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

김유신이라는 이름의 야구선수에 대해서는 김유신(야구선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김유신이라는 이름의 드라마 선덕여왕의 출연 인물에 대해서는 김유신(선덕여왕)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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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 김유신 표준영정 인용 오류: <ref></code> 태그를 닫는 <code></ref> 태그가 없습니다의 김유신 사당인 길상사에 소장되어 있다. 이 그림 역시 장우성 화백 작품. 이 영정을 그릴 때 김해 김씨 남성 50여명의 얼굴을 보고 이를 기준으로 그렸다고 한다.</ref>
시호흥무대왕(興武大王)
김(金)
유신(庾信)
생몰년도595년(진평왕 건복 12년) ~ 673년(문무왕 13년) 7월 1일
국적신라
관직태대각간, 대장군
본관김해김씨(金海金氏)

1 소개

신라의 통일을 이끈 불세출의 명장

군과 연합해 고구려백제를 멸망시킨 다음 당군을 축출해 한강 이북의 영토를 확보해냈다. 세운 공이 공이니만큼 모르는 사람이 없다.

장군으로 유명하지만 동시에 재상이면서 권신이기도 했다. 매우 유명한 역사인물인만큼 그를 빼놓고서는 삼국통일전쟁이나 신라 중대의 역사를 이야기할 수 없다. 어쨌든 신라의 삼한일통이라는 큰 사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인만큼 넓게 보면 한국사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 중 한 명.

2 출생

김씨지만 신라의 왕성이었던 경주 김씨가 아니라 신김씨로 불린 금관국 망국의 왕족 김해 김씨로, 김서현의 아들이다. 증조부김해 금관국의 마지막 왕인 구해왕이며, 금관국의 시조인 수로왕의 13대손이다. 신라가 가야에 대해 실시한 유화정책의 효과를 엿볼 수 있는 대목으로, 그의 신분은 가야계 진골이다. 어머니는 진흥왕의 동생 숙흘종의 딸 만명부인으로 성골이었는데, 가야 왕실의 후손 김서현과 사랑했지만 두 사람의 신분 차이로 주위에서 결혼을 반대하자 사랑의 도피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어릴 때부터 관심 좀 받았을 듯 하다

결혼에 얽힌 이야기를 근거로 가야계인 탓에 차별받았다고 유추하는 주장도 있으나 근거는 명확치 않다. 김서현은 애초에 진골출신으로, 성골만명부인과는 신분 차이가 있었다. 신라 역시 부모 중에 낮은 쪽의 신분을 자식이 물려받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만명부인의 부모가 미래에 태어날 외손자의 신분을 생각해서라도 결혼을 반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2] 때문에 단지 가야계였기 때문에 차별받았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설화에 따르면 어머니가 2년을 임신했다고 한다.

이름유신이라고 지은 이유까지 김유신 열전에 나와 있는데, 김서현의 말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내가 경진(庚辰)일 밤 길몽을 꾸어 이 아이를 얻었으니 마땅히 이로써 이름을 지어야 하오. 그렇지만 <예기(禮記)>에 따르면 날짜로써 이름을 짓지는 않는다[3]고 하던데, '경(庚)'자는 '유(庾)'자와 서로 비슷하며 '진(辰)'과 '신(信)'은 소리가 서로 가깝고 옛 현인 중에 유신(庾信, 512~580)[4]이라는 이름도 있으니 어찌 그렇게 이름 짓지 않겠소? -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 상

앞서서도 가야계였던 김유신 차별설에 대해서 언급되었지만 이에 대해서는 실질적인 근거는 없다. 최고의 관직에 오른 것도 모자라 기존에 없던 더 높은 관직을 특별히 만들어 승진했던 김유신이 차별을 받았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죽어서도 김유신은 김해 김씨임에도 왕으로 추존되어 명목상 경주 김씨 신라왕들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김유신 혈통 자체를 보면 상당히 생각할 거리가 많다. 일단 그의 외할아버지가 진흥왕의 동생이고, 그의 작은 할아버지가 노리부인데 노리부는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 세 명의 왕을 모셨고, 진지왕 때는 백제 대군을 격파했다. 그리고 진평왕 때는 숙청당하지 않고, 최상의 자리까지 올랐다는 점에서 과연 김유신이 대놓고 차별받았을 지 의문이다. 만약 그를 모욕한다는 것은 그의 가야 혈통 이전에 진흥왕의 혈통을 건들게 되니 말이다. 혹시 아는 분은 추가바람

3 청년기

609년, 15살 때 화랑으로 임관했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15대 풍월주가 김유신이다. 다만 화랑세기는 신빙성이 떨어지는 자료다.

이후 611년, 17살 때 화랑의 우두머리인 국선으로 승격되는데, 이 시기동안의 유명한 일화로 천관녀에 대한 일화가 있다. 고려 시대의 문인 이인로의 《파한집(破閑集)》에 실려 있는 이야기이다.

  • 김유신은 기생인 천관녀를 사랑해 그녀와 교제했는데, 어느 날 어머니 만명부인이 그 꼴을 보고는 "나는 이제 늙었다. 니가 커서 공을 세워 왕과 부모에게 기쁨을 안겨줄 날을 밤 낮으로 고대해왔는데 어찌 너는 술과 여자나 쫓아다니느냐"라고 울면서 말했다고 한다. 김유신은 그 뒤 자신의 행동을 부끄러워 해서 다시 그 집에 들르지 않기로 맹세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술에 취해 집에 돌아가던 중, 말이 버릇대로 그녀의 집 앞에 멈춰서자 정신을 차린 김유신은 말의 목을 그대로 베었다고 한다. 말 못하는 말만 불쌍하다 얼마나 뺀질나게 다녔으면 암소리도 안하면 천관이 집에 갔을까? 오늘날 우리나라 정치인들과 다름이 없다 결론적으로 무조건 잘되면 지탓 안되면 남탓 아님 밑의사람 탓으로 돌리는 못돼먹은 짓거리다다른 설화와 조합하면 그 말이 다름아닌 용마였다고 한다! 천관녀는 그의 무정함을 원망하며 《원사(怨詞)》를 지었다고 한다. 후에 김유신도 나름의 죄책감을 느꼈는지 전설에는 삼국을 통일한 후에 천관녀를 찾았지만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던터라 그는 천관사라는 절을 지어 그녀를 위로했다고. 이 천관사지는 현재에도 경주에 남아있다. 말한테나 미안해해라

이 이야기는 네이버 한국만화거장전에서 만화가 백성민이 만화로 그려냈다.#
또한 이는 팬텀 하록의 수토수노툰에도 나와 있다. 이때 김유신이 말의 목을 벨때의 대사가 명대사. 말을 베며 "네탓이요!!"[5]인용 오류: <ref></code> 태그를 닫는 <code></ref> 태그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자료들은 공식 사전 자료로 떡하니 올라와 있다. 천관사, 천관녀설화. 앞의 주석에서는 동명이인 천관을 예로 들어 이름의 뜻만으로 천관녀의 신분을 추정하는 것은 무릿수라 하는데 중요한 것은 천관녀가 야사에만 나오는 가공의 인물일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즉, 설화를 토씨 하나까지 전부 사실로 받아들이려는 자세는 무리한 비약 만큼이나 섣부른 주장이다. 천관녀가 신녀(神女)일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은 역사스페셜 제 103회 "김유신은 왜 천관녀를 버렸나"편을 통해 알려졌고 그 이후로 사극의 소재가 되었다. 상당히 좋은 컨텐츠 개발의 한 예인데 역사가 아닌 설화를 가지고 실제 운운하며 이건 틀리다 못 박는 것 만큼 답답한 노릇도 없다.</ref>[6]

그 외에 고구려의 자객이 김유신을 죽이러 화랑으로 위장했는데 나림, 혈례, 골화라는 세 여신이 나타나서 이를 알려줘 목숨을 건졌다는 전설도 있다. 이 전설에 따르면 억울하게 죽은 고구려의 점쟁이 추남이 죽을 때 적국의 대장으로 태어나 고구려를 멸망시키겠다고 맹세했는데, 왕이 추남이 서현의 부인 = 만명부인의 품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고 고구려를 멸망시킬것이라 하여 미리 제거하기 위해 자객을 보낸 것이라고 한다.# 근데 정작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 김유신은 골골거리고 있었다.(...)

4 신라의 영웅

당시 신라 사회에서 김유신 가문이 인정받는 방법은 전쟁에서 무공을 쌓는 일이었다. 629년 이찬 임영리 등이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할 때 참전. 적군의 역습을 받아 아군의 형세가 불리해지자 아버지 소판 김서현에게 이런 말을 한다.

"제가 평생 충효를 다하기를 스스로 기약하였으니 전쟁에 임해서는 용맹스럽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듣건대, '옷깃을 바루면 갓옷이 바르게 되고 벼리를 당기면 그물이 펴진다'[7]고 하니 제가 그 벼리와 옷깃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홀로 적진으로 돌격해서 적장을 무려 셋이나 베고 돌아왔다. 흠좀무.

이후 대야성 전투에서 삽질하다 전사한 김품석의 후임으로 새로 설치된 압독주의 군주 및 소판, 상장군에 올라 주로 백제와 끊임없는 교전을 벌여 644년 가혜성 등 백제의 7성을 함락하는 전공을 세웠으나 이듬해에 고구려를 치는 당을 지원하기 위해 많은 병력이 빠지는 바람에 7성을 다시 백제에게 빼앗겼다. 이때 김유신이 전세를 만회하기 위해 백제군과 다시 교전을 벌였으나 별 성과는 없었다. 백제군과의 교전중 가장 유명한 일화는 백제군이 쳐들어오자 깨부수고 돌아오는 길에 백제군이 또 쳐들어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가족들이 머물러있는 집을 코앞에 두고도 잠깐이나마 들리지 않고 곧바로 전장에 나아간 일이다. 647년 진덕여왕 즉위 직후에는 화백회의의 수뇌인 상대등 비담과 염종의 반란군을 토벌했고 이해에 백제의 의직이 3천 병력으로 침공해오자 1만 병력으로 맞서 싸워 숫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의직의 능수능란한 지휘에 한때 불리한 지경에 빠졌지만 부장 비령자의 희생 덕에 겨우 백제군을 격퇴하였다. 648년에는 백제가 점령한 대야성(현재의 합천)을 탈환할 계획을 세웠으나 오히려 의직의 맹공에 요거성 등 상주 일대의 성읍만 다 빼앗겼고 그나마 의직의 진격을 옥문곡에서 저지해서 서라벌이 침공당하는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649년에는 은상이 이끈 백제군이 침공해와 석토성 등 7성을 함락하자 진춘, 천존, 죽지 등과 함께 반격에 나서 도살성에서 이들을 격파하였다. 이렇듯 백제와의 전투에서 종횡무진 활약을 했다.

  • 비담의 난에 얽힌 일화로 연에 대한 것이 있다. 상대등 비담이 여왕의 무능함을 알리기 위해 신라 서라벌 남산 위에 떠 있는 별이 떨어졌다고 유언비어를 퍼뜨리자 김유신은 위기를 직감하고 서라벌로 돌아왔다. 김유신은 비담이 퍼뜨린 유언비어를 정리하기 위해 남산 위에 올라가 연에 불을 붙여 하늘에 띄우게 하여 남산에 다시 별이 떴다고 백성들에게 소문을 퍼뜨린다. 이것이 한국의 에 대한 최초의 기록.
  • 유언비어가 수포로 돌아가자 비담은 직접 2만의 대병력으로 왕위를 찬탈하려 드는데, 김유신에게는 그 절반 병력인 1만밖에 없었다. 그러나 김유신이 비담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대항하는 자는 9족을 멸하겠다며 진군해 비담의 병력과 대치하자 김유신을 본 병사들은 모두 무기를 버리고 투항했다. 김유신은 3만 병사를 이끌고 그대로 진군해 비담과 반란에 가담한 9인의 9족을 멸하고, 투항한 2만 명의 죄는 전혀 묻지 않았다고. 대인배[8]

정치적 입지를 올리기 위해 김춘추와의 정략결혼을 시도한다. 여기에 관해서 에피소드가 있는데, 축국 놀이를 하다가 일부러 김춘추의 옷자락을 밟아서 터트린 다음, 옷을 고쳐주겠다면서 자기 집으로 데려와서 누이동생 문희를 방으로 들여보내서 검열삭제를 하게 했다. 그런데 문희[9]가 임신을 했는데도 김춘추가 모른 척 하자, 누구의 자식인지도 모를 아이를 임신해서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 문희를 화형시키겠다면서 일부러 젖은 장작을 쌓아놓고 불을 지펴 연기가 무럭무럭 솟아오르게 해, 그것을 본 선덕여왕이 중재를 하여 혼인을 맺게 되었다고 한다. ...신라의 성풍속은 자유로웠다는 이야기가 많지만 이 이야기를 보면 다른 관계는 몰라도 속도위반은 죽여도 상관없는 죄였던 듯.(...) 다만 과정을 보면 '쇼'가 많은데, 이 때문에 사실은 전부 다(특히 김유신과 선덕여왕이) 짜고 친 고스톱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다. 계획대로

하지만 김춘추는 이 일로 단단히 골이 난 모양[10]인지 10여년간 김유신과 상종을 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이 화해하게 된 계기가 김춘추의 고구려 사신 파견이다. 이 때 자칫하면 죽을 수 있는 곳으로 가는 김춘추를 배웅하러 온 김유신은 당신이 돌아오지 못하면 모든 힘을 다해 고구려를 치겠다고 격려를 했었고 둘은 화해하게 된다.

5 삼국 통일의 공로자

5.1 백제 공격

진덕여왕 사망 이후 재상이었던 알천과 함께 김춘추를 그대로 왕으로 옹립해버린다. 그 이후에 백제로의 공격을 주장한 것도 그고, 결과적으로는 660년에 당군과 연합하여 각자 백제로 진격하였고, 계백을 물리친 후 사비성을 함락하여 백제를 멸망시킨다.

또한 이 과정에서 황산벌 싸움 때문에 당군과의 약속 기일인 7월 10일을 지키지 못한 것을 문제삼은 소정방이 신라 군의 독군 김문영[11]을 군법으로 처형하려 하자, 그 불같은 성질(...)로 백제하고 싸우기 전에 당과 일전을 불사하겠다고 소정방을 받아버려서 이를 철회시키기도 하였다. 말이 쉬워서 그렇지 한국군 참모총장이 미군 사령관에게 평양 치기 전에 니들하고 일전하겠다고 받아버린 셈이다. 또한 소정방은 낙하산이 아닌 한 때 당의 상국으로 자처하던 강성하던 돌궐(투르크) 제국을 멸망시키는 데 일조한 사람이다. 더구나 황산벌의 격전이 있었고, 하루 늦었다고는 해도 원래 약속한 날짜를 지키지 못한 건 사실이다. 이 상황에서 성질부려서 소정방의 뜻을 꺾었는데...삼국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큰 도끼를 짊어지고 군문에 서서 "당군의 목부터 치고 싸우겠다"라 했다고. 즉 커다란 도끼를 들고 공개적으로 협박을 한셈이다.[12]

참고로 다음 날 출병시에 소정방이 하늘에 나는 까마귀를 보고 점을 치자 불길한 징조라는 점괘를 받고 출정을 주저하자 쿨하게 단검을 뽑아 하늘을 나는 까마귀를 오체분시(!!)한다. 이외에도 백제땅을 자기에게 식읍으로 주겠다는 소정방의 수작을 쿨하게 씹고, 도독부를 설치하는 등 당의 한반도에 대한 야욕을 꿰뚫어보고, 당과 협조하면서도 장차 있을 당과의 전쟁에 대비하는 면모를 보인다.

5.2 고구려 공격

667년(문무왕 7) 왕을 따라 당군과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섰으나 고구려 원정은 당군이 일방적으로 철수함으로서 실패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백제의 잔적을 토벌하고 돌아오는 길엔 두솔성에서 일어난 백제부흥군을 토벌한다. 이듬해 9월 나당연합군으로 평양을 칠 때 연합군 대총관이 되었다. 그러나 전쟁에는 참여하지 않고 왕명으로 금성에 남아 수도를 방위했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할 무렵 당군에 '쌀배달 행군'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때문에 김유신을 '쌀배달꾼'이라 비하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는 전쟁에서 보급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간과한 것이다. 사실 이 행군 자체는 고구려군의 방어선을 거의 가로질러 당군 진영에 도착했던만큼 대단히 위험한 모험이었다. 더군다나 김유신은 이 때 나이가 70을 바라보고 있었던 데다가 신라 정계의 최고 실력자의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전에 신라군이 가 본적이 없는 황해도와 평안도로의 이 행군을 자원했다. 말년에 짬밥 셔틀이라니! 이런 젠장! 현대인의 시각에서 보면 '동족의 나라를 치는데 힘을 빌렸다'고 깔 수도 있겠지만, 이 행군 자체는 김유신의 통솔력과 지략, 그리고 솔선수범하는 태도를 보여준 좋은 사례다. 또한, 전략적으로도 이전 같으면 보급이 안되어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을 당군을 신라가 보급에 성공하여 전력을 온존하게 하였다. 이는 이전의 고구려의 전략을 송두리채 뒤집는 엄청난 전환으로 연개소문이 김춘추의 제안을 거부하고 신라를 품는 대신 고립시키려 한 것이 얼마나 잘못된 선택이었나를 여실히 드러내준다.

그래도 668년 고구려가 망할 때에는 나이가 나이인지라(74세) 풍으로 인해 참전하지 못했다. 대신 김흠순김인문이 장수로 나갔는데, 열전에 따르면 이들이 유신과 함께 가고 싶다고 하자, 아픈 사람한테 이게 무슨 지거리야! 문무왕은 여기 세 신하는 나라의 보배이니 셋 중 하나는 남아서 나라를 지켜야 한다고 막았다. 그래도 두 사람이 응석을 부리자 조언을 청하자, 김유신은 교훈적인 덕담을 몇 마디 하는 것으로 마무리. 혹시 비밀작전을 수행중이셨...으려나? 여기에 대해서는 다른 시각도 있다. 고구려가 멸망한지 1년도 지나지 않은 669년 3월에 신라가 옛 백제지역에 있는 당군 및 당의 괴뢰정부인 웅진도독부를 공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공격의 규모가 크고 치밀하게 진행된 점을 미루어보아 고구려에 대한 최후의 공격을 감행하는 시점에서 이미 당나라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을 가능성이 높다. 만약 그렇다면 고구려 원정에서 김유신이 빠진 것은 다음해에 있을 당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일 수 있는 것이다.

6 말년과 사망

고구려 정벌 직후에는 태대각간이라는 신라 천 년 역사상 두 명밖에 못 받은 당대 최고직위에 올라 당나라 군사를 축출해냈고, 한강 이북의 고구려 땅을 수복함으로써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져 놓았다. 673년 7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79세로 매우 장수한 편. 죽기 직전에도 이야기를 남겼는데 문무왕 13년 1월 기록을 보면 황룡사와 도성 사이에 커다란 별이 떨어졌고, 때맞춰 지진까지 일어나자 왕이 걱정했는데, 김유신은 "이 변이는 신에게 있는 것이지 나라의 재앙이 아니니 걱정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했다. 문무왕은 만약 그렇다면 더 걱정이라면서 담당 관서에 액땜을 할 것을 명했다.

또한 김유신의 집에서 갑자기 한 무리의 무장한 병사들이 통곡하면서 나와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 이야기를 들은 김유신은 "그들은 나를 지켜준 음병(陰兵)들이다. 내 운이 다한 것을 알고 떠났으니 나도 곧 죽을 것이다"라고 말했으며 이 일이 있은지 10여일 후에 자리에 눕게 되었다고 한다. 어쨌든 말년의 김유신 본인도 자기가 죽게 될 것을 느끼고는 있었던 모양. 남장이라면 딱 밴시 설화인데...

7 사후

공도 공이지만 김유신이 태종 무열왕과 문희 사이에서 태어난 딸 중 하나와 결혼해 문무왕의 외삼촌이자 사돈 관계가 되기 때문인지 사후 흥무대(興武大王)에 추존되었다. 넓은 의미에선 신라 왕족에 속한다고 할 수 있으나 가야계라 차별받는 입장에 있었는데, 왕에 추존된 희귀한 사례이다. 또한 삼국사기 문무왕본기에서는 김유신의 죽음을 卒(졸)이라고 썼지만 김유신 열전에서는 김유신의 죽음에 (훙)자를 쓰고 있다. 이 글자는 왕의 죽음을 표현할 때 쓰는 글자다.

충청북도 진천군에 김유신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인 길상사가 있다.

8 관직

김유신은 대장군을 거쳐 신라의 17관위보다도 더 높은 비상설직 대각간(大角干)에 임명되었는데 이는 중국 한(漢)나라의 승상에 해당되는 관직이였다. 거기에 삼국통일을 완전히 이룩한 이후 김유신은 태대각간(太大角干)에 임명되었다. 태대각간이라는 벼슬은 한나라의 상국에 해당되는 어마무지하게 높은 관직으로 태대각간 자체가 오직 김유신 하나만을 위해 일부러 만든 관직이다. 이 관직을 신설한 이유는 김유신이 삼국통일에 지대한 공헌을 세운 공로를 인정해서 특별히 김유신에게만 내리기 위해 태대각간이라는 관직을 만든 것이다. 신라 역사 전체를 통틀어도 살아생전에 태대각간에 오른 자는 오직 김유신이 유일하며 김유신 이외에는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아무도 없었다. 절친이자 촌수상으로는 좀 많이 복잡한 관계인 김춘추가 왕이 되었는데 김유신은 왕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이 이것이라고 해 두자.[13]

9 일화

9.1 광역 파괴 마법 사용!

원래 그런 내용을 담으려 한 책이긴 하지만 삼국유사에는 백제 부흥군과 고구려, 말갈에게 고전할 때 김유신이 광역 파괴 마법을 쓴 기록이 등장한다.

(…) 5월 11일부터 6월 22일까지 신라 군사는 매우 위태로웠다. (…) 성부산에 단을 쌓고 신술(神術)을 닦으니, 갑자기 큰 독만한 빛이 단 위에서 나타나 별처럼 북쪽으로 날아갔다. (…) 한상성 안의 병사들은 구원병이 이르지 않음을 원망하며 서로 바라보고 울 뿐이었다. 적들이 급히 그들을 공격하려고 하자 갑자기 남쪽 하늘에서 빛이 비치더니 30여 군데의 포석을 깨뜨렸다. 또한 적군의 활과 화살과 창이 부서지더니, 군사들이 모두 땅에 쓰러졌다가 한참 뒤에야 깨어나 달아나 돌아갔다. 이에 우리 군대도 돌아왔다.

앞뒤 원문을 모두 읽어보면 더 무서운 게, 경주에서 옛 백제 땅을 포격했다는 결론이 나온다…흠좀무. 물론 삼국유사는 민담이나 야사 등도 기록하고 있는 역사서이니만큼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겠지만.

9.2 돌을 갈라버린 검기

김유신이 17세의 무렵에 고구려와 백제 말갈이 신라의 강토를 침범하자 이에 뜻을 품고 스스로를 수련하기 위해 중악(현 경주 단석산)에 들어가게 된다. 김유신이 자기 자신이 가진 포부를 하늘에 고하며 맹세하고 나흘이 지나자, 갈포옷을 입은 신비로운 노인이 나타나 김유신의 포부를 칭찬하며 신비스런 검법과 신검을 전수하고 광채를 남기고 사라졌다고 한다.

김유신은 노인에게 받은 검법을 수련했으며 김유신이 수련한 경주의 단석산 정상엔 검법을 전수받은 김유신이 신검으로 돌을 갈랐다는 설화가 담겨있는 돌들이 아직도 남아있다.[14]

근데 어떤 민담에선 산속에 제단 쌓아서 기도를 올리자 그냥 가지고 있던 검에 신령이 깃들어 신검이 되었다는 내용도 있다.

9.3 사후에도 남은 전설

사후에도 나타나기도 했다는데 신문왕(문무왕의 아들)때 만파식적을 보낸 것도 김유신과 문무왕의 혼백으로 되어 있다. 그후 혜공왕이 770년 반란을 도모한 김융 세력을 숙청할 때 김융과 친하게 지내던 김유신의 후손들도 같이 숙청한 후로 김유신의 무덤을 돌보는 자가 없었는데, 9년 후에 죽은 김유신의 혼백이 나타나 미추왕릉에 찾아가 미추왕의 혼백에게 통곡하고 이제 신라를 버리고 떠나겠다고 꼬장을 부렸다고 한다. 이를 전해들은 혜공왕이 뉘우치고 김유신의 무덤을 정비하고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김유신 무덤은 신라 왕릉들보다 더 잘 조성되어 있다.

후에 후삼국이 형성되고 신라가 망할 때가 되자 왕궁에서 수많은 군사들이 울며 김유신의 묘로 들어갔다는 전설이 있다. 이 전설은 김유신이 세상을 떠날 때 김유신의 집에서 군사들이 나왔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김유신의 위대함을 증언하는 전설이라 하겠다. 삼국유사에는 만파식적 설화에서 문무왕의 혼백이 화하였다는 용과 함께 신라의 천신이 되어 만파식적을 내려 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조선시대에 김유신을 제사지냈는데, 이를 하지 말자고 주장하던 관리가 김유신 귀신에게 화를 당해 죽었다는 전설도 있다. 임방이라는 인물이 지은 《천예록》이라는 책에 '서원에서 제사지내는 것을 폐하자고 했다가 화를 당하다'라는 제목으로 나오는 이야기로 줄거리는 이러하다. 조선 시대의 야담집 《천예록(天倪錄)》에는 서악서원이 조정으로부터 사액[15]을 받던 때를 배경으로 한, 김유신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김유신과 설총, 최치원 세 사람의 위패를 모신 경주의 서악정사[16]가 비로소 조정으로부터 사액을 받게 된 것과[17] 관련해 경주의 유학자들이 모인 회의에서 어떤 서생이 "설총은 중국의 유교 경전을 이두로 풀이하여 가르친 공적이 있고 최치원은 문장으로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친 공적이 있지만 김유신은 무장(武將)으로서 유학자들에게 모범이 될 만한 일을 한 것이 없다"며 김유신의 위패를 빼고 나서 사액을 청하자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 자리에서 논의가 나지 않아 회의를 파하고 얼마 뒤, 이 서생이 서원에서 깜빡 잠이 들었는데 갑옷을 입은 무사들이 몰려와 서생을 잡아다 뜰에 꿇어앉히고, 병사들을 거느린 김유신이 그의 앞에 나타나 서생을 향해 "유학자들이 중히 여기는 덕목이 충(忠)과 효(孝)가 아니던가. 내가 살아서는 위태로운 나라를 위해 전장에 나아가 어려움을 구제하고 삼국을 통일하는 공을 세웠으니 그것이 충이고, 그렇게 공을 세우고 입신양명하여 집안과 부모의 이름을 빛냈으니 그것이 효인데, 어찌 함부로 이야기하느냐."라며 호통을 쳤다. 깨어난 서생은 두려워하며 시름시름 앓다가 이틀만에 피를 두 말이나 토하고 사망했다.

많은 기담과 전설을 남겨서 뭔가 영력이 강한 장군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인지 김유신은 한국 전통 무속 신앙에서도 신으로 모셔지는 역사 속 인물 중 하나다. 강원도 강릉 지역에서는 김유신을 산신으로 모시는 사당도 남아 있는데 강릉 지역의 구비 전설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산신령이 된 김유신이 대관령의 소나무를 모두 병사로 보이게 해서 왜군이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또한 경북 군위 지역에서도 김유신을 산신령으로 모시고 있는 신당이 있으며 오늘날에도 전국 방방곡곡에서 김유신을 모시는 신당은 매우 많다.

9.4 가족과 후손들

김유신의 가계도는 그 당시 신라에서는 순혈주의를 지키려는 의도 때문에 당연한 것이지만 오늘날의 기준으로 따지면 완전히 막장이였다. 김유신은 자신의 여동생 김문희가 김춘추에게 시집갔는데 문제는 김춘추와 김문희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김유신에게 시집갔다는 것. 즉 외삼촌과 조카가 결혼한 셈이다.[18]어쨌든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이 전하는 김유신의 가족은 아래와 같다.

  • 아내: 지소부인(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3녀. 김유신의 조카딸)
  • 장남: 김삼광 이찬(신라 17관등 중 2위)
  • 차남: 김원술 [19] 소판(=잡찬. 신라 17관등 중 3위)
  • 3남: 김원정 해간(=파진찬. 신라 17관등 중 4위)
  • 4남: 김장이 대아찬(신라 17관등 중 5위)
  • 5남: 김원망 대아찬
  • 딸 4명
  • 서자: 김군승 아찬(신라 17관등 중 6위)

김유신의 부인 지소부인은 655년에 김유신과 혼인을 했는데, 김유신이 죽은 후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성덕왕 때까지도 생존해 있었다고 한다. 지소부인은 문희의 딸이 아닌 전처 소생이었을 거라는 말도 있는데, 그렇다고 쳐도 김유신과 무열왕부터가 8살 터울이나 나기 때문에 무열왕의 딸이 김유신과 엄청난 나이 차이였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열전에서 김유신의 다섯 아들과 딸 넷은 모두 지소부인의 소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장남 삼광의 경우 666년에 당나라에 숙위로 간 적도 있고 고구려 정벌 당시 당군과 함께 평양성에 참전하기도 했다. 이 기록대로라면 삼광은 10대 초반에 당나라와의 숙위외교와 고구려 전쟁에서 활약한 천재소년이라는 얘기가 된다.(…) 아무리 나이 열다섯이면 성인 취급을 하던 시대임을 감안할지라도 숙위라는 직책이 신라와 당과의 외교관계를 조정하는 중요한 역할이었던 것과, 삼광의 활약 연대로 봤을 때 삼광은 사실 지소부인이 아니라 전처의 소생일 가능성이 높다.

삼국유사를 보면 '재매부인'과 관련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게 기록된 게 삼국유사 기이편의 김유신 편이다. 여기서는 '김씨 집안의 종부'라고만 기록해 놓았으며 그녀가 죽자 청연 위의 골짜기에 장사지내 그곳을 '재매곡'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 해마다 봄이 되면 김유신 가문의 남녀들은 그 골짜기 남쪽 시냇가에 모여 잔치를 베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이 '재매부인'을 지소부인과 결혼하기 전의 김유신의 부인으로 보는 설도 있다.[20]

화랑세기 필사본에서는 태종 무열왕의 딸과 결혼하기 전 김유신이 미실세종의 손녀와 결혼을 했었으며, 이와 별개로 천관녀와의 사이에서 아이가 있었다고 한다. 위서 의혹을 받는 화랑세기 필사본이니까 저 내용을 다 믿을 수는 없다 해도, 현실적으로 봤을 때 무열왕과 문희의 딸은 그의 조카딸인데다 김유신이 김춘추보다 나이가 더 많다는 걸 생각해보자면 ,어쨌든 김유신은 무열왕의 딸 지소부인과 결혼하기 전 이미 결혼한 적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1990년대 드라마 삼국기에서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김유신의 서자 군승이 천관녀의 아들인 것으로 설정하고 있다. 천관녀가 김유신과 헤어진 후 혼자 낳아 길렀고, 훗날 군승이 김유신 휘하에 들어가 활약하게 되는데 두사람은 자신들이 부자 사이인 걸 모른 채 '존경하는 상관과 성실한 부하장수' 사이로 지냈다. 훗날에야 자신들이 부자지간임을 알게 되는데, 얼마 후 군승이 이복동생이며 김유신과 지소부인 사이의 둘째아들 원술과 당나라와의 전쟁에 나갔다가 전사한다. 그리고 (많이 알려진대로) 원술은 후일을 도모한다며 살아돌아온다. 이 드라마에서는 김유신이 살아돌아온 월술에게 그렇게 모질게 대한 이유 중에, 아들 대접을 제대로 못 받은 군승이 전사한 것에 슬픔과 충격을 느낀 김유신이 혼자 살아돌아온 원술에게 더욱 분노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김유신의 이름에 가려져서인지 김유신의 후손들은 희곡으로 만들어질 정도로 유명한 일화를 남긴 원술을 제외하면 신라가 망할 때까지도 이름을 드러내질 못했으며 기록도 별로 없다. 삼광은 삼국사기 열기 열전을 보면 열기에게 삼년산군의 태수 직을 주었다는 것과 신문왕의 혼사에서 관여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데, 나름대로 신문왕 때까지 조정에서 역할을 했던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또한 서자 김군승은 662년 김유신의 '군량수송 행군'에서 김유신과 함께 참전했고 김인문과 함께 당군과 접촉했다는 기록을 볼 때 제법 중국어에도 능통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삼광의 아들인 김윤중은 당의 요청으로 인한 발해 공격의 대장으로 북진했으나 폭설을 만나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성덕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다른 귀족들의 시기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부터 김유신 집안 사람들은 신라 조정에서 힘을 잃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서 김유신 후손들에 대한 기록이 적은 것과 삼국유사에 기록된 김유신 무덤에서 김유신 귀신이 뛰쳐나와 통곡했다는 전설은 이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다.

또한 김유신의 서손으로 당에 유학을 다녀오고 둔갑술(!!!)에 능했다고 전해지는 김암이 있다.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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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김유신의 묘는 경주시 충효동에 위치해 있다. 사적 제21호. 묘 주위에 둘레돌(護石)을 만들었으며 십이지신상을 부조로 조각해 두었다. 김유신의 묘는 어지간한 왕릉 못지 않게 크고 아름다운 규모를 자랑한다. 묘비가 두 개인데 이는 모두 후대에 세워진 것으로 하나는 조선 숙종 때 경주부윤 남지운이 세운 묘비로 '신라태대각간 김유신묘(新羅太大角干金庾信墓)'라고 적혀 있고 하나는 1970년대에 세워진 '개국공순충장렬흥무왕릉(開國公純忠壯烈興武王陵)'인데 이 비석의 '능(陵)'자가 비가 오면 '묘(墓)'자로 바뀐다고 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다만 이 묘는 사실 김유신의 진짜 묘가 아니라는 견해도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도 제기한 문제이기도 하고 해방 후 이병도는 사실은 김유신의 묘가 아니라 신무왕의 능이며 진짜 김유신의 묘는 오늘날 태종 무열왕의 차남인 김인문의 묘라고 전해지고 있는 '각간묘'라는 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둘레돌이나 십이지상을 두른 김유신 묘의 양식은 동시대의 인물인 무열왕릉의 양식과는 다르고 성덕왕 이후에나 확립된 양식이며, 비록 흥덕왕이 흥무대왕으로 추봉하여 흥덕왕 무렵의 양식대로 묘를 개수한 것으로 보고 있지만[22] 그렇다고 당시 이미 추봉된 선왕들의 능을 개수하지 않고 굳이 김유신의 묘만을 개수할 이유는 없다는 점이 이 설의 주요 논지. 여기에 후대의 일이기는 하지만 조선 시대 경주 서악서원의 모태였던 서악정사를 지은 목적이 원래는 인접한 김유신묘의 관리를 위해서였다는 것도 포함된다(서악정사는 동시에 김유신을 모신 사당이기도 했다). 또한 신무왕릉이 아니라 경덕왕의 능으로 보는 설도 있다.[23]

어쨌든 이런 견해도 있지만 오늘날의 그 묘를 김유신의 묘로 보는 것이 확실한 정설.[24]

10 평가

10.1 삼국사기에서의 평가

삼국사기에서는 을지문덕과 장보고의 업적은 중국 서적이 없었으면 몰랐을 거라고 하면서, 김유신은 어린아이들도 다 안다고 평했다. 이를 보면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한 고려 중엽까지도 김유신의 이름은 일종의 슈퍼스타급이었던 듯하다.

비록 을지문덕의 지략과 장보고의 의롭고 용맹함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중국의 서적이 아니었던들 흔적이 없어져 듣지 못하였을 것이다. 유신과 같은 사람은 우리 나라 사람들의 그에 대한 칭송이 지금까지도 끊어지지 않으니, 사대부들이 그를 아는 것은 그럴 수 있지만 꼴베는 아이와 가축을 기르는 아이까지도 또한 능히 그를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사람됨은 반드시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데가 있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하

많은 설화의 주인공이기도 했고 민간신앙에서도 장군신으로 숭배되었다는 것 자체도 그가 민중들에게도 대단한 영걸로 남아 있었음은 분명하다.

10.2 비판 : 삼국사기의 기록의 신뢰도

물론 이러한 평가는 신라에 있어서 삼국의 통일을 이룬 김유신이란 인물이 가진 정치적인 위치를 생각했을 때 액면 그대로 믿기엔 무리가 있다. 《삼국사기》를 보면 김유신 열전은 무려 3권으로 제일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사실 김유신열전이 김유신의 행록, 즉 김유신 현손(손자의 손자)이 작성한 기록을 토대로 지나치게 황당한 기록을 임의로 깎아내고 쓴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다른 인물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너무나 부족해서 삼국사기에서 가장 부족한 것이 열전으로 꼽히는데 김유신 열전만은 그 가운데서 특출나게 방대한 규모를 자랑하여 거의 대하소설 급이다.[25]

이는 분명히 객관성 부분에서 비판받아야 할 점이다. 행록의 기록은 단순한 야사가 아닌 특정 인물을 영웅화하기 위한 기록이나 마찬가지인데, 이걸 갖다 썼다는 것부터가 기록 자체의 신빙성을 크게 낮추는 것이다. 정사라고 해도 그 인물의 정치적인 성격에 따라, 특히 고대사일수록 비판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점을 잘 보여주는 사례.

그래서 삼국사기의 기록을 모두 신뢰하기엔 무리가 있다. 원래 삼국사기는 기이(奇異)한 기록을 배제하고자 노력했는데, 김유신 열전만은 이상하게 시작부터 무협지처럼 기이한 내용이 가득하다. 부모의 로맨스로 시작해서, 별이 아래로 강림하여 북두칠성의 기운을 타고 태어나 등에 북두칠성 모양의 점이 있고, 그 다음에는 산에서 수련하다가 어디선가 백발의 달인노인이 나타나서 무술을 가르쳐 주고...초반부는 내용만 보면 이게 삼국사기인지 삼국유사 신이편인지 헛갈릴 정도의 내용이다. 그나마도 이게 기이한 내용은 되도록 쳐내고 현실적인 내용만 추린 거라는 걸 생각해보면 원본인 김유신 행록은 완전히 무협지 뺨치는 판타지 소설 수준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김유신 열전에 나오는 김유신의 전과 역시 신뢰하기 어려운게 많다. 예를 들어,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과 3만명이 전사한 이후 백제는 엄청난 타격을 받았는데, 이 시기 김유신에게 죽은 백제군만 해도 공식적으로 참수한 머릿수만 6만이 훌쩍 넘어가는데도 백제는 여전히 신라를 몰아붙이고 있다.(…)

게다가 애초에 의자왕본기와 보장왕본기, 연개소문열전 등을 보면 신라는 한때 수세에 몰리기도 했는데 김유신열전을 보면 이 당시 김유신은 무조건 이기고 있다. 간혹 황산벌 전투가 김유신의 첫 패배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말이 안 되는 것이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 당시 신라는 백제에게 김유신이 상장군이 되기 전인 642년 40여 성을 뺏겼다는 기록이 있고 상장군이 된 후인 655년에도 30여 성을 뺏겼다는 기록이 있다. 즉 호구 백제에게 완전히 깨지고 있었다는 소리. 게다가 김유신열전에는 아예 이 642년과 655년의 전투에 대한 기록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딱 하나 있는데 도비천성을 공격해서 이겼다는 게 전부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당연히 열전의 기록에 의문이 갈 수밖에 없는 것이 김유신이 열전에 나오는 것처럼 진실로 무패의 장군이었다면 당시의 신라가 그렇게 정성들여 당나라를 끌어들이려 할 필요가 있었을까? 게다가 신라는 이미 김춘추가 목숨까지 걸고 고구려에 가서 도움을 요청한 전력이 있다. 또한 의자왕본기를 보면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백제 수뇌부가 회의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때 여러가지 주장들이 나오지만 당군을 걱정하는 신하들은 있어도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을 걱정하는 인물은 아무도 없다. 심지어 달솔 직위에 있는 상영(常永)이란 인물은 허접 신라군을 먼저 박살내버리고 당군을 치자라는 논조의 주장까지 한다(...). 일본서기에도 신라의 사찬(沙飡) 관등에 있는 지만이라는 인물이 사신으로 파견되었는데 당나라 복장을 입었다고[26] 쫒겨나는 수모를 겪었고,[27] 이때 일본 조정에서 "지금 신라는 X밥인데 우리가 지금 쳐들어가면 정복 가능한뎁쇼?"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28]

사실 김유신열전을 제외한 기록을 보면 오히려 의자왕이 신라의 재앙 수준이라 이게 과연 같은 시대를 기록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갈 정도. 여러모로 신뢰도에 의심이 가는 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김유신이 매번 승리한 것은 맞지만, 그것이 백제나 고구려의 판도를 바꿀만한 정도가 아닐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29]

또한 행록을 지은 김장청은 친척인 김융의 반란으로 몰락해 말단직을 전전한 인물인데, 그런 그가 객관적으로 김유신을 평가했을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있다. 오히려 몰락한 가문의 대한 한과 이에 대한 보상심리에서 김유신을 높였을 가능성 역시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김유신의 조금이라도 객관적인 면모를 보려면 여러 가지 자료를 바탕으로 다각적인 시각에서 보아야 한다.

일단 삼국사기가 지어진 고려에 김유신은 이미 신격화된 인물이다. 그렇지만 삼국사기 열전을 제외하고 기사만 본다면 김유신은 멸망 일보 직전에 나라를 지키기 위해 악전고투로 싸운 장군이다.[30] 김유신이 활동하는 시기는 이미 고구려, 백제의 맹공이 시작되었고, 진평왕과 선덕여왕이 대비를 안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힘의 밀렸다는 것 이다.

김유신이 활약한 전투를 보더라도 악전고투를 하면서 아군을 희생시키면서 까지 적을 혼란의 빠뜨리는 전술과 적을 속이는 방법을 썼다. 그리고 주로 방어전이 주류가 되었다. 이는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칠 만큼에 힘이 없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리 수 있다. 선덕여왕 말기 군을 이끌고 7성을 빼앗았다는 기록은 있지만, 곧바로 빼앗겼다는 것은 다시 말해 점령 보다는 정벌의 성향이 크다. 그리고 진덕여왕 기사를 보면 당시 김춘추, 김유신, 진덕여왕이 신라를 지키기 위해 눈물나는 상황을 볼 수 있다. 그 만큼 신라는 위기에 놓인 상황을 반증한다. 심지어 김춘추가 목숨을 걸고 고구려에 원군을 오청 했을 정도로 신라의 상황은 심각했고, 결과적으로 원군 요청도 실패했다.

하지만 이는 고구려의 뼈아픈 실책이 되어 돌아왔다. 그리고 선덕여왕의 가려져 있던 진덕여왕은 굴욕적인 당의 요구에도 그것을 받아주고, 당의 관제로 바꾸면서 동시에 나라를 중앙집권체제로 바꾸었다. 속된 말로 병풍이 아니었을 것 이다. 이렇듯 김유신은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한 이순신 장군과 같은 초월적인 영웅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영웅이라 할 수 있다.

다만 후대 직접 싸운 김유신이 백성들 마음의 빛으로 남았고 이것이 신격화로 변했을 것 이다. 그리고 당시 김부식의 생각과 맞물린다고 볼 수 있는데 고수전쟁 당시 백만 대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를 을지문덕 장군 덕분이라 하였다. 이 관점을 김유신의 대입하면 신라의 통일과 안정이 뛰어난 신하인 김유신 덕분이라고 해석 했을 것이다. 이는 중세시대의 영웅적 관점의 한계라 볼 수 있다.

10.3 근현대의 평가

무열왕, 문무왕과 더불어 삼국통일이라는 역사상 위대한 업적을 달성한 인물이자 사라진 왕국의 왕족으로서, 장군으로서의 유능함과 동시에 권력의 상층부를 노리는 모습이 인상적인 인물. 단순히 '유능한 장군'이라는 카테고리만으로 분류하기엔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때문에 학자들은 김유신을 단순한 장수만이 아닌 정치가로 평가하기도 한다. 이런 모습을 잘 묘사해낸 매체가 없는 점은 안타까운 부분.

당시 삼국을 통일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으나 그 과정에서 당의 힘을 빌렸다는 점 때문에 민족주의 세력과 북한에서는 한국사에 둘도 없는 매국노로 가루가 되도록 까이고 있는건 물론이고 아직까지도 적지 않은 일반인들에게 그다지 좋지 않게 여겨진다. 민족의 의미를 잘못 이해해서 생기는 문제. 고구려·백제와 신라는 계통이 다르며, 계통이 비슷한(부여계) 고구려와 백제조차도 그 때 정말 민족적 동질성을 얼마나 느꼈을지는 의문이다. 복식이나 언어 등이 유사하긴 했지만. 이 때문에 민족주의 사학계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단재 신채호조선상고사에서 "교활한 음모로 적국을 혼란에 빠뜨린 음험하고 무서운 정치가"라고 비판적으로 평가했다. 또한 단순히 민족적인 문제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그의 행적에 여러가지 의문이 많다는 점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김유신의 입장에서는 동맹국의 힘을 빌려 적국을 멸망시킨 것인데 후대에 와서 까이고 있다면 환장할 노릇일지도 모른다.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을 한 나라로 보는 것은 어디까지나 근대 이후의 산물이다. 아무리 앞서 본다고 해도 고려다. 삼국통일(토는 일통삼한) 이전 고구려, 백제, 신라는 한 나라였던 적이 없으니 김유신 입장에서는 어디까지나 적국(게다가 매제이자 국왕이자 장인이자 절친의 철천지 원수인 나라가 백제다). 한 나라로 1000년을 넘게 지내온 한국인들이 이념 때문에 전쟁을 벌이고 그 와중에 외세인 미국과 동맹을 맺어 영토를 지켜낸 것을 비판하는 사람은 적으면서 김유신에게는 외세를 빌려 동족을 멸한 민족반역자라는 평가를 내리는 것은 명백한 오류다. 이는 아마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당에게 사대하고 고구려의 영토였던 만주를 수복하지 못하고 발해가 생기도록 사실상 방치한 사실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0.4 성품

신라시대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만큼 김유신에 얽힌 일화 또한 다양하게 전승되어 왔다. 일부 일화를 근거로 김유신이 뛰어난 능력자인건 분명하지만 인성의 측면에선 약간의 의문부호가 달리는 인물이라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천관녀와의 관계를 단칼에 끊은 것이라든지, 여동생 문희를 불태워 죽이려 한 점이라던지[31], 유망한 화랑으로 인정받고 있던 아들 원술이 전장에서 도망쳤다는 이유로 왕명과 집안을 더럽혔다며 집에서 내쫓았다는 등의 기록[32] 등으로 김유신을 비정한 인물을 평하기도 한다. 하지만 연구자들은 이런 김유신의 다소 비정한 측면이 냉혹한 신라 귀족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노력, 그리고 나라의 중진이 되어서는 고구려와 백제의 연이은 협공에 시달리며 위기에 있던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이었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원술의 경우에는 김유신의 처사가 비정하다고 생각할 수 하지만, 전시상황에서 결단력 있는 처사였다. 김유신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다른 게 김유신은 전쟁 과정에서 비령자 같은 부하들이나 자기 조카인 반굴이나 관창을 전쟁 중에 희생시킨 전력이 있다. 그랬는데 자기 아들은 상관 효천도 전사하고 신라군이 대패했는데 살아서 돌아왔으니 주위에 볼 낯도 없었을 것이고 자칫하다간 본인에게 "친척이랑 부하들은 그렇게 희생시켜놓고 자기 아들은 살아돌아오게 하다니"라는 식의 비판이 따라붙을 수도 있었다. 즉 원술을 내친 것이 상술된대로 냉혹한 신라 귀족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을 뿐만아니라 자신의 아들보다 국가의 대의를 소중히 여기는 자세였다고 볼 수 있다. 분명한 점은, 적어도 김유신은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즉, 부하들에게 희생을 요구할만큼 자신도 그걸 피하지 않았다는 소리다. 이는 이미 최고의 권력자이면서도 노구를 이끌고 어려운 원정을 자원한 점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래서 냉철한 인물로 보이지만 잘 뜯어보면 다혈질이고 불 같은 성격의 소유자. 상술된 것처럼 천관녀한테 간다고 버럭하고 말의 목을 베었다거나, 여동생이 속도위반했다고 버럭하고 화형크리(물론 이것은 김유신의 꾀였다는 견해가 우세하지만), 김춘추가 안돌아온다고 버럭하고 결사대 몇천 이끌고 고구려로 닥돌, 원정 날 새가 천막 위를 도니 불길하다는 소문이 돌자 버럭하고 한큐에 반쪽을 내버린다거나(...), 엄연히 약정한 기일에 늦어서 군법으로 독군 김문영을 참하겠다는 돌궐(투르크)족을 쌈싸먹은 대륙의 명장 소정방에게 버럭하고 당군부터 썰어버리겠다고 군문 앞에 도끼를 질질끌고 가서 다 쳐죽일거야!라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화를 냈다거나, 원술랑이 패배한 전투에서 살아 돌아오자 버럭하고 부자의 연을 끊다시피 한다는 일화들을 보면 어지간한 성깔은 아니었던 듯하다.

문무왕이 어릴 때부터 본 성질내면 진짜 무서운 아빠 친구 겸 외삼촌에게 쫄아서 대각간에 특별히 "태"자를 붙인 태대각간을 줬을 지도 모른다.

10.5 종합해서

하여튼 관점에 따라 굉장히 엇갈리는 평가를 받는 역사 속 인물인데, 김유신의 활약이 과장되었음은 분명하지만 당의 야욕을 간파하고 있었을 정도로 전략적 안목도 뛰어났고 위에 언급된 '군량수송 행군'만 봐도 김유신은 장수로서의 통솔력이나 부대 운영 능력도 뛰어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다가 정치적인 능력 역시 뛰어난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에 대한 기록에 상당한 과장이 있어보이고, 실제로 그가 받고 있는 평가가 그의 정치적인 위치에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33]

외국 사이트에도 소개된 바 있다. 이번 주의 멋진 녀석으로 선정되기도 했는데[34] 눈에 뵈는 건 다 때려죽이고 어느 한놈이 짱 먹을때까지 전쟁질만 하던 아시아 역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진시황같은 우당탕쿵탕 정복왕 라이프를 살아간 지존 멋있는 녀석이라고. 고구려의 엉덩짝을 마구 차 주고 적진에 달려들어 목을 따오기도 했으며, 이 글에 의하면 아무래도 한국 사람들이 스타크래프트 같은 전략전술 게임을 휩쓰는 건 김유신 시절부터의 하드코어한 전통 같다고 한다. 정확하다. 그리고 깨알같은 관용적 매큔-라이샤워 표기법. 지금 보니 badass의 뉘앙스는 멋진 녀석이 아니라 나쁜남자인데? 직역하면 나쁜 엉덩이.

11 각종 매체에서의 김유신

참고: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삼국통일전쟁

  1. 250px
  2. 때문에 당시 신라에서는 성골끼리 근친혼이 매우 성행했다.
  3. 예기에는 이름 짓는 법도에 대해 나와 있는데, 여기서는 나라 이름이나 달이나 날짜의 이름, 산이나 강의 이름 등으로는 사람 이름을 짓는 것이 아니라고 적혀 있다.
  4. 남북조시대 ·북주에서 활약한 인물인데 김유신과 달리 문인으로 명성이 높았다.
  5. 천관녀를 바라보는 시각으로 그녀가 기생이 아니라 불교의 전래로 몰락한 신라 모계신앙의 신녀라는 설이 유명하지만 웃기는 소리. 천관녀(하늘+관리+여자)라는 이름 자체가 무속적인 성격이 있다는 것인데, '천'자도 '관'자도 당대 신라에서는 흔한 이름이었다. 대표적으로 천존무관랑이 있고, 아예 천관이라는 남자 동명이인도 기록에 보일 정도.(삼국사기 문무왕 10년) 애당초 이름만으로 이 정도 주장을 하는 것은 음이 비슷하다는 것만으로 지명을 비정하는 수준이라 정설이 되기에는 엄청나게 무리다. 모 소설에서는 그녀를 가야계로 설정하고, 김유신이 '우리는 같은 가야계니 혼인하면 신라계와는 진정으로 서로 통할 수 없게 된다'며 이상을 위해 그녀를 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6. 또한 기생(妓生)의 발생을 고대 무녀(巫女)의 타락에서 찾는 견해도 있다고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사전에 나와있다는 점도 유념할만 하다. 고대 제정일치사회에서는 무녀가 사제(司祭)라는 고급 직위를 가졌으나 정치와 종교가 분화하는 과정에서 점점 후대의 기생의 형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고대의 신라가 아직 제정분화가 덜 이루어진 사회였음을 미루어 볼때 천관녀의 기생이란 신분이 단순하지 않을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 두산백과에서도 기생의 원류로 이익(李瀷)의 성호사설에 나온 양수척(揚水尺) 집단 외에 신라 화랑의 전신인 원화(源花)를 거론하고 있다. 그리고 원화의 주요 기능은 바로 종교적 의례로 추정되고 있다.
  7. 이 말의 원 출처는 <송사> 직관지. 즉 어떤 일을 풀어가는 핵심이 되겠다는 의미다.
  8. 사실 사람이 중요한 노동 재원이었던 시대에 2만 명을 처리하는 건 보통 큰일이 아니다. 노동력의 감소를 막으면서 인심도 과시할 수 있으니 살려주는 게 확실히 이득이다.
  9. 이것과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로는 그 전에 언니 보희가 꿈에서 산에서 소변을 봤는데 그게 수도를 가득 매워서 민망하다는 말에, 문희가 그 민망한 꿈을 사겠다고 하며 자기가 아끼는 비단치마를 주겠노라 하자, 언니는 그 치마를 받은 후 내 꿈 가져가라 하며 손시늉을 하고 문희가 치마를 펼쳐 받았다. 훗날 문희는 왕후가 된다
  10. 생각을 해보면, 김유신과 김춘추는 둘 다 진골이지만 같은 진골이 아니다. 김춘추가 폐출된 왕의 후손이라서 신라 왕실 후예, 김유신은 가야 왕실 후예이고 친구처럼 묘사되어서 동급으로 인식되기 좋지만, 김유신의 금관가야계 김해 김씨는 신라 역사 내내 꾸준히 제대로 된 진골대접을 받지 못했다. 아래에 김유신의 신분 컴플렉스와 그걸 유지하기 위한 비정한 모습 운운하는 언급이 있는게 이 때문이다. 반면 김춘추는 왕위 계승권에 있는 인물이다. 비록 진지왕이 폐위되면서 성골 자리에서 밀려났다고는 하지만 부친인 김용춘진평왕의 딸인 천명공주와 결혼하였기 때문에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에게는 조카뻘이 되어서, 실질적으로 성골의 피가 끊어지는 상황에서 왕위계승권자 자격을 유지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때문에 왕위계승자 지위를 노리는 김춘추 입장에서는 자신의 본처가 가야계인 김해 김씨에서 나오는 것이 마음에 들리가 없다. 애초에 신라 왕들의 왕비족은 박씨계에서 나왔다는 것을 고려하면 더더욱 그렇다.
  11. 뒷날 김문영은 문무왕, 신문왕 때까지도 활약하며 효소왕 때는 상대등까지 오른다.
  12. 참고로 이 일화와 몇몇 사건에서 도끼을 빼들고 달려드는 김유신의 성격 때문에 김유신의 메인 무기가 도끼로 알려지기도 했는데, 사실 전근대의 도끼는 군대에서 군령의 엄격함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자주 쓰였기 때문에 성급하게 일반화하기엔 무리가 있다. 다만 중갑기병을 상대할 때 신라군이 반월도끼를 사용했던 점, 검이란 무기보다 도끼가 파괴력면에서 우월했던 점 등을 고려하자면, 주무기라기 보다는 즐겨쓰는 무기 중 하나로 봐야할 것이다.김리?
  13. 김인문이 사후 효소왕에 의해 태대각간으로 추증되긴 했다. 그러나 사후까지 따지자면 김유신은 아예 경주김씨 왕들과 동급인 흥무대왕으로 추봉되었으니, 신하의 자리에서 왕이 된 격이라 전무후무한 기록을 가진 건 마찬가지다.
  14. 이 일화를 담고자 함인지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김유신이 꾸준히 바위를 내려치는 수련 끝에 결국 갈라버리는 장면이 있다.
  15. 국가에서 현판을 내려주는 것으로 사립학교격인 서원에 대한 일종의 국가 공인인 셈이다.
  16. 지금의 서악서원의 전신으로 원래는 김유신 한 사람을 위해 지어졌던 것이 설총과 최치원까지 모시게 되었다.
  17. 서악정사의 사액이 조정에 건의된 것은 인조 1년(1601년)의 일이다.
  18. 신라에서 삼촌간의 결혼은 흔하다. 왕족 가계도를 보면 오히려 삼촌간에 결혼하지 않은 케이스를 찾는 것이 더 어려울 정도
  19. 김유신의 자식 중 가장 유명해서 김원술을 주인공으로 하는 희곡이 과거에 중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리기도 했음.
  20. 드라마 대왕의 꿈에서는 이 설을 적용했다. 재매부인을 지소부인과 동일인물로 보는 해석도 있으며, 김유신의 친척이라는 해석도 있다.
  21. 2016년 경주 지진으로 안전을 위해 경주국립공원 토함산, 남산, 단석산, 무장산 등의 지역이 출입금지로 설정되었다. # 출입금지 해제되면 본 틀 삭제요망.
  22. 이병도의 설에 반박을 제기했던 김상기 박사의 지적이다.
  23. 이것은 2011년에 작고한 故 이근직 교수(전 경주대학교 문화재학과)의 설. 사후 이근직 본인의 주장을 담은 《신라왕릉연구》가 2012년에 출간되었다. 이근직은 아예 경주에 왕릉이라고 전해지는 가운데 7기(27대 선덕여왕릉, 29대 태종무열왕릉, 30대 문무왕릉(대왕암), 33대 성덕왕릉, 38대 원성왕릉(괘릉), 41대 헌덕왕릉, 42대 흥덕왕릉)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그 비정이 잘못되었으며(실제로는 다른 왕의 무덤이거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왕족 또는 귀족 인사의 무덤일 것이라고 추정) 영원히 사라져버린 왕릉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한 그의 주장 때문에 故 이근직 교수 본인께서는 생전에 박, 석, 김씨 이렇게 세 문중에서 항의도 많이 받으셨다고. 이근직 교수는 애석하게도 2011년 6월 17일 아침 경주대학교 앞 사거리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하셨다. 고인의 유고가 된 신라왕릉연구는 고인이 생전에 쓰셨던 영남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신라 왕릉의 기원과 변천'을 단행본으로 출판하고자 수정과 보완을 거듭해 편집까지 완료한 상태로 PC에 남아 있었고, 미망인 주진옥 씨와 그와 같은 연구실에서 공부한 동료가 찾아냄으로써 출판되었다고.
  24. 사실 이 부분은 어른의 사정 탓이 더 크다.어디 안 그런 게 있겠느냐마는 당장 문중 입장에서도 지금까지 조상 무덤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었던 무덤이 실은 딴 사람 무덤이고 진짜 조상 무덤은 다른 곳에 있거나 아주 영영 잃어버렸을지 모른다고 하니 섣불리 받아들이기 어렵고, 무엇보다 관공서 입장에서는 학설 하나에 그 많은 안내책자며 지도, 안내판, 심지어 교과서 사진 및 설명까지 죄다 뜯어고쳐야 하는데 하루 아침에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상황.
  25. 사실 김유신 열전은 원본이 대하소설이 맞다. 애초에 김유신의 현손 김장청이 쓴 행록은 무려 10권 짜리였다고 한다.
  26. 649년(진덕여왕 3년)부터 신라는 중국 조정의 의관을 입기 시작했다. 여담이지만 19세기 조선 말기에도 메이지 유신 이후 서구식 제복으로 바꾸고 찾아와 대등한 수교를 요구하는 일본 관리를 조선 관헌들이 보고 "일본도 오랑캐가 되었다"며 놀라 내쫓는 사건이 벌어진다.역사는 되풀이된다
  27. 웃긴 건 일본도 당의 엄청난 국력을 경험하고한 번 데고 나서는 자발적으로 당풍 복식과 제도를 적극 수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28. 일본서기 권25 고토쿠 천황. 원문 - 이 해(652년) 신라(新羅)의 공조사(貢調使)인 지만(知萬) 사찬(沙飡) 등이 당나라의 옷을 입고 츠쿠시(筑紫)에 이르렀다. 조정에서 함부로 풍속을 바꾼 것을 싫어하여 꾸짖고 돌려 보냈다. 그 때 巨勢大臣이 “지금 신라를 정벌하지 않으면 나중에 반드시 후회할 것입니다. 그 정벌하는 상황은 모든 힘을 다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니와진(難波津, 현 오사카)으로부터 츠쿠시해(筑紫海, 현 후쿠오카 해협) 가운데까지 서로 이어지도록 배를 가득 띄우고 신라를 불러 그 죄를 묻는다면 쉽게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청하였다.
  29. 일각에서는 한산도대첩이 있었지만, 당시 일본군은 여전히 평양성에 주둔하고 있었던 상황에 비유하면서 이순신도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전황을 못바꿨다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 예는 적절하지 않다. 한산도 해전 이후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남해안을 완벽하게 장악해버렸고, 이 때문에 "육군은 빠르게 진격해 왕을 사로잡고 서해안을 통해 보급을 한다"라는 일본군 전략이 완전히 틀어져 버렸다. 평양성에서 더이상 진격하지 못한 것은 일본군은 보급 문제로 더이상 북쪽으로 진격 할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 한산대첩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수군에게 해전 금지령을 내린다. 애초 수륙병진이라는 일본군의 기본 전술을 완전히 바꿔버리고, 금지시킨 승리가 바로 한산대첩이다.
  30. 이 때문에 이순신과의 비교가 이루어 지기도 한다.
  31. 물론 이렇게 하면 김춘추가 결혼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벌인 계략이긴 하지만, 선덕여왕이 나서지 않았다면...물론 이조차도 선덕여왕과 김유신이 짜고 친 고스톱이라는 의혹(?)이 있다...
  32. ~이후 큰 공을 세워 명예를 회복했는데도 용서하지 않았다.~이 부분은 사실과 약간 다르다. 원술이 명예회복을 했을때 김유신은 이미 죽어서 용서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에피소드는 '원술랑'이라는 희곡으로 재구성되기도 했다.
  33. 삼국지의 관우와 제갈량 그리고 악비를 대입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 이다. 비록 셋과 달리 비극적으로 운명을 마치지 않았지만, 절망의 가까운 상황에서 필사적으로 싸워 나라를 지켜내고 불가능할 것 같은 상황을 해결해내는 등 충분히 영웅적 행위를 해 왔다. 그런 그의 모습은 민중에게는 오늘날에 이순신장군처럼 숭배 받았을 것 이다. 그리고 여기에 살이 붙어 과장이 섞인 김유신이 탄생했을 것 이다. 하지만 이는 당시 김유신의 위상이 높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34. 여담이지만 이 사이트에는 이순신 장군도 올라온 적이 있다. 이순신 항목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