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책

후한의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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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오의 추존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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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策
(175년 ~ 200년 5월 5일)

1 개요

후한 말의 군벌. 는 백부(伯符). 손견오국태의 장남, 손권의 형.

손오의 2대 군주이지만 손견은 죽을 무렵에 원술의 부하로 움직였기 때문에, 사실상 독립 세력을 이끈 손씨로는 초대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손견은 자신의 일가족을 수춘에 머물게 하였고 따라서 그는 수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강표전에 따르면 손책이 10세(!)부터 교우 관계를 맺어 명성을 가지고 있었다. 손책과 동갑인 주유 또한 영리했고 손책의 소문을 듣고 서현(舒縣)에서 조언(造焉)으로 찾아와서 손책과 매우 깊은 관계가 되었다. 주유가 손책에게 자신이 사는 서현으로 이주해 살 것을 권하자 손책이 이 말을 따라 모친 오국태를 데리고 서현으로 옮겨가서 살면서, 주유 등 여러 사대부들과 친교를 쌓는다.

[어림] '유예주가 손백부의 걸음걸이를 넋을 잃고 바라보다.'는 이야기가 있다.
손책孫策이 14살일 때, 수양壽陽의 원술袁術을 찾아갔는데, 바야흐로 이르자, 잠시 있다 밖에서 이르길 :
『유예주劉豫州 비備께서 오셨습니다. 』
손책이 곧 [유비에게] 가겠다 청하자 원술이 말하길 :
『유예주는 군君과 어떠한 관계인가?』
[손책이 원술에게] 답하여 말하길荅曰
『그를 모릅니다만不爾,영웅은 뛰어난 사람을 꺼리는 법입니다.』
곧 나가서는 동쪽 계단으로 내려갔다. 유비劉備가 동쪽 계단을 따라 올라가는데 다만 손책의 걸음걸이를 돌아보고는 거의 다시 나아가지 못하였다.

아버지 손견이 죽자, 돌아와 곡아(曲阿)에 장사지냈다. 위서에 따르면 손책은 아버지의 후작 자리를 이어야 했으나, 동생 손광에게 양보해주었다. 장례가 끝난 후 장강의 북쪽 강도(江都)로 이사갔으나 서주목 도겸이 손책을 싫어했으므로 떠나게 되었다. 오력에 따르면 손책이 강도에 있을 때 장굉은 모친상을 지내고 있었는데 손책이 눈물까지 흘려가며(?) 장굉을 등용하고 자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을 장굉에게 맡긴다.

손책은 모친 오국태를 곡아로 옮겨놓고 여범, 손하와 같이 외숙부인 단양태수 오경에게 가면서 이를 기회로 사람들을 불러 모아 수백 명을 얻는다.

2.2 원술 휘하에서

194년, 거의 모든 손견 휘하의 장수들이 그러한 것처럼 손책은 원술 밑으로 들어가 벼슬살이를 한다. 강표전에 따르면 손책이 지름길로 가서 수춘에 가서 원술과 만나 눈물을 흘리며 부친 손견과 원술 간의 옛 인연을 언급하며 등용해달라고 한다. 원술이 그가 매우 뛰어나다 여겨 손견의 옛 부곡들을 손책에게 돌려주었다.

원술손견을 대등한 위치에서 서술한 삼국지연의에 익숙한 사람들은 원술은 손견에게 유표를 치도록 부탁해 유표에게 죽게 했는데 손책이 아버지의 원수같은 원술 밑으로 들어가다니 불효막심(?)하다고 여길 수 있으나 정사에서는 손견은 원술의 수하의 위치였다.

강표전에 따르면 원술이 손책을 귀하게 여기긴 했지만 아직 그의 부친 손견의 병사를 돌려주려 하지는 않았다. 원술이 손책에게 손책의 친척인 오경과 손분을 각각 단양의 태수와 도위로 삼았으니 그 땅에서 병사를 모아보라고 한다. 손책이 단양으로 가서 외숙에게 의지해 수백 명을 얻었는데 경현(涇縣)의 대도적 수령 조랑에게 기습당했고 정보와 그 휘하 기병 1기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남는다. 그러나 병사를 모두 잃었고 이에 다시 원술에게 가니 원술이 손견의 잔여 병력 1천여 명을 손책에게 돌려주었다.

마일제가 수춘에 있을 때 손책을 천거하면서 표를 올려 회의교위로 임명하도록 하자 손책은 원술 휘하의 장수인 교유, 장훈 등의 공경을 받는다. 원술은 "이 원술에게 손랑(孫郞)같은 자식이 있다면, 죽어서도 다시 무슨 한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어느날, 손책의 기병 병사가 죄를 짓고는 원술의 진영으로 도망쳐 들어가 안쪽 마구간에 숨었는데 손책이 사람을 시켜 가서 참수하게 하였다. 일이 끝난 후 원술에게 가서 사과하자 원술은 "병사들은 반란을 일으키기 좋아하는데, 응당 같이 그런 자를 미워해야지, 어찌해서 사과까지 하오?"라고 말했고 이후 군중의 사람들이 손책을 더 두려워했다.

손책은 이전에 원술로부터 구강태수의 지위가 약속되어 있었으나 원술은 나중에 바꾸어 단양의 진기(陳紀)를 등용하여 삼았다.

원술은 유비와의 싸움에 앞서 여강태수 육강(육손의 숙부)에게 군량을 청했으나 그가 이를 거부하자 분노한다. 손책이 예전에 육강에게 갔을 때 육강이 직접 만나주지 않고 주부(主簿)를 시켜 접대하게 해서 손책이 그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으니 원술은 손책을 보내 육강을 공격하게 하였고 그에게 점령지의 태수직을 약속한다. 손책은 육강을 격파하나 원술은 약속과는 달리 유훈을 임명한다.

이렇게 두 번이나 약속된 태수직을 받지 못하자 이에 실망하고 빡친 손책은 원술로부터 독립할 것을 결심하게 된다.

2.3 유요를 격파하다

194년, 양주자사 유요가 단양에서 오경과 손분을 쫓아내며 원술과 전쟁을 시작한다. 유요는 번능우미를 횡강진에 주둔하게 하고, 장영은 당리구에 주둔시켜 원술에 맞서도록 했다. 원술은 혜구를 양주자사로 삼고, 오경을 독군 중랑장으로 삼아 손분과 함께 병사를 거느리고 장영 등을 치게 했으나, 1년이 넘게 이기지 못했고 이에 손책이 원술에게 참천을 요청했다.[1] 강표전에 따르면 원술은 그가 태수직을 안 줘서 손책이 품은 원한을 기억했지만, 유요가 곡아를 점거하고 있고, 회계에 왕랑이 있어서, 손책이 쉽게 이길 수 없을 거라 생각해서 이를 허락했다.

원술이 표를 올려 손책은 절충교위와 행(行) 진구장군 임명되어 출병한다. 처음 병사는 천여 명에 기병 수십 필이었으나 따르기 원하는 자가 수백 명이라 역양(歷陽)에 도착할 즈음에는 5~6천명을 얻었다. 손책은 역양에서 병사를 인솔하여 온 주유와 합류했고 손책의 모친 오국태가 먼저 곡아에서 역양으로 이사와 있었으니, 손책이 다시 모친을 부릉(阜陵)을 옮긴다. 손책군은 장강을 건너 단양군을 치는데 손책은 군사적인 재능이 있어 유요군을 격파한다.

태사자전에 따르면 태사자와의 처절한 일기토는 정사에도 기록으로 남아서 그가 싸움꾼으로서도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2] 물론 양측의 군사들이 몰려나오는 바람에 무승부가 되었다.

강표전에 따르면 이듬해인 195년, 손책이 유요의 우저산에 있는 진영을 공격하여, 창고의 양곡과 군수품을 모두 얻었다. 말릉성(훗날 건업)을 지키던 팽성상 설례와 하비상 착융[3]은 유요를 맹주로 삼고 있었는데 손책이 착융을 선공격하여 5백 여명을 죽이니 착융은 성문을 닫고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손책은 장강을 건너 설례를 공격하자, 설례는 갑자기 달아나서는 번능, 우미 등과 함께 우저의 진영을 습격해 탈환했다. 이 소식을 들은 손책이 돌아가 번능 등을 공격하고, 남녀 1만 명을 사로잡았다.[4] 다시 내려와 착융을 공격하다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서 허벅지에 상처를 입어서 말에 탈 수 없게 되자, 직접 수레를 몰고 우저영으로 돌아갔다.

어떤 배신자가 착융에게 "손랑이 화살에 맞아 이미 죽었다."고 알리자 기뻐한 착융이 장수 우자(于慈)를 보내어 손책을 향해 가게 했다. 그러나 손책은 우자를 도발하여 배후에 매복시킨 복병으로 격파하여 1천 여명을 베었다. 이후 손책이 착융의 진영 아래로 가서 주변인들에게 "손랑이 마침내 어찌되었다고 하더냐!"고 외치게 하자 놀란 적의 병사들은 두려워 밤중에 달아났다. 착융은 손책이 아직 살아있음을 듣고는 다시 도랑을 깊게 파고 보루를 높이면서 수선하며 우주방어 모드로 들어가 그가 있는 곳은 지키는데 성공하지만 그 틈에 손책은 유요의 본군을 공격한다. 손책군은 별장(別將)을 공격해 격파하고, 돌아서 호숙(湖孰)과 강승(江乘)을 공격해 모두 항복시켰다.

손책은 용모가 빼어나고 사교성이 좋아서 민심을 얻었고 유요가 군대를 버리고 달아나자, 여러 군의 태수들도 모두 성곽을 부수고 달아났다. 유요가 예장으로 도망칠 때 태사자는 저항하나 결국 손책에게 사로잡혀 투항한다.

강표전에 따르면 백성들은 모두 손책을 손랑(孫郞)이라 불렀고 선정을 베풀어 민심을 얻는다. 손책은 장수 진보(陳寶)를 보내 부릉으로 가서 모친 오국태과 동생들을 데려오게 하고 은혜를 베푸는 영을 내리자 사람들이 모여 병사 2만여 명과 말 1천 필을 얻었다.

2.4 왕랑을 격파하다

손책은 주유에게는 단양의 수비를, 주치에게는 오군의 평정을 맡기고 자신은 회계로 진군한다. 오경은 엄백호를 먼저 칠 것을 진언하였는데, 손책은 엄백호를 도적 무리에 불과하다고 여기고 왕랑을 먼저 공격하였다.

왕랑전에 따르면 왕랑은 항복하라는 우번의 조언을 듣지 않고 손책과 싸웠는데 패배하여 바다에서 표류하게 된다. 표류하다 동야(東冶)에 닿았는데 손책은 또 동야까지 추격하여 왕랑의 군사를 대파시킨다. 손책은 왕랑이 명망이 있었기 때문에 문책만 했을 뿐 죽이지는 않았다.

오록에 따르면 이때 왕성(王晟) 등이 최대 만여 명에 달하는 무리를 모으고 있어서 손책이 병사를 이끌고 쳐서 토벌했다. 모친 오국태가 손책에게 왕성은 아버지 손견과 친분이 있었고 왕성의 형제와 자식은 다 죽었으니 나머지는 죽이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손책은 듣지 않고 나머지 일족들도 모두 죽였다.

2.5 엄백호를 격파하다

오군태수 허공은 이미 주치에게 격파되어 호족 엄백호에게 몸을 의탁한 뒤였다.

강표전에 따르면 손책이 엄백호를 공격하자 엄백호는 엄여사자로 보내 화의를 청했는데, 엄여가 들어오자마자 손책이 책상을 칼로 부수면서 겁을 주니 엄여는 이에 위축되었다. 이를 본 손책은 엄여가 그 명성에 미치지 못하는 상대라 판단해 그대로 창을 던지자 엄여는 그것을 맞고 선 채로 죽었다.

손책이 엄백호는 단순한 도적의 무리라며 절강을 건너 회계를 근거로 삼아 진군하여 동야를 도륙내고 엄백호를 격파하자 엄백호는 겁을 먹고 예장군에 있는 허소에게로 달아난다. 정보가 달아난 엄백호를 공격할 것을 청했으나 손책이 말했다.

허소는 옛 주군에게 의를 지켰고, 옛 벗들에겐 진실함이 있으니, 이는 장부의 뜻이오.

이렇게 손책은 허소의 명망을 알아 일단 치지 않았다가, 허소가 죽고 뒤이어 착융에게 간신히 이긴 유요가 병사하자 이들을 흡수했다.

그 뒤 자신은 회계태수가 되고 주치를 오군태수, 오경을 단양태수, 손분을 예장태수로 삼았다. 예장군을 나눠 노릉군(盧陵郡)을 만들고, 손분의 아우 손보를 노릉태수로 삼고, 장소, 장굉, 진송, 진단 등을 모주(謀主)로 삼았다.

2.6 원술로부터 독립

강표전에 따르면 손책이 봉정도위 유유(劉由)와 오관연 고승(高承)에게 하여금 허도로 가서 천자에게 방물(方物)을 헌납하게 했다.

손책은 이후 원술과 대립하였고, 원술이 임명한 단양태수 원윤(袁胤)을 서곤을 파견해 쫓아냈다. 그 뒤 원술이 칭제하게 되자 손책은 그를 꾸짖는 서한을 보내고[5] 관계를 끊는다. 그 서한은 오록에 따르면 손책이 장굉에게 짓게 했다고 하는데 전략(典略)에 따르면 장소의 글이라 한다.[6]

198년 조조 밑에 옹립되어 있던 헌제로부터 손책에게 작위를 내리고 원술을 공격하라는 조서가 내려온다. 강표전에 따르면 처음엔 작위로 기도위와 오정후를 받았으나 장군직을 얻고 싶은 손책이 조정에서 온 사신 왕포(王誧)에게 아부(?)를 하니 왕포가 손책을 임시로 명한장군으로 임명했다.

헌제의 조서에 따라서 손책은 조조, 여포, 진우(진등의 친척)와 함께 원술을 토벌하기 위해 출병한다. 그러나 수적으로는 불리했으므로 장소의 진언에 따라 조조의 원병(구원군) 포지션을 맡아서 주된 싸움은 조조에게 떠넘긴다.[7]

도중 진우가 몰래 손책을 치려고 조랑, 엄백호 등에게 내부에서 호응하게 하고 손책이 원술과 싸우는 그 순간 공격하기로 한다. 이를 알아챈 손책이 여범, 서일을 파견해 진우를 대파시킨다. 산양공재기에 따르면 패배한 진우는 도망가서 원소에게 귀부한다.

198년, 손책이 또 천자에게 이전에 올린 것의 배가 되게 방물을 바치니 헌제는 조서를 내려 손책을 토역장군, 오후로 고쳐 봉했다.

2.7 유훈을 격파하다

꿀물을 찾던 원술이 죽고 원술의 일가족인 원윤, 원요, 원부인 등은 원술의 관을 매고 유훈에게 간다. 또한 양홍, 장훈 등 원술 휘하 장수들이 원술의 병사를 거느리고 손책에게 가려고 했는데 여강태수 유훈이 도중에서 습격하여 모두 사로잡는다.[8] 더불어 유엽까지 정보를 죽이고 그 세력을 이끌고 유훈에게 의탁하러 오자 유훈의 세력이 커져서 군량이 부족해졌다.

유훈은 사촌동생 유해를 보내 예장태수 화흠에게 군량을 요청하였다. 화흠도 군량이 적어 유해에게 해혼(海昏)과 상료(上繚)로 가서 거기의 여러 일족의 우두머리들에게 곡식을 얻으라고 했다.

유훈이 큰 세력을 얻었다는 소식을 들은 손책은 유훈과 거짓으로 동맹을 맺고 뇌물을 주어 유훈에게 상료를 공격할 것을 요청했다. 유엽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훈은 이를 취하기 위해 해혼과 상료로 갔지만 일족의 우두머리들이 군량을 들고 도주해서 유훈은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

손책과 주유는 이 틈을 타서 유훈의 본거지인 환성을 빈집털이했고 원술의 일가족을 사로 잡는다. 그리고 그 곳의 미녀 자매 이교를 취한다. 또한 여남태수였던 이술을 여강태수로 등용하여 환성을 지키게 한다.

손책이 보낸 손분손보는 성 밖에 나가 있는 유훈을 격파한다. 본거지 환성이 털렸다는 것을 들은 유훈은 황조에게 구원을 청했으나 황조의 구원군으로 보낸 큰아들 황역도 손책과 주유에게 털려서 유훈과 유해는 조조에게 귀부했다.

유훈의 세력을 얻은 손책군은 이 기세로 하구의 황조를 공격한다. 유표가 황조에게 조카 유호와 남양의 한희를 원군으로 보냈으나 손책군은 황조를 격파하고 유호와 한희도 죽는다.

유훈과 황조를 격파하고 돌아오던 중 예장태수 화흠을 종속시키고 손분을 예장태수로 삼는다. 예장군의 한 지방에서 단양 사람 동지가 스스로를 여릉태수라 칭했는데, 손분과 손보가 평정했고 손보가 여릉태수가 되었다.

2.8 고대를 죽이다

손책이 강남을 평정하고 배후를 위협할 조짐을 보이자 조조는 그를 신경쓰게 되었고 오력에 따르면 조조는 "미친 개 같은 아이와 예봉을 다투기 어렵도다."라고 탄식했다.[9]

조조는 동생의 딸을 손광에게 시집보내고, 자신의 아들 조창과 손분의 딸을 혼인 시켰다. 또한 손책의 동생인 손권과 손익을 천거하고, 또한 양주자사 엄상에게 명하여 손권을 무재로 천거하게 했다. 이렇게 조조는 손책과 우호 관계를 맺으려 했으나, 손책이 오히려 대장군 자리의 직책을 요구하자 관계가 완전히 어긋나 버린다.

오록에 따르면 손책이 고대좌전을 잘 한다는 소식을 듣고 부하를 시켜 고대를 데려오게 해 좌전에 대해 강론을 받고자 했다.

이 때 한 부하가 "고대는 손책님이 단지 무력만 있는 우장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약 제 말이 맞다면 그는 좌전을 논할 때 손책님을 상대하기 싫어 모른다고 대답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또 고대에게는 "손책님은 지는 것을 싫어해 만약 모든 손책님의 의문에 대답을 한다면 손책님은 화를 낼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끔씩 모른다고 대답해 그의 뜻을 어느 정도 맞추어 주십시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고대님의 목숨이 위태롭습니다."라고 했다.

고대는 과연 그 부하의 말이 옳다고 여겨 좌전을 손책과 논할 때 몇 번씩 대답에 모른다를 섞어 대답해 주니 손책은 분노했고 "이 녀석이 나를 우습게 보는 것이냐!"라며 그를 투옥한다.

그가 투옥되자 고대의 친구들과 지인들이 땅바닥에 엎드려서 그를 풀어줄 것을 청했다. 문제는 손책이 누각에 올랐더니 수 리가 엎드린 사람들로 가득 차있던 것. 이에 손책은 고대가 민심을 잡고 있는 것에 화가 나 그를 죽인다.

고대와의 일화는 손책의 더러운 성격을 보여주는데 이러고도 원한으로 죽지 않는게 이상할 지경. 그리고 이 빌어먹을 성격이 손권, 손노반, 손준, 손침, 손호까지 이어진다.

2.9 허공을 죽이다

200년, 조조와 원소가 관도에서 대치하자 손책은 허도를 급습할 계획을 꾸민다. 그는 군을 이끌고 북상하였는데 우선 광릉태수 진등과의 접전이 먼저 이루어졌다. 진등은 예전에 손책이 격파한 진우의 친척으로 예전에 진우가 손책에게 당한 것을 갚고자 했다. 진등은 몰래 인수를 엄백호의 잔당에게 주어 결탁했고 손책은 진등을 공격하려다가 의병계에 무너진다.

손책은 진등과 대치하면서 단도에 머물며 군량 수송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때 허공의 식객들의 기습을 받고 죽음에 이른다.

손책의 척후 관리가 허공헌제에게 보낸 밀서를 얻어 손책에게 보여줬는데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손책을 참소하는 글인데 어째 손책을 후빨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기분 탓이다.

손책은 항우와 같은 무예와 항우와 같은 인격을 지닌 위인입니다. 때문에 손책은 언제든지 황실을 뒤엎고 그 종묘사직을 자신이 가로챌 수 있는 위인입니다. 그런 손책을 절대 가만 냅둬서는 안되며 조정에 불러들여 참수를 하든 인질로 붙잡아 두든 해야만 합니다.

항우와 같은 인격에서 볼 수 있듯이 후빨하는 건 아닌 거 같다. 손책은 당장 허공을 불러 심문했다. 허공은 그런 적이 없다고 말했지만 손책은 바로 그를 죽이게 했다.

강표전에 따르면 손책은 사냥을 좋아해서 수차례 사냥을 나갔는데 허공의 식객들이 허공의 복수를 하려고 했다. 사냥하는 날에 허공의 식객 3명이 군졸로 있었는데 손책이 "그대들은 어떤 사람들인가?"라고 물었다. 그들은 "저희들은 한당의 병사들인데, 사슴을 잡느라 여기 있는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손책은 "한당의 병사들이라면 내가 다 아는데, 너희들은 본적이 없다."라며 한 사람을 활로 쏘아 죽였다. 겁에 질린 나머지 둘은 손책의 뺨에 화살을 적중시켰으나 기병이 도착하자 남은 두 식객도 죽었다.

곽가전에 따르면 곽가는 손책이 암살당할 것이라 자신하였다. 곽가가 이를 예측했다는 이유만으로 곽가가 암살에 관여했다는 음모론을 내세우는 사람도 있지만 적당히 가려서 듣자. 주석을 단 배송지도 곽가의 예측이 맞은 것에 운이 강하게 작용했음을 지적하고 있으며, 증거가 될 기록 따위 한 줄도 없다. 그냥 손책을 직접적으로 본 적 없는 모사가 저런 예측을 할 정도로 손책의 잔혹함이 잘 알려졌다 정도로 참고하자.

2.10 우길을 죽이다

배송지 주석에 우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나 야사라 보아야 옳을 것이다.

강표전에 따르면 사람들이 도사 우길이 탁문(度門) 아래로 오자 대부분의 여러 장수와 빈객들이 누각을 내려가 우길에게 절했다. 빈객을 담당하는 자가 하지 말라고 했으나 사람들은 듣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도사 우길을 따르는 것에 화가 난 손책은 그를 잡아 들였다. 우길을 따르는 사람들이 부녀자들을 시켜 손책의 모친 오국태에게 우길을 구해주라고 청하게 했다. 오국태와 여러 장수들은 손책에게 우길을 살려 달라고 했으나 손책은 듣지 않고 우길을 죽였다. 우길을 섬기던 여러 사람들이 아직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시체만 남겨두고 혼백은 빠져 나가 신선이 된다고 말하면서 제사를 하면서 복을 구했다.

수신기에 따르면 손책이 허도를 습격하고자 하는 군행의 도중에 장수와 관리들이 우길 부근에 많이 있는 것을 보고는 질투가 난 손책은 우길을 잡아 들이게 했다. 그리고는 지금 날씨가 가물었으니 비를 내리게 하면 사면하겠고 그러지 못하면 죽이겠다고 했다. 정말로 대낮에 큰 비가 한꺼번에 내리자 장수와 병사들은 기뻐하며 우길에게 가서 경축하고 위로했다. 분노한 손책이 끝내 우길을 죽였다. 장수와 관리들은 슬퍼하며 함께 그의 시체를 묻었다. 밤이 되자, 홀연히 다시 구름이 일어 우길의 무덤을 덮었는데 다음날 아침 가서 보니 그 시체가 사라져있었다.

수신기에 따르면 우길을 죽인 뒤 손책이 혼자 앉아있으며 우길의 환영을 보고 피폐해져갔다. 이후에 상처의 회복에 약간의 차도가 있자 거울을 봤는데 거울 속에 우길이 있었다. 돌아보아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데 거울 속에 우길이 있으니 손책은 거울을 깨트리고 크게 소리쳤고 상처가 모두 터져 얼마 안 되어 죽었다.

2.11 죽음

오력에 따르면 손책이 상처를 입었을 때, 치료할 수 있다고 말한 의원이 백일 동안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손책이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더니 "내 얼굴이 이와 같은데, 아직도 다시 공을 세우고 대업을 이룰 수 있겠는가?"라며 책상을 치고 화를 내니 상처가 모두 파열되어 그날 밤에 죽었다.

손책은 상처가 심하자, 장소 등에게 손권을 잘 살펴 달라고 말했고 아우 손권에게 뒷일을 모두 맡겨 후계자로 정하고, 밤이 되어 26세의 나이로 죽었다.

2.12 사후

후에 손권이 황제를 칭하면서 손책을 장사환왕으로 추존했다. 아버지 손견처럼 황제가 아니라 왕으로 추존한 이유는 차남장남을 제쳤을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정통성 문제 때문이었다. 훗날 진수는 "네가 네 형 아니었으면 그 위치에 있었겠냐!"라면서 대접이 박하다고 대차게 깠다. 실제로 비슷한 경우였던 사마염도 자신의 백부 사마사를 황제로 추존했으나 사마염의 경우는 백부 사마사가 아들이 없고 딸만 다섯 있었기 때문에 직위를 아버지인 사마소가 물려받은 경우라 애시당초 정통성 문제가 별로 없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10] 솔직히 사마염의 성격도 다른 의미에서는 손제리 못지 않았다.

그러나 본래 황제는 되지 못했다 하더라도 실질적인 권력자의 지위에 있었다면 그 후예들이 황제로 추숭하는게 예의였다. 북제고양도 자기 형인 고징에게 세종 문양제의 묘호를 올렸다. 고징의 경우 아들만 6명이고 모두 왕의 작위를 가졌는데 그 유명한 난릉왕도 고징의 자식이었다. 금의 완안아골타도 형 완안오아속에게 강종 헌민공간황제의 묘호를 올렸다. 때문에 손권의 손책 무시는 당시의 관례로 볼 때 석연치 않은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송서 예지에 따르면 손권이 건업에 형(손책)의 장사환왕부를 주작교 남쪽에 세웠다. 손권이 병에 걸리자, 태자가 所禱(병이 낫기를 기도함)하였는데, 바로 손책의 사당이다.

손책의 아들 손소(孫紹)는 손권이 황제가 된 뒤 처음에 아버지처럼 오후(吳侯)에 봉해졌다가 이후 상우후(上虞侯)로 바뀌었다. 오후라고 하면 국명인 '오'와 겹치기 때문에 바꾼 듯하다. 아무리 정통성 때문이라도 조카를 왕작도 아니고 겨우 후작에 봉한 것은 푸대접이라고 손권이 까이게 되었다. 손소의 아들 손봉(孫奉)은 상우후를 세습했으나, 손호 때 제위에 오를 거라는 뜬소문 때문에 주살당하고 만다.

3 평가

손책은 전투에서 패배한 일이 없었고 짧은 시간안에 강동을 제패하였다. 그래서 소패왕(小覇王)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패왕(覇王) 항우에 걸맞는 용맹을 지녔다는 뜻이다.

동오 패권주의를 펼치며 강동을 정벌하고 기틀을 다지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 잔인함 때문에 강동의 호족들을 완전히 복속시키지 못한 채 일찍 죽어버렸고, 이 점은 후대에 길이길이 이어져서 손가의 발목을 잡게 된다.

요즘 코에이나 일본식 창작물이 대세가 되다 보니 장군으로써의 능력만 부각되는데 이는 여러면에서 위험한 생각이다. 그가 강동을 정벌하면서 상대한 적들은 큰 도적떼 수준으로 추정되는 안습의 아이콘 엄백호, 전투 경험 없는 문관이나 낙하산 인사, 관료 + 군벌이지만 원술에게 두들겨 맞고 힘이 빠졌거나, 별 볼일 없는 토착 호족으로, 속된 말로 양민학살에 가까운 상대들이다.

군사적 실적을 부각시키는 것도 좋지만 지나치면 오히려 손책의 능력을 깎아내릴 수 있다. 더구나 피해가 지나치게 커서 이상하다고는 하지만 진등에게 대패한 기록도 있다.[11] 그래서 현재 '오오 소패왕!'하는 것처럼 대단한 능력자는 아니었다는 의견도 있다. 하필이면 손책의 아버지 손견이 끗발 날리던 군벌이라서 더 그런 경향이 있는 듯.

사실 조정의 붕괴로 지방 통제력이 박살나면서 군벌들이 충돌하면서 완전히 난장판이 되어가고 있는데 비해서 강동은 커다란 충돌없이, 고만고만한 지방 호족들과 지방관들이 협조하여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손책이 오기 전까지는 당시 중국 전토에서는 평화로운 편에 드는 지역이었다고 봐도 무방한 셈.

즉 손책은 평화로운 강동 지방을 꿀물의 명령으로 닥치고 유린하는 동네 깡패다. 엄여를 대뜸 죽이는거야 그렇다 쳐도(?), 명문장가 고대를 쳐죽이는 스토리 등에서 열등감과 시기심 많고 잔인한 손책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물론 그럼에도 인정해야할 것은 손책의 리더십 덕목이다. 손책이 정말 돋보이는 부분은 군사적 능력이 아니라 패권가, 전략가적 자질과 리더로서의 대국적인 안목이다. 그는 강동 통합의 기치를 내걸고 강동의 한 군소 호족에 불과한 손씨의 깃발 아래 내노라하는 호족과 무장들을 뭉치게 했고. 진작부터 서주와 허창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아 손오의 한계를 파악하고 빠른 중앙집권화를 위해 외정을 통한 친위 세력 육성과 호족들의 세력 약화를 기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과정에서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잔혹했던게 흠이었지만. 궁예?

그가 제안한 허창 기습 작전은 협천자(挾天子)의 이점과 한황실의 가진 권위에 대해서도 인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데[12] 성공 여부는 차치하고 한왕실의 권위를 헤아리고 이용한 사람도 당대에 몇 안되며 이중 창업에 성공한 사람이 조조유비 정도니 과연 삼국의 하나를 이룰 수 있을 만하다.

아버지를 잃고 절박한 상황에서 원술같은 소인배에게 고개를 숙여가며 후일을 도모한 불굴의 의지, 태사자와의 일화나 부유한 호족 출신인 주유를 평생 손가에 헌신한 충신으로 만든데서 엿보이는 용인술[13] 등 분명이 패업을 이룰 자질이 있는 인물이었다.

종합하면 손책은 용인술과 리더쉽, 대국적 안목 등의 덕목을 갖춘 인물로 호족들을 억누르고 조금씩 중앙집권화를 이룩하기 위한 장기적인 플랜을 갖고 있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가히 대업을 이룰 인물이지만, 그 시도가 너무 급하고 잔혹해서 자신에게 화로 돌아왔다. 손책이 호족들을 다 누르지 못하고 황천길을 가게 되면서, 이후 손오는 큰 싸움마다 단결되지 못하고 약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오죽하면 삼국지 팬들 사이에서는 주유와 함께 이른 나이에 사망하지 않고 오래 살았다면 아쉬워하기도 하는 오나라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성격이 동생 손권보다 급하고 잔인한 면이 있었기에 오래 살았다면 그 성격 때문에 손권 대신 손책의 말년 실책이 더 부각되었을지도 모른다는 평가도 있다.

당대의 영웅으로 평가되었으며 상기했다시피 항우의 현신처럼 여겨지기도 했는데, 유독 조조의 군사인 곽가만은 그의 인물됨을 폄하하며 말하길, '제 성질을 못 이겨 자멸할 것이다.'라고 하였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손책이 심하게 일찍 죽는 바람에 동오의 손씨 가문은 다른 군벌들과는 달리 군벌로서 제대로 완성시키지 못한 채 손권이 그 상태로 그대로 끌고 가야만 했다. 이랬기 때문에 오나라는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군주가 토호들을 완벽하게 제압하지 못해서 툭하면 토호들끼리 밥그릇 싸움을 하게 되고 막상 전투를 하게 되면 토호가 삐질까봐 걱정하게 되었다. 이것은 엄청 큰 것으로 위나라나 촉나라가 하지 않아도 되는 근심거리 하나가 오나라에 추가된 것으로 이 근심거리 때문에 일을 제대로 망친 게 하나 있다. 그것이 합비 공방전이다. 유표 역시 토호들을 하나로 규합시킬 능력이 아예 없는 위인이였으나 유표의 경우는 채모가 유표의 세력을 하나로 규합시키는 데에 성공했으므로 이러한 문제점이 없었다. 하지만 오나라를 하나로 규합시킬 손책이 일찍 죽었기 때문에 오나라는 시종일관 규합이 되지 않은 상태 그대로 끌고나가야만 했고 이는 이궁의 변과 아주 연관성이 없다고 보기 힘들다.

4 기타

손책의 딸 손씨육손의 아내가 되는데 이것은 손책이 육강을 죽인 이래로 호족 육씨와 원수 관계가 된 것을 봉합하려는 정략결혼의 의미가 강하다. 하지만 육손의 최후로 미루어 본다면 이 정략결혼은 100% 임시 땜빵일 뿐이였다. 원한 → 화해 → 숙청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원수 관계가 임시 땜빵이 아닌 실제 봉합했다면 육손이 숙청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정사에서 그의 별명이 손랑(孫郞)인데 이는 손씨 성을 가진 엄청 잘생긴 남자를 뜻한다.[14] 삼국지 전체에 등장한 모든 남자 장수들 중 친구인 주유와 더불어 수위권을 다투는 수준의 미남이였다.

동갑이었던 주유와는 매우 절친한 사이. 미녀 자매인 대교소교를 얻었을 때도 대교를 아내로 삼으면서, 소교는 주유의 아내로 삼게 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이 부분이 매우 간략하게 되어 있지만, 청춘남녀의 사랑이 느껴지는 일화라서 그런지 여러 경극으로 로맨틱하게 각색돼서 널리 퍼졌다. 참고로 경극에서는 어쩐지 엄백호가 대교와 소교를 노리는 악역을 맡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정사의 기록을 보면 약탈혼이며, 정실로 삼은 것도 아닌 으로 삼았다. 그리고 손책이 1년 뒤 요절했기에 둘 사이에 자식은 없다. 육손의 아내가 된 손씨는 대교가 낳은 자식이 아니다.

그 외 기타 트리비아로, 바둑사에 남는 인물 중 하나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바둑서적인 '망우청락집'에 그와 여범이 둔 기보가 남아있다. 현존하는 기보 중 가장 오래 된 기록이다. 다만 이에 대해선 진위성이 의심된다는 의견도 있다.#

5 미디어 믹스

  1. 연의에서는 원술에게 전국옥새를 담보로 하여 군사를 받았고 황개 등 옛 가신들이 합류한다.
  2. 연의에서는 이 부분을 더욱 부풀려서 1차로 말 추격전, 2차로 칼&창싸움, 3차로 주먹다짐(!)까지 세세하게 설명했다. 4차로 공성전 당시 싸움 중에 뺏었던 태사자의 수극과 손책의 투구를 내걸어 욕배틀을 하기도 한다.
  3. 조조의 공격으로 치소인 팽성국과 하비국을 떠났다.
  4. 연의에서의 허구로 번능은 손책의 고함 소리에 놀라 말에서 떨어져 죽었고 우미는 손책이 옆구리에 끼우고 끌고 오다가 질식해 죽었다.
  5. 연의에서는 이 역시 앞서 설명한 옥새 건을 들먹이면서 "옥새는 왜 안 돌려주고 역적짓을 하냐"라며 원술을 꾸짖는 내용으로 바꿨다.
  6. 배송지는 장굉이 글을 더 잘 쓰니 장굉이 지은 것이라 여겼다.
  7. 역적 편에 설 수 없다는 간단한 논리도 있었지만, 원술보다 조조가 나중에 성공할 확률이 높았으므로 잘 보이기 위해 그랬을 확률이 높다.
  8. 손책전에서는 이렇게 적혀 있지만 유훈은 예전에 원술이 여강태수에 임명한 사람이다. 원술의 휘하 장수들은 애초부터 유훈에게 항복한 것으로 추정된다.
  9. 연의에서는 조조가 손책이 급속도로 동오를 평정하자 그를 두고 "사자 새끼와 같구나. 그와는 젖을 주지 않고 싸움을 피해야겠다."라고 말한다.
  10. 물론 사마사의 양자로 사마유가 있었지만 그는 원래 사마소의 차남이자 사마염의 동생이다.
  11. 그러나 손책전과 여포전의 기록이 다르게 써져 있기 때문에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12. 그런데 정작 자신이 중앙에서 보낸 문관들을 죽였다는 점은 참 특이한 점.
  13. 참고로 삼고초려 일화나 '후계자의 자질이 모자라면 님이 대신 주공 해 주시오' 운운하는 일화는 손책도 가지고 있다. 동생은 없는데 형은 있네.
  14. 참고로 주유는 연의에서 미주랑(美周郞)이라는 별명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