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orge Robert Price
미국의 이론 생물학자(개체군 유전학). 샛별처럼 등장했다가 아쉽게도 오래 연구하지 못하고 타계한, 진화생물학 분야의 특이한 존재.
시카고 대학에서 물리화학을 전공하고, 1946년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하버드 대학의 강사, 아르곤 국립 연구소의 컨설턴트, 벨 연구소 등을 거쳐 1961~67년 동안 IBM에서 그래픽 데이터 처리 컨설턴트로 재직했다.
1966년 그는 갑상선암을 수술하다가 결과적으로 한 팔을 잘 쓰지 못하는 사태를 당했다. 원래 이 팔은 소아마비의 후유증 때문에 약간 불편했다고 하는데, 이 수술은 문제를 더 악화시켰다. 그는 상당한 보험금을 챙길 수 있었기 때문에, 다음 해에 IBM을 그만두고 런던으로 이주하여 넉넉한 아파트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도서관을 드나들면서 한가한 생활을 하다가 그의 눈에 윌리엄 D. 해밀턴의 1964년 논문이 보였다. 이것이 그를 진화생물학 분야의 큰 공로자로 남게 해 준다.
그는 1968년 해밀턴에게 편지를 보내 그 논문의 reprint를 청했다. 해밀턴은 편지에 감명을 받고 긴 답을 했으나, 브라질로 9개월 동안 현장 조사를 갈 예정이었기 때문에 바로 같이 연구를 할 수는 없었다. 그 동안 그는 뒤에 프라이스 방정식(Price equation)이라고 불리게 된 식을 유도하는데, 그야말로 획기적이어서 해밀턴이 "당신이 유도한 식에 매료되었습니다"라 답할 정도였다.[1] 해밀턴은 이 식을 자신의 논문에 집어넣고, 새로 알게 된 동료의 논문과 함께 네이처에 투고한다. 해밀턴이 염려했던 대로 이미 명성이 있던 해밀턴의 논문은 바로 통과됐으나 프라이스의 논문은 거절되었는데, 해밀턴은 "내가 쓴 논문은 그의 식을 이용했다. 당연히 그의 논문이 실려야 하지 않냐"고 주장하여 프라이스의 논문도 실렸다. 이 논문은 프라이스 방정식의 유도와 의미를 설명했는데, 그의 독창성을 반영하듯이 참고 문헌이 하나도 없다.
그의 또 다른 큰 공헌은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의 창안이다. 네이처에 처음 발표된 것은 존 메이너드 스미스와 공저로 올라가 있으나 나중에 그가 밝혔듯이 중요한 아이디어는 프라이스가 처음 제시했다.
원래 강경한 무신론자였던 프라이스는 갑자기 1970년 여름 경건한 신도로 전환하는데, 이유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프라이스 자신은 "천문학적으로 낮은 확률의 연속"이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성경 연구, 무료 봉사 등에 열중하다가 그는 점점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게 되었는데, 갑상선암 수술의 부작용으로 늘 치료를 받다가 약을 거르는 바람에 병원에 실려가기도 할 정도였다. 아파트에서도 나와 밑바닥 생활을 하는 등 전반적으로 상태가 매우 좋지 못했으며, 정신적으로도 주변에서 자살을 염려할 정도였다.
1974년 정도에는 리처드 르원틴(Richard Lewontin)이나 제임즈 크로(James Crow)같은 저명한 개체군 유전학자들이 그의 공헌을 인정하는 편지를 보내 올 정도로 이름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1974년 말 해밀턴 가족과 한 주를 같이 보내는데, 이 때는 거의 정상적이었으며 해밀턴은 그가 다시 유전학에 전념하도록 거의 설득했다. 하지만 새해가 되자 마자 그는 결국 불법 거주하던 낡은 집에서 손톱을 깎는 가위로 목을 잘라 자살하고 말았다. 유품은 해밀턴에게 왔던 편지 몇 장 뿐이었으며, 신원 확인은 해밀턴이 했고[2] 장례식에는 종교 봉사 관계로 알던 사람들 외에 학계에서는 메이너드 스미스와 해밀턴만이 참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