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그리스도교연맹 본부 청사
조선그리스도교연맹Korean Christian Federation
1 개요
북한의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은 북한의 개신교 단체로서, 북한의 유일한 합법적 개신교 단체이다. 교파를 초월한 초교파 개신교 단체임을 표방[1]하고 있으며, 공식적으로 북한의 개신교인 전체를 포괄하고 그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단체이다. 하지만 헌법에는 명시되어 있으나, 실질적으로 종교와 신앙의 자유가 제약되어 있는 북한의 특성상 정부의 압력을 많이 받는 관변단체라고도 할 수 있다.[2] 현 위원장은 강명철 목사이다.
2 역사
조선기독교도연맹 총회장 김익두 목사
조선기독교도연맹 위원장 강양욱 목사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은 1946년 11월 28일 조선기독교도연맹이라는 이름으로 창립되었다. 해방 직후 이북의 반공주의 성향 개신교 목회자들이 결성한 이북5도연합노회에 대항하여 친정부 성향 개신교 목회자들은 당시 이북 정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묵인과 지원을 받으면서 조선기독교도연맹을 창립했다. 창립 총회에서는 일제시대 많은 부흥과 은사를 행한 명망있는 개신교 인사 김익두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했으며, 중앙위원장에는 김일성의 외종조부이자 학창시절 스승인 강양욱 목사가 선출했다. 하지만 조선기독교도연맹의 총회장을 맡을 만큼 연맹에 협조적이었던 김익두 목사는 한국전쟁 당시 태도를 바꾸어 국군과 UN군에 적극 협조한 죄로 총살되었으며, 이후 유일한 연맹의 지도자가 된 강양욱 목사는 83년 사망할때까지 조선기독교도연맹의 중앙위원장을 지냈다.
강양욱 목사를 포함한 창립 주도자들은 연맹 창립 이전부터 이북 정부에서 실시한 토지개혁에 찬성하는 등 적극적인 친정부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이들은 토지개혁 이후에도 기존 이북5도연합노회에서 주일 성수를 명분으로 반대한 북조선인민위원회 선거에도 적극 참여할 것을 주장하는 등 일관된 친정부 행보를 보였다. 연맹 창립 이후에는 이북 개신교계의 주도권을 놓고 이북5도연합노회와 적극적으로 경쟁했다. 이북 정부는 이렇게 자신들을 지지하는 조선기독교도연맹을 지원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정책에 반대하는 이북5도연합노회를 탄압했다. 결국 이북5도연합노회는 한국전쟁 무렵에는 주요 인사가 체포되거나 월남하는 등 사실상 와해되고 말았다. 강양욱 목사를 포함한 연맹 주도세력은 한국전쟁 때에도 이북 정부에 적극 협조하여 서울 점령 기념예배를 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조선기독교도연맹 및 연맹 주도 세력은 정치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강양욱 목사는 연맹 창립 이전인 1945년 11월에 조선민주당의 중앙위원이 되었으며, 1946년 2월에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서기장을 되었다. 연맹의 다른 회원들도 조선민주당 당원으로 입당·활동했으며 지방 인민위원회 공직에 선출되어 공직 활동에도 참여했다. 조만식이 신탁통치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연금된 이후로는 최용건을 지지하는 당원들과 조선기독교도연맹 쪽 개신교인들이 조선민주당을 주도했다. 이들이 주도하게 된 조선민주당은 조선노동당 등의 정당들과 사회단체들이 가입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에 가입하여 1948년 초대 최고인민회의 및 지방인민회의 선거에 공동으로 후보를 공천했으며, 연맹 중앙위원장인 강양욱 목사 자신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피선되었고, 이후에도 계속 대의원에 피선되었다. 강양욱 목사는 대의원만 맡은 것이 아니라 외교부문에서도 활동하여 1972년 부주석으로 정부에도 입각했다. 1981년 1월에는 조선사회민주당으로 당명을 바꾼 조선민주당 제6차 당대회에서 당의 중앙위원장에 선출됐다.
광복 당시 한반도 전체 개신교인의 2/3는 이북에 있었고, 이북의 개신교는 한반도 전체의 개신교를 주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인한 교회파괴, 정부에 의한 교회폐쇄 등으로 이북에는 단 하나의 교회 건물도 남지 않은 상황이 되었다. 신자들도 전란 와중에 죽거나 대거 월남하고 더러는 이북 정부에 의해 반정부 인사로 지목되어 처형당하는 등 크게 감소하였다. 살아남아 이북에 살아남은 개신교인들도 당장 생존의 문제와 전란 직후 이북 정부와 주민의 극도로 악화된 반기독교 감정 때문에 공개적인 신앙활동을 하기 어렵게 되었다. 더군다나 1958~1959년 정부와 조선노동당의 대대적인 반종교 선전으로 인해 북한 개신교인들의 입지는 더욱 위축되었다. 이로인해 친정부 성향인 조선기독교도연맹의 공개적인 활동조차도 한국전쟁 이후 오랬동안 사라졌다.
한국전쟁 이후 교회 건물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면서 이북의 개신교 신자들은 가정에서 예배모임을 가지기 시작했는데, 이는 현재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의 중추를 이루는 가정교회의 시초가 되었다. 가정교회의 실제 존재 여부에 대해서는 전 조선노동당의 간부로서 한국에 간첩으로 내려왔다가 전향한 신평길의 증언을 참고할 필요가 있는데, 그는 북한 정부에서 1960년대 말 '풀어주는 사업'을 통해서 원래 개신교인이던 사람들이 자신들끼리 가정에서 모여 예배모임을 가지는 것을 공식적으로 허용하기 시작했다고 증언했다.
조선기독교도연맹의 공개적인 활동은 1972년 남북공동선언을 계기로 재개되었다. 당시에 강양욱 목사가 방한하여 기자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대외적으로는 남한에서 일어나는 여러 시국 사건들에 대해서 다른 종교단체들과 함께 성명을 발표했고, 세계교회협의회WCC 등 국제 기독교 단체와의 교류도 시작했다. 내부적으로는 목회자 양성을 위하여 1950년 폐교되었던 평양신학교를 계승하는 평양신학원을 개원했다.
1980년대에는 세계교회협의회WCC 등 국제 기독교 단체를 통해서 남한과 해외 한인 기독교인과의 교류도 시작되었다. 이때 접촉의 목적은 종교적인 교류에 있다기보다는 통일운동의 확산에 목적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으나 종교적인 면도 없지는 않았다. 이때 북한의 개신교인과 교류하고자 한 남한 개신교인들은 주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를 주축으로 하는 진보적, 개혁적 개신교인들이었다. 남북한 개신교인의 공식적인 첫 접촉은 1986년 9월 2-5일까지 스위스 글리온에서 세계교회협의회(World Chuch Cpuncil: WCC) 국제위원회 주최로 열린 세미나에서 이루어졌다. 글리온 협의회라 명명되는 이 회의에서 조선기독교도연맹 고기준 목사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강문규 목사가 평화통일을 주제로 발제를 한 후 성만찬과 성경공부를 함께 진행했다.
또한 1980년대에는 조선기독교도연맹이 자신들의 신앙생활을 외부에 공개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했다. 1980년대 초부터 고향을 찾으러 방북한 해외 한인 개신교인들을 대상으로 자신들의 가정교회 예배모임을 공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당시 조선기독교도연맹이 공개한 가정교회들은 평양 뿐 아니라 평안남도, 개성, 원산지역의 가정교회들이었다. 1981년에는 조국통일해외기독자회 이영빈 목사가 방북하여 강원도 원산의 가정교회 예배에 참석했으며, 1986년에는 미국장로교PCUSA 총회장을 역임한 재미동포 이승만 목사가 방북해서 평양 경상골 가정교회 예배에 참석했다. 이영빈 목사의 증언에 의하면 81년 방북 당시 방문한 가정교회에서 장로로 교회를 이끌었던 사람이 훗날 봉수교회 담임목사가 된 이성봉 목사라고 한다.
2008년 재건축 전의 봉수교회
2008년 재건축 전의 봉수교회 내부 모습
2014년 재건축 전의 칠골교회
1988년과 1989년에는 당시 사회주의권의 해빙 분위기의 영향을 받아 평양에 두 곳의 개신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바로 봉수교회와 칠골교회다. 봉수교회는 1988년 10월 완공되어 예배를 드렸으며, 칠골교회는 1989년 완공되어 예배를 드렸다. 특히 칠골교회는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이 다니던 교회를 재건한 것이다. 봉수교회는 2008년 재건축되었고 칠골교회는 1992년과 2014년 두 번 재건축되었다.
1992년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권호경 총무와 세계교회협의회WCC 박경서 아시아국장은 방북하여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인사들과 김일성을 만났다.
1999년에 이름을 조선기독교도연맹에서 조선그리스도교연맹으로 개칭했다.
연맹의 (중앙)위원장은 83년 강양욱 목사가 사망한 뒤, 3년 동안 공석이었다가 86년부터 89년까지 조선적십자회 간부였던 김성률 목사가 위원장을 지냈다. 89년 김성률 목사가 사망한 뒤로는 강양욱 목사의 아들인 강영섭 목사가 2012년 역시 사망할때까지 위원장을 지냈다. 2013년부터 강영섭 전 위원장의 아들이자 조선그리스도교연맹 평양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강명철 목사가 위원장을 지내고 있다.
3 현황
4 성서와 찬송가
북한의 성서
한국전쟁 이후 북한에서는 오랬동안 성서가 인쇄, 발행되지 않았다. 그래서 오랬동안 가정교회 교인들은 한국전쟁 이전에 발행된 성서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다가 조선그리스도교연맹에서 1983년를 신약성서를 1984년에는 구약성서를 발행했으며 1990년에는 신구약 합본 성경전서를 발행했다. 2010년에는 다시 성경전서를 발행했다. 찬송가는 1935년 일제시대에 발행된 신편찬송가를 바탕으로 1990년과 2010년에 발행했다. 이 성서와 찬송가는 봉수교회, 칠골교회 및 가정교회에서 쓰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북한 유일의 가톨릭 성당인 장충성당과 북한 유일의 정교회 성당인 정백사원에서도 쓰이고 있다.
조선그리스도교연맹 당국에서 발행한 성서는 조그련에서 성서 원문을 번역한 것이 아니라 1977년 발행된 한국의 공동번역성서를 북한 문화어에 맞춰 교정한 것이다. 다만 공동번역성서를 100% 그대로 따르지는 않고 일부 어휘는 개역성경이나 개역개정성경의 어휘를 따르고 있다.
조선그리스도교연맹 당국의 공식 주장에 따르면 한국전쟁 이후 지금까지 발행된 성서의 부수는 35000부이다. 하지만 정말로 그 정도로 발행되었는지는 구체적으로 확인할 방법이 없다. 다만 이 성서의 발행 자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조선그리스도교연맹에서 발행한 성서 외에 일부 한국 선교단체들이 인쇄, 발행한 북한어 성경이 탈북자들을 통해 북한에 몰래 배포되고 있다고 한다. 한국 선교단체들 중에서는 따로 번역한 북한어 성경이 아니라 조선그리스도교연맹에서 발행한 성경 본문을 그대로 베껴서 발행한 성경을 몰래 배포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