秦松
생몰년도 미상
후한 말 오나라의 문관으로 자는 문표(文表).
서주 광릉군 출신으로 장소, 장굉, 진단과 함께 모주가 되어 손책의 밑으로 들어가 대계를 정하는 일에 참여해 손책과 장굉에게 대우를 받아 상빈이 되었는데, 진송은 장소, 장굉 등과 함께 사해를 평안하게 하기 위해서는 무력을 길러야한다고 보는 입장이었다. 이때 새파랗게 젊은 나이였던 육적이 관중과 공자의 예를 들면서 이를 비난하자 놀랐다고 한다.
202년에 조조가 원소와의 싸움에서 크게 이기고 손권에게 아들을 조정에 인질을 보낼 것을 요구하자 이에 대해 상의했지만 장소 등과 함께 뚜렷한 계책을 내지 못해 손권은 주유의 말에 따라 아들을 보내지 않았으며, 208년에 조조가 형주를 정복하고 손권에게 이제 곧 수군 80만을 이끌고 오나라를 정복할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자 진송은 사신을 보내 격문을 받아 영접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요절했다고 한다.근데 적벽대전에서 손권이 승리해서 손권이 장소과 같이 까임권를 부여할수도 있다. 험한 꼴 당하지 않고 죽어버려서 다행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