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일반적인 의미
- 場所 : 어떤 일이 이루어지거나 일어나는 곳.
- 長笑 : 길게 웃음. 말 그대로 "껄껄껄껄~" 하며 길게 웃는 것을 말하는데, 무협지에서는 웃음에 내공을 실어 상대의 기를 죽이기 위한 용도로 쓰이기도 한다. 혹은 상대의 말에 대한 반박이 얼른 떠오르지 않을 때 시간을 때우기 위한 목적으로도 가끔 이용된다.[1]
2 삼국시대 오나라의 인물
『오서』 「장고제갈보전(張顧諸葛步傳)」 | |||
장소 | 고옹 | 제갈근 | 보즐 |
張昭
(156년 ~ 236년)
삼국시대 오나라의 인물로 삼국지의 등장인물. 오의 문신(文臣)으로 자는 자포(子布). 장승과 장휴의 아버지.
생몰년도에서 알 수 있듯이 굉장히 장수하여 80년을 산 인물이다.[2] 황건의 난 때 이미 성인이었으나 제갈량이 죽은 후에도 살아 있었다.
2.1 생애
2.1.1 초기 생애
팽성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고, 예서에 뛰어났다고 한다. 조욱, 왕랑과 함께 명성을 날리고 친교를 맺었다. 서주자사 도겸이 무재로 천거했으나, 응하지 않았고, 도겸은 자신을 가벼이 여겼다고 여겨 잡아들였다. 조욱이 힘을 다해 구출하여 석방되었다.
이후 황건의 난을 피해 강남으로 이주하였다.
2.1.2 손책 휘하에서
손책은 장소를 매우 신임하였고 그에게 정사의 일체를 맡겼다고 한다. 그 뒤 그를 중부라고 칭할 만하다 했다. 원술이 칭제하자 손책은 원술과 절교했는데 이 때 원술에게 보내는 절교 격문을 작성한 것이 장소였다. 사실 장소는 이 당시의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빠르게 간파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원술이 칭제를 하자 장소는 손책에게 원술이 대의명분과는 정반대로 가려는 행동을 저지시키기 위한 격문을 작성하게 했다. 다음은 그 격문의 내용이다. 손책은 사실상 받아쓰기만 했고 내용의 큰 틀은 장소가 만들어줬다.[3]
"은(殷)나라 탕(湯)왕이 하(夏)나라 걸(桀)왕을 토벌할 때 '하나라는 죄가 많다' 하였소. 주나라 무(武)왕이 은나라 주(紂)왕을 정벌할 때는 '은나라는 징벌이 너무 무겁다' 하였소이다. 이 두사람이 아무리 성스러운 덕이 있다 할지라도 가령 그때 걸과 주에게 도리를 잃은 과오가 없었더라면 그들을 핍박해 천하를 취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오. 황제께서는 천하에 악한 일을 한 바가 없소이다. 단지 어리고 세력이 약해 강한 신하에 의해 협박을 받고 있는 것으로 탕왕과 무왕의 시절과는 사정이 다르오. 비록 동탁이 탐욕스럽고 도리에 어긋나고 교만하고 황실을 업신여기고 욕심이 끝이 없었으나 그조차도 황제를 폐립한 후 스스로 자립하는 지경에까지 이르지는 못했소.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천하의 사람들이 다 한마음으로 그를 미워했는데 항차 그의 잘못을 본받고 나아가 더 심한 짓을 하려는 것이오? 또 듣기로는 어린 군주가 지혜롭고 총명해 이미 덕을 이룬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오. 천하 사람들이 비록 천자께 은혜를 입은 바 없음에도 마음을 천자께 돌리고 있소이다. 사군께서는 5대에 걸쳐 재상의 직을 역임하고 재상으로서 한나라를 보필하여 그 영예와 은총의 크기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바가 아니오. 마땅히 충성을 다하고 절개를 지켜 왕실에 보답함으로써 주공 단(旦)과 소공 석(奭)의 아름다운 전례를 밟기를 바라는 것이 사군을 따르는 자들이 소망하는 바이오. 요즘 사군께서는 사람들이 도참과 점술에 의거해 떠드는 말에 혹해 망령된 글을 끌어다 붙이면서 참으로 아첨하는 말만 아름답게 여기고 계책의 성공과 실패를 고려하지 않고 있소이다. 성패는 예나 지금이나 신중을 기해야 하는 바이거늘 어찌 깊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있겠소? 충성스러운 말은 귀에 거슬리고 논박하는 것은 증오를 불러 일으키는 법이나 진실로 사군의 밝음에 도움이 된다면 감히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소이다. |
손책이 임종 시에는 장소에게 손권을 잘 보살펴 달라고 했을 뿐만 아니라 손권의 능력이 못하다면 그가 직접 나라를 취하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이는 유비가 제갈량에게 한 것과 같은데 그만큼 손책이 장소의 능력을 믿고 신뢰했다는 것을 보여준다.[4]
2.1.3 손권 휘하에서
그는 손권을 모시면서도 특유의 신중함으로 국사가 경솔히 이루어지는 것을 막음으로써 손권의 지배 기반을 든든히 하였다. 손권 역시 장소를 중히 여겨 그가 출정하거나 떠나는 일이 있으면 장소를 항상 후방에 남겨 그에게 정사 일체를 맡겼다고 한다.
그런데 208년에 조조가 형주를 함락하고 강동 땅을 노리자 주화파의 우두머리가 되어 그에게 대항하는 것이 무익한 일임을 들어 항복을 주장했다. 손권은 이러한 주장에 굴복하는 것을 내켜하지 않았고 자리를 떠났다. 그때 노숙이 아무말 없다가 손권을 따라가 넌지시 그들 모두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암시함으로써 신임을 얻었고 노숙이 파양에서 불러들인 주유가 적극적으로 항전을 주장한 뒤 적벽대전에서 조조군을 격파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항복을 주장하던 장소의 입지가 상당히 축소됐고, 더 극단적으로 평가하면 숙청만 피했을 뿐 장소의 정치 커리어는 사실상 끝나게 된다. [5]
다만 아예 뒷전으로 밀려난 것은 아니었다. 이후로도 활동했던 기록이 꾸준히 있으며, 적벽의 대승 직후 손권이 합비로 진군한 것에 맞추어 장소가 서주로 진군하기도 했다. 장소가 군 통솔을 했다고?!
그 이후로는 2인자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또한 손권도 장소가 이랬던 것을 내심 언짢게 생각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상황이 굉장히 의미심장한 게 장소의 나이가 손권의 아버지인 손견과 동갑내기라는 점이다.
221년에 위나라에서 사자 형정을 보내어 손권을 오왕에 봉했을 때 형정이 궁궐 문에 들어서고도 수레에서 내리지 않으므로, 장소는 형정의 무례함을 꾸짖고 협박하자 형정은 수레에서 곧 내렸다고 한다.
손권이 황제를 칭하게 되자 장소가 손권에게 축하하러 왔는데 손권은 장소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만약 장공의 계책같이 했다면, 지금쯤 이미 밥이나 빌어먹고 있을 것이오.”라고 쏘아붙였고, 장소는 땀을 흘리면서 그 자리에서 엎드렸다고 한다.
또한 승상을 새로 임명할 상황이 되어 사람들 모두 장소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는데 손권은 "내가 어찌 자포에게 애정을 가지겠소? 승상의 일이 번잡하지만 공은 성품이 강직하여 말하는 바를 따르지 않아 원한과 허물이 장차 생겨나는데, 이를 더할 수는 없소”라고 말하면서 고옹을 등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해 강표전에서 말하기를 손권이 장소가 항복을 주장하는 일로 그를 꺼렸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6]
또한 육손과 함께 주유, 노숙, 여몽에 대해 이야기 했을 때[7] 장소와 진송이 사신을 보내 격문을 받아 영접해야 한다고 같이 말했으나 노숙이 반대하여 이기니 통쾌했다하면서 장소의 이름을 찍어서 언급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손권의 측근으로 남아 그를 보좌했는데, 사람됨이 강직하고 엄격했기 때문에 손권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런데 또한 손권은 그를 꺼리기도 하였는데, 장소의 사람이 꼬장꼬장해서 군주인 손권 앞에서도 직언을 서슴치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의 회화는 주로 말싸움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영감님이 뭘 믿고 그러는지 몰라도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기 때문에 그랬던 모양. 번오기는 그러다 죽었는데…
마침 이에 관한 일화가 있다. 공손연이 오의 번국이 되기를 청했다. 손권은 장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신 장미와 허안을 요동에 보내 공손연을 연왕에 임명하게 했다. 화가 난 장소는 병을 핑계로 조회에 나오지 않았고, 손권도 화가나서 장소 집 문을 흙으로 막았다. 그런데 장소의 예측대로 공손연은 장미와 허안을 죽였다. 이후 손권이 장소에게 사과도 하고 구슬려보기도 했지만 영감이 단단히 삐쳤는지 묵묵부답으로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결국 손권이 집에 불을 지르면 나오겠지 하고 생각해서 그렇게 했더니(!) 그래도 끝까지 장소는 집을 나서지 않아서 결국은 아들이 장소를 업고 나왔다고 한다.영감님이 배짱도 좋아
어쨌든 그렇게나 손권과 대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숙청되지 않은 걸로 봐서는 제대로 된 애증 관계였는 듯. 그 대신인지 이궁의 변으로 집안이 박살나기는 했지만.
2.2 기타
손오세력의 대표적인 화친파로서 주전파에 대비해 경제발전을 주도했는데, 이때 고구려, 왜 등에도 사신과 상인을 파견한 기록이 있다.
그의 증손자로 동진에서 사마예의 참군을 지낸 장개(張闓)가 있다.
2.3 미디어 믹스
- 장소/기타 창작물 항목 참조.
3 삼국시대 촉나라의 인물
張紹
생몰년도 미상
삼국시대 촉한의 인물. 촉한의 장수로 명장인 장비의 둘째 아들이자 장포의 남동생.
형이 아버지보다도 일찍 죽었으므로[8] 222년에 장비가 암살당했을 때 아버지의 뒤를 이었으며, 관직은 시중상서복야로 황제의 하문에 응대해 멀리 외출할 때 수행하는 측근이 되었다.
삼국지연의에서 장비가 사망하자 낭중을 주관했다고 하며, 촉한이 오를 공격하자 형을 대신해 낭중을 지키게 되었다. 이후에는 벼슬이 상서시중으로 촉에서 내정을 담당하다가 유선이 등애에게 항복할 때 초주, 등양과 함께 촉한의 옥새를 들고 같이 나갔다고 한다.
서진에 항복한 이후에는 벼슬이 익주별가가 되었다. 등애의 명령으로 장준과 함께 파견되어 각 군의 군민들을 위무하면서 강유에게도 파견되면서 항복하기를 권한 것은 익주별가 여초가 한 일인데, 삼국지연의에서는 장준과 함께 이 일을 한 것이 장소로 나온다.
3.1 미디어 믹스
삼국지 11 |
삼국지 12,13 |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평범한 문관 1 정도의 스탯으로 나오며, 일부 작품에서는 장비 사후 장팔사모를 아이템으로 갖고 있다. 보통은 장비→장포→장준으로 전승된다. 보통 아무리 듣보잡이어도 아비가 맹장이면 통솔과 무력이, 책사면 지력과 정치력이 그 후광을 받아 60~70대 정도는 찍기 마련인데 장소는 유독 그런 것도 없다. 옥새를 들고 나간 것 때문에 매국노로 찍혀 코에이가 일부러 하향 조정을 한 건지도 모르겠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7/12/30/60. 특기도 없다. 내정용으로나 굴리자.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7/32/36/63/46으로 능력치가 바닥인 것도 안습인데 특기가 아예 없다. 유선조차도 특기가 있는데…
삼국지 11의 일러스트는 매우 후덕하다. 능력치는 8/12/31/59/52에 역시 특기가 없다(…).
삼국지12에서 나온 그의 일러스트는 딱 장비가 문관 옷을 입은 모습. 일러스트는 위나라에 항복할 때 옥새를 들고 나온 모습을 묘사했다. 생긴 것은 갑옷만 입으면 무력 최소 90은 찍어줘야 할 듯한 험악한 모습이지만 무력은 낮다.
삼국전투기에서는 하레로 등장한다. 참고로 장성채는 구우.
4 후한 말의 인물
張昭
생몰년도 미상
후한 말의 인물.
하내군 수무현 출신으로 형제로는 형인 장범, 장승이 있으며, 한나라에서 조부 장연은 사도, 아버지 장연은 태위를 지냈다.
동탁이 정권을 잡자 그 당시에 의랑이 되었는데, 형인 장승이 동탁을 주살하기 위해 군사를 모으려고 할 때 때마침 장안으로부터 오게 돼서 장승에게 충고했는데, 장승이 가진 무리들이 그 수가 적어 동탁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으면서 하루 아침의 계책으로 밭을 가는 농민들을 이끌고 싸워 평소에 훈련이 없었거나 연습을 하지 않아 성공하기가 어렵다는 문제점을 지적했다.
또한 동탁의 문제점도 얘기해 동탁이 군사들을 고달프게 하면서 도의를 무시하기 때문에 오래 지속될 수 없어 귀순하는 자들 중에서 선택해 때를 기다려 행동하는 것이 낫다면서 그런 이후에 생각대로 따르라고 했다.
비록 동탁이 죽기까지는 시간이 걸렸으나 결국 동탁은 장소가 장승에게 충고한 것 그대로 여포에게 살해당해 그의 식견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줬다.- ↑ 삼국지연의에서는 적벽대전 직전 제갈량이 오나라의 장소와 말싸움을 할 때 사용한 전력이 있는데 아무래도 곧 이어질 일장연설에 대비한 준비 시간을 갖기 위해 사용한 것 같다.
- ↑ 단 오나라 최고 장수 무장인 여대에는 미치지 못하는데, 그는 놀랍게도 96세까지 살았다고 정사에 기록되어 있다.
- ↑ 장굉이 적었다는 기록도 있는데 배송지는 "장소는 비록 명망이 무겁긴 하나, 장굉의 문장만 못하다."라며 이 글은 잘 썼으니 장굉이 적었다고 추정했다.
- ↑ 연의에서는 이를 "안의 일은 장소에게 묻고 밖의 일은 주유에게 물어라"라고 말한 것으로 각색한다.
- ↑ 다만 장소의 의견은 가신의 입장에서 주군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긴 주장이었다는 의견도 있다. 전력 차이는 물론, 항복이 한심하다고 욕하기에는 당시 조조의 입장이 너무나도 선명했다. 항복한 장수와 유종은 살아남았지만, 항전한 원소의 자식들은 몰살되었다. 전력차가 명백한 상황에서 손권의 후견인 역할을 맡은 장소는 젊은 주군이 그런꼴을 당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을 여지가 있다. 문제는 손권은 단순히 일신의 안전만을 생각하기보단 더 큰 뜻을 품고 있었다는 거지만.
- ↑ 단 배송지는 이를 두고 "만약 항복을 했었더라면 삼국지 시대를 거칠 필요없이 나라가 하나로 통일 되었을 테니 좋은 일 아닌가? 장소의 계책은 큰 관점에서 보면 좋은 일이다."라고 하였다.
- ↑ 이 대화는 여몽전에 있다.
- ↑ 삼국지연의에서는 장포가 남정북벌에서 종횡무진 활약하지만 정사 삼국지에서 장포는 장비보다 앞서 요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