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천보 전투

보천보 전투
날짜1937년 6월 4일
장소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보전리 주재소
이유독립운동
교전국한국 독립군
Name.png 조선인민혁명군
Name.png 조국광복회
일본 제국
지휘관Name.png 김일성
병력독립군
조선인민혁명 90여 명
조국광복회원 80여 명
주재소 주재원
순사 3명
보조원 2명
추격 경찰대
30명
피해규모주재소 공격시
없음
경찰대와 충돌
사망 25명
부상 30명
주재소 민간인
순사의 2세 여아
민간 요리사
추격 경찰대
사망 7명
부상 14명
결과주재원의 도주, 주재소의 무장 탈취. 독립군 선전에 성공
영향국내의 패배주의 일소, 독립군의 사기 진작, 김일성 홍보[1]

1 개요

1937년에 김일성과 휘하 170여 명의 부대원들이 갑산군 보천면 보전리 주재소(지금의 파출소)를 공격한 사건.

2 내용

1937년, 만주지역의 조선인 항일세력은 사실상 소멸했고, 30년 가까운 일제의 식민지배는 매우 견고해 일제가 상당히 기세를 높이고 있던 시기[2]. 특히 한반도 내에서 벌어지고 있던 무장 독립운동은 남한대토벌작전 이후로 완전히 끊어진 상황이었다. 독립운동 세력에마저 조금씩 패배감과 비관주의가 감돌기 시작하는 시점이었다.

후에 6.25 전쟁의 발발 과정에서도 드러난 바 있지만 상당히 저돌적인 성격이었던 김일성은 상대적으로 방비가 허술했던 보천보 주재소를 공격했다. 김일성 휘하의 조선인민혁명군 90여명과 내응한 국내의 조국광복회원 80여명등 170여 명의 항일세력이 동원되었으며, 주재소에 있던 일본인 경찰은 셋, 조선인 보조원이 둘. 휘하 170여명의 부대원들의 맹공이 실시되었으나 다섯 모두 무사히 도망치는데 성공, 순사의 딸인 2살배기 여아 1명과 주재소의 일본인 민간 요리사 1명이 유탄에 맞아죽고[3] 주재소의 주재원 다섯의 무장(소총 다섯정, 총탄 수백발)을 탈취한다.

실제로는 목적 자체가 선전에 있었던 만큼 전술면에서 큰 성과는 없었으며, 보천보 점령 후 토벌군이 본격적으로 오기 전에 허둥지둥 보천보를 빠져나갔다. 일본측 기록에 의하면 다음날, 경찰대가 추격하던 중에 교전으로 일본측 사망자 7명 부상자 14명. 오히려 독립군측이 수십명의 피해자를 냈다. 전술적인 측면에서 보면, 아무런 실질적인 피해를 입히지 못하고 오히려 적군에게 포착되어 큰 피해만을 입은, 게릴라전에서의 전형적인 실패사례에 불과하다. 다만 이 전투는 일제의 지배력이 완벽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줘 독립군과 국내에 희망을 심어주는 공을 세웠고, 당시 상황에서는 이런 식의 해프닝에 가까운 사건이라도 큰 의미가 부여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간삼봉 전투 등 이후의 반응이 이 사건이 큰 의미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후로도 김일성을 토벌하기 위해 수차례 교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동아일보에서 다분히 의도적으로, 대대적으로 대서특필하여 호외 기사[4]를 내보냈다. 조선총독부를 엿먹이려는 기자들의 의도가 엿보이는데, 아예 보도 자체를 막아버릴 수 있는 총독부의 보도통제를 슬쩍 우회했다. 항일세력을 '비적'으로 칭하는 총독부의 방침을 따르는 척 하면서, 김일성이라는 순 조선인 이름을 중간 제목에 박아버려 진짜 비적떼가 아니라 소멸된 줄 알았던 조선인 항일세력이 총독부 선전과 달리 만주에 존재함을 대문짝처럼 광고한 것이다.
그리고 3년뒤 동아일보는 폐간당했다

김일성은 조선 전역에서 유명해졌고[5][6], 중도파 여운형[7] 사회주의 독립운동 노선과는 척을 졌던 김구도 이 사건에 주목했을 정도.

3 영향

3.1 신문


위 이미지는 1998년 10월 동아일보 취재단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동아일보의 보천보 전투 대서특필 호외보도(1937년 6월 5일)를 황동으로 뜬 금형을 제작해 북측에 선물한 것이다.[8]

3.2 우상화

현재 북한에서는 김일성 우상화 차원에서 이 전투를 그야말로 신화로 포장하고 있다. 솔방울로 수류탄 만들고 가랑잎 타고 두만강을 건너고 웃통을 벗고 모래밭을 구르니 모래가 쌀이 되었다는 전투가 이것. 진짜로 이러면 이미 일반군인이 아니라 NINJA잖아. 축지법까지 쓰니 딱이다. 또한 일본군 수천명을 섬멸하고 골짜기마다 일본군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는 보천보 신화를 떠든다. 북한 영화 '내가 본 나라'에는 하도 일본군이 많이 죽어서 시체를 호박이라 속여서 날랐다나 뭐라나... 물론 당연히 개구라다. 모 탈북자는 자신이 탈북하기 전까지, 보천보 전투는 김일성이 200명도 못되는 병력으로 수십만 대군을 격파한 대전투로(300?) 잘못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 사건을 다룬 다른 작품으로는 북한 시인 조기천의 장편 서사시 백두산이 있다.

(중략)
이는 이름만 들어도 / 삼도 왜적이 치 떠는 / 조선의 빨찌산 김 대장!
이는 장백을 쥐락펴락하는, / 태산을 주름잡아 한 손에 넣고 / 동서에 번쩍!
천리허의 대령도 단숨에 넘나드니 / 축지법을 쓴다
(후략)

- 조기천 <백두산> 어째 장군님 축지법 쓰신다를 복붙한것 같다.

보천보 전투를 묘사하고 김일성을 우상화해 북한 정권이 아주 좋아하는 작품이다. 북한 정권 수립 전인 1947년에 쓴 것으로 김일성은 조기천을 칭찬하고 서사시 창작 중에는 따로 면담도 가졌다. 결국 북한에서 영화화까지 된다.

4 김일성 자신의 평가

김일성 자신은 보천보 전투에 대해

“보천보전투는 대포도 비행기도 땅크도 없이 진행한 자그마한 싸움이였다. … 평범한 습격전투였다. 사상자도 많지 않았다. … 너무나도 일방적으로 진행된 기습전이여서 어떤 대원들은 오히려 아쉬워할 지경이였다. 그러나 이 전투는 유격전의 요구를 최상의 수준에서 구현한 전투였다. 전투목표의 설정과 시간의 선택, 불의의 공격, 방화를 통한 충격적인 선동, 활발한 선전활동의 배합 등 …입체적으로 맞물린 빈틈없는 작전이였다”[9] 라고 하여 군사적 성과보다는 정치적 의의를 강조하였다. 보천보 전투 자체가 큰 전과를 거두었다는 주장은 본인도 하지 않았다. 양심은 있는가 보네

5 참고항목

  1. 농담거리가 아니다. 아래 동아일보 항목을 보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2. 1937년 4월말, 식민지 조선 국내에서 가장 활발하게 독립운동 활동하던 이재유가 검거당했는데, 이재유의 검거로 당시 총독부는 '이제 식민지 조선에서 독립운동은 사라졌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던 시기였다.
  3. 한홍구 교수의 저서 '대한민국史'에서 상세히 나와있다. 부대원들이 총을 쏘는 와중에, 엎드린 순사부인이 등에 맨 아기에게 유탄이 맞았다. 이 외에 술꾼이 나오다가 유탄에 맞았다고 한다. 이전 항목에 앞뒤 내용 다 자르고 여아 1명과 요리사 1명을 살해했다고 전쟁범죄라고 표기했는데 이들이 작정하고 일부러 그들을 노려서 살해한 것은 아니므로 전쟁범죄는 아니다.
  4. 당시 동아일보 기자로 특파원으로 나갔던 기자가 양일천이라는 자였는데, 이 자가 김일성의 조국광복회 비밀결사 요원이었다고 한다.
  5. 일제말, 삼천리잡지에서 그의 행적 및 신원에 대해 직접 취재 및 주변인들 인터뷰까지 했을 정도였다.# ##
  6. 해방직후 '중도우파'성향의 잡지 회사였던 '선구'에서 창간기념으로 1945년 11월 여론조사를 했던 적 있었는데, 여기서 '김일성'이라는 이름이 군무부장에 1위로 조사되었다.#
  7. 당시 여운형은 검소한 생활을 유지하느라 금주, 금연하고 있었는데, 보천보 전투 소식을 듣고 동네사람들을 모아다가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8. 탈북자 출신인 주성하 기자의 증언에 따르면, 김일성이라는 이름 석 자를 전 조선에 널리 광고해준 덕분에 북한에서 동아일보의 이미지는 매우 좋다고 한다.당시로선 듣보잡이던 김일성을 띄워줄 의도는 아니었는데... 흔히 보수언론으로 규정짓고, 북한에서도 조중동 타격 운운을 대외적으로 떠드는 것을 생각한다면 의외다. 물론 북한은 대외적 보도와 대내적 보도가 철저히 다르다. 그래서 보천보 전투 선전 탓에, 북한주민들이 유일하게 알고 있는 대한민국 신문이 바로 동아일보라고 한다.
  9. 세기와더불어 2권 17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