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물정보
이름 | 忠常 |
출생 | ?~? |
나라 | 백제->신라 |
2 개요
중상(仲常)이라고도 불렸다. 삼국시대 백제 말기의 장군이자 정치가. 관직은 백제 최고관직인 좌평이다. 말년에 신라에 귀부해서 공을 세운 것 덕분에 신라 사서들에 기록이 많이 남았었는지, 삼국사기에 나오는 백제 인물 중 왕들을 제외하곤 의외로 가장 기록이 많은 인물중 하나다. 열전까지 따로 작성한 계백보다 기록이 많다. 그래봤자 미미한 수준 (그만큼 백제사는 사료가 너무나 부족하다. 일본서기라도 없었다면 어쩔뻔...)
3 백제 8명의 포로와 김품석 부부 시신 교환
648년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때 옥문곡 전투에서 백제 장군 의직이 김유신에게 백제가 패하여 의직의 부하장수 8명이 김유신에게 포로로 붙잡혔다. 이에 신라는 백제에 사신을 보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의 군주(軍主) 품석김품석과 그의 아내 김씨고타소의 뼈가 너의 나라 옥중에 묻혀 있고, 지금 너희의 부장 여덟 명이 나에게 잡혀 있어 엎드려 살려달라고 하였다. 나는 여우나 표범도 죽을 때에는 고향으로 머리를 돌린다는 말을 생각하여 차마 죽이지 못하고 있다. 이제 그대가 죽은 두 사람의 뼈를 보내 산 여덟 사람과 바꿀 수 있는가?” 이에 좌평 충상이 의자왕에게 아뢰었다.
“신라인의 해골을 남겨 두어도 이로울 바가 없으니 보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만약 신라인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 우리의 여덟 명을 보내지 않는다면 잘못이 저쪽에 있고, 곧음이 우리 쪽에 있으니 어찌 걱정할 바가 있겠습니까?”
이에 김품석 부부의 뼈를 파내어 관에 넣어 신라에 보냈다. 이에 김유신은 “한 잎이 떨어진다고 하여 무성한 수풀이 줄어들지 않으며, 한 티끌이 쌓인다고 하여 큰 산이 보태지는 법이 아니다.”니네 따위는 죽여봤자 낙엽이나 먼지같이 존재감이 없다. 하고는 포로로 잡힌 여덟 사람이 살아 돌아가도록 허락하였다.
4 황산벌 전투
660년 음력 7월, 달솔인 계백, 상영 등과 함께 죽음을 각오한 오천 결사대를 이끌고 황산벌에 진을 치고 김유신과 전투를 벌였으나 결국 패하자 충상, 상영등 20여명의 부하들과 함께 김유신에게 포로로 붙잡혔다가 이내 항복하였다. 곧이어 백제 멸망 직후 일길찬(7등)의 관등을 받고 총관의 직책에 보임되었다.
5 백제 부흥군 토벌
뒤이어 아찬(6품)의 관직으로 승진되었다. 이는 6두품의 관직중 더이상 오를수 없는 최고위 관직이다. 661년 음력 2월 백제부흥군이 사비성을 공격해오자 구원하기 위해 이찬 김품일, 잡찬 김문왕, 대아찬 김양도 등과 함께 출전하였다. 이때 충상은 백제인 출신으로 길잡이 역할을 하기 위해 간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귀실복신은 이들 진영이 정돈되지 않았음을 바라보고 갑자기 기습하여 패하였고 전열을 가다듬고 두량윤성으로 나아가 한달 엿새동안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또한 반골양에서 백제부흥군과 재차 싸웠으나 또다시 패하고 말았다. 이때 병력손실은 적었으나 병기와 짐수레를 잃어버린 것이 매우 많았다고 한다. 이에 패전의 책임을 물어 벌하였다고 한다. 함께 벌받은 김품일, 김양도등이 이때 벌을 받고 다시 복직하여 활약한 기록이 있으나 충상은 그뒤에도 기록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쓸쓸한 말년을 보낸것으로 보인다.
6 역사적 평가
의자왕때부터 좌평의 관직에 올라 황산벌전투라는 굵직한 전투에도 출전하였고 신라에 투항하여 아찬이라는 6두품 최고직에도 올랐으나 결국 백제부흥군 토벌에 실패하여 관직에서 물러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인물인데 그나마 삼국사기에 여러번 등장하는 백제인물임에도 인지도가 턱없이 낮기에 처음으로 작성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