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직

義直
생몰년도 미상

1 개요

삼국시대 백제의 장군. 의자왕 대의 장군이다. 성씨는 불명. 삼국사기에 몇 차례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2 생애

647년 보기 3천명을 이끌고 신라 무산성(전북 무주)에 주둔하고 감물(경북 김천)-동잠(경북 구미) 2성을 공격했다. 그러자 신라는 김유신을 필두로 보기 1만을 보내 맞붙게 하는데 1만의 신라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비령자 등의 희생과 김유신의 결사항전으로 백제군은 대패, 의직 본인만 겨우 살아서 돌아갔다.

648년 3월 다시 군사를 이끌고 요거성(현재의 상주) 등 10여성을 함락시켰다. 그 기세를 몰아 4월 옥문곡으로 진격했으나 김유신과 두 번 싸워 패배하고 군사 1천과 장수 8명이 포로로 잡혔다. 김유신 열전에 따르면 648년의 전투는 백제, 신라 본기의 내용과는 달리 김유신이 대야성을 탈환하기 위해 일어났으며 신라군은 거짓 패배로 백제군을 옥문곡으로 끌어들인 뒤 습격으로 이겼다고 되어있다. 김유신의 본진인 압독주를 기준으로 요거성은 북서쪽에 위치해있고 대야성은 남서쪽에 위치해 있는 만큼 본기와 열전은 전투의 시작지점부터 격차가 심하다. 때문에 김유신 열전의 내용은 초반에 상주 일대의 10여 성을 빼앗긴 사실을 감추기 위한 각색일 가능성이 높다. 상주도 본시 김유신이 담당하던 지역이었던 만큼 상주를 빼앗긴 자체가 김유신의 전적에 있어서 흑역사가 되기 때문이다.

660년 당나라-신라 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하자 군신회의에서 당군을 먼저 선공하자는 주장을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백강에서 당과 전투를 치루기 했지만 당군의 상륙을 저지하거나 기습하지 않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때의 관등은 좌평으로, 백제 대성팔족 못지않는 고위 귀족이였을 것으로 보여진다. 이도학 교수는 의자왕 즉위 초부터 백제 멸망시 까지 줄곧 좌평직에 있었으며 의자왕의 이름인 '의자'와 이름 앞글자가 같으며 유교식 이름인 점을 들어 의직을 의자왕의 동생이라고 추측하였다.

백제 멸망 후 같은 관등의 좌평인 충상, 상영황산벌 전투 후 신라의 포로로, 좌평 각가, 사택천복, 사택손등, 국변성은 기록상 당의 포로가 되는데 의직의 행방은 전혀 알 수 없다. 전쟁 중 사비성 부근에서 나당 연합군과 백제군이 대규모 교전을 벌여 백제군 사망자만 1만여명에 달했는데[1] 이 과정에서 전사했거나 다른 관료들처럼 당군에게 끌려갔을 가능성이 높다.

3 기타

신라를 침공해서 전공을 세웠으나 하필 격퇴하러 온 상대가 김유신이라 이 묻힌 감이 있다. 그래도 김유신을 고전시킬 정도였으니 뛰어난 용병술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의직이 1만의 군사로 당군을 요격하다가 전사했다고 주장했지만 문헌의 출처를 알 수 없어 신빙성이 낮다. 다만 대중에게 이 내용이 많이 퍼졌다. 안정복의 동사강목에서는 이름이 '의진(義眞)'으로 나오는데, 안정복의 착오로 보여진다.

2006년 7월의 호국인물로 선정되었다.

대중매체에선 드라마 삼국기, 계백, 대왕의 꿈에서 등장하지만 조연으로만 등장한다. 삼국기에서는 백제의 사비성이 함락될 당시에 당나라 군대에 끝까지 저항하다가 결국 전사한 것으로 그려진다. 한편 계백 마지막화에선 '당군과 싸우다 전사했다'고 백제군의 보고로 나오면서 최후도 그려지지 않았고 대왕의 꿈에선 648년 대야성 전투에서 윤충과 함께 전사하여 광탈된다(...)

계백전이라는 게임에선 궁기병으로 나온다. 처음엔 계백을 못마땅하게 여기지만 점차 계백을 인정하게 된다.
  1. 위치 미상. 이도학 교수는 당군이 사비성을 공략하기 위해 금강 남안에 상륙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두고 군산시 오성산으로 비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