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

義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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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영국 신문 <데일리 메일(Daily mail)>의 극동 특파원으로 조선에 파견된 매켄지(F.A. Mckenzie)가 양근군(오늘날의 양평군)에서 만난 의병들을 찍은 사진. 중앙에 다른 사람의 의상과 대비되는 코트를 입은 사람이 보이는데, 해산된 군인의병에 합류했기 때문이다. 후에 이 사진은 항일 무장투쟁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유물이 되었다.

“우리는 어차피 죽게 되겠지요. 그러나 좋습니다.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보다는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위 사진을 찍은 영국인 기자 매켄지와 인터뷰를 한 의병 부대의 의병장이 남긴 말.

"...전술을 알지도 못하는 유생이나 무기도 없는 농민이 순국을 각오하고 맨손과 맨주먹으로 적과 싸워 뼈를 들판에 파묻을지언정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으니, 이것이야말로 오랜 역사적 전통 가운데 배양된 민족정신의 발로였다..."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1 본문

왕조시대 외적의 침입이나 대규모 반란에 대항해 사적으로 조직하여 정부군을 돕거나 향토 방위에 힘쓰는 군대를 뜻하는 말. 요즘말로 하면 의용군이나 민병대.

기록에는 보통 "0조 00년 하늘이 노하시어 나라에 망조가 드니 외적이 들끓어 백성들이 고통에 신음할 제, 00땅에 한 선비[1]가 있음에 이름은 00이라 하였다. 국난의 상황에 스스로 웅대한 의기를 억누르지 못하고 어느날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니 그 곁으로 천하의 호걸 협객이 모였으메, 경공이 뛰어난 자, 의협심이 강한 자, 권법이 출중한 자들이 모여 정의로 불의를 심판하여..."같은 식으로 묘사된다.

2 의의

나라의 국난극복을 위해서 민간인들이 일어났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애초에 국가의 정규군이 외침을 막아내지 못했거나 대규모 반란을 야기하게 했다는 점에서 국가의 실패를 드러내는 면이라 의병 활동을 그저 좋다고 보기만은 곤란하다. 하지만 국가와 내가 하나이며 외적은 나와 다른 이질적인 공격자라는 의식이 없으면 의병이라는 것 자체가 생길 수가 없다. 이런 면에서 민족적 일체감이나 국가적 일체감이 없으면 의병 자체가 생겨날 수 없는 것이다.

2.1 부정적 측면

국가의 입장에서는 사실 달갑기만한 존재는 아니다. 본래 군대를 운영하는 것은 돈을 밑빠진 독에 쏟아 붓는 것처럼 엄청난 자금을 필요로 한다. 단순히 의기만 가지고는 의병을 조직하기 힘들기 때문에 의병장은 보통 자기 지역에서 재력을 가지고 있거나 명성이 높은 인물이기 마련이다. 이들의 의병 활동이 성공적으로 수행되면 의병장들은 더욱 높은 명성을 얻게 되며 무력집단지역 근거지까지 가지게 된다. 의병의 활동으로 인해 문제가 해결된다면 더욱 명성이 높아지고, 스스로 국가적 난제를 수습하지 못한 중앙정부의 권위는 상대적으로 추락한다.

그 결과 문제가 해결되면 의병은 군벌화 하고, 의병장들은 지방의 권력자가 될 수 있다. 실제로도 처음부터 나라를 구하고자 함이 아니라 이런 출세를 목적으로 의병을 일으키는 인물도 많다.당장 유명한 삼국지의 유비만 하더라도 의병으로 군세를 일으켜 한 나라의 왕이 된 인물이다.

3 군사적 한계

다만, 의병 체제는 성공의 가능성이 그다지 높지만은 않은데, 일단 의병은 중앙군의 소속이 아니라서 중앙군이 받을 수 있는 만큼의 보상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이 단점으로 지적된다. 전투 도중 부상을 입거나 사망했을 경우 중앙군은 이에 대한 합당한 보상을 보장해주지만, 의병의 경우는 그 소속 조직의 상황에 따라 지원이 없을수도 있다. 물론 의협심으로 자발적으로 싸우다 그렇게 된 것이긴 하지만, 적어도 보상이 없는 것보단 있는게 그나마 낫지 않겠는가.

장비 수준 또한 지도자의 수준이 미치지 못한다면 중앙군에 못미치는 떨어지는 장비 수준을 보유하게 될 수도 있다. 또한, 중앙 정부의 강력한 인력 소집 능력에 비해, 순전히 의협심만으로 인력을 소집하므로 머릿수도 부족할뿐더러, 핵심 인사들이 전략/전술적 개념이 얼마나 있는지도 문제시 된다.

4 효과

하지만 의병은 일단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적군에게 지대한 심리적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된다. 자신들의 한가운데, 혹은 후방이나 진격로 등에, 자신들을 괴멸시키는 것이야 당연히 불가능하겠지만, 어찌되었든 피해를 입힐만한 세력이 있다는 사실은 진군 속도나 경로에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2]

전쟁의 성격에 따라 다르지만, 공격군 입장에서 볼 때 진출 지역의 민간인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무장 투쟁에 나설 정도로 공격군을 지지하지 않고 적대한다는 사실은 공격군의 사기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도 있다.

더군다나 의병은 무장 수준이 비참하기 때문에 정규군처럼 한눈에 구분이 힘든데, 그렇다고 아무 민간인이나 보이는대로 족치면 현지인들의 반감을 사게 되어 의병에 가담하는 현지인들이 더욱 늘어나게 될 가능성이 급상승한다. 민간인 하나 족쳤는데 분노한 현지인 10명이 의병에 가담하면 단순히 주먹구구식으로 계산해봐도 침략군 쪽이 명백한 손해.

그리고, 의병도 일단은 싸울 수 있는 자들인지라 아무 힘도 없는 것은 아니다. 의병장들도 대체적으로 의병의 약점을 잘 알고 있어서, 의병의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살릴 수 있는 게릴라 전술을 주로 활용한다. 이렇게 되면 당하는 침략군 쪽은 짜증을 넘어서 피로하게 된다.

5 한국의 의병

한국사로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계의병(繼義兵) 등)과 한말 을미의병 등이 유명하나, 다른 시대 특히 고려몽골의 침입 때나 조선후기 정묘, 병자호란 때에도 의병이 활동한 바 있다. 심지어 홍경래의 난 등 반란군을 상대로 의병이 일어난 경우도 있다. 의병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다양해서 승병들은 한국 불교가 호국불교의 성향을 띈다는 것을 잘 보여주며, 몽골의 살리타이가 고려를 침입했을 때 약 3,000의 고려 의병에게 기습을 받는데 이 의병들의 정체는 사실 도적(…)이었다고 한다[3]. 하지만 고려 이전에는 기록이 부실... 아니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의병이 있었다고 해도 알 수가 없다.

동학농민운동의 경우는 이를 의병 활동이라고 규정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자발적으로 조직됐으되 중앙정부와 협력해서 국내외의 위협에 맞서는 민중 무장조직이라는 게 일반적으로 쓰이는 의병의 정의인데, 동학의 경우는 외세에 맞선 민중 봉기라는 점은 비슷하나 중앙정부를 향해 칼을 겨눈 반란 내지 혁명의 성격이 있었기 때문에 의병과는 구별된다.

국내에서는 의병이 중국처럼 군벌이 된 일은 없다. 국가차원에서 유교 이데올로기를 보급하고 지방에 대한 관의 통제를 지속적으로 강화했기 때문. 임진왜란때도 전쟁 극초반인 임진년 5월부터 의병의 관군화가 진행되어 순수한 의병부대는 크게 줄고 의병장이 관군을 지휘하거나(정문부) 관군장수가 의병을 지휘하는(박진) 사례가 나타난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이후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여러 의병장들을 죽이거나 핍박했다고 잘 못 알려졌는데, 이는 송유진의 난과 이몽학의 난에서 이름이 거론된 이산겸과 김덕령을 죽인 일을 인터넷에서 튀긴 탓이다. 선조가 정말 의병장들을 숙청했다면 의병 활동을 내세워 종전 이후 집권당이 된 대북의 존재는 무엇으로 설명한단 말인가? 선조가 죽인 의병장은 이산겸과 김덕령 둘 뿐인데 이산겸은 이전부터 병력을 묶어두고 움직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의심을 받았고 김덕령은 함부로 사람을 죽여 압송된지 겨우 몇달지나 반란에 연루된데다 반란가담자 수십명에게서 공통적으로 이름이 거론된 탓에 그 당시로선 빠져나올 방법이 없었다. 함께 이름이 거론된 최담령은 별 일 없이 풀려났다는것만 봐도 무조건 의병장들을 믿지 못해 벌인 옥사가 아님을 알 수 었다.[4]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는 을미사변 이후부터 의병이 일어나기 시작한데 처음에는 지방 유생들이 주도하였으나 점차 농민이나 포수 출신의 의병장도 나오게 되었고[5] 전국으로 확대되기에 이르며 1907년의 군대해산 이후에는 해산군인이 합류하여 그 세력이 더욱 커진다. 1908년 의병의 세력은 절정에 달해 7만명에 이르렀다. 이에 일제는 일진회의 회원들을 총알받이로 동원하는 한편 남한 대토벌 작전(삼광 작전)을 전개해 의병은 물론 의병이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말살함으로[6] 의병의 세력은 크게 축소되어 불과 1년 후인 1909년에는 25,000명으로 격감했고 1910년에는 고작 수천명 단위만이 잔류했다. 많은 의병이 일본군과 헌병보조원들에 의해 토벌되었고 살아남은 의병들은 만주연해주 등지로 건너가 독립군이 되기에 이른다.

5.1 조선시대 의병 지도자 목록

5.2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시대 의병 지도자 목록

후에 만주로 넘어가 독립군으로 활동하는 이들도 있으나 기본적으로 한반도 내에서 의병 활동을 했던 인물들이다.

6 중국의 의병

중국사에서도 이런 예를 볼 수 있는데, 삼국지의 배경이 되는 후한황건적에 대항하여 일어난 의병들은 나중에 여러 군웅의 기반이 되었으며, 남북조시대에서 선비족을 격파한 동진의 명장 유유나라의 장수 진패선은 자신들이 거둔 전공을 무기로 백성들의 명성과 지지를 얻어 나중에 을 세워 황제가 된다.

또한, 나라는 황소의 난에서 강한 권력을 가지게 된 지방 절도사들의 할거로 멸망하게 된다. 이런 문제로 인해 중앙정부에서는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예를 들어, 나라 시대에 에 대항하여 의병을 이끌었던 악비 등은 충성하던 정부에 의해 제거되었다.

대에는 태평천국의 난에 대항하여 증국번이 의병 활동을 하였고, 사실상 국가의 기능을 상실한 청의 실질적 정규군 역할을 일부 담당했다. 증국번의 제자인 이홍장도 함께 활약했으며 이 때의 활약을 바탕으로 권력자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군대의 유지비용을 도무지 사재로는 감당할 수가 없는 경우 상당수의 의병집단은 그대로 비적이 되었다. 중국 나라 말기 나타난 군벌과 비적집단을 좋은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여담으로 중국사를 살펴보면 송대를 기점으로 의병이라 할 수 있는 의용군이 정규군을 전투력에서 압도하는(…) 사례가 종종 나타난다.

7 유사 개념

이름이나 행동 등은 약간 달라도 비슷한 걸로 일제 때 독립군[16]이나 프랑스레지스탕스, 독소전 당시 러시아등을 볼수있다.

8 서브컬처에서의 묘사

문명 5의 한국 문명에서 임진왜란 시나리오(사무라이의 침공)의 전용 특성으로 의병이 나온다. 효과는 유닛이 하나라도 남아있으면 절대로 멸망 당하지 않으며 도시를 탈환하면 추가 유닛이 나오는 것.

9 관련 항목

  1. 계급은 중요치 않으나 현직에 있는 고위 관료급은 보통 의병이 되지 않아도 자기가 맡은 군사들이 있어서인지 잘 안나온다. 관료들이 이를 실행하면 당연히 의용군, 즉 의병 모집이 아니라 징병 혹은 모병이 된다.
  2. 특히 독소전쟁처럼 한쪽이 장거리를 이동하는 경우 모든 지상 통로를 통한 보급부대에 어느 정도 이상의 무장을 시켜야하며 현대에는 IED등의 설치를 통한 보급로의 봉쇄등도 가능하기에 진격거리가 늘어남에 따라 기하급수적으로 많은 병력이 필요해진다.(보급로를 확보하기위한 병력+그 늘어난 병력을 보급해야 하는 보급부대+다시.....)
  3. 이 도적은 일반적인 도적이 아니라 농민경제 파탄으로 인해 생겨난 유랑민이었다. 이걸 도적이라고 하는 이유는 고려 정부가 유랑농민들을 '초적(草賊)'이라고 불렀기 때문.
  4. 김덕령의 의병 활동 자체가 이경린, 이귀 등 지방관들의 권유를 받아 시작된 일이고 조정에 이를 알려 충용군이란 칭호까지 받았다. 처음부터 조정의 영향력하에 있던 의병대다.
  5. 이것 때문에 계급 간 갈등이 불거진 경우도 있었다. 의병장 김백선이 중군에서 지원군을 보내지 않은 것에 대해 따졌더니 유인석이 상놈이 양반에게 대든다며 처형했고, 이를 본 포수 출신의 의병들중 상당수가 신분제의 한계를 느끼고 이탈해 버렸다. 유인석은 이외에도 동학 출신의 의병을 반역도로 몰아 처형하기도 하였으며 이 때문에 수많은 농민들이 이탈하게 되었다. 물론 이건 해당 항목에 있듯이 좀더 복잡한 사정과 근거가 있긴했지만.
  6. 말이 토벌이지 사실상 학살 수준이었다 한다.
  7. 아들 고종후, 고인후 형제와 함께 삼부자가 모두 의병활동을 한 충신들이다.
  8. 고경명의 아들이자 고종후의 동생으로 아버지와 함께 금산 전투에서 전사했다.
  9. 고경명의 아들이자 고인후의 형으로 아버지와 동생이 죽은 후 의병활동을 받아 스스로 복수 장군이라고 칭하며 활약한다.
  10. 임진왜란 (고령 사건사고와 사회운동)
  11. 믿어지진 않겠지만, 원균의 동생이다(...). 개막장인 형과 달리 초야에서 선비로 살다가 의병장이 되어 용인에서 왜군의 전세를 꺾는 공훈을 세우다가 정유재란 때 전사한다.
  12. 정인홍 자료
  13. 고경명, 고종후, 고인후 삼부자와 비슷한 케이스로 이쪽은 큰 형 최경운, 둘째 형 최경장, 최경희까지 3형제가 의병활동을 했다.
  14. 배우 손현주 씨가 드라마 제중원에서 카메오로 나올 때 맡았던 배역. 이름 때문에 가공의 인물로 혼동하는 이들이 있는데, 실존 인물이다.
  15. 의병 활동을 하다가 만주로 넘어가 독립군 활동을 한다.
  16. 실제로 한말 의병의 일부가 만주 등지로 흘러 들어가 초기 독립군 결성에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