陳璘
1543 ~ 1607
목차
1 개요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원군으로 파견된 명나라의 해군 장수. 자는 조작(朝爵). 호는 용애(龍厓). 시호는 충강(忠康).
2 설명
한국에서는 정유재란때 파견된 장수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광동성 옹원현 사람으로 가정제 말에 지휘첨사가 되었으며, 영덕현의 도적을 토벌하는 것에 공을 세워 광동수비가 되었다. 도적 뇌원작을 평정하고 영동의 도적들을 물리쳤으며, 만력제 초에는 고요현의 도적 등승룡, 게양현의 도적 종월천 등을 평정했다.
여러 차례 승진해 도지휘첨사, 첨서광동도사에 임명되었으며, 이성립이 도적을 평정하기 위해 제양보를 공격했지만 패하자 진린이 참전했다. 도적을 평정하고 조경유격장군, 고주참장이 되었다. 나방의 요족을 정벌해 부총병으로 옮겨 동안첨장사가 되었지만 그 곳에서 살아남은 자가 백성을 살해한 일이 일어나 이로 인해 책망을 받아 죄를 가지게 되었으며, 주문달과 함께 석우, 청수의 여러 망루를 꺠뜨려 36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아 죄가 사해졌다.
동안현이 평정되자 토목 공사를 일으켜 영채, 관성, 사당 등을 지었는데, 재물을 반출하는 것도 금지해 병졸들이 반란을 일으켜 주현을 약탈하자 나응학에게 탄핵받아 관직이 박탈되었다가 적을 사로잡으면서 죄가 사해져 낭산부총병이 되었다. 모략이 있어 병사를 잘 부렸지만 탐욕이 심해 다시 탄핵을 받고 관직을 빼앗겼으며, 조정의 선비들은 그의 재주를 아깝게 여겼지만 천거하지는 않았다.
1592년에 적에게 패한 일이 참작되어 관직이 회복되어 광동의 병사 5천명을 이끌고 조선을 구원했으며, 1593년 2월에 어왜총병관이 되어 마귀, 유정 등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병사 3천여 명, 전함 수백 척을 나누어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해구에 포진시켰다. 어위도총관 겸 전군도독부도독(前軍都督府都督)이 되어 수군 5천 명을 이끌고 명량해전 이후 이순신 함대에 합류하였다.
이순신 장군과 만나기 전에 능력이 뛰어났지만 탐욕을 일삼는 장수였으며, 이순신 장군이 처음에 명 해군의 행패를 핑계로 본진에서 백성들과 함께 떠나려는 척을 해서 그에게서 명 해군의 지휘권까지 넘겨받는 한편, 이후 진린에게 자신이 세운 공로를 전부 넘겨주는 식의 '채찍과 당근'을 병용하여 그를 마음으로 감복시켜 진심으로 존경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후 진린은 이순신 장군을 이야(李爺) 혹은 노야(老爺)라는 경칭으로 불렀다는 것은 왕조실록에 전할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이다.
참고로 이순신이 명나라에게 받은 벼슬이 정 1품 도독이다. 이는 사후 받은것이 아니라 임진왜란 당시에 받은 벼슬이다. 진린은 정2품 도독첨사로 이순신에게 함부로 할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다. 조선의 품계로 따진다면 동등할 수 없이 두 세등급을 깎아보았겠지만, 명나라 관품이 우선인 걸 감안한다면 이순신 장군에게 진린이 함부로 대할래야 대할 수 없다. 하면 하극상인데 어떻게 하겠는가?[1]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후 진린은 위기에 처하였는데 이순신의 조카 이완이 그를 구원해주자 진린은 이를 이순신이 행한 일인줄 알고 이순신에게 사례하고자 하였는데 이 때 이순신의 죽음에 땅바닥에 주저앉아 "어른께서 오셔서 나를 구해준 것으로 알았는데 이 무슨일이란 말입니까?"라며 통곡했고, 이순신의 지휘 아래에서 대부분의 명군과는 달리 꽤나 엄한 군율 때문에 곤욕을 치렀던 명나라 해군 장졸들도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것과는 별개로 전후 조선수군의 공적을 모조리 가로챘고[2] [3]인정된 공과는 별개로 지휘력은 안습해서 노량해전에서 등자룡과 함께 형편없는 지휘로 왜군에게 포위당했다가 이순신 장군에 의해 목숨을 부지한 적이 있다. 등자룡은 구출되기 전에 백병전에 휘말려서 전사한다.
그래도 아주 밑바닥까지 썩은 인물은 아니였는지 왜란이 끝난 후에는 명나라 조정에 이순신의 전공을 상세하게 보고하여 만력제가 이순신에게 8가지 선물들을 보내도록 하는 데 일조했다고 전해진다.
명에 돌아가서는 임진왜란 때의 공적으로 도독동지, 지휘첨사에 임명되고 광동백(廣東伯)에 봉해졌으며, 1년 전인 1597년에 양응룡이 파주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1598년에 호광총병관에 임명되어 군사를 이끌고 반란을 진압했으며, 이어서 피림을 토벌했다.
1605년에는 신첨장관사로 옮겨 산묘를 토벌하는 것에 종군했으며, 광동성을 진무하고 관직을 마쳤다. 파주를 평정한 공으로 좌도독을 더하면서 지휘사에 임명되었으며, 1607년에 세상을 뜨자 묘족을 평정한 공으로 태자소보에 추증되고 시호는 충강(忠康)을 받았다.
진린의 아들 진구경(陳九經)은 애산에서 청군과 싸우다 죽었다. 진국영의 아들 진영소는 감국수위사(監國守衛使)로서 일하다 명나라가 멸망한 이후 '원수와 같은 하늘을 지고 살 수 없다'며 벼슬을 버리고 조선으로 귀화, 고향인 광동성에서 본관을 따와 광동 진씨의 시조가 되었다. 즉, 진린의 직계 후손은 현재 한국에서 이어지고 있다는 이야기. 이 마을을 황조리라 하며, 진린을 모시는 황조별묘(黃朝別廟)가 세워졌다. 중국에 남은 후손들도 있는 모양이다 2013년 3월에 한국후손이 광동으로 가서 같이 제례를 올리는등의 교류가 이어저 오고 있다고 한다.
3 대중문화 속의 진린
불멸의 이순신에서 등장한다. 김하균씨가 배역을 맡았다. 첫 등장부터 대명의 도독에게 무례하다며 접견나온 군관한테 행동대장(?) 등자룡이 대신해서 싸대기를 날리더니 환영회에서 이순신이 직접 따라준 술잔을 이순신 얼굴에다 뿌려버리는 등 행패를 부린다. 이건 역사적 사실과 너무나 다른 태도다. 상술했듯 이순신과 진린이 만났던 시점에서 이순신에게 진린은 바로 상급자 대우를 하기 시작했다. 당연하게 이순신은 명나라 정1품 도독이고 그는 정2품이니 당연한 일이다. 아무튼 드라마에서는 각종 건방진 행위는 다하며 이순신과 갈등을 빚으나 이순신의 포용으로 그를 믿고 따르게 된다.물론 도움이 되기는커녕 짐만 됐다.
칼의 노래에서는 부패한 명 수군 제독으로 등장하는데,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거대한 체구의 인물로 묘사된다. 생마늘을 으득으득 씹어먹고 공훈을 세우는 것에 집착하여 전투 중 바다에 떨어진 수급에 욕심을 부리는 면모를 보인다.
임진록2에서는 명의 화승총 영웅으로 나온다. 이는 수군 영웅들이 모두 원거리 무기를 쓰기 때문. 다른 장수들마냥 그냥저냥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다만 성능은 딱 거기까지만이고 종합적인 능력은 별거 없다. 나중에 이순신이 조선의 반격에서 멋진 스킬까지 들고나온 반면 이 양반은 그런것도 없었다. 그래도 용기린갑옷의 버프가 좋은게 다행이라면 다행
여담으로 조반에서 기공신포는 본래 진린이 사용하던 기술이었으나, 정식 버전으로 오면서 이순신의 기술로 변경.(...) 그리고 시나리오 진행시 임진록 2 조선 시나리오 8장에서 잠깐 언급된 것을 빼면 직접 스토리 진행(브리핑)에 나온 적이 없다.
- ↑ 그래도 여러 문헌에서 기록되었던것처럼 진린은 벼슬을 떠나서 진심으로 이순신을 존경했었음을 추론할수 있다.
- ↑ 하지만 이순신도 생전에 이를 알고는 있었으나, 과거 명성을 쌓은 것 때문에 선조에게 죽을 뻔한 이후로 오히려 공을 드러내길 꺼리게 됐기에 부담없이 자기 공을 진린에게 퍼주다시피 넘겨주곤 했었다. 그리고 그것과는 별개로 어쨌거나 자기 부하들의 공훈은 꼬박꼬박 챙겨줬고…. 애초에 이순신은 장계를 올릴 때 아예 진린의 공을 적은 거짓 장계와 실제 공로를 적은 진짜 장계 두 개를 올려서 조정에서도 상황은 다 파악하고 있었고, 나중에 명나라에서 진린이 조선군의 전과를 뺏었다는 소문을 듣고 진상 조사를 할 때 진린이 공을 세운 내용의 장계를 보여주어 넘어갔다.
- ↑ 일설에는 선조와 이순신 간의 사이가 안 좋은 것을 알고 의도적으로 이순신의 공적을 깍아 이순신에 대한 선조의 질투를 막고 자신은 실리를 챙겼다고도 한다. 명나라에는 이순신의 공적을 상세히 잘 보고한 점 때문에 나온 이야기이지만 단순한 추측의 영역이며 동시에 이것도 이순신의 약점을 이용한 셈이니 결코 좋은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