 임진왜란 부분은 한페이지 뿐이다. 임진왜란중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에서 꽃놀이 하는 부분은 몇십페이지씩 차지함에도. 소설내에서 전쟁에 대한 비중이 매우 높음에도 무려 7년씩 끌었던 임진왜란에 대한 분량이 없는 것은 이례적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같은 작가의 소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 직전까지만 글을 쓰고 끝내 버린다. 이를 요코야마 미츠테루 7권짜리 만화로 만들었는데 마지막 페이지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말년에 노망이 들어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끝." 달랑 이문장 뿐이다. 야마오카 소하치 뿐만이 아니라 다른 유명한 역사 소설작가들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기작품도,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시키면서 끝난다. 전국시대를 배경으로한 무협소설 작가인 시바타 렌자부로의 "무사"[100]에서 임진왜란 진행사항이 1페이지 반에 걸쳐 기술되었는데, 고작 무협소설 보다 많은 페이지를 할애해서 임진왜란을 묘사한 책을 찾아 보기 힘들다.

성호사설에서 저자인 이익이 일본으로부터 수입해서 번역한[101] 저자 미상의 한 역사 평론에서는 임진왜란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수길 공이 본래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들을 편안히 할 만한 술법이 없으면서 한갓 쓸데없이 군사를 일으켜 멀리 이웃 나라를 쳐서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고, 군량과 무기를 천릿길에 운수하여 우리의 생령을 못살게 한지라, 이 때문에 신명에 죄를 얻어 그 몸이 죽고 3년이 못되어 나라가 크게 어지러웠으며, 그 아들 수뢰공까지 마침내 원화(元和)[102]의 전역[103]에 죽었다. 그러므로 작은 것으로써 큰 것을 치는 자는 앙화를 받는다 한다.[104]

이 외에도 강항간양록에서도 비슷한 반응이 있는데, 당시 강항과 대화를 했던 일본의 승려 등 몇몇은 조선의 처지를 동정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당시 강항도 간양록에서 '일본 애들 중에도 사람 꼴하고 사는 사람들은 꽤 있구나' 하는 견해를 표했다고 한다.

역사저널 그날에서 패널로 나왔던 일본 교수는 색다른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그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과의 무역을 독점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으며, 일본 본토와 조선에 끼어 있던 대마도주 때문에 전쟁이 확대, 장기화됐다는 주장이다. 애초에 대마도 번주는 대 조선무역을 위해서도 조선과 관계를 적절히 유지해야 했지만, 그러면서도 일본과의 관계 또한 유지해야 했다. 그래서 이 번주가 일본이 조선을 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지 여부를 염탐하기 위해 보낸 통신사를 조선이 일본의 명 공격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항복 사절로 자기 맘대로 목적을 바꿔 전했다는 것. 도요토미 히데요시 입장에서는 자기가 명을 치면 온 조선이 자신의 편을 들어 명을 칠 것이라고 생각한 와중에 조선의 격렬한 저항을 받았기 때문에 이를 반역으로 규정, 코나 귀를 베는 등의 잔인한 진압을 했던 것이라는 것.

6.1 일본내의 조선 장수 인식

조선에서 아는 일본 장수가 수괴인 풍신수길 외에 선봉장이자 외교를 담당했던 '가등청정'과 '소서행장' 딱 2명 뿐이였다. 그외에 몇명이 사서에 이름이 나와 있기는 했는데 일본 장수 이름을 한자 그대로 가등청정과 소서행장이라고 적으면 후대의 우리가 "아!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를 뜻하는구나!"라고 알겠지만 당시 우리 조상님들은 일본 장수의 이름을 발음이 들리는데로 한자로 적었다. 그바람에 사서에 나온 사람이 누군지 현재까지도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차라리 발음 나는데로 언문으로 쓰던가 조상님의 기록만으로 누구인지 도통 알 수 없는 대표적인 인물이 가토 기요마사의 부하로 초전에 항복했다는 '김충선'이나, 이순신이 명량해전에서 목을 친 '마다시'이다. 김충선은 지금까지도 누구인지 전혀 감도 못잡는 상태이고, '마다시'는 '구루지마 미치후사'를 뜻하는 것 같기는 한데 한글자도 같은 글자가 없어서 긴가민가 하는 정도이다. 사서에는 보통 '왜구', '왜적', '적'이라고 표기 되었을 뿐이다. 적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일본측도 마찬 가지이다. '징비록'이 일본으로 전래되기 전에는 일본에서 아는 조선측 장수라고는 '이순신', '균'(원균), '모쿠소 한간'(牧使 判官, 진주목사 김시민), '세루토스'(응?,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한극함)등 4명 정도이다. 이순신을 제외한 3명은 일본군에게 패전하거나 죽었다는 특징이 있다. 다시 말해 일본은 이긴 정투와 이긴 상대방만 기억하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한 그림책이 대유행 하였는데, 비주얼 노벨의 원조 이런 책에서는 모쿠소 한간이나 세루토스등이 최종 보스급으로 나온다. 다만 이순신은 26전26승을 하며 일본을 공포로 물들게 한장수... 뭐 이런 묘사는 없고 그냥 거북선을 사용한 장수로 나온다. 심지어 '균'보다 비중이 적다. 잘해야 노량해전에서 패배하여 죽은 장수로 언급되는 정도. 다만 거북선이라는 것이 충격적이였는지 이순신이 등장하면 조선 수군이 전부 거북선이 되어 나온다.

이순신과 균이 누군지 더이상 설명할 필요는 없고,

일본측에서는 뭐가 어떻게 잘못 전달 된 것인지 모쿠소 한간은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를 담당하는 조선 최강의 장수로, 세루토스는 강원도, 황해도, 함경도, 평안도를 담당하는 조선 국방의 책임자로 알고 있었다. 진주목사 김시민의 경우 1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하였지만, 일본측에서는 이 사실을 모른체 2차 진주성 전투에서 후임자였던 진주목사 서예원의 목을 베고 이것을 조선 최강의 장수인 모쿠소 한간의 목이라며 일본의 히데요시에게 보냈었다. 세루토스의 경우 더 황당한데 함경도 끝까지 진격했던 가토 기요마사에게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한극함이 항복하였다. 이를 가토 기요마사가 조선의 국방 최고 책임자이자 북쪽 4개도를 담당하는 세루토스라고 선전한 것이다. 세루토스는 절도사를 뜻하는 말인데 김시민의 일본식 직책인 '모쿠소 한간'처럼, 일본에서는 고유명사화 되었다.

이러한 일본측의 착각은 17세기 말 유성룡의 징비록이 일본으로 건너가 번역하여 보급됨으로서 대부분의 착오들이 바로 잡혔다. 조선측 장수들의 정확한 이름이 알려지기도 했으며, 일본 장수들이 활약한 전투가 이때서야 재조명 되기도 하였다. 다만 '세루토스' 만은 비슷한 글자도 없고 해서 끝까지 세루토스와 한극함이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다만 이런 일본의 무지를 너무 깔필요 없는게, 남의 나라 사정에 관심 없는 우리 조상님들은 자신들이 싸웠던 일본군 장수들이 누구였는지 조선이 망할 때까지도 알지 못하였다.

6.2 일본군 3대 대첩

조선의 3대 대첩은 진주 대첩, 행주 대첩, 한산도 대첩이다. 그러나 일본측에서는 이 전투들을 잘 모른다. 모쿠소 한간 때문에 진주성 전투가 좀 유명한 정도. 행주산성 전투는 조선내 일본군 주요 다이묘들이 초호화 드림팀을 구성해서 10:1이라는 압도적인 병력으로 공격했다가 대패한 전투이지만 역시 잘 모른다. 17세기 경에 <징비록>이 일본에 유입될 때 까지, 일본인들은 행주산성 전투에서 일본군을 이긴 것이 명군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조선정벌기> 같은 당시 일본책에서는 이 전투를 안남성 전투라고 부르며, 털옷을 입은 이국적인 병사들이 산위에서 내려와 일본군을 공격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물론 조선군은 우주방어 하느라 성밖으로 나간적이 없다. 일본내 주요장수들이 다 출전한 진주성 전투, 행주산성 전투와는 달리 한산도 해전은 일본에서 듣보잡인 와키자카 야스하루 같은 C급 장수들만 출전한 전투라 일본측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역사왜곡 드라마인 불멸의 이순신에서 이순신의 라이벌로 묘사된 그 와키자카 야스하루 맞다.

반대로 일본 측에서 3대 대첩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벽제관 전투(1593년), 가토 기요마사의 울산성 전투(1597~8년), 시마즈 요시히로의 사천성 전투(1598년) 이다. 응? 그런 전투도 있었어?

벽제관 전투는 명나라 군이 기세좋게 지원 왔다가 벽제관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의 기습을 받고 대패하여 평양까지 도망간 전투로 역사책에 반듯이 언급되는 중요한 전투이다. 울산성 전투와 사천 전투는 완벽한 듣보잡. 역사 매니아 아니면 도저히 모를만한 전투이다. 울산성 전투와 사천전투는 조명연합군이 임진왜란을 끝내기 위한 마지막 대공세인 사로병진 작전의 일환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부분은 4방향으로 병진하여 육상방향 3군데에서 패했는데 일본은 이른 임진왜란 최대의 대첩으로 보고 있다. 반대로 우리는 남은 한방향인 바다에서 진린과 이순신의 조명연합 수군의 전투 노량 해전만 중요한 전투로 기억하고 있다. 서로 이긴전투만 기억하는 것이다. 다만 일본은 노량해전을 이긴 전투로 계산하고 있다. 포위를 뚫고 본국 귀환하는데 성공했으며 그 와중에 적 사령관도 저격했으면 승리한 전투 아닌가효?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win-win

조선 3대 패전을 쌍령전투, 용인전투, 칠천량 해전으로 보고 있고 그중 두개가 임진왜란 때이지만, 왠일인지 일본은 그 두 전투를 빼놓고 듣도 보지도 못한 전투를 3대 대첩으로 분류하고 있다.

용인전투야 역덕이 아닌 평범한 일본인이라면 도저히 알수 없는 와키자카 야스하루라는 다이묘가 수십명의 기병으로 공격하자, 밥먹고 있던 조선군 5만명이 모랄빵 났던 조선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단일 전투인데, 일본측에서는 전투로 보지 않은 것 같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이순신의 라이벌로 설정된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보고 "아! 이렇게 훌륭한 장수를 왜 우리가 지금까지 몰랐었지?"하는 일본측 반응이 나올 정도.

칠천량 해전은 조선측에서는 전투로 보지 않고 '칠천량의 무너짐'이라고 표현했던 사건인데 조선수군 134~180척을 상대로 일본군 2대가 접근하자, 겁먹은 총지휘관인 원균이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가고, 이를 본 다른 수군들이 모랄빵 나서 저절로 무너졌던 전투였다.[105] 일본측에서는 3대 대첩중 하나로 보기에는 너무 싱거웠던 듯. 아니 그전에 칠천량에서 전투 자체가 없었잖아

조선의 가장 큰 패배였던 용인전투와 칠천량 해전이 아닌, 듣도 보지도 못한 전투 3개를 일본이 3대 대첩이라고 한 것은 3대 대첩의 지휘관이 일본내에서 유명한 장수라는 점과, 조선과 일본의 전투가 아니라 명나라와 일본군 간의 전투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해당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벽제관 전투는 평양성에서 명군에게 패배하여 몰리다가 한방에 뒤집은 중요한 전투였고, 울산성 전투와 사천전투의 경우 명나라가 패배하기는 했지만 일본군도 쌀이 떨어져서 배고파서 처절하게 싸운 전투이다.

7 조선, , 일본의 전후 상황

7.1 조선의 전후

조선의 역사는 명백하게 임진왜란 전과 후로 갈린다.

왜란이 일어난지 7년 동안 조선은 전국을 다 합쳐서 막대한 인명피해와 물자피해 등을 보았으며 전쟁동안 일본군들이 상륙하여 전국 각지를 공격하며 조선 병사들을 몰살시키고 양민들도 학살하였으며 농토와 농촌 지역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대거 참전을 하였던 영향으로 젊은이들의 피해가 컸으며 미처 피난가지 못한 노인과 아이들 그리고 처녀와 부녀자들도 잇딴 피해를 입었고 여자들은 일본군에 의해 성추행, 성폭행, 임신까지 당하는 등 육체적, 정신적인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전쟁 범죄의 책임은 물론 조선군과 명군에게도 있는데, 조선군 역시 종종 민간인들의 물자를 털어먹었고 개중에는 조직적인 약탈도 있었다. 명군도 마찬가지. 명군은 남해 지역의 민간인들을 일본군의 앞잡이로 몰아 학살하기도 했다. 그밖에도 조선 도적들은 이때다 싶어 힘없는 다른 조선인들을 유린하기도 했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나서 가장 핍박받는건 민간인들이다.

문화재도 대거 피해를 입었다. 류성룡징비록과 이를 따른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3궁이 모두 백성들의 폭동에 의해 방화로 없어졌고[106]# 여러 이설에 대해서는 여기 참고, 그야말로 종묘보신각, 사대문을 제외하고는 궁성과 육조가 다 타버렸다. 그나마도 일본군이 입성하면서 한번 더 손실을 입었다. 그 밖에 일부 사찰과 가옥들도 (당연히) 불에 타 없어졌으며 이 중 일부 문화재는 일본군이 약탈하여 일본 열도로 반출되어 버렸고 일부는 파손되었거나 완전히 흔적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없어지기도 하였다.

농업 및 산업 기반도 대거 파괴 되었다. 임진왜란 전까지만 해도 150만결에 달했던 경작지가 임진왜란 후엔 30만결로 대폭 줄어들어버렸다. 이후 잇따른 가뭄과 호란, 몇십년 후 경신대기근등의 천재가 겹쳐 조선이 임란 직전의 경제 규모를 완전히 회복하는 것은 영조 때 가서였다.

전후 조선의 국민 감정은 때려잡자 풍신수길 즉 반왜(反倭), 척왜(斥倭) 성향 및 호국의식이 발달하게 되었으며 전후 복구와 경제회생 등에 총력을 기울였다.

보통 전쟁, 특히 방어전의 경우 무장들이 전공과 대중의 지지를 얻어 정치계에 큰 위치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지만 조선의 경우엔 좀 달랐다. 당시로선 고도로 발달한 중앙집권, 관료제 국가였던 조선은 원래 공직자인 무장들은 물론 향촌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국가의 통제아래 편입시키려 노력했고 성공했다. 무엇보다 도원수 권율이나 왜란 이후 의병활동을 명분으로 집권한 북인의 예에서 알 수 있듯 지휘관중에 적지 않은 수가 문신이었기에 무관들이 치고올라올 여지가 별로 없었다. 굳이 뽑자면 이순신 정도가 치고 올라갈 여지가 있었고, 선조도 이를 알기에 엄청나게 경계했지만, 알다시피 이순신은 마지막 전투에서 전사한다. 이순신의 예에서 보듯이 유능한 무장의 상당수가 전쟁에서 전사했기에 고려 말 신흥무장들의 집권과 같은 일이 일어나기 힘든 환경이기도 했다.

다만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재난 불구하고 조선은 바뀐 것이 하나도 없다라는 학계의 주장도 있다. 파병만 했을 뿐인 일본과 명나라도 망했는데, 모든 재난을 뒤집어 쓰고 나라가 초토화된 조선은 아무일도 없다는 듯 이후 몇백년을 거뜬히 버텨 나갔다. 모든 책임을 져야할 조선왕 선조가 물러나거나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죽을때 까지 더 강화된 왕권으로 호위호식 하다가 죽었다. 조선의 어떤 정치체계가 바뀌거나 주자학 사상이 무너지지도 않았다. 워낙 중앙집권의 관료제가 발달 되어 있어 어떤 재난을 격어도 조선의 통치 체계는 끄떡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중기 보다 국방력이 어느정도 강화된 정도. 다만 조선초기보다 국방력이 강화되었냐고 보자면 '글쎄올시다'이다. 그냥 사상 최악이였던 선조 초기 보다 괜찮아진 정도이다. 즉 임진왜란을 격고 나서도 바뀐 것이 없었다. 오히려 일부 분야는 조선 초기보다 퇴화되었다. 예를들어 과학이나 국방력 같은...

하지만 조선이 바뀐 것 하나도 없다는 주장은 이제 학계에서는 거의 사라진 상태이다. 오히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일대 국란을 격고도 그 체제를 유지한 개혁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더 집중하는 추세. 즉 16세기부터 계속되었던 폐단들이 어떻게 17세기를 거치면서 개혁을 할 수 있었는가에 집중하고 있다. 예를 들면 대동법

7.2 명과 일본

명나라조선에 대군을 파병한 이후로 쇠퇴와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107] 조선과 왜에 집중하느라 여진족을 방치한 탓에 여진족이 세력을 키워 후금- 왕조가 성립되어 심각한 위협을 주게 된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경진년의 대기근[1]까지 겹치며 이자성, 장헌충등 의 농민 반란이 겹쳐서 일어나며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명나라는 이자성의 반군에게 베이징을 함락당하고 숭정제가 자살하였으며, 연달아 일어난 후금의 침략으로 완전히 멸망의 길을 걷고 만다. 하지만 임진왜란 탓에 명나라가 망했다라는 말은 직접적 인과관계가 없음을 유의할것. 이미 만력제가 즉위하면서 이미 명나라는 국운이 기울기 시작했는데 만력제가 얼마나 막장 황제였냐 하면 후한영제(靈帝)에 비견되는 암군이였다. 따라서 이 당시 명나라는 후한말에 비견될 정도로 이미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일본은 7년에 걸쳐 침략을 반복했으나 당장은 별다른 성과 없이 물러나야 했다. 다만 전반적인 인구 피해는 큰 편이 아니었고 오히려 학자와 기술자 납치, 불상과 서적 등 문화재 약탈을 통해 엄청난 이익을 얻었다. 그러나 침략을 주도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위신이 심각하게 떨어졌으며, 경제적으로도 도요토미 파는 막대한 물자를 헛되이 써버린 탓(다이묘들은 피해가 적었다.)에 큰 타격을 받았다. 게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생물학적 수명도 끝나버렸고, 히데요시가 억누르고 있었던 전국시대 말기의 라이벌들, 특히 파병을 회피하며 세력을 온존하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다.

서기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를 거쳐 일본을 지배하게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임진왜란은 모두 이미 죽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탓이며 자신은 오히려 그 도요토미 일족을 몰아냈고 침략에도 나서지 않았다며 전후 조선과 외교 복원을 요청하였다. 현대 시점에서 보면 매우 형식적이고 완전하지도 않았지만 전쟁 당시 일본군이 포로로 붙잡아온 조선 사람들을 어느 정도는 도로 돌려주는 사과 절차도 거쳤다. 그리하여 1609년에 조선과 일본은 기유약조를 체결하여 화해하고, 양국 간의 통신사 사절단을 파견하게 된다.

8 이것저것

  • 사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원래 요구는 정명가도(征明假道)가 아닌 정명향도(征明嚮導)였다. 즉, 명을 칠 것이니 조선이 앞장서라는 것이었다. 당시 조선과의 외교 창구를 담당하고 있던 대마도소 요시토시가 국서의 내용을 정명향도에서 정명가도로 몰래 바꿔치기 하면서 이런 일이 발생하였다.[108] 요시토시 입장에선 조선과 일본의 협력이 생존에 이득이었기 때문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요구를 일부러 누끄러뜨려 전달한 것으로 해석된다.
  • 일본군의 1군부터 9군까지, 사단장급 인물중에 죽은 사람은 거제도에서 병사한 하시바 히데카츠[109]밖에 없고, 나머지는 모두 돌아가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했다(6군 대장으로 참여한 고바야카와 다카카케는 휴전 중 일본으로 귀국 후 병사했다).[110] 물론 일본군의 사단장급 인물 중에 하마터면 죽을 뻔한 인물들이 있긴 했다. 행주 대첩 당시 일본군 총사령관 우키타 히데이에, 사단장 급인 이시다 미츠나리, 참군 안코쿠지 에케이, 연대장 급인 킷카와 히로이에 이들 장수들이 모두 승자총통에 맞고 중상을 입었지만 병사들이 업고 뛴 덕에 다들 목숨은 부지했다. 다이묘급들까지 쳐주자면 8인 정도가 사망했다.[111]
  • 노량 해전이나 시마즈 요시히로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시마즈는 노량 해전에서 동원한 500여척 가운데 200여척이 침몰되고, 150여척이 대파, 100여척이 조명 연합 수군에 나포되고 살아 돌아간 건 1/10정도인 50여척인 수준에서도 부하들을 물에 처박으며 도주에 성공했으며, 이외에도 이순신에게 처발린 수많은 일본 수군 무장들 또한 휘하 함대가 궤멸되더라도 대부분 목숨을 건지는데는 성공한다.
  • 이렇게 일본 영주들은 전투에서 패해 할복하는 경우는 많지만 전투 현장에서 전사하는 경우가 드문 편이다. 무사들이 자기 목숨을 바쳐가며 필사적으로 영주를 지키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본인이 유독 충성심이 강해서가 아니다. 이것은 영주가 패해서 죽으면 휘하 무사들은 떠돌이 낭인이 되고 비참하게 생활하다 죽게 되기 때문인데, 조선에 파견된 일본 고위 무장 중에 전사자가 거의 없는 것도 이러한 일본의 사회 체제에 기인한다.
  • 흔히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3대 대첩으로 권율의 행주 대첩, 김시민제1차 진주성 전투, 이순신한산도 해전을 뽑는다. 일본쪽 연구로는 일본군이 패배한 최대의 계기가 권율 장군의 이치 전투라고 꼽는다. 이치 전투에서 조선군이 승리해서, 한성 남쪽에서 행주 전투도 벌어질 수 있었다는 의미이다. 물론 일본군이 수적인 피해는 행주 전투에서 더 입기는 했다.그 외에도 한국사 최악의 3대 패전으로 꼽히는 원균칠천량 해전도 임진왜란에서 벌어졌다.
  • 노량해전이 있기 전, 이순신 곁의 많은 사람들은 그가 "오직 한 번 죽는 것만 남았다"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들었다고 한다. 이를 토대로 한때 이순신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는 주장이 무성하였다. 실제로 노량해전 당시 이순신은 갑옷을 입지 않고 전투를 지휘했는데, 이는 선조의 미움을 받은 이순신이 역적으로 몰려 가족까지 몰살되기 전에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는 해석과도 연결된다. 또 다른 주장으로 이순신이 죽은 것으로 위장하고 숨어살았다는 카더라도 있다.
  • 조선의 전 국토가 전쟁터가 되다시피 했지만 유일하게 제주도만은 전화를 피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왜구가 출몰해서 노략질을 하는 등의 피해가 있었지만 소규모 왜구들의 준동과 대규모 정규군의 상륙전은 엄연히 달라서 일본군은 제주도에 대한 공격을 전혀 시도하지 않았다. 다만 이건 일본의 사정이고, 조선에서는 일본군이 제주도를 침공할 수 있다며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한 적이 있었다. 당시 제주목사 이경록[112]이 병력을 선발해서 본토에 지원할 것을 건의했지만, 조정에서는 제주도의 방위가 매우 우려스럽다며 이를 거부하기도 했다. 대신 제주도에서 가축과 식량 등의 물자 지원을 하였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도 제주도에서 소나 돼지 등을 보내주었다는 기록이 몇 차례 나온다.
  • 언어면에서는 반치음이 이쯤해서 소멸되며, 사람들이 하루에 얼마나 쓰는지도 모를만큼 많이 쓰는 주격 조사 '-가'도 이쯤해서 유입되었다(같은 역할인 '-ㅣ'는 체언에 받침이 있을 때만 쓰이게 된다) 그 외에도 많은 것들이 있으나 적자면 헤아릴 수가 없으니 각설하고, 고등학교 1학년 과정 국어와 국사를 공부하면 많은 내용을 알 수 있다.[113]
  •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는 자신이 점령한 조선 지역에서 양반 출신으로 추측되는 여자아이를 줏어다 자신의 양녀로 삼고 키웠는데 그녀가 줄리아 오다이다. 그녀는 고니시 유키나가로부터 천주교를 줄리아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나면서 고니시 유키나가가 참수당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 아이를 데려다 키웠다. 그녀는 자라면서 굉장한 미인으로 성장했는데 이 때문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무척이나 아끼고 좋아했다. 하지만 당시 천주교를 탄압하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줄리아 오다에게 천주교를 그만 믿을 것을 권유하지만 줄리아 오다는 이를 거부하고 끝가지 천주교에 대한 신앙을 지켰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줄리아 오다를 유배보냈는데 줄리아 오다는 유배지에서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 한국사 전반에 대한 묘사가 그렇긴 하지만, 특히나 임진왜란 부분은 일본어 위키백과에서 한국과의 사료 해석이 극명하게 갈리며, 조선에 대한 불명확하고 왜곡된 묘사가 그득하다. 그 일례로 전쟁 전개 과정 설명 전 양측 전력 비교 문서에선, 조선군의 화포는 초기 사석포 보다도 못한 수준으로 사거리가 100m도 채 안되며, 조선의 활은 일본의 하고유미 보다 사거리가 현저하게 떨어지며 조총보다 낮은 수준이라고 몇년동안 아직도 명기 되어있다. 하지만 징비록에 따르면 신립이 조총을 낮게 평가했는데 임진왜란 직전 당시 고위층은 조총이 뭔지 다 알고 있었다.[114] 소오 요시토시가 조선에 왔다 가면서 조총을 선물로 줬기 떄문인데 그런대도 신립이 낮게 평가한 이유는 쏘는대로 다 맞겠냐는건데 실제로 이 시대의 조총은 명중률과 사거리가 활보다도 떨어졌다. 신립이 조총을 우습게 생각한것이 맞지만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였다. 다만 조총은 활과 달리 군집으로 쏘아대면 활보다 몇배나 위력이 세다. 즉 당시 조총과 활은 장단점이 다른 무기이고, 당시 조선의 국가체계로서는 조총 보다는 활이 효율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조선후기의 군제에서 조총의 사격사거리는 활보다 더 먼 거리에서 쏘게 법으로 정했다.수정바란다
  • 이라는 단어가 국내에 들어오게 된 것도 임진왜란 당시이다. 당시 포르투갈어 pão가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115] 또한 이 때 조선군에 흑인 군인이 고용되어 참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뭔가 강력해 보이는 흑인의 외모와는 달리 별 활약은 없었다. 명과 교역하던 포르투갈의 해군에서 용병으로 일하던 것을 참전시킨 것. 이들을 그린 그림이 남아 있다. 해군 잠수병으로 복무했다고. 실록에도 기록이 있다.[116] 국가 권력자가 술까지 주었다는 말이 있는걸 보아 매우 특이한 존재 정도로 인식한 모양.
  • 이 전쟁으로 인하여 고추와 담배가 국내에 들어왔다.[117] 조선 시대 이후의 곰방대는 결국 임진왜란 이후에 존재하는 것이며 지금의 배추절이 김치, 통칭 묵은지 역시 임진왜란 이후부터 먹기 시작했는데 그 전의 조선의 김치는 동치미같은 백김치였다.[118]
  • 일본의 임진왜란 관련 저작을 여러권 본 사람이 말하기를 그 어느 책도 임진왜란을 잘했다고 한 책이 없으며 언제나 무익하고 허무하다고 평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의 활약상은 적어도 한줄은 있고 비중이 높아지면 적의 장군이 아니라 "주인공"[2].
  • 도요토미 히데요시빠와 논쟁이 붙을 경우 임진왜란만 거론해도 한방에 데꿀멍시킬 수가 있다. 그만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인생 전체에서 최악으로 삽질한 행동이 바로 임진왜란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주인공인 태합입지전만 해도 임진왜란은 그냥 넘겨버리거나 조선이나 명을 공격하려 하면 부하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일본이 갈갈이 찢어진다. 심지어는 일본 고전문학에선 사악한 텐구가 히데요시에 빙의해서 임진왜란을 일으켰다는 내용이 나올 정도로 병크중의 병크로 여겨진다. 일본에서는 히데요시가 말년에 치매를 앓아서 정상적인 판단력을 잃은게 아니냐는 주장까지도 있다.
  • 워해머 브랜드를 달고 나오는 미니어쳐 게임중 하나인 '워해머 히스토리컬' 시리즈 종족 중에 사무라이 시리즈가 있는데, 그 사무라이의 적 테마인 '일본과 그 적들'에서 등장하게 된 진영중의 하나가 흥미롭게도 '조선군'이다. 제작자는 모델러로 유명한 앨런 페리가 맡았다. 보통 사극에서 나타나는 모습에 따라서 포졸 복장의 안습한 조선군 모델이 출시되었는데, 마침 한국의 미니어쳐 게임 플레이어 한 명이 그 소식을 듣고 모델을 보고서는 조언을 하며 여러가지 자료를 제작자들에게 넘겨 주며 이글루스에서도 이슈화 되었다. 덕분에 제대로 된 완성품이 등장했다. 자칫 알려지지 못할 뻔한 이야기였지만, 좋게 되어가는 듯해서 다행. 주소는 여기. 현재는 쌍검기마병(앨런 페리는 '쌍검기마병을 실제 편제에 포함한 군대가 있었다니 하악하악'과 비슷한 반응을 보이면서 크게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쌍검이 조선 기병의 보편적인 무기가 되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궁병, 신기전(화거라는 이름으로 등장), 심지어 의병이나 승병 등 질 좋은 주석 모델이 계속 출시 중. 최고의 모델러 중 한 사람인 페리가 만든 만큼 퀄리티가 하늘을 찌른다. 한국에선 홍대의 오크타운에서 구매할 수 있다. 진열되어 있지는 않으므로 카운터에 문의할 것.
  • 또다른 보드게임으로 일본의 워게임 전문잡지 게임저널 31호로 일본 아마존에 재고가 있으니 일본어가 가능하고 이 게임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한번 구입을 고려해보는 것도 좋겠다. 다만 4만원 가까운 가격은 부담스럽다. 구글 이미지 검색에서 'ゲームジャーナル31号'으로 검색하면 구성 및 다양한 이미지들을 볼 수 있다. 31호 다운로드 주소가 있긴 하나 잡지를 구매해야 활성화시킬 수 있다고.
일본에서 만든 게임이라 일본어판이지만 한글화 자료도 있으니 이걸로 수작업 한글패치가 가능하다. 플레이해본 일본인들에 따르면 일본군의 난이도가 매우 높다고. 초반에 쾌진격을 하지만 역사대로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평안도로 튀고... 바로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해 일본군이 2중, 3중으로 포위되버리는데다 일정턴이 지나면 명군이 인해전술을 벌이기 때문에 일본군이 각개격파 당하기 일쑤라고. 의병의 봉기를 막겠다고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에 대한 점령전을 실시하려 해도 벙력이 부족해서 불가능. 여기에 이순신이 보급로를 끊어버리기 때문에 일본군으로 이기는 게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한다.
허나 이건 전략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데서 나온 결과일뿐, 실제로는 고니시, 가토, 구로다의 3개군만 동원해도 초반에 조선 8도를 거의 쓸어버릴 수 있다. 이후 병력을 차근차근 상륙시켜가면서 황해도로 진격하면 선조까지 잡고 일본이 승리할 수 있다.[119] 제대로 플레이한다면 일본이 질래야 질 수가 없는 수준이다.
  • 왜란 시기에는 의병들 못지 않게 승병들도 많이 활약하곤 했다. 그 공헌이 너무 지대한 나머지 억불 국가인 조선의 사신들 조차 이들 승려들을 까는 글을 거의 찾기 드물었고 오히려 무신들이나 비불교도[120]들을 디스하는 글들이 적지 않았다.[121] 특히 사명대사같은 경우는 일본인들이 중과 친숙하다는 특성 때문에 외교관으로 활동한 정황이 적지 않으며 훗날 선종할 당시 왕이 친히 병세를 살피고 약을 보내줬다고 했다.[122] 이 외에도 전공에 대한 대가로 사찰에 대한 수리 등 각종 혜택이 있었는데 어떤 의미로 임진왜란은 조선 불교가 그나마 사회적 위상을 높인 계기가 되었다 볼 수 있다.
  • 일본 학생들이 역사 연표를 외울 때 고로아와세로 연도와 사건을 외우곤 하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은 "이국에 침입, 분로쿠의 역(異国に侵入、文禄の役)"이라 외우기도 한다. 1592가 일본어 고로와아세로 '이고쿠니(いごくに)'라고 쓸 수 있는데, 이게 '이국에(異国に, 이고쿠니)'와 동음이의어가 되기 때문. 또 일본이 조선에 쳐들어온 전쟁이기 때문에 '침입'만 붙여주면 제대로 외우기 쉽다. 근데 웃긴 건 저 '역'이 바로 반역의 역 맞다. 속국 따위가 감히 분란을 일으켜 정벌했다는 뉘앙스의 단어. 일본은 조선을 마치 속국 중 하나처럼[123] 내, 외부에 알렸기 때문이다.[124] 이런 이유로 한국이 왜 굳이 임진왜란을 임진전쟁, 조일전쟁 따위로 불러 저자세로 나가냐?는 주장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8.1 임진왜란? 임진전쟁?

2011년 9월말에 인터넷 상에서는 임진왜란을 2012년부터 교과서에 임진전쟁으로 바꿔서 서술한다는 소식이 알려져서 논란이 일었다.
난중일기→전쟁일기?

사실 이것은 2011년 입학한 고교 1학년생이 배우는 커리큘럼(201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부터 수능 사탐 과목으로 지정)부터 신설되는 "동아시아사" 과목 때문에 생겨난 일이다. 동아시아사는 한국사 위주의 관점에서 벗어나 새롭게 동아시아 관계를 들여다보자라는 취지로 한일관계사 전문 강원대 손승철 교수와 한국중세사 전문 한신대 안병우 교수가 집필한 교과서다.

"임진왜란"을 "임진전쟁"으로 표기하는 것은 전쟁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희석시킨다는 비판이 있었고, 여기에 기존 교과서에서 '일왕'으로 표기한 것을 '천황'으로 고친 것 등이 합쳐져 반일감정이 강한 인터넷 상에서는 까임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물론 학술적으로는 현행 명칭보다 새로운 교과서 쪽이 더 정확하고, 근대 이전에 발생한 전쟁의 명칭을 정하는 일에 침략국의 도덕적 책임을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이 교과서가 기존의 국사를 당장 대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인터넷상의 논쟁은 너무 과한 측면이 없지는 않다. 어디까지나 새로운 교과목이 나온것이지 국사를 폐지하고 동아시아사로 대체한것도 아닌데다가, 동아시아사는 통사로서 전 시대를 다루기 보다는 조선시대 위주로 다루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손교수는 "앞으로 한국사 교과서와 동아시아사 교과서의 차이나는 용어의 통일이 과제"라고 언급해 논란의 여지는 남아있다.

또한 인터넷에서의 임진전쟁에 반대하는 의견 중 일부는 포인트를 잘못 잡고 있는데, 임진전쟁으로 변경하자는 주장을 친일파, 나아가 뉴라이트라는 표현을 쓰며 이명박 정부의 하수인 격인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으로 공격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임진전쟁을 주장하는 안병우 한신대 교수는 대운하 반대 교수에 이름을 올렸으며 # 2009년 사학자 시국선언에도 참여하였을 정도#로 親정권 성향과는 거리가 있다. 게다가 1987년 5월에도 시국선언에 참여했다.#

왜란이라는 표현에 반대하는 측에서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는데 이는 왜란이라는 표현에 반대하는 진짜 학자들의 주장과는 다르니 인터넷 자료로 참고만 하자.. 1.'왜란'이라는 용어로 '일본'을 '왜'로 비하하고 있어서, 객관적이지 못한 역사인식이 반영되어 있다. 사건의 명칭 자체에 가치판단이 개입해 있어서 객관적이거나 새로운 평가를 막고 있는 셈. 2.'왜란'이란 용어는 왜구나 조선 주재 일본인들이 일으킨 일개 '사건'을 일컫는다. 다년간에 걸친 거국적 전쟁 규모의 사건을 다루기에는 부적절하다. 3.'왜란'이라는 단어는 동북아의 균형관계를 뒤흔드는 대사건이자 국제전쟁이었던 임진왜란의 역사적 의의를 과소평가하는 것이다.[125]

한국군측에 따르면 전쟁은 상호 각국간의 전술적인 대립과 선전포고 등 전술적 상황이 오간 상황에서 벌어진 사건을 전쟁으로 규명하기에 당시 조선이 왜측의 십만양병설과 같은 견해에 대개 전술적 대비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벌어진 학살사건을 시작으로 벌어졌던 사건으로 왜란이 아닌 전쟁이 시발점이 아니기에 부적절하다는 의견이 존재한다. 이는 국내외에서 한국전쟁으로 명명되는 6.25 전쟁 역시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규정하고있는부분과 마찬가지이다.

9 창작물

동아시아 3개국이 모두 참전한 대규모 전쟁이고 조선 시대 자체를 둘로 나누는 중요한 사건이어서[126] 한국에서는 이를 소재로 한 작품이 많은 편. 다만 밑을 참조하면 알겠지만, 발발 이전 상황부터 발발 및 종전까지 거시적으로 전체를 다룬 작품은 의외로 드물다. 아무래도 성웅 이순신 및 졸장 원균을 위주로 한 수군의 모습이 많고 대체역사물도 많다. 소설뿐 아니라 영화나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당장 한국인에게 가장 인상깊은 영상매체물을 꼽으라면 아마 불멸의 이순신명량을 꼽을 것이다. 그나마 최근에 흐름을 탈피한 징비록이 방영되었으나 거시적으로 보자는 초반의 취지를 잃은 채 흥행에 실패했다.

반면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작품이 많지 않다. 전국시대(일본)와 겹치고, 전국시대의 인물 중 임진왜란에 참전한 인물도 적지 않으나, 일본에서도 전국시대 관련 역사는 관심 있는 사람이나 파는 분야라고 한다.

NHK 대하드라마 시리즈에서도 임진왜란에 대해서는 아예 생략하거나, 간접적인 묘사로 넘어가는 사례가 많다. 우선 위에 언급한 것처럼 도요토미 히데요시 최악의 실책인 명백한 침략 전쟁이라서 어떻게 미화할 구석이 없다. 외국에 대한 판단력 부족이나 강화 협상에서 드러난 과대 망상 등 히데요시를 긍정적으로 볼 여지가 거의 없다. 또한 임진왜란 때 벌어진 전투와 참전한 인물들도 일본에선 그다지 관심 있는 대상이 아니라서 일본 시청자/독자들의 관심을 이끌어 내기가 어렵다. 지상전도 지상전이지만 무엇보다 해전은 일본 입장에서 도저히 흥미롭게 묘사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7년 내내 자연재해에게 떼죽음을 당하며 고통스러워하는 일본 수군만 묘사하면 무슨 화제거리를 낼 수 있을까?코스믹 호러?

게다가 임진왜란 자체가 한일관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역사적 사건이다보니 아주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바로 한일관계에 악영향을 끼칠텐데 이는 창작자들에겐 대단히 부담스러운 일이다. 임진왜란과 한일 관계에 대한 좋은 예가, UN-GO 거북선 논란 사건이다. 물론 이 작품 자체는 일본의 과거사에 날선 비판을 가하는 작품이고 논란이 된 거북선 장면도 결코 역사 왜곡을 위한 장면이 아니었다. 하지만 단순히 연출의 실수로 치부될 수도 있었던 일이 이렇게 커졌다는 점만 봐도, 임진왜란과 관련된 소재를 이용한 창작물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간에 관심을 크게 가질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이런 이유로 일본 창작물에서 임진왜란이 등장한다면 너무나 당연하게도100% 히데요시를 까는 내용이다. 만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서도 간략하게나마 무의미한 전쟁이라고 거하게 비판한다. 또한 군사 간베에에서도 주인공 간베에의 시선으로 막장 상태인 왜란 도중의 일본군을 보여주며 그의 입으로 이대로는 일본이 망한다고 얘기하는등, 히데요시의 어두운 면을 다룬다면 임진왜란에 대한 비판은 꼭 나온다.

9.1 소설

  • 박종화의 임진왜란

역사소설가 박종화의 대하소설. 고전소설 느낌이 강하게 난다. 소설속 역사관은 완전히 옛날 역사관으로 대인배에 성인군자급으로 나오는 선조, 붕당이 나라를 망쳤다는 통설, 막강한 명군, 허접 관군과 막강 의병 등 지금 보면 압박적인 사관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하지만 소설이 쓰여진 시기를 감안하면 박종화 특유의 필력에 녹아들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바비도'의 저자로 유명한 김성한의 대하소설. 1980년부터 동아일보에서 연재했으며 1992년에 <임진왜란>을 제목으로 하여 7권 완결로 출판되었다. 작가가 작가인지라 상당히 퀄리티가 높고 외교전에 관한 분량이 많은 편이다. 그래서 심유경, 나이토 조안(소설에선 조선측에서 부르던 별명인 소서비로 등장. 재출간본에서는 고니시히.), 윤두수, 윤근수 형제 등 외교관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챕터가 상당히 많다. 옛날 소설판에는 일본측 인물들이 풍신수길, 소서행장 등 한국 한자음으로 불렀는데, 재출간판에서는 일본 발음에 기초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으로 적고 괄호 안에 한자음을 표기했다. 작가가 15년간 사료를 바탕으로 임란을 전반적으로 조명했고 당시 소설치고 흔치 않게 선조의 의심병과 찌질함, 원균의 미련하고 탐욕스러움도 제대로 묘사하고 있다. 고니시 유키나가에 대한 평가가 후한 편이다. 임진왜란 7주갑(420년)인 2012년 8월, 7년전쟁이라는 원래 연재시 제목으로 재출간되었다. 재출간본은 7권이 아니라 5권이다. 자세한 사항은 7년전쟁 참고.

  • 달과 칼

홍성원의 대하소설. '백성의 눈으로 본 임진왜란'이란 주제로 쓴 소설로 미시사적 측면에서 본 임진왜란이라는 좋은 평가도 있으나 너무 백성의 입장만 강조한 나머지 많이 노력한 높으신 분들의 업적은 대부분 무시하는 기본적인 사실왜곡이 적지 않으며 무엇보다 재미가 없다.

  • 평!(平)

방기혁의 역사소설. 특이하게 임진왜란 종전 후 몇 백년 뒤 저승에서 염라대왕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처럼 임진왜란에 관련된 인물들을 처벌 및 진상을 규명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작가가 전공이 사학이 아닌 탓에 고증에 맞지 않는 장면이나 사실이 심심찮게 나온다. 일단 제목인 平부터, 조선에서 히데요시의 이름을 평수길이라고 쓴 데서 착안했는데, 작가는 平이 다이라씨를 나타내는 글자인 줄 전혀 모르고 十八의 파자, 그러니까 히데요시를 욕하는 뜻으로 쓴 것이라고 주장하는 오류를 범했다.[127] 또한 작가가 나이 지긋한 탓에 왜장들의 이름이 소서행장, 가등청정 이런 식으로 나와 읽는데 애로사항이 많다. 이 소설의 진주인공계월향. 그녀의 로맨스가 반을 이룬다.

김경진, 안병도의 공동저작. 임진왜란의 전투인 명량 해전을 주 소재로 하고 있다.

밀덕후 계층에게 유명한 작가들인 김경진, 안병도의 공동저작. 사극 불멸의 이순신의 원균옹호론과 고증 오류에 강력히 반발해서 쓴 소설. 위의 소설들과 달리 밀리터리 소설가들답게 강력한 고증과 전투신을 극대화한 소설이다. 다만 명량 해전 부분은 전작 <격류>를 거의 그대로 가져왔다는 비판도 있다.

소설가 김훈의 작품. 2000년대 한국문학계 최고의 베스트셀러이다. 애초에 사극 불멸의 이순신의 원작 중에 하나로 알려졌지만, 사실 큰 관련은 없고 저자는 자기 작품은 빼놓으라고 방송사에 거세게 항의했다. 다만 주연 김명민은 이 작품을 정독하고 연기에 반영했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재미교포 작가인 백지원이 낸 인문 교양 서적. 그러나 저자가 전작 왕을 참하라에서 드러냈던 극렬 조선까 시각을 그대로 가져온데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세계 최강의 육군이라고 지나친 과장을 하는 바람에 수많은 역덕후들로부터 무수히 까였다. 1쇄분에서는 이미 2005년에 반환된 북관대첩비가 아직도 일본에 있는 줄 알고 정치인들은 이런거나 돌려받지 뭐하고 있냐고 했다가 누군가에게 지적받았는지 2쇄분에서는 부랴부랴 고쳤다. 또한, 임진왜란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미야모토 무사시 이야기가 마지막 부분에 떡 하니 들어가 있는 황당함은... 사실상 불쏘시개.

이우혁판타지소설. 이순신 약골설의 원인이기도 하다. 문서 참고.

고우영 화백의 만화. 전쟁 당시 산에 숨어 지낸 마을 사람들과 도래인 후손인 왜장이 나오는 이야기.

김탁환의 장편 소설. 이문열처럼 작품 작성 능력은 출중하지만, 원균을 이순신의 반대편에 위치한 명장이라며 무리수를 두면서 띄우다 보니 전반적으로 등장인물에 대한 설정이나 서술이 반대급부로 낮아지고 말았다. 작가가 해군사관학교에서 교수를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더욱 비난을 받았고, 작가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지은 다른 소설들이 대부분 호평을 받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작가로서의 명성과 역량까지 저평가받게 만든 괴작.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주인공으로 한 야마오카 소하치의 장편 소설. 임진왜란에 대해 부정적으로 묘사되며 이순신의 이름이 언급된다. 다만 임진왜란 자체의 묘사는 적고 이에 대한 일본 국내의 정치 상황에 대한 묘사가 더 많다. 참고로 야마오카 소하치는 태평양 전쟁을 소재로 한 소설을 쓴 바 있는 상당한 골수 우익 성향 작가.

  • 숙적

엔도 슈사쿠의 소설. 주인공은 고니시 유키나가가토 기요마사다. 배경은 혼노지의 변부터 세키가하라 전투까지. 두 라이벌간의 이야기. 책 전체로 봐도 임진왜란의 분량이 꽤 된다. 한마디로 일본인의 관점에서 본 임진왜란이다.

9.2 드라마/영화

9.2.1 한국 드라마/영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주인공으로 하며, 임진왜란이 주된 배경으로 존재한다. 원균 옹호론 등 고증 오류가 여럿 있으나 이순신 역을 맡은 김명민 등 출연진의 열연과 고증은 무시했을지언정 한국 사극 역사상 역대급으로 화끈했던 전투신으로 만회. 하지만 이 때 해상 전투신을 너무 공들여 찍은 탓인지, 이후 임진왜란 관련 드라마에서 해상 전투신을 찍을 때 죄다 불멸의 이순신에서 찍은 장면을 재활용하는 폐해(...)가 있기도 했다.

1592~1598 임진왜란
</br>7년 전쟁이 시작된다
</br>23전 23승
</br>조국을 지켜낸
</br>불패의 신화
</br>불멸의 역사가 온다
</br>ㅡ 불멸의 이순신 임진왜란 예고, KBS

명량 해전을 배경으로 한 전쟁 영화. 최민식이 주연인 이순신을 연기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재상인 류성룡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 역시 임진왜란이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등장한다.

9.2.2 일본 드라마/영화

일본 드라마에서 임진왜란의 앞뒤인 전국시대와 세키가하라 전투는 매우 단골 소재이기 때문에 임진왜란 시기가 중간에 끼는 경우가 많지만, 의도적으로 묘사를 기피한다는 느낌이 팍팍 들 만큼 간략하게 넘어가는 편이다. 대체로 히데요시가 말년에 미쳐서 뻘짓했다는 식으로 묘사되며 주인공은 잘못된 전쟁이라고 계속 전쟁에 반대하는 식으로 나오는 편이다.

주인공 본인이 대한해협을 넘어 임진왜란에 참전한 인물인만큼 일본 사극치고는 그나마 임진왜란에 대한 간략한 묘사가 등장하는데, 히데요시의 망상으로 인한 전쟁에 주인공 간베에의 입으로 대의명분이 없는 싸움이니 일본군끼리 싸우는 꼴이라며 전쟁을 계속하다간 일본이 망해버리겠다는 말까지 한다. 여담으로 조선 현지인들의 한국말도 나오는데 고우 공주들의 전국에 비해 괜찮은 한국어를 보여주나 문제는 배경이 황해도인데 충청도 사투리....

  • 일본 드라마 고우 ~공주들의 전국~

위의 통신사씬처럼 조선인과 임진왜란이 약간이나마 나오는데 26화에선 거북선 그림도 나오며 조선 농부가 한국말도 한다. 다만 일본인 배우라서 엄청 어설프다.

조선통신사 김성일과 황윤길에게 히데요시가 무례하게 구는 내용은 위 드라마들과 마찬가지로 나왔고, 히데요시가 무리한 해외 침략을 구상하는 것이 상당히 일찍부터 계속 언급되고 있다. 다만 한국인들의 인식과 달리 조선을 친다기보다는 '명나라를 친다'라고만 언급되고 있다. 하지만 한일 외교관계 악화를 우려해서인지 임진왜란을 직접적으로 다루기 보다는 내레이션으로 처리하는 정도에 그쳤다. 이 드라마 자체가 일본 내부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도 보이인다.

9.3 게임

여기선 병자호란까지 합쳐졌다. 한국, 일본, 중국, 만주로 싸워야하는 시나리오. 한국, 중국은 도시를 모두 수복해야 하고 일본과 만주는 서울과 베이징을 먹어야 한다.
전투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3편까지는 이순신의 능력치도 낮게 평가되어 있고 해전도 명량 해전 하나만 기록되어 있는 등 고증이 부실하지만 3편의 확장팩 Divine Wind부터는 이순신의 능력치가 상향되고 Europa Universalis 4에서는 대부분의 전투가 기록되고 이순신과 선조의 능력치가 재평가되는 등 고증에 충실하려고 노력한 부분이 보인다.
1편에서는 조선과 일본을 진영으로 선택할 수 있으며, 2편에서는 명나라가 추가. 다만 게임의 싱글 미션은 실제 역사와 다르며 이는 게임 안에서도 미리 밝혀놓고 있다.

9.4 기타

2013년 9월 2일부터 MBC 표준FM에서 방영중인 라디오 드라마. 자세한 내용은 배한성의 고전열전 문서 참조.

10 위키에 등록된 임진왜란 링크

10.1 조선측 주요인물

10.1.1 조정

10.1.2 정규군 지휘관

10.1.3 의병장

10.1.4 기타 조선측 인물

10.2 명측 주요인물

10.3 일본측 주요인물

10.4 전투 전개과정

10.5 기타 전투

10.6 기타

  1. 부산진순절도, 임진왜란의 시작을 알린 부산진 전투
  2. 명나라를 칠테니 길을 빌려달라는 뜻.
  3. 놀랍게도 악질 권신 윤임 아들이다. 하지만 아버지와는 반대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4. 놀랍게도 졸장 원균 동생이다. 하지만 형과는 반대로 인망 있고 활약이 크다.
  5. 애초 조선을 정복하겠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공격에 맞서 방어에 성공했으니 승리한 전쟁이다. 다만 전장이 조선이었던탓에 피해가 막심했으니 상처뿐인 승리라 할 수 있다.
  6. 壬辰倭亂史 / 國防部戰史編纂委員會 285p
  7. 간혹 Samurai Invasion of Korea로 불리기도 한다.
  8. 직역하면 '만력제 시대에 조선에서 벌어진 전쟁'이란 뜻이다.
  9. 여기서 豊太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뜻한다. '호'처럼 이름의 한자를 음독으로 읽는 것은 일종의 존경을 나타낸 호칭이다. 제국주의 일본에서 히데요시를 침략, 대외팽창주의의 심볼로 고평가하고 있었음을 일부 보여주는 대목.
  10. 일본에서의 표현을 보고 役은 별로 대단치 않은 국지전 등을 의미하는거라서 일본에서 일부러 임진왜란을 비하 내지는 격하시키려는 목적으로 사용하는 말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일본에서 쓰이는 役은 임진왜란과 같이 대규모의 군대가 '동원'된 전쟁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기에 적절한 비판은 아니다. 그러나 하필이면 경술국치 때부터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정벌"이 "분로쿠 케이쵸의 역" 이라는 중립적인 명칭으로 바뀌었는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자기네 영토가 된 땅을 자기네 선조가 정벌했다고 하면 이상하잖아. 물론 나중에 쫓겨나지만
  11. 관련 인구 통계를 보면 임진왜란 당시 1700만 명 가량의 일본 인구는 에도시대 이후 몇십년 만에 2700만 수준으로 성장하였다. 하지만 그 이후 거의 220년 동안 그 인구를 유지하였다가 메이지 시대 이후 급성장하였다. 20세기 중반에는 7천만에 달한다. 반면 동시기 조선도 인구가 증가하긴 했으나 1200만 명에서 1800만 명으로 늘어나는 정도였고 20세기 중반 시점에도 3천만에 불과했다.
  12. 명 왕조 시절이던 중국을 당나라라고 부른 것에는 이유가 있는데, 일본은 조선왕조가 들어선 후에도 조선을 고려라고 부르거나 중국 등 대륙의 문물을 싸잡아서 '카라', 즉 당나라 것이라고 부르는 등, 대체로 상대국을 그 시점에서의 정식 국호로 호칭하지 않고 일본과 제일 밀접한 관계였을 시절의 국호로 대충 부르곤 했기 때문.
  13. 호위할 위에 나라 국. 즉 나라를 지킨다는 의미.
  14. 여기서의 조선은 북한이다. 북한의 공식 국명은 지금도 '조선'이다.
  15. 지금의 오사카 성은 오사카 전투(오사카 여름의 진) 후 완전히 파괴된 것을 도쿠가와 막부가 재건한 것이다.
  16. 참고로 이 장면에서 조선 사절단의 의상은 KBS에서 협찬해줬다고 한다.
  17. 원문 출처는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 참고로 위의 기록은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에도 보인다.
  18. 합하는 전하보다 한 단계 낮은 칭호로 재상급 신하에게 붙이는 것이다. 즉, 조선 국왕을 자기 부하 취급하며 대놓고 모욕한 것.
  19. 1590년. 당시 일본의 연호
  20. 원문 출처는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
  21. 이에 대해 류성룡은 전후 집필한 징비록에서 '바다를 사이에 두고도 침입을 막지 못했는데 한 줄기 강물을 가지고 논하다니 우습기 짝이 없다'라고 비판하였다.
  22. 당시 난부가 당주인 난부 하루마사의 후계자리를 놓고 양자인 난부 노부나오와 사위인 코노헤 마사자네가 내전을 벌이고 있었다. 일명 코노헤의 난
  23.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 따르면, 이후 히데요시 정권하에서 잇키를 선동하여 반란죄로 거의 사형이나 개역에 쳐해질만한 혐의를 받는데, 히데요시가 니가 반란을 일으키려고 한건 다 알고는 있지만 임진왜란에 자발적으로 참전하였으니 목숨만은 살려준다. 다만 너는 다시는 니네 고향으로는 절대 못돌아 갈 것이다. 라는 기록이 있다.
  24. 최관ㆍ김시덕 공제,<임진왜란 관련 일본 문헌 해제 : 근세편> 및 국립진주박물관, 장원철-오만 역 <프로이스의 (일본사)를 통해 다시 보는 - 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에서 발췌.
  25. 고바야카와 다가카케가 1597년 사망하고 5대로가 되었다.
  26. 이전 글에는 난부 시게나오라고 되어 있으나 이 사람은 17세기 사람이다.
  27. 가모 히데아키의 아버지다.
  28. 도쿠가와 직할령은 말 그대로 직할령 400만 석, 직속 가신인 하타모토의 300만 석으로 총 700만 석이었으나 그 밑의 다이묘들은 끽해야 초슈, 사쓰마, 마에다, 다테가문 정도를 제하면 몇 십만 석에 그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29.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224석 가량에 더해 광산, 무역 수입을 얻었다. 5대로 중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를 능가하는 260만 석을 웃도는 석고를 보유했으며 특히 그 둘의 격차가 고니시 유키나가의 석고보다 컸다. 또한 5대로를 포함해 어지간한 메이저 다이묘들은 100만 석 이상이거나 그와 비슷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30. 기록마다 병력 수가 차이가 난다. 16,700명이라는 기록도 있고 18,700명이란 기록도 있다. 추후에 징발된 가능성도 없잖아 있다.
  31. 소 요시토시가 무리하게 병력을 이끌고가는 바람에 가뜩이나 인구가 적었던 쓰시마는 사람들 씨가 말랐다고 한다. 여기에 쓰시마 도미중 조선말을 할 수 있는 사람 56명, 쓰시마에 살던 조선인 5명을 통역으로 종군 시켰다. 현재도 쓰시마의 인구는 4~5만을 겨우 웃돈다. 소 대신 무네라고도 읽는다. 그래서 무네 요시토모라고도 한다.
  32. 당시 고니시와 사이가 좋지않던 (앙숙 수준이였다.) 가토를 2군으로 보냄으로써 서로 경쟁토록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33. 원균이 이순신에게 보낸 공문에선 박홍과 이각은 한차례 동래성 북쪽으로 접근했다가 물러났다고 한다. 안방준의 묵재일기에선 제승방략에서 감사와 병사는 성안에 들어가지 않고 성밖에서 호응한다고 언급했다. 박동량의 기재사초에 박진과 이각이 소산역에서 전투 방식을 놓고 의견을 조율한 대목이 나오는걸 보면 적어도 이때까진 이각에게 싸울 의지가 있긴 했던 모양.
  34. 이 400척을 왜군의 전력으로 판단해 왜군 규모를 1만 가량으로 추산하는 실책을 저지르고 만다.
  35. 부산에서 서울까지의 봉화 전달은 기상상태가 최고로 이상적일 때 2시간, 최대 12시간 정도 걸린다. 이를 감안하여 봉화의 일일 보고는 아침에 출발하여 해질녘에 목멱산 봉수대에서 확인할 수 있도록 짜여졌다.
  36. 탄금대vs조령 논쟁은 전쟁직후부터 지금까지 활발한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37. 일단 당시에 조총의 내수성을 높이기 위해, 조총의 점화구에 작은 우산을 달아 어느 정도 비를 막는 기술이 일본에 있긴 했다. 문제는 해봤자 별 도움이 안되었지만.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일본 아시가루들이 주 무기로 장창(長柄槍, '나가에야리'라고 읽는다. 무려 6m를 넘기는 어마어마한 길이의 장창이었다)을 사용한 방진(야리부스마槍衾라고 불렸다)을 형성하여 싸웠다는 점을 생각하면 조총이 무용지물이 되더라도 비 오는 날 진창을 달리는 기병대가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쉽게 알 수 있다(다만, 일본의 장창전술은 대기병용으로 등장한 다른 문화권의 장창과는 조금 다른 탄생 배경을 가지고 있기는 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장창 방진 자체의 대기병 전투력이 없어지는건 아니겠지만 말이다). 일본군이 조총만 가득 들고 온건 아니니까. 전투개시전 새벽에 비가 내렸고 전투시에는 맑았다. 한마디로 조선군은 재수가 없었고, 일본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결전을 시도한 것.
  38. 또한 조총이란 물건은 현대인들이 흔히들 착각하는 것처럼 왜군이라면 누구나 들고 싸우던 주력무기가 아니였다. 주력무기는 어디까지나 창이였고, 당시 조총의 보급률은 20% 채 못 미쳤으며 결국 전투의 승패를 가른것은 백병전이였다. 100년간 전국시대를 겪어 사무라이부터 하급 잡졸들까지 실전으로 단련된 왜군과는 달리 200여년간 태평성대를 만끽한 조선군의 역량차는 상당했을 것이 당연하다. 더욱이 조선은 백병전엔 유독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긴 평화로 인해 실전성보단 휴대성을 높이기 위해 환도나 창이 점점 짧아졌기 때문에 전투에서 더욱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환도는 전쟁중 점점 다시 길어지거나 아예 왜검을 노획/수입해 사용하고, 전쟁이 끝나자 다시 짧아진다.
  39.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민초들만의 힘으로' 일어난 것은 아니다. '임진왜란의 이해'에 기술.
  40. 취미삼아 양민을 죽이고 첩을 빼앗기 위해 정승을 암살하는 지경으로 껍데기는 왕자인데 내용물은 김길태이니 누가 좋아하겠나.
  41. 여러 번 양위파동을 일으켜 전시 행정부를 혼란시켰다. 사실 명에서도 선조 대신 광해군으로 갈아치울 움직임이 있긴 했다. 그런데 전쟁끝나고는 명에서 만력제의 후임 문제로 인해 자칫 광해군은 세자로 인정되지 못 할 뻔했다.
  42. 누구누구가 노비 임을 증명하는 문서들이 이 곳에 보관되어 있으므로 제일 먼저 방화됐다고 전해진다.
  43. 이 부분은 최근 일본에서 발견된 당시 한양에 도착한 일본 군 병사의 것으로 보이는 기록에물론 아직 사실로 검증되지 않은 기록이다. 궁궐 양식의 아름다움에 대한 극찬과 궁궐 전개도, 심지어 기와의 색까지 세심하게 기록되어 있어 부정하는 견해가 대두되고 있다. 이를 보면 적어도 일본군이 한양에 입성한 시기까지는 궁궐이 불타지 않았으므로 그 시간차이를 생각할 때 일본군이 다시 밀려서 한양을 빠져나갈 때 불태우지 않았는가 하는 의견이 제기되었고, 실록에도 저자간에 떠도는 소문이 그렇다더라 식으로 적혀있다. 이 때문에 이 기록이 지배층에 대한 피지배층의 불신과 이를 의식한 지배층의 피지배층에 대한 적의에 가까운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어 사회상 분석에는 유용하지만 진실로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가 많이 늘어나는 추세다.
  44. 이 당시 여진족들의 끊임없는 약탈에 질린 함경도의 조선인들도 일본편이 되어서 함께 침공했다고 한다.
  45. 더구나 명나라의 입장에서도 조선까지의 거리 때문에 식량운반의 문제도 있고 해서 자기들이 필요할 때마다 강화협상을 핑계로 시간을 질질 끌었는데 일본의 이해와도 맞아떨어진 셈. 지켜보는 선조만 답답할 뿐.
  46. 특히 탄금대 전투의 참패 이후 급조된 조선 기병과는 달리 북방의 기마민족인 만주족, 몽골족과의 전투로 단련된 명나라의 기병대는 보병 중심의 일본군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게다가 명군이 평양성문을 뚫을 때 사용했다는 병기가 다름아닌 프랑스에서 들여온 대포였다. 지금이야 중국의 위상이 미국이나 소련 같은 초강대국 때문에 빛이 바랬지만 이때 당시의 중국은 지금의 미국의 위상에 버금가거나 더 상위인 위치였다.즉, 명군과 싸우는 것은 지금으로 치면 미군과 싸우는 것과 같은 셈이다.
  47. 애초 명군의 참전이유는 전선이 명나라땅으로 확대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으니 제 역할을 하긴 했다.
  48. 사실 그 이전부터 숫적으로 몇 만은 족히 되었지만 임진왜란 때는 굳이 싸우려고 하지 않았고, 전투 의욕을 보인 시점은 정유재란 초기때다.
  49. 소빙기가 시작하여 거의 경신대기근에 준하는 기근이었다.
  50. 전란을 거치며 왕권은 땅에 떨어졌고 민심은 선조가 아니라 전쟁영웅들로 향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선조는 자국 장수가 아닌 명군을 드높이면서 이러한 명군을 불러온 자신의 업적을 알리고, 자국 장수들의 업적을 폄하하며 스스로의 권위를 세우려했다. 실제로 실록에는 선조가 자국 장수들이 세운 공은 명군을 따라 다니며 얻은 것으로 작은 공밖에 세우지 못했다며 폄하하는 부분이 있다.
  51. 이건 전국시대 일본의 관습이다.
  52. 명군도 멀쩡한 조선인을 왜군 앞잡이로 오해하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전공을 부풀리기 위해 살해한 사례는 있으나, 행정구역 단위로 의도적인 학살을 한 적은 없다. 단, 정유재란 남원성 전투에서는 양원이 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바람에 성 안의 사람들이 모두 몰살당하기했다.
  53. 꼴랑 50석이냐고 할 수도 있지만 당시 명군은 식량공급이 류성룡에 의해서 겨우겨우 이뤄져가고 있었다는데에 유의해야한다. 실제로 이여송도 식량이 제때 안온다고 류성룡을 책망한적도 있던만큼 명군의 식량 사정은 당시 주황불이었다. 물론 일본군 사정은 빨간불이었지만
  54. 사실 그럴수밖에 없다. 자기나라 놔두고 천리만리 떨어진 남의 나라에 목숨바쳐 싸우라면 누가 좋아하겠는가.
  55. 사실 이런 명군의 민폐는 현대 이전 군대에서 흔한 일이었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인 18세기만 해도 유럽에서도 자국 병사들을 적국 병사들만큼이나 두려워한 일은 흔했다.
  56. 더구나 유목민 출신들이나 유목민들하고 살며 한족들도 구분하기 어렵다라고까지 말을 할 정도로 동화된 사람들로 주로 구성된 북병은 원래 살던 곳 마인드가 전쟁에서 약탈, 강간은 여간하면 기본(칭기즈칸 같은 유목민 영웅들도 아군이 하도 막장으로 약탈을 해서 못봐준 나머지 명령을 내려 금지시키기도 했다.)이라 징비록 등에서도 약탈이 너무 심하다는 평을 들었고 실제로 평양성을 함락시키니까 명군 소속의 몽골 기병대는 자의적 판단으로 약탈을 했다.
  57. 시대가 발전해서 절대적인 기준에서는 더 나아진 무기들도 있었지만 과거에는 무장의 질적 구성이 좋았던 반면 이 시기에는 암군들의 영향으로 기강이 개판이라 전체적으로 쇠퇴하고 있었다. 비유하자면 과거에는 보병들이 소총으로 무장했지만 전차랑 자주포의 지원, 보급도 풍부한 반면에 이쯤 오면 보병들이 자동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지만 전차와 자주포 등의 지원이나 보급 수준이 크게 떨어졌다고 보면 된다.
  58. 실제로 과거 서달의 북벌군만 해도 사막과 혹독한 기후를 넘어 카라코룸, 울란바토르까지 도시를 초토화시킬 정도의 보급을 유지할 체계가 되었으나 임진왜란 때는 조선에서의 삽질이 있었다고 해도 손실된 군마나 장비 등을 쉽게 보급하지 못하고 있었다.
  59. 사소한 일로 매질하는 건 기본이고, 유능한 항왜인 여여문은 아무리 가해자가 심신상실에 가까운 상태였다지만, 명군의 행동에 항의하다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60. 심지어 진린의 경우에는 자기 비위 거슬리게 했다고 조선 관리를 묶어서 개처럼 끌고다니는 행패를 부렸다. 이거 보고 기가막힌 류성룡이 말려도 듣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민족의 영웅님이 해결했다.
  61. 조선 땅을 점거하고 깽판을 부리면서 후금을 토벌하는 제 역할을 게을리하고 건방지게 황제까지 칭하는 지방 군벌, 반역자로 전락해 버렸다.
  62. 출처 :「쾌락의 혼돈」, 티머시 브룩 저,「명청시대 사회경제사」, 오금성 저
  63. 이는 명의 영향도 상당히 있다. 명은 주변국들에게서 은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였고, 스페인(필리핀을 통해 접촉)과 일본처럼 막대한 은을 산출하는 국가가 아니라면 은본위 경제체제를 구축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조선 후기 화폐경제때도 은이 아닌 다른것을 화폐로 삼은 것에서 이를 알 수 있다.
  64. 조선 북방에서 사용한 조운선인 북조선은 일반 조운선보다 크기는 컸지만, 조선 북부지역에서 걷은 세곡은 모두 함흥 별궁까지만 갔고 한양까지 전달되지 않았다. 당연히 거리가 그렇게 멀지 않으니 해상운송의 수준이 그만큼 떨어질 수 밖에 없다.
  65. 출처 :「다시보는 임진전쟁사」, etc.
  66. 명군 참장 낙성지 등이 은광개발을 건의했으나 처음부터 부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사실 그럴 수 밖에 없는게, 조선은 금은을 중국에 공물로 바치는 데 국가부담이 매우 커서 세종 때 완화되기 전까지 엄청난 고생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임란 이후 명의 사신들은 무지막지하게 한국의 귀금속을 뇌물로 긁어갔다. 호란 이후 청나라도 귀금속을 좀 요구했지만, 임란 이후 명이 긁어간 수준하고는 비교가 안될 정도였다.
  67. 출처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한명기 교수 저
  68. 이여송이 전투를 회피한것 맞다. 애초에 이여송이 총병직에서 물러나게 된 사유 자체가, 조선에서도 그렇고 심지어 명의 유정 등 부총병들도 이총병이 싸우려 하지 않습니다. 라고 뭐라고 하니까 병부상서 석성이 와서 직접 조사해보고 역시 싸움을 회피한다는 보고를 하여 탄핵당한 것이다. 조선도 아니고 명측에서 조사한 정식 탄핵 사유자체가 싸움 회피인데 이걸 다르게 말하면 안된다.
  69. 물론 그래도 당대에는 명이 더 많다는 평인지 왜놈은 얼레빗 명은 참빗 이라는 말도 있었다. 단, 깃카와 히로이에군후퇴하는 동안 학살을 자행했다.은 하루에만 10,040의 코를 전공으로 인정받았다는 둥의 내용으로 보아 실제 피해는 왜군이 압도적으로 많이 입혔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승려 게이넨의 기록에는 본토에서 건너온 노예 상인들이 부대를 따라다니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사들였으며 목을 밧줄로 이어 앞장 서게 했고 걷지 못하는 사람은 지팡이나 몽둥이로 매질해서 강제로 걷게 했는데 이들이 바로 지옥의 죄인을 처벌하는 악마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는 내용이 있다. 추가로 이거 게이넨도 이런 짓하는 자국의 병사들이 사람같지가 않다고 욕할 정도였다. 일본군도 점점 사나워지기 시작하였는데, 히데요시가 명군 참전 이후 조선정복이 실패할 가능성이 커지자 자존심 회복을 위해 조선에 참혹한 피해를 입히고 싶어 했다고 한다. 일례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신으로 두고 있는 도요쿠니 신사(豊国神社) 옆에는 이총공원(耳塚公園)이 있는데 당시 기록에 1597년 9월 12일 규슈의 나고야성에 조선 각지로부터 수집된 조선인 126,000여 명의 귀나 코를 15개의 나무통에 절여 실어온 뒤 이곳에 묻었다고 한다. 단, 거의 대부분은 코를 잘랐고 코무덤이라는 이름이 너무 잔인하다고 하여 이름을 귀무덤으로 바꾸어서 귀가 강조된 면이 있다. 물론 일본군의 전공 뻥튀기 가능성죽은 일본인의 귀나 코를 자른 경우 등도 있겠지만 그걸 감안해도 일본군의 학살은 극심하기 짝이 없었다. 부풀렸다고 해도 일단 단위가 정말 장난이 아니여서(...) 히데요시는 패배할 것 같은 생각이 들자 '조선인을 모조리 죽이고 조선을 빈 땅으로 만들어라'라는 망언을 하였으며, '일정 숫자의 조선인을 죽인 다음에야 조선인의 생포를 허가한다. 증거는 담당관에게 제출한 후 반드시 확인 받을 것'이라는 할당제(?) 같은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70. 왜냐하면 의병은 만명단위의 대부대는 거의 없었다.
  71. 김시민이 이미 전사한 줄을 모르고 있던 히데요시는 2차 진주성 전투에서 김시민은 꼭 베어오라는 특명을 내린다. 그런데 당시 진주목사인 찌질이 서예원이 살려달라고 울고 불고 난리치다가 잡혀 죽자 다테 마사무네는 그 목을 베어다가 김시민의 목이라고 소개하며 히데요시에게 갖다 줬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서예원이 명장은 아니어도 용맹한 장수였다는 주장도 있다. 즉 위에 적은 것처럼 겁쟁이에 찌질이라 울고 불고하지 않고 용맹하게 맞섰다는 것. 진주성으로 부임하기 전에 몇차례 전공을 세웠다던가 2차 진주성 싸움에 앞서 (필사의 각오로 싸우기 위해)온 가족을 진주성으로 불렀단 기록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근데 이건 김천일의 후손과 서예원의 후손들이 서로자기 조상 자랑하고 상대방 조상 욕하는 내용이라 진실은 알 수 없다. 좀 더 연구가 되면 확실한 결론이 나올 듯하다.
  72. 진주성 방어에 나선 병력이 얼마인지 제대로 파악이 안되고 있다. 입성자와 전사자 관련기록을 비교대조해 보면 입성해 방어전에 들어갔단 이야기가 없는 부대가 전사자 수효에 다수 포함되고 막 그렇다.
  73. 진주성 공격 시기의 일본 육군은 초기 병력의 40% 가까이를 상실해 약 10만여 정도 남긴 했는데 이때 참전 영주들 관련 기록을 보면 영지에 충원병력 보내라고 막 닦달하고 있어서 총 규모도 제대로 파악이 안 된다.
  74. 일본의 '회본태합기'에는 비가 올 때 귀갑차를 사용해 성에 접근해 성을 무너뜨렸다고 하고 있다.
  75. 조선시대 사료나 하멜표류기들을 보면, 향토방위는 승병들의 고유의무였다. 추측건데 징병제 국가였던 조선에서 남정네들이 군대에 소집되었을 때 남자들이 믿고 마을을 맡기기에는 승병이 적합하지 않았을까? 어쨌건 마찬가지로 보부상들은 전시에는 척후병으로 징집되도록 되어 있었다.
  76. 의병과 수군을 합치면 17만 5천이다. 사람들의 통념과 달리 임진왜란의 주력은 정규군이었다. 의병은 보조적 역할을 맡다가 결국 정규군에 편입되었는데, 병농일치 징병제 국가인 조선의 시스템을 고려하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단 조선 후기부터는 모병제였다.
  77. 조선까들중엔 17만이 장부상기록이었다고 주장하는데 조선보다 인구도 딸리던 고구려도 주필산 전투때 15만 모았고 고려도 2차 여요전쟁때 30만 모았는데 조선이 17만 못 모았을 가능성은 없다, 게다가 선조때는 아직 조선이 세도정치시기만큼의 막장이 아니었다.
  78. 이 전쟁의 공식적인 사죄는 오히려 이 전쟁에 불참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했다. 물론 이 사과를 딱히 이에야스가 평화주의자라서 했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
  79. 대개 전국시대의 무장들은 문맹이었다. 그래서 그 점을 이용한 고니시는 사전에 심유경과 짜고 사이쇼 죠타이를 시켜 위조된 내용을 말하라고 했다. 참고로 이 사람이 게임 임진록2에 일본 영웅으로 등장하는 그 '세이쇼오'다. 이 인간은 진구황후 전설에 푹 빠져 산 인간으로 도요토미의 조선 정벌을 부추긴 장본인이기도 하다. 자세한 것은 사이쇼 죠타이 문서 참조.
  80. 豊臣秀吉의 冊封問題와 壬亂期의 講和交涉, 임진전쟁기 강화교섭 연구
  81. 종전 이후 1599년 2월, 명나라로 돌아가기 전의 명 장수와 병사들을 위해 훈련원에서 베푼 연회를 그린 그림이다.
  82. 양호가 서울을 떠나자 도망가는 거 아니냐며 선조가 가서 붙잡고, 그러면서 백성들에게 이건 피난 가는 게 아니다고 설명하라고 명령했다. 한편 양호는 서울을 무조건 지키겠다며 확실하게 약속하기도 하는 등 개판이다.
  83. 히데요시의 명령에 대해서 다소 논란이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굳이 한양을 공격하지 않아도 되는것처럼 말했지만, 실제로는 한양공격을 강하게 지시하고 있었다.
  84. 이 무렵, 시기상 10월로 접어들고 있었기에 곧 겨울이 올 것이므로 보급 없이 계속 진격하다가는 그대로 고립되어버리는 상황에 처할 수 밖에 없었다.
  85. 엄밀히 말하자면 패한 건 아니다. 울산성 함락 및 전멸의 위기 직전에 일본의 구원군이 포위망을 돌파하여 고전하긴 했어도 결국 일본군이 승리했다. 구원군이 좀만 늦었으면 가토 기요마사 포함 울산성의 일본군이 모두 전멸했겠지만.
  86. 사실 영 우스갯소리라고 하기도 뭐한게 이때 이들이 반목한 이유와 저 삽질을 벌인 이유가 거의 비슷하다.
  87. 조선 조정에서도 잘 알고 있을 정도였다. 덕분에 이 일로 관광타게 된다.
  88. 실제로 의병장 중에서는 기축옥사로 쫓겨난 이들도 있었고 심지어 북인의 핵심 당원이던 정인홍도 있었다.
  89. 실제로 해산하라고 하면 할 수밖에 없는게 의병이다. 안따르면 죽음뿐이니까
  90. 윤두수는 몰라도 류성룡의 경우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육지에서는 류성룡, 바다에서는 이순신만 없어도 이길수 있었을것이다." 라고 할 정도로 활약 많이 했다.
  91. 이후 광해군~숙종 기간동안은 군대에 관심을 많이 쏟는다.
  92. 전쟁 초기에는 현지에 대한 지식 부족으로 조선을 단순히 지나가는 통로 취급했지만 일본군이 조명 연합군에게 밀려서 휴전협상에 들어갔을 때에는 전략목표가 보다 현실적으로 수정되었고, 가장 중요한 협상조건이 조선 8도 중 4도를 일본에 할양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도 현실과는 한참 동떨어진 목표였지만...
  93. 예를 들어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미군탈레반을 상대로 아무리 압도적인 전비로 전술적 승리를 거둬봤자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이나 이슬람 극단주의를 근절하지도 못했고 친미 민주주의 정부를 세우지도 못했으며 아프간의 막장스러운 경제사회를 복구하는 데도 실패했다. 이래서야 탈레반 테러리스트 개개인을 아무리 많이 죽였어도 미국 입장에선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94. 약간이라고 서술 했냐면 이에야스는 인식과는 달리 평화주의자라고 할수 없고, 임란 직후의 조선 조차도 이에야스를 완전히 신용한 것은 아니다. 자세한 건 항목 참조
  95. 일본의 개전 이유 중 경제적 측면의 이유로 꼽히는 것이 일본의 은 생산량 폭증과 제련기술의 향상이었다. 일본측은 넘쳐나는 은을 소비할 창구, 즉 대륙과의 무역에 대한 절실한 욕구가 있는 상황이었으며, 이것을 전쟁으로 해소하려는 시도는 처참하게 실패했지만 대신 전후에 조선과 국교를 회복하며 조선을 통해 청과 무역하는 방법으로 해소할 수 있게 된다.
  96. 당시의 주요 상인들은 자본의 몇 곱절에 가까운 엄청난 이득을 보았다고 할 정도이고, 이것은 독점적 민간자본의 형성으로 이어진다. 조선이 원시적 농업국가에 불과했다는 식민사관의 논지를 반박하는 가장 중요한 단서 중 하나다.
  97. 숙종 때 일본에 통신사의 일행으로 간 신유한의 '해유록'에서 신유한은 징비록이나 강항의 간양록같은 조선의 임진왜란 관련 책들이 일본에 출판된 것을 보고 국가 기밀이 담긴 책들이 일본으로 건너간 걸 보니 우리나라의 기강이 말이 아니다라고 한탄하였다.
  98. 일본에도 기록이 있으니 지방의 썰에 의하면 상당한 활약상이 있으나 적이 존재조차 모르는 의병들은 신빙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99. 아예 언급을 안 한 것도 아니고, 세계 각지의 첩보를 듣는 장면에서 조선을 까면서 "철포병 20만 앞세워서 두 달이면 되겠군"이라고 직접적으로 언급되었는데도 그렇다. 이렇게 문제되는 부분은 아예 덮어두고 얘기 자체를 꺼내지 않는다는 견해도 있다.
  100. 임진왜란때 용병으로 따라간 낭인이 조선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내용. 책은 상하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임진왜란당시 조선이 배경이다.
  101. 일본의 고문체는 조선/중국의 문체와 한자의 배열이 다르고 일본식 구결(가나)이 섞이는 등 조선인으로서는 이해가 굉장히 힘든데, 이익은 이 글을 한자 한자 다 따져 보면서 글자를 재배열해서 번역했다고 한다.
  102. 일본 고미즈노오(後水尾) 덴노의 연호. 1615년~1624년까지 사용되었다. 일본어 발음으로는 '겐나'.
  103. 겐나의 역, 즉 1615년의 오사카 공방전을 말한다. 도쿠가와 가문이 도요토미 가문을 완전히 멸망시킨 전투이다. 덧붙여 원화라는 연호는 오사카 전투가 끝난 후에 변경된 연호인데, 일본에서 완전히 전쟁이 끝났다는 의미로 바꾼 연호다. 그래서 전국시대의 종결을 상징하는 '원화언무(元和偃武, 겐나엔부)'라는 말이 있다.
  104. 성호사설 권12 인사문 일본지세변 급 격조선론
  105. 조선수군이 무서워서 뒤에서 구경만 하고 있던 도도 다카도라의 50척은 이때야 뒤늦게 참전함. 모랄빵 나서 도망간 덕분에 조선군이 거의 죽지 않은 전투이기도 한데, 남해안 곳곳에 숨어있다가 이순신이 명량해전에서 승리하자 데~헷! 하고 판옥선 까지 끌고 다 나타난다.
  106. 나머지 두 궁은 전쟁이 끝난 후 복원하였다. 일본 기록에는 경복궁에 입궐해 풍경에 대해 이야기하는 기록이 있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수정되어야 할 듯 하지만 경복궁의 경우 큰 규모라서 조선 정부도 복원하는데 엄두를 내지 못하였고, 19세기 말 흥선대원군이 중건할 때까지 폐허로 방치되었다.
  107. 실제로 명은 이후 재조지은의 논리를 내세우면서 조선에 상당히 무리한 요구를 하게 되는데, 명의 입장에서 보면 나름 정당한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사실 논리적으로 보면 명군이 조선을 구원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게 사실이라 틀린 주장은 아니었다. 허나 그것이 조선에겐 큰 부담이었고, 사신들의 개인적인 뇌물 받기 등이 겹쳐 현대까지 명에 대한 반감이 커지는 계기가 되었다.
  108. 소 요시토시는 임진왜란 중 명과의 강화협상을 진행했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였다.
  109. 도요토미 히데츠구의 동생, 즉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카이자 양자였다. 또, 거제도에서 병사한 인물로는 시마즈 요시히로의 차남인 시마즈 히사야스가 있다.
  110. 고바야카와 다카카케는 행주 대첩에서 권율인지 아니면 그 휘하의 병사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한 쪽 눈을 저격 당했다고 한다.
  111. 그중 전사자 중 다이묘 급은 4명으로 당포 해전에서 전사한 도쿠이 미치유키, 명량에서 전사한 구루시마 미치후사 형제와 수원에서 매사냥하다가 조선군의 기습으로 죽은 나카가와 히데마사, 그리고 사망자 중 최대어라고 할 수 있는 자가 에가미 이에타네로 대력강용하다고 평가받는 녀석으로 그 류조지 타카노부의 차남으로 하스이케 성의 영주이자, 아버지의 명으로 에가미 가문의 양자로 들어가 에가미 가문을 먹어치운 녀석이다. 심지어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후계자인 나베시마 카츠시게를 양자로 까지 데리고 있었던 녀석인데. 가토 기요마사 휘하에 있었으나, 조선군이 임진왜란 발발 1년만에 부산에서 전사시킨다. 다이묘급은 아니지만 야규 가문의 후계자 역 이자 장남이던 柳生久三郞도 전사. 나머지는 모두 병사(病死).
  112. 이순신과 녹둔도에서 근무했던 동료로, 이순신이 백의종군하게 된 계기인 녹둔도 전투에도 함께 참여했고 백의종군 또한 함께 했다.
  113. 국어학계에서는 정철 어머니의 서간문에서 '가'를 발견하고, 이것이 후대의 주격조사 '가'의 전신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여기에서의 '가'는 동사 '가다'의 어간인 '가-'와 명확한 구분이 되지 않기 때문에 회의론자들 또한 많다. 일부 책에서 인선왕후가 보낸 서간문에도 주격조사 '가'가 발견되었고 1550년대의 일이라고 말하지만 역사상 인선왕후는 효종의 비이고 최소 1650년대의 일이다. 위에서 말하는 인선왕후는 인종의 비인 인성왕후'와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주격조사 '가'가 나타났다는 구절을 보면 조금 재미있는 것이 정철의 어머니의 서간문에는 '찬 구들에서 자니, 배 세니러서(꼿꼿이 일어나서, 여기에서는 폭풍같은 설사가 일어나서) 자주 (화장실에) 다니니'라는 구절이고 인선왕후 어필에서는 '두드러기 불의예 도다 오르니'라는 구절로 모두 영 좋지 않은 상황에서 쓰였다는 것.
  114. 즉 당대 명장으로 인정받던 신립도 조총이 뭐 어떤건지는 알고 있었다는 얘기
  115. 이상한 얘기다. 조선에 빵문화가 없는데, 빵이라는 단어만 들어왔다는 말인가? 아니면 누군가가 빵에 대해서 기록해두었다는 말인가? 하지만 단어가 민간에 퍼지지 않는 한 임란때 빵이 전래되었다는 얘기는 성립할 수 없다.어떤 기록이 남아있는지 작성자 추가바람.
  116. 조선왕조 실록 선조실록 선조 31년 5월 26일.
  117. 고추는 일본군이 생화학무기처럼 사용하기도 했고 담배는 동래 인근에 많이 심었다.
  118. 그런데 여기서도 다른 주장이 제기되는데,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고추가 16~17세기부터에나 수입되었다는 건데 그 짧은 기간동안 고추장은 몰론이고 지역별로 가지각색인 지역 고유의 김치들이 불과 2, 3세기만에 생겨나 정착했다는 말이 된다는 소리인데 이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이다. 다만 조선시대 당시 기록에 고추를 왜에서 들어왔다고 왜초(성호사설), 왜자개(지봉유설) 등으로 부르는 것이 남아있어 확실한 설은 아니다.
  119. 이순신 장군이 이벤트 카드로 등장하는데 조선에 존재하는 모든 왜군의 보급은 끊는게 가능하다. 이미 보급이 끊긴 왜군은 중복으로 보급 단절 효과를 받는것도 가능하다. 다만 가토 키요마사가 함경도에 존재하는 경우는 가토 키요마사의 호랑이 사냥 카드로 무효화 가능하다는 약점이 있다.
  120. 실록에서는 육식자라고 나왔다.
  121. 가령 중들도 이렇게 열심히 싸우는데 우리들은 뭐하냐는 식으로, 특히 사명당이 일본 군영을 살펴보고서 왜군과의 전투를 독려하는 글을 올리자 중이라도 말 참 잘했다는 논평도 실었다.
  122. 심지어 사명당전에서는 병조판서에 임명한다! 즉 국방부장관직을 준 셈 물론 사명당은 사양하지만
  123. 네덜란드영국(...)도 이렇게 선전하곤 했다. 헨드릭 하멜 참조.
  124. 내부로는 백성들에게 프로파간다용으로 썼고, 외부로는 서양 국가들에게 조선 건드리지 말고 우리랑만 교역하라는 식으로 썼다. 당연히 중국이나 베트남처럼 알 거 다 아는 중화권 국가에는 씨알도 안 먹혔으므로 이런 개드립을 치진 않았다.
  125. 명-청 교체의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고, 일본에서도 도요토미 정권이 멸망하는 직접적 원인이 되었으며, 조선에서는 대동법 개혁 등 조선 전기와 후기를 구분짓는 근본적인 사회변화를 일으켰다. 앞의 평가는 최근 서서히 부정되고 있으니 참고만 할 것.
  126. 일반인들에게는 임란이 분기점이겠지만 사학계에서는 보통 임란을 기준으로 전후기를 쪼개기보다는 전기 중기 후기 3부분이나 말기를 추가해서 끊는 편이다. 500년의 조선을 전후기로 짜르기엔 사실 애매한 부분이 있다.
  127. 또한 거제도에서 병사한 왜장(일본 장수) 하시바 히데카츠(羽柴秀勝)를 히데요시의 양자이며 오다 노부나가의 아들인 동명이인과 오인하는 오류를 저질렀다. 전쟁에 참여한 하시바는 히데요시 누나의 아들. 우에노 쥬리가 주연한 고우 공주의 남편이기도 했다.
  128. 당시 도원수는 권율의 전임자인 김명원.
  129. 볼드체가 쳐져있는 이유는 인지도가 가장 높기도 하고, 이순신이 없었으면 조선은 그대로 멸망이었기 때문.수륙간 동시병진과 해상의 안전한 보급로 확보라는 일본의 전략을 해상에서 차단함으로써 완전히 비틀어놓았다. 자세한 건 이순신 항목과 명량 대첩, 한산도 대첩 등을 참조.
  130. 조선 관군, 의병을 통틀어 최초로 승리한 전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