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이 단어의 어원이 되는 단어에 대해서는 파르티잔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1 소개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 Partisan
러시아어 : Партизан

빨치山
비정규군(非正規軍) 유격전 요원 파르티잔의 러시아어식 발음. 실제 러시아어 발음상으로는 빠르찌잔이라 부르며, 한글의 러시아어 표기법상으로는 파르티잔이라 부른다. 절대 산(山/酸) 이름이 아니다.

공산당을 뜻하는 간색이 쉽게 연상되어 공산 게릴라를 쉽게 떠올리는데 특히 한국에서는 실제로 공산 게릴라 한정으로 쓰였기 때문에 더 그렇다. 또한 우연찮게도 글자도 비슷해서 갱이들이 에서 활동해서 빨치산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하지만 어원은 빨갱이와는 무관하다. 갱이 하의 도 아니다.

오히려 빨치산은 파르티잔→팔치산[1]→빨치산이 된 것이므로 어떻게 보면 교화되어 사실상 우리말화된 외래어.
따라서 된소리 발음/표기가 허용되는 몇 안되는 단어 중 하나다. --한번 파르티잔이란 단어를 연속으로 빨리 발음해보자.
몇번 하지도 않았는데 빨치산이 되는 신기한 경험을 할 수 있다-- 비슷한 예로 , 등이 있다.

빨갱이든 아니든 유격전을 수행하면 빨치산이라 부르는게 정석. 한국군도 상황이 떨어지면 언제든지 빨치산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남한에서 빨치산 활동한 사람들은 대체로 공비잖아… 22세기가 돼도 구별 못할거야 아마…. 태백산맥에서 '염상진'은 "빨치산은 욕이 아니다. 빨갱이이다."라고 했다.

사실 빨갱이라 카더라

일제와 더불어 벌교읍의 양대 원쑤

2 어원

'파르티잔(partisan)'은 프랑스어의 '파르티(parti)'에서 비롯된 말이며, 당원·동지·당파 등을 뜻하는 말이었으나 적어도 12세기경부터 partisan 이라는 단어가 프랑스에서 쓰이기 시작했으며 17세기경에는 이 단어는 지역 군벌을 의미하는 단어였다고 한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스페인 전역에서 게릴라에게 호되게 당한 프랑스군은 이들을 군벌이라고 호칭하게 되었고, 그것을 옆에서 잘 지켜보던 영국군은 게릴라 = 파르티잔이라고 생각하게 됨에 따라 스페인어에서 유래한 게릴라와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게 정착되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순수한 유격대원의 의미와 더불어서 정예, 혹은 특수부대의 의미도 어느정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덕분에 19세기 이전 미국에서는 파르티잔의 의미가 약간 뒤틀리게 되었는데 미국 독립전쟁 당시의 민병대남북전쟁 당시의 남부군[2]의 영향으로 인해 19세기까지 미국에서 파르티잔의 의미는 레인저나 코만도와 같은 특수부대와 비슷한 느낌이 더 강했다.

그러던 와중 20세기에 접어들어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반프랑코 게릴라들의 활약과 국제여단덕에 파르티잔과 게릴라는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가고 보급되기 시작하였으며, 의미도 거의 현재와 비슷하게 고정되었다.

3 현재

현재는 유격대원·편의대원(便衣隊員)[3]을 가리키며 그에 따라 앞서말한 게릴라와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제네바 조약[4]에서는 몇몇 상황에서 무기를 공공연하게(=숨기지 않고) 갖고 있으면 전투원으로 취급되며, 잡혔을 때 전쟁포로로서 존중됨을 규정하고 있다. 몇몇 상황은 다음과 같다.

가. 각 교전기간중 및
나. 공격 개시전의 작전 전개에 가담하는 동안 적에게 노출되는 기간 중. 본 항의 요구에 부합하는 행위는 제37조1항에서 의미하는 "배신적 행위"로 간주되지 아니한다.

현실적으로 잘 지켜질지는 의문이지만... 게다가 우리나라는 이 조항을 "유보"하고 제네바 협약에 가입했기 때문에 적용 자체가 안된다(...)

제네바 조약이 없던 시절인 나폴레옹 전쟁 중의 스페인 전역 때에도 프랑스군은 게릴라들은 불문곡직하고 쏴 죽였으며, 동조자들도 종종 처형하곤 했다.[5]

빨치산은 정규군과는 별도로 적의 배후에서 그들의 통신·교통 수단을 파괴하거나 무기와 물자를 탈취 또는 파괴하고 인원을 살상한다.
빨치산은 일반 주민의 협조나 지원이 없이는 수행할 수 없고, 그 지방의 지리나 지형에 밝아야 하는 것이 절대적인 조건이 되므로 아무 곳에서나 실행할 수 있는 전투는 아니다. 한국에서는 주로 한국전쟁 전에 각지에 준동하였던 공산 게릴라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이에 대해서는 빨치산 대신 공비라는 호칭도 많이 사용한다.

4 역사

빨치산의 역사는 게릴라전의 역사와 맥을 같이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에 따라 아일랜드에서 벌어진 반란, 미국 독립 전쟁 당시의 민병대, 러시아 적백내전에서 대다수의 적군과, 백군에 가담한 민중봉기 세력들 등을 빨치산의 범주에 넣기도 한다. 20세기 이후 굵직한 빨치산을 몇몇 다루자면 다음과 같다.

4.1 스페인 내전과 그 이후의 게릴라

게릴라/파르티잔의 확산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세력으로, 스페인 내전당시와 이후 반 프랑코 세력을 총칭한다.
또한 이 시기에는 국제적으로 상당수의 의용병들이 들어와서 국제여단을 형성하기도 했는데, 공화파 의용군의 경우 대부분 제대로된 군복과 명령체계가 없었다. 그 외에도 스페인 내전이 끝난 뒤 망명했던 스페인인 일부가 귀국하여 게릴라전을 벌였고, 이들또한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이러니한 점은 막상 '게릴라'란 단어 자체가 태어난 곳임에도 불구하고 막상 스페인 내전이 당장 벌어지고 있을 때 공화파 진영 전체로 보면은 CNT나 UGT등 공화국 정부와는 사실상 따로 노는 전투 노조들이 프랑코 군에게 포위 된, 막말로 가망 없는 조직원들에게 최후 항전의 의미로 내린 단발성 지령을 빼고는 조직적인 게릴라전을 펼친 적이 없다. 이 당시는 게릴라전에 대한 심도 깊은 군사학적, 전술적 연구가 이루어 진 것도 아니고, 여전히 1차대전식 '정정당당한' 목숨은 내다 버리는 마인드가 군사적 인프라로는 영 후진국인 공화파, 파시스트진영 양쪽에 팽배했기 때문에 공화파는 충분히 장기적인 게릴라전을 수행할 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그 이득을 못 봤으며, 후대 살아 남은 공화파 인사들은 아나키스트 CNT나 공산당 지도 아래 공화국 정부 인사나 군사 내적인 측면에서는 이 점을 최대의 실책으로 평가했다. 빨치산의 근간이 되는, 발렌시아에 위치한 공화국 정부의 지휘를 받는 정규군인 공화국인민군(Ejército popular de la República) 소속이 아닌 좌익 의용군, 민병대들은 전쟁 발발 이전 노동자로서 먹고 살며 지리와 구조에 익숙했던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같은 곳의 시가전에서는 정규군 못지 않은[6] 효율과 전투력을 발휘했던 반면, 어리석게도 공화파 지도부나, 자체적인 노조 의용대 지휘관들이나 오히려 1차대전의 참호전과 근본적으로 변한게 없는 야전에서의 고지 점령전을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CNT의 연맹 민병대 (milicia confederal) 같은 무장 노조 민병대들도 나름 사정이 없었던 건 아니다. 애초에 시작 부터 정규군과 헌병대의 절반 이상이 넘어갔으며, 당시 스페인에서 유일하게 실전에서 단련 된 정예 병력인 북아프리카 식민지 부대 (regulares) 만으로도 모자라, 그나마 외부 지원 세력인 소련은 오히려 공산당이 점차 장악해 가는 공화국 정부만 독점 지원하며 자신들을 때려 잡으려는 와중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적극적인 군사 지원을 받는 파시스트 쿠데타 세력을 상대로 기본적인 군사적 인프라의 격차는 현격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와중에 그나마 상술 된 상황에서의 선전으로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한 스페인 북동부 산악 지대에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한 무장 노조들은 당장 해방구 내에서 벌어지는 정치, 사회적 혁명의 물결을 주도하는 걸로 대중적인 지지와 정치적인 입지를 확보할 수 있었으며, 이런 이데올로기적 사회 혁명을 지속 시키려면 어쩔 수 없이 구체적인 마을, 도시를 중심으로 고정적인 해방구를 성립해 사수, 확대 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장기적으로는 저런 근본적인 군사적 인프라의 차이로[7] 더 불리할 수 밖에 없으니 CNT나POUM, 혹은 바스크 자치정부 산하 구다리 (Euzko Gudarostea) 같은 독립 세력들은 오늘은 우에스카, 내일은 자라고자라는 식으로 정치적인 가치가 큰 지방 도시들을 목표로 삼아 제대로 된 기갑, 항공 지원 따위는 생각지도 못하는 상황에 1주일 전에는 민간인이었던 알보병들로 도시 점령 전격전(...) 공세를 펼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근본적으로 단순히 군사적인 차원을 넘어 공화파와 스페인 좌파 전반의 정치적, 구조적인 문제를 극복 못하고 결국 공화파는 반자이 돌격스러운 무분별한 공세를 남발하다 느리지만 착실한 프랑코군의 반격으로 하나 하나 통제 지역을 상실하다 1939년 결국 패망했다. 오히려 전쟁이 말기에 들어가고, 공화국의 패망이 시간 문제인 기정사실화 되면서 프랑코가 점령한지 얼마 안된 지역이었던 아스뚜리아스-레온의 북부 산맥, 카스티야 라만차의 중부 고원, 안달루시아 대농장과 대도시들을 중심으로, 2차대전이 터지자 프랑스레지스탕스와 발을 함깨 한 유격전이 성행했다. 이 시기에 들어서는 오히려 아예 조직 자체가 붕괴되어 버리고, 남아 있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파시스트들에게 항복하자니 에라이 될대로 되라는 마인드니 저런 정치적인 문제에 전혀 속박 당하지 않고 게릴라전을 펼치다 보니 의외로 효율이 좋아(...) 공화국이 정식으로 패망하고도 10년 넘게까지 빨치산 조직들은 프랑코 정권의 속을 썩였다.

이들의 운명 또한 프랑코 정권이 열렬한 양다리 외교로 연합국에 의해 그 생존을 허락 받자 (...) 결국 하나 둘 씩 고립되어 잡혀 죽던가 아니면 프랑스를 비롯한 해외로 결국 망명하는 식으로 말라 죽었으나, 이들의 경험에 기반한 군사 활동/정치 활동 양면의 유격전 군사적 교훈은 라틴 아메리카와 유럽 전반으로 국제 여단과 망명객들을 통해 퍼지게 된다. 2차대전이 끝나면서 연합군이 프랑코 정권을 응징하지 않고 협상으로 그 존속을 허락해 버리자 피레네 산맥, 칸타브리아, 아라곤 등지에서 버티고 있던 빨치산들 중 많은 수가 무장 투쟁을 포기하고 프랑스를 통해 망명을 갔다. 이 와중 적지 않은 수가 프랑스, 중남미 등 망명간 나라의 좌파 인사들과 교류하며 자연스럽게 투쟁 방식과 게릴라전 경험도 전파하게 되었다. 스페인 내전 자체에서 빨치산 전술은 잘해봐야 가능성을 보여준 정도에 끝나지만, 여기서 실전 경험을 한 이탈리아 의용병 출신 가리발디 여단이나 프랑스계 파리 꼬뮨 전투단 같은 국제여단의 의용병들은 스페인에서 배운 선동술, 전술 등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가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자국 내 반파시스트 빨치산 투쟁의 밑거름이 되었다. 특히 이탈리아의 경우 1943년 여름 무솔리니 정권이 한번 몰락하고 살로 공화국이란 나치의 꼭두각시 정권으로 부활해 이탈리아 전선이 내전의 구도로 변화 할때 까지 핵심적인 조직적 기반과 교관 역할을 할 수 있는 숙련된 투사들은 비공산권 사회주의 혁명 조직이었던 정의와 자유 (Giustizia e Liberta)나 이탈리아 공산당 내 국제여단 출신원들 같은 스페인 내전 경험자들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당장 이탈리아 공산당의 당수이자 30년대 후반에서 2차대전을 통틀어 소련 외 국제 공산주의 네트워크 중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 중 하나였던 팔미로 톨리아티만 하더라도 국제 여단 의용병 모집을 책임지면서 국제적 경력과 인망을 쌓았다.

4.2 소련의 파르티잔

소련은 그 태동부터 파르티잔과 깊은 연관성이 있었는데, 적백내전 때부터 파르티잔은 볼셰비키로 전향한 장교들이나 지역민들에 거의 의존했다. 보급 또한 힘들었기에 제복은 물론 제대로 된 명령 체계도 없다시피해서 대부분의 경우 지휘관과 사병만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독소전쟁에서 파르티잔의 역할은 다시 중요해졌다. 독소전 초반 스탈린의 폭정에 반발했던 이들이 반소 게릴라 조직에 붙었다가 나치가 점령지에서 학정을 벌이며 다시 재전향한 이들이 늘게 되자, 파르티잔 조직들은 이 재전향자들을 적극 포섭해 세를 불려 지리멸렬한 분대소대급에서 연대여단급 조직까지 확대할 수 있었다. 소련군도 이렇게 거대화된 빨치산 조직들을 지원하기 위해 무기와 탄약, 훈련과 보급 요원들을 공수해 지원했다. 이 시기에 활동한 유명한 빨치산 지휘관으로 우크라이나 출신인 시디르 코브파크가 있다.

역설적으로 파르티잔이 과격해진 것은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점령지의 약탈이었다. 친지를 적군에게 잃고 농지와 작물을 속절없이 빼앗겨 잃을 것도 없어지자 복수심에 불탄 많은 이들이 파르티잔에 들어가 점령군과 싸웠다. 가뜩이나 물자 부족에 시달리던 독일군으로서는 파르티잔이 철도를 파괴하고 후방 부대를 급습해 지휘관이나 병사들을 암살하거나 무기와 탄약 등을 탈취해 가는 것에 치를 떨었고, 파르티잔이 잡히면 고문을 가하고 모욕적인 문구를 써넣은 플래카드를 들게 해 조리돌림한 뒤 공개처형하는 식으로 보복했다. 심지어 파르티잔이 아닌 일반인도 그들에게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거나 사소한 지원을 했을 경우 같이 처벌했다. 하지만 이런 강경한 탄압은 오히려 파르티잔의 저항을 더 격렬하게 만드는 역효과를 불러왔다. 전쟁이 소련군에게 유리하게 흘러가면서 소련군에 해방된 지역 출신의 파르티잔들이 정규군으로 재입대하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베를린 전투에서 제국의사당 옥상에 소련 국기를 꽂은 밀리톤 칸타리야와 미하일 예고로프도 파르티잔 출신 병사들이었다.

4.3 프랑스레지스탕스

레지스탕스라는 좋은 이름이 붙기는 하나, 이들이 수행한 것은 게릴라전(유격전)이고, 계급과 제복이 있는 정규군도 아니었던지라 이들도 빨치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꽤 미묘하긴 하다. 자세한 것은 문서참조.

4.4 이탈리아의 파르티지아노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정권과, 이탈리아가 연합군에 항복한 뒤 이탈리아를 점령했던 나치 독일군과 나치에 의해 옹립된 무솔리니 괴뢰정권에 대항해 싸웠던 이탈리아의 무장 저항집단인 파르티지아노 또한 큰 활약을 보였다. 이탈리아가 독일이나 일본과 달리 그다지 전범 국가로 취급되지 않는 이유는 이탈리아군의 졸전 기록과 같이 그다지 추축국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이유 이외에도, 이렇듯 독일이나 일본과 달리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의 침략 전쟁에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찬성한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연합군과 함께 연합하여 싸운 파르티지아노들의 활약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소설 신부님 신부님 우리 신부님 시리즈의 주인공 돈 까밀로 신부와 빼뽀네 읍장은 파르티지아노에서 함께 싸운 전우였다. 관련 민중가요로 벨라 챠오가 있다.

4.5 유고슬라비아의 파르티잔

제2차세계대전 이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대통령이 되는 요시프 브로즈 티토 역시 빨치산으로 유명하다.
당시 유고슬라비아의 빨치산은 체크니트의 세르비아계와 티토의 공산주의계 두가지가 있었는데 이 중 티토가 영국측으로 자신을 선전한 것도 꽤 많기도 했고, 체크니트는 나중에 독일과 협력하여 빨치산 토벌을 하기도 하여 민심이 기우는 바람에 전후 민중과 승전국의 암묵적인 지지로 대통령이 된다. 그리고 그 덕에 축구팀 이름에 파르티잔까지 붙는다.(파르티잔 베오그라드)

4.6 한국에서의 빨치산(조선인민유격대)

빨치산(조선인민유격대) 내용 참조. 빨찌산으로도 검색 가능하다.

4.7 북한에서의 빨치산

빨치산은 북한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개념이다. 일단 1대 왕주석인 김일성부터가 동북항일연군을 통한 게릴라전으로 경력을 쌓았고 이 당시의 김일성부대 인물들이 북한을 구성하는 초기 멤버들이 된다. 동북항일연군 이후 김일성이 조직한 조선인민혁명군을 비롯한 다양한 부대들은 북한의 정신을 이루는 근간이 된다. 물론 과거뽕에 취해서 한국전쟁 이후 무장공비를 줄줄이 내려보냈다가 전부 발살난다

  1. 일본어에서는 아직도 파르티잔을 비슷하게 부른다. 예를 들면 로맨싱사가 3에서 나오는 창 이름이나 퍼스트퀸 4 일본어판에서 나오는 パルチザン이라든지.
  2. 특히 이들은 Partisan Rangers라고 자칭하고, 파르티잔 전술을 총정리하기까지 했다. 다만 최초의 문서화는 프로이센군의 한 공병 대위가 7년전쟁 중에 했다.
  3. '편의'란 사복, 즉 민간인 복장을 가리키는 구식 표현. 그리고 빨치산=빨갱이는 남한 내에서 무장공비가 자주 쳐들어오다 보니 붙게된 인식.
  4. 정확히는 제1 의정서
  5. 사실 대부분의 빨치산들도 제네바 협약을 준수하며 싸우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6. 물론 당시 스페인 정규군도 쿠데타군이던, 공화파에 남은 편이던 유럽 주요 열강에 비하면 장비나 훈련의 질이 모로코 식민지 외인부대 빼고는 한두단계 아래이기도 했다
  7. 반복해서 강조하자면, 아무리 유럽 기준에서는 2류라 해도 일단 정규군과, 말 그대로 내전 발발 하루 전에는 빨레방 이모, 정육점 아재로 일하다 총 잡은 민간인들의 대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