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진

趙嬉珍

1962년생

1 개요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검사장.

2 생애

1962년 충청남도 예산군에서 태어났다. 1981년 고려대학교 고려대학교/학부/법과대학에 입학하였고, 1985년 졸업하였다.

1987년에 제29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1] 그 후 1990년에 사법연수원을 제19기로 수료하고 서울지방검찰청에서 검사생활을 시작하였다. 사법연수원 19기 가운데 유일한 여성 검사였다.[2]

그 후 검찰 내 유일한 여성검사[3]로서 검찰 조직 내에서 승승장구했다. 1992년 수원지방검찰청 검사, 1996년 서울지방검찰청 북부지청 검사, 1998년 법무부 여성정책담당관, 1999년 서울지방검찰청 동부지청 검사를 거쳐, 2002년 서울고등검찰청 검사가 되었고, 그 얼마 뒤 법무부 부부장검사가 되었다.

2003년 법무부 검찰국 검사를 거쳐 2004년 6월에는 여성 최초로 부장검사가 되었다. 의정부지방검찰청 형사4부 부장검사가 된 것.

2005년에는 사법연수원 교수로 있었고, 2007년에는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공판2부 부장검사, 2008년에는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형사7부 부장검사, 2009년에는 서울고등검찰청 검사로 있었다.

2009년 8월에는 의정부지방검찰청 고양지청 차장검사가 되었고, 2010년 8월에는 제43대 대전지방검찰청 천안지청 지청장으로 임명되었다. 2011년 10월 다시 서울고등검찰청 검사로 갔다가, 2013년 12월 서울고등검찰청 차장검사가 되었다.

2014년에는 검사장으로 승진하였다.[4] 2015년 2월에는 제63대 제주지방검찰청 지검장이 되었고, 2015년 12월에는 제15대 의정부지방검찰청 지검장이 되었다.

3 트리비아

  • 초임 검사는 형사부에서 6개월을 일하고 자동으로 공판부에 배치된다. 그런데 동기 검사 중 조희진만 공판 업무에서 제외되고 형사부에 남겨졌다.[5] 그러자 공판부에 자리가 비기를 기다려 손을 들고 공판부를 자원했다. 공판부가 비(非)선호 부서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했다.
  • 검찰 내에서 여성으로서 언제나 최초의 인물이었기 때문에 항상 조심하며 살았다고 한다. 회식 자리에 매니큐어를 바르고 참석했다가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국자를 들 때마다 손톱이 보이지 않게 손가락을 오므렸을 정도였다.
  • 조희진 검사가 검찰조직 내에서 인정을 받고 훌륭히 적응하며 활동하자, 그를 지켜보며 용기를 낸 후배가 늘어나면서 지금은 검찰 내에 여성 검사 비율이 예전에 비해 월등히 높아졌다. 대략 전체 검찰 인원 가운데 약 30%가 여성 검사일 정도. 간부급을 빼면 평검사 가운데 절반이 여성이다.
  • 남편 송수근은 2016년 현재 문화체육관광부 기획조정실장이다. 조희진 검사장이 잦은 야근에 주말 근무를 밥 먹듯이 해도 “그만두라”는 말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을 정도로 아내를 배려했다. 아들을 맡길 곳이 없을 때는 남편이 주말에 아이를 데리고 출근하기도 했다. 조희진 검사장은 “우리집 주방 권력은 남편이 쥐고 있어요.”라는 말을 하기도 하였다.
  • ‘워킹맘’으로서 1998년 법무부 여성정책관으로 근무할 때 청주여자교도소 안에 직장 어린이집을 처음 만들었다. 새로 짓는 검찰청에 직장어린이집을 없다는 점을 지적하며 어린이집 설치를 요구하기도 했다.
  1. 여성이 시험에 붙으면 신문에 이름이 실리던 시절이었다. 전국에 여성 법조인이 50명도 안 되는 때에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2. 함께 있던 연수원 여성 동기 9명은 모두 법원이나 법무법인을 선택했다. 앞서 검찰을 선택했던 여자 선배들이 모두 금새 전업한 영향이 컸다. 예를 들어 첫 여성 검사였던 조배숙은 4년 만에 판사로 전직했다.
  3. 전체 755명 검찰 정원 가운데 여자 검사는 조희진 혼자였다.
  4. 검사장은 ‘검찰의 별’로 불린다. 고등법원 부장판사, 대기업 고위 임원에 비견되는 자리다. 검사장이 되는 길은 ‘바늘구멍’에 비유된다. 동기 10명 중 1명꼴로 이 좁은 문을 통과하는 행운이 주어진다.
  5. 아마도 지휘부에서 ‘유일한 여성 검사가 공개된 재판정에 나서면 어떤 불상사가 벌어질지 모른다’고 생각한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