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야 시로지로

茶屋四郎次郎

전국시대에도 시대 초기까지 조정의 포목점을 세습한 교토의 거상이 쓰는 세습명이자 상호명. 특별한 언급 없이 차야 시로지로라고 하면 대개 초대인 키요노부를 가리킨다.

원래 오가사와라 가문을 섬기던 나카지마(中島) 가문이 다이에이 연간에 포목상을 시작한 것이 그 시초이며, 상호명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차야 아키노부의 저택에 주로 차를 마시기 위해 들렀던 것에 유래하여 찻집은 신마치도오리 타코야쿠지에 세워 160년에 걸쳐서 본거지로 삼았다.

아키노부 때부터 차야로 불렸지만 차야 시로지로라는 세습명을 본격적으로 사용한 것은 아키노부의 아들인 키요노부 때부터 해당하며, 에도 시대 초기에 슈인젠 제도를 통해 그 혜택을 받거나 대관 역할을 하는 등 많은 부를 쌓았다.

쇄국 정책 이후에는 그 특권을 잃어버리면서 포목사, 생사 등의 판매를 하다가 1800년에 납품 가격을 두고 포목 어용 금지 처분을 받았으며, 1807년에 금지 처분이 풀렸지만 부진하게 되면서 메이지 유신 이후에 폐업했다.

1 당주

2 기타

  • 헤이세이 연간인 현대에는 이들의 후손인 나카지마 츠네오라는 사람이 17번째 차야 시로지로의 계승자라고 한다.
  • 도쿄복지대학의 프론티어 정신은 미래를 여는 개척자 정신으로 차야 시로지로가 해외 무역을 한 것 때문에 휘장에 그려져 있다.

2.1 창작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