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역대 황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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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사두정치 | 콘스탄티누스 왕조 | 콘스탄티누스 왕조 |
목차
1 개요
역사상 가장 유명한 로마 황제 중 한 명인 콘스탄티누스 1세의 셋째 아들. 재위 337 ~ 361년.
2 생애
2.1 3형제가 통치하던 시기
원래 콘스탄티누스 1세는 자신의 사후, 제국을 그의 세 자식과 조카 둘에게 나눠 통치하게 하려고 했으나 자식들이 조카 두 명을 살해함으로써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 그 후 조카들의 담당 구역은 콘스탄티우스 2세와 막내 콘스탄스의 휘하에 들어가게 된다.
이에 불만을 품은 콘스탄티누스 2세가 바로 옆 지역을 담당하고 있던 콘스탄스에게 북아프리카의 통치권을 요구했지만 콘스탄스는 무시했고, 결국 340년에 콘스탄티누스 2세가 쳐들어왔다가 전투에서 패배하고는 살해되고 말았다. 해서 콘스탄티누스 2세가 통치하던 지역은 콘스탄스의 영역이 되고 이후에는 막내인 콘스탄스가 사실상 선임 황제가 되고 마는데, 콘스탄티우스 2세는 아리우스파였던 반면 콘스탄스는 아타나시우스파에 기울어지고 있었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역대 동서 분할 제국 중 가장 크고 강력한 서로마 제국을[1] 통치하는 콘스탄스에게 압도되어, 생전에는 아타나시우스파에게 함부로 하질 못했다. 아타나시우스파를 탄압하자 콘스탄스가 대군을 이끌고 "항의"하러 왔을 때는 아무 소리도 못하고 그 조치를 철회해야만 했던 일도 있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콘스탄티우스 2세는 그런 상황에서도 전력을 기울여 제국 방어에 전념하고, 그러던 중 콘스탄스가 350년도에, 야심만만한 휘하 장수 마그넨티우스에게 살해된다.
2.2 마그넨티우스의 반란 이후
그 당시 사산조 페르시아와 전쟁 중이던 콘스탄티우스 2세는 서둘러 페르시아와 강화를 맺고 반란 진압에 나선다. 마그넨티우스가 반란을 일으킬 당시에 도나우 강 중류를 담당하고 있던 사령관 베트라니오도 황제로 들어섰기 때문에 콘스탄스가 통치하던 지역에 황제가 둘이나 있었다. 삼국지 2 베트라니오에 대해서는 항복을 귄유하여 그 휘하의 병사들을 흡수하였지만, 마그넨티우스에 대해서는 3년 동안 내전을 벌여 마그넨티우스 휘하의 병사들의 2/3 이상이 죽고 마그넨티우스는 결국 자살하게 된다.
그 사이에 혹시라도 있을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대비해 콘스탄티우스 2세는 카파도키아 지역에 유폐해두고 있었던 사촌[2] 갈루스를 351년에 부제로 임명해 동방을 담당하게 했다. 하지만 갈루스는 오랜 유폐 생활로 콘스탄티우스 2세를 끊임없이 경계하고 혐오했으며, 결국 마그넨티우스의 반란이 진압된 이후 354년에 정제 살해 음모죄로 처형되었다.
2.3 뛰어난 내치 능력과 탁월한 조직력을 겸비했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와는 달리 군사적으로는 영 자질이 없었지만, 조직력이 뛰어났고 책임감도 대단했다. 내치와 법률 집행에 관심을 두고 직접 관리했으며, 관료들의 탐학을 막는 법률도 여러 차례 제정했다. 야전군 관리와 군인들 생활 상에도 관심이 많아, 황궁의 사치스런 생활을 즐겼던 동생 콘스탄스와는 달리 국경 지대 순행에 열의를 쏟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궁에 있던 시간은 의외로 얼마 되지 않았으며, 때문에 역시 콘스탄스와는 달리 야전군을 확고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로마인 이야기에서는 그를 자기보다 뛰어난 이들을 제거하는 권모술수만 능하고 자랑거리는 집착하며, 자랑할 건 혈통 밖엔 없고 능력 있는 장교 숙청에 열을 올린 암군으로만 그리고 있으나,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정치적, 군사적 공헌을 무시하고 단점만 부각시키는 이런 짓은 왜곡과 오류,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거기서 묘사되는 특유의 성격적 결함과 음험함 그리고 군사 지휘력의 무능함은 어느 정도 사실이지만, 갈수록 강해지는 사산조를 상대하고, 중앙군을 강화하려면 황제 직속의 야전군이 필요하다는 판단 하에, 프레센탈 야전군을 제1프레센탈군과 제2프레센탈군으로 증설 개편하여 두 배로 늘린 것은 바로 콘스탄티우스 2세다.
콘스탄티우스 2세의 이 군 조직 개편은 이후로 무려 사백 년 넘게 기본 틀을 유지하게 된다! 또한 그전까진 그저 말을 탄 보병에 불과했던 제국 기병들이 정말로 말을 타고 싸우는 기병이 되기 시작한 게 그의 치하에서부터며, 기병의 비율을 대폭 늘린 것도 그의 조치다.
아미다를 잃은 것이 로마인 이야기에서는 집중적으로 부각되는데, 콘스탄티우스가 다스렸던 동방 제국은 역대 분할통치 동로마 제국들 중 가장 최약체[3]였음을 유념해야 한다.
일리리쿰 속주가 없는 건 그렇다치더라도 아카이아와 마케도니아 속주까지 죄다 서방 제국에게 넘겨준 상태의 동방 제국을 가지고, 한창 다시 무시무시한 상승세를 타고 있었던 사산조 페르시아에게 한치도 밀리지 않는 대등한 승부를 벌인 것은 콘스탄티우스 2세의 조직력과 행정적인 수완 덕택이었다. 때문에 한참 전성기에 있었고 또 역대 가장 뛰어난 장군 황제를 보유했던 사산조 페르시아와 샤푸르 2세[4]는, 성장 동력만 낭비한채 세월만 보내게 된다.
2.4 부제 율리아누스
갈루스를 처형한 다음, 355년에는 갈루스의 동생이었던 율리아누스를 부제로 임명하여 갈리아를 담당하게 한다. 이후 악조건에서도 율리아누스가 활약하는 동안, 도나우 강 일대와 동방을 담당하면서 정제로서 통치했다.
359년, 사산조 페르시아의 재침공으로 제국 동방 방위선에 있던 아미다가 점령당하자 콘스탄티우스 2세는 반격에 나설 채비를 했고, 이 일환으로 부제 율리아누스의 주력 부대를 보내올 것을 요청했다. 이에 반발한 부제의 병사들이 율리아누스를 정제로 옹립하여 다시 내전이 시작되게 되었다. 율리아누스 측이 먼저 움직임으로써 도나우 방위선의 병력까지 접수하고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쳐들어오던 와중에 중병이 들었고, 그 상태에서 세례를 받고 율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임명한 다음 숨을 거두었다.
2.5 아미다와 니시비스의 후일담
세베루스 황제 이후로 확고히 로마의 영토로 확립되었던 니시비스는 오히려 율리아누스의 원정 실패로 사산조 페르시아에게 넘어간 후론 영영 로마의 품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반면 아미다는 이후에 제국이 도로 페르시아에게서 빼앗아오게 되며, 아랍에게 빼앗긴 후에도 9~10세기의 반격기에 수복하여 적어도 바실리우스 2세치하까진 제국의 수중에 있게 된다.- ↑ 동서 간에 늘 논란의 대상이었던 일리리쿰에, 아카이아와 마케도니아 속주까지 가지고 있었다! 동방의 경제력이 더 우세했다는 점을 미뤄보면 적어도 경제적인 면에선 1:1로 나눠가진 셈이지만 군사력과 인구적인 면으로는 확실히 압도적인, 다시 말하자면 콘스탄티우스 2세에겐 극도로 불공평한 분할이었다.
- ↑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는 배다른 동생이 둘 있었고, 이들 중 첫째에게서 난 두 조카는 사후 공동 황제로 정했으나 콘스탄티누스의 아들들에게 살해당했다. 당시 나이가 어렸던 둘째 동생의 자식들은 유폐되어 있었다. 사실 이들은 모계쪽으로도 친척이고 이렇게 보면 콘스탄티우스 2세가 두 형제의 당숙. 율리아누스 형제의 할머니인 테오도라는 콘스탄티우스 2세의 모친인 파우스티나의 씨다른 언니였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계모의 여동생을 아내로 맞이해서 족보가 꼬였다.
- ↑ 리키니우스가 콘스탄티누스에게 한 차례 크게 패하고 난 다음 보전했던 영역과 정확히 일치하긴 하지만, 그때의 그 상태는 평화적인 분할이 아니라 일종의 휴전 상태라 제외함이 옳다.
- ↑ 콘스탄티우스 2세 때문에 인생이 크게 꼬인 또 한명의 불운한 명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