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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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산 전투
날짜
1597년 9월 7일
장소
조선 충청도 직산
교전국1교전국2
교전국명 제국쇼쿠호 일본
지휘관양호,마귀,해생구로다 나가마사
병력기병 4000여기보병 5000명
피해 규모불명불명
결과
일본군의 북진 저지.

1 전투 전야

1597년(정유년) 음력 1월부터 병력을 증강시킨 일본군은 음력 7월에 6백여 척의 선박으로 추가 병력을 경상도 해역에 상륙시키는 등 총 14만의 병력을 동원하여 경상·전라 지역을 석권하였다. 일본군은 음력 7월 보름에는 칠천량 해전에서 승리했으며, 이어 충청도까지 장악하고 계속 북진하여 경기지역으로 진공하였다. 북상하는 일본군을 막기 위해 조선은 한강에 방어선을 구축하였고, 명군 주력부대는 남하하여 일본군을 차단하려 하였다. 1597년 음력 9월 3일 한성에 도착한 경리 양호는 제독 마귀에게 병력을 남파하여 일본군의 북진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마귀는 9월 5일 기병 2000여기를 남파시키고 뒤이어 2000여기를 증파하였다. 부총병 해생이 지휘한 명군 기병부대는 급행군으로 9월 7일 새벽에 평택을 지나 날이 밝기전에 직산 남쪽 1Km인 삼거리에 도착하였다. 일본군의 우군 선발인 구로다 나가마사군의 선발부대도 삼거리에 이르렀을 때 명군을 발견하고 공격준비에 들어갔다. 이에 명군도 방어태세를 갖춰 일본군과 대치했다.

2 전투전개

먼저 공격을 개시한 것은 일본군이었다. 일본군은 조총 사격을 퍼붓고 나서 칼을 휘두르며 명군진영에 저돌적인 공격을 하였고 이에 명군은 포격과 백병전으로 응수했다. 그러자 구로다는 천안의 본대에 증원을 요청해 병력을 좌우로 나누어 전개시키고 명군에 사격을 퍼부었다. 오후가 되자 증파된 2000여 기의 명군이 도착하여 해생은 중,좌,우 보대로 일본군을 공격하였고 4000여명의 명군기병과 5000여 명의 일본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때 천안에서 증원된 일본군 기병이 전투에 가세했지만 명군은 일본군을 압도하여 이들을 격퇴했다.[1]

3 전투결과

구로다군이 직산에서 철수하자 기세가 꺾인 일본군 우군은 일단 진격을 멈췄다. 그러나 큰 타격을 입지 않았기에 일본군은 다시 공세를 준비했는데, 하필 명량에서 보급과 후방 상륙 임무를 맡은 수군이 이순신이 이끌던 12척의 소함대에게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이것이 바로 명량 해전. 이 전투에서의 패배로 일본군은 사실상 후방 보급 역량을 상실하여 전면 퇴각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뒤 다시는 북상하지 못했다.

승패의 결과가 아주 압도적이지는 아니었지만 일본군의 북상을 저지한 승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전투의 주력이 명군이었다는 이유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전투이다. 단, 당대에는 '대첩'이라 불릴 정도로 고평가되었는데 그 원인은 바로 선조(...). 뒤이어서 명량해전에서 패하여 퇴각하였지만 명량해전 항목의 전과 부분에 올라온 기록처럼 선조는 어떻게든 명량해전의 의의를 최대한 깎아 내리고 직산 전투의 의의를 실제보다 높이 평가해서 일본군이 후퇴하게 만든 공로를 죄다 명군에게 돌리려 했다. 오죽하면 명군 장수조차 정도가 심하다는 것을 알고 이순신을 칭찬하며 그의 품계를 올리라고 요청할 지경이었다.

김경진의 소설 임진왜란(김경진)에서는 전반적으로 명군을 폄하하는 경향 때문에 이 전투 자체를 제대로 된 교전이 아니고 명군에 전투 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견제를 위한 기동 정도만 하다가 돌아갔다고 각색하였다. 한동안 한국 인터넷 상에 이 소설 내용이 정설처럼 퍼진 적이 있었다.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전투이나 현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 실려있는 몇 안되는 임진왜란 전투 중 하나다. 용인이나 칠천량, 이치는 언급이 되지 않는 마당에..
  1. 애초부터 일본 기병은 말타고 다니는 일본 장수들을 모아서 급조하다보니 전투로 단련된 명나라 기병한테 상대가 될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