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민혁명군

朝鮮人民革命軍

북한의 역사에 등장하는, 김일성의 영도 하에 만들어진 빨치산 부대. 마오쩌둥의 위엄

1 개요

김일성이 1934년 3월,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들을 주축으로 창건했다는 항일 무장군사조직. 북한은 조선인민혁명군과 관련하여, “주체사상을 지도적 지침으로 하고 인민의 리익을 위하여 투쟁”하고 “모든 계급적 압박과 착취를 청산하고 사회주의를 건설할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김일성은 1932년부터 항일 빨치산으로 활동했다.[1] 1932년 4월 25일[2] 김일성은 반일 인민유격대를 결성한 빨치산 대장이었는데, 이 시기에는 만주에 여러 군벌, 마적, 독립군, 혁명군 등 다양한 무력집단이 군웅할거 하고 있던 시기였다. 1933년쯤 되면 이러한 단체들이 연합하기 시작하고 만주에 조선/중국 양국의 인민들의 "혁명적 지방주권기관"이자 "해방구"라고 쓰고 마적소굴이라 읽는다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당시 신생 괴뢰국가였던 만주국의 행정 능력은 산간 오지나 황무지까지 미치지 못했고, 이를 이용하여 무력단체들은 자신들의 영역에서 자체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야흐로 만주 웨스턴의 시작

1934년에 이르러 김일성은 동만주의 반일 인민유격대남만주 반일유격대를 통합하여 조선인민혁명군을 창설하였으며, 그 이듬해인 1935년 5월에는 반일 민족 통일전선 본보인 조국광복회[3] 를 조직하고 그 회의 회장으로 추천되었다.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김일성은 만주 각지의 혁명적 무장세력을 통합하여 신박한 영도력을 발휘하여 조선인민혁명군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물론 당연하게도 이는 대부분 과장과 구라로 덧칠된 이야기다. 특히 북한에서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내용 중에는 양세봉조선 혁명군을 김일성이 흡수해서 대규모 부대로 거듭나게 되었다(...).라는 것도 있는데, 이는 완전한 거짓이다. 조선혁명군은 북한에서 주장하듯이 ‘조선인민혁명군’에 편입되었다기보다는 일부 대원이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4]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다고 보는 것이 사실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북한에서 주장하는 조선 혁명군과 실제 사료에 등장하는 조선 혁명군이 다르다. 해당항목 참조.

요약하자면, 일단 존재하긴 했고, 당시 만주의 군사단체들 중에서 적은 숫자는 아니었으나,[5] 북한이 선전하는것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었다.

2 내용

김일성이 1945년 8월 20일 소련의 야영지에서 조선인 간부들에게 새 국가 건설의 3대 과업을 제기함에 따라 조선인민혁명군을 북한지역에서의 건당․ 건국․ 건군의 핵심으로 인식, 당과 국가, 군대 창설의 골간으로 삼았다.

3 평가

북한은 조선인민혁명군이 김일성의 “세련된 령도와 뜨거운 사랑 속에서 창건 후 빠른 시일 안에 주체의 혁명위업을 확고히 떠메고 나갈 수 있는 믿음직한 혁명적 무장력으로 자라났으며 마침내 겹쌓인 난관과 시련을 용감하게 뚫고 일제를 반대하는 항일혁명전쟁에서 력사적 승리를 쟁취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과장된 주장은 김일성 혁명전통에 입각한 것으로 김일성 우상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일단 주체사상이라는 개념 자체가 1950년대 중후반이 되어서야 나온다(...). 당시 김일성은 중국 공산당 노선을 따르는 재만 무장투쟁 세력의 일원에 지나지 않았다.

1936년경 동북항일연군에 참가하고, 이들은 1937년 보천보 전투로 일약 유명해진다. 그러나 조선인민혁명군이라는 이름이 국내에 크게 알려지지는 않았고 김일성과 공산비적(...)의 준동으로 보도되었다.

(당시의 신문 기사)
  1. 이 무장투쟁 노선은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1930년 카륜회의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김일성은 이 회의에서 무장투쟁 노선을 정립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회의에서 주체사상을 주장했다고 하는 등, 후대에 윤색되고 소급된 내용들이 많다. 카륜회의에 관한 내용
  2. 조선인민군은 이 날짜를 창군일로 삼고 있다.
  3. 역사가들이 조선인민혁명군의 존재에는 그다지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편이다. 물론 수꼴 언론들의 시각은 다르지만 일단 존재하긴 존재했고, 게릴라전을 하기는 했다는게 정설이다. 그러나 조국광복회는 그 실체가 불분명하다는 이야기가 많다. 일단 북한의 주장으로는 "김일성의 영도하에 조직된 자발적인 국내 조직"이지만 실제로는 김일성을 추종하는 소수의 국내 인사들 모임에 지나지 않았다는 평가가 많다. 소수의 김일성 오타쿠들이었단 소리다 #
  4. 그 산하 제2방면군장이 김일성이었음
  5. 1933년 당시 약 300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당대의 빨치산들이 적으면 100명 안팎, 많으면 1000명이 조금 안되는 수준이었으니 300명이면 그렇게 적은 숫자는 아니다. 스파르타!! 여담으로 어차피 빨치산은 운용면에서 한계가 있기 때문에 숫자가 많다고 좋은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