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암진 전투 | ||
날짜 | ||
1592년 음력 5월 26일 (양력 6월 16일) | ||
장소 | ||
조선 경상도 의령 남강 정암진 | ||
교전국1 | 교전국2 | |
교전국 | 조선 왕국 | 쇼쿠호 일본 |
지휘관 | 곽재우 | 안코쿠지 에케이 |
병력 | 의병 50여명 | 2000여명 |
피해 규모 | 불명 | 전멸 |
결과 | ||
곽재우 의병의 승리.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 저지 |
1 개요
곽재우가 일으킨 의병 50여명이 일본군 6군의 선봉대를 정암진에서 매복해있다 기습하여 일본군 6군의 전라도 진출을 저지시킨 전투이다.
2 전투전야
임진왜란 발발이후 조선은 일본군에게 당시 주요곡창지대인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일명 하삼도)중 전라도를 제외한 지역을 모두 빼앗긴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전라도는 조선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했던 곳이였고 이에 일본군은 전라도를 점령키위하여 6군을 의령으로 이동시킨다.
그러자 앞서 의령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는 6군을 공격하기 위해 남강 정암진부근의 갈대밭에 의병 50여명을 매복시켰다.
3 전투
음력 5월 26일 안코쿠지는 2000여명의 선봉대를 정암진 인근으로 보내어 도하하기 위하여 얕은 곳을 골라 푯말을 세워두게 하였다.
그러나 이날 밤 곽재우의 의병들은 일본군이 세워놓은 푯말의 위치를 늪지대로 옮겨 세워두도록 하였고 이를 몰랐던 안코쿠지의 주력군이 푯말을 믿고 갔으나... 아니 이게뭐야!
늪지대에 빠지게 되었고 이를 노리며 매복하던 곽재우의 의병은 일제히 기습을 가하였고 결국 이도저도 아니게 된 일본군은 그야말로 궤멸되버린다.
4 결과 및 영향
결과는 그야말로 대승.
불과 50여명에 불과한 의병으로 2000명이 넘는 일본군 주력을 궤멸시켜버렸다.
또한 이 전투로 충공깽되어 버린 6군은 전라도 진출을 포기하게된다.
한변 이 전투 이후 곽재우의 의병은 불과 50여명에서 오운과 박사제의 병력 등이 합세하여 3000명이 넘는 대군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