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역대 황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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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 왕조 | 콘스탄티누스 왕조 | [1] |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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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신들과 인간들의 어머니이시여. 위대한 제우스와 왕위를 공유하는 분이시여. ······ 오, 생명을 주시는 여신이시여. 지혜이자 섭리이자 우리 영혼의 창조자이시여. ······ 모든 인간에게 신들이 누리는 최고의 행복을 주시고, 로마인들이 스스로에게서 불경스러운 부분을 정화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율리아누스, 대모신 키벨레에게 바치는 찬가- |
플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율리아누스.(Flavius Claudius Julianus) 재위 361년 ~ 363년 6월 26일. 흔히 배교자 율리아누스(Iulianus Apostata, Julian the Apostate)라고 불리는 황제다.
1 불행한 어린 시절
율리아누스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조카다.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황제로 임명되면서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헬레나와 이혼하고 서방 정제 막시미아누스의 의붓딸인 테오도라와 재혼하는데, 그 사이에서 아들 둘을 보았으며 그 중에 한명인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가 두번째 아내에게서 본 둘째 아들이다. 그가 첫번째 아내에게서 본 첫째 아들은 갈루스. 이 둘은 그러니까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이복 동생의 아들이 되는데, 이런 미묘한 위치가 율리아누스와 갈루스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는 조카가 넷이 있었는데, 그 중에 나이가 어렸던 갈루스와 율리아누스를 제외한 두 사람을 자신의 세 아들과 함께 공동 후계자로 삼아 제국을 다섯등분하여 다스리게 할 예정이었다. 제국의 혼란기이니만큼 황제가 많으면 그만큼 방어에 유리하기도 하고, 두 조카가 두 황제의 후손이기 때문에 내란의 우려가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 1세가 죽은 후, 갑작스레 닥친 숙청[2]으로 인해 수십여명이 살해되었고, 이 때 차기 황제인 두 조카와 콘스탄티누스의 두 이복 동생도 살해되었다. 겨우 살아남은 율리아누스와 갈루스는 그 당시 나이가 고작 6세와 12세였다.
이렇게 고아가 되어버린 두 형제는 어린 시절을 니코메디아에서 동방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의 감시 하에 지냈다. 콘스탄티우스가 아리우스파였기 때문에 유명한 아리우스파 성직자였던 에우세비오스에게 기독교 교육을 받으면서 세례까지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와 함께 스키타이 출신의 고트족 거세 노예였던 마르도니우스에게서 고전 문학과 철학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이 때 당시에 받았던 교육은 율리아누스의 인격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생애 전반에 걸쳐 그 영향이 드러난다.
이렇게 6년을 지내다가 342년, 이들은 카파도키아의 마르켈룸에 유폐되고 만다. 콘스탄티우스의 감시가 워낙에 철저했던 탓에, 이들은 바깥 세계와 격리되다시피 한 생활을 해야 했다. 거의 감금된 거나 다름 없는 상황에서 형제들의 선생님이었던 마르도니우스도 오지 못하게 했기에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했고, 물론 친구도 노예의 자식 정도 밖에 없었던 삶이었다고 한다.
2 비극의 부제 갈루스
이러한 삶은 마그넨티우스가 로마의 두 황제 중 한명인 콘스탄스를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끝나게 된다. 콘스탄티우스는 한창 전쟁 중이던 사산조 페르시아와 강화를 맺고 반란 진압에 나섰으며, 그 때 동안 자기를 대신해서 동방을 맡아줄 부제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 부제의 자리에는 자신이 오랫동안 유폐해왔던 두 사촌 중에 형이었던 갈루스가 임명되었다. 그와 함께 율리아누스도 자유를 얻어 소아시아에서 철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자신이 바라던 삶을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율리아누스는 자유를 얻었지만, 갈루스는 그렇지 못했다. 콘스탄티우스의 누이동생이었던 콘스탄티나와 결혼하여촌수 꼬인다 안티오크를 수도로 삼아 동방 황제로서 통치를 하게 되었지만, 인생의 절반을 콘스탄티우스 때문에 억압받으며 살아왔던 갈루스는 그에 대한 분노가 장난이 아니었었다.
게다가 그의 아내가 된 콘스탄티나 또한 오빠 콘스탄티우스에 대한 분노가 컸었다. 그녀는 원래 아르메니아 왕국 지역의 황제가 되기로 했던 한니발리아누스의 아내로 황후가 될 예정이었으나 위에서 말했듯이 그는 숙청으로 살해당했고, 그 때문에 빡쳐서인지 한창 반란 중인 마그넨티우스에게 접근해서 그와 결혼하려고 한 적도 있었다.
이렇게 자기를 싫어하는 둘을 뭉쳐놨으니 콘스탄티우스도 당연히 갈루스를 열심히 견제해댔고, 이에 두 황제 사이의 갈등은 커져만 가고 동방은 갈수록 혼란에 빠진다. 시리아 속주 총독이 살해될 정도로 사태가 심각했던 안티오크의 대규모 식량 부족 사태라던가, 유대인들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도시 하나를 몰살시킨다던가,[3] 정제가 보낸 두 고관을 살해해서 오론테스 강에 시체를 던진다던가. 즉 그대로 내버려뒀다가는 갈루스만 욕먹는 걸로 끝나지 않고, 콘스탄티우스 자신의 통치 자체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 시기에는 제국민 모두가 속주민이 아니라 로마 시민권자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이 때문에 마그넨티우스의 반란이 진압된 후 콘스탄티우스는 갈루스를 제거하기로 마음 먹었고, 354년 갈루스를 밀라노로 불러들인 다음 긴급히 체포하여 갈루스를 반란죄로 처형해버린다. 갈루스는 그 전에 자기 아내를 밀라노로 보냈었지만, 여행 중에 병이 들어 죽었다고 한다.
3 부제 율리아누스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갈루스의 동생이었던 율리아누스도 의심을 받아 밀라노로 불려오게 된다. 하지만 황후 에우세비아의 도움으로 황제와 직접 대면하여 자신을 변호함으로써 살아남아 그리스로 유학을 가게 된다. 하지만 반년 후 사산조 페르시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게 되고, 그렇다고 마그넨티우스의 반란 때문에 커다란 공백이 생긴 서방을 비워둘 수도 없었던 콘스탄티우스는 결국 그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남자 혈육이었던 율리아누스를 부제로 삼게 된다.
서방 부제가 된 율리아누스는 정제의 또 다른 여동생인 헬레나와 결혼했지만, 제대로 된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사산조와의 싸움을 위해 병력을 증강 중인 콘스탄티우스가, 자신이 죽인 삼촌의 아들이자 자신이 죽인 부제의 동생인데다 군사 경험은 커녕 일체의 공직 경력이 없는 일개 철학도에게 지원을 줄 여유는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아무런 지원 하나 받지 못한 채로 한겨울에 알프스를 지나 갈리아로 가게 된 율리아누스는, 모두의 우려와는 다르게 자신이 맡은 바를 잘해내게 된다. 제대로 지원도 받지 못하고 병력도 부족한 상황에서 갈리아의 군무장관인 살루스티우스의 도움을 받아, 그 적은 병력을 긁어모아 적극적으로 군사 활동을 펼치면서 견실하게 운영하여 5년 동안 4번의 원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담당 구역인 갈리아와 라인강 방어선의 게르만족들을 격퇴하였으며, 적극적인 감세 정책과 농경 활성화 정책으로 갈리아의 부흥을 꾀했다.
4 정제로 추대되다
부제 율리아누스가 기대 이상의 성과를 올리는 동안, 정제 콘스탄티우스는 도나우강 방어선을 지키면서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 페르시아 측이 국경지대에 있던 도시인 아미다를 점령하면서 국경선에 구멍이 나고, 이로 인해 큰 손실을 보면서 정제는 부제 율리아누스에게 지원병을 요청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율리아누스를 경계하고 견제하고 방해했던 이 정제는 이를 빌미로 크게 한방 먹일 생각이었고, 하필 이 때 쯤에 콘스탄티우스의 방해를 막아주던 부제의 황후 헬레나와 정제의 황후 에우세비아가 죽고 말았다.
그렇기 때문에 부제 율리아누스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요구[4]를 하게 된다. 하지만 정작 이 차출의 대상이 된 병사들이 동방으로 가는 걸 거부했다.(...) 오히려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이들 앞에 나선 율리아누스를 자기들 머리 위로 번쩍 들어올려 정제로 추대해버렸다. 그리고 율리아누스는 이들의 정제 추대를 받아들이고 콘스탄티우스와 맞서기로 함으로써 다시금 내전이 발발하게 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율리아누스는 정제에게 끊임없이 편지를 보내 해명하려 했고, 라인 강 너머의 야만족들과 싸우면서 1년을 보낸다. 그리고 콘스탄티우스가 페르시아와 강화를 맺고 기어이 자기를 치러 오자 재빨리 군사를 이끌고 시르미움에 도달하여 평화롭게 도나우 강 방어선을 손에 넣는다. 그렇게 로마 제국의 양대 정예를 손에 넣은 율리아누스는 정제와 한판 붙기 위해 군사를 편성해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하는데...
콘스탄티우스 2세가 덜컥 죽어버렸다(...). 갑작스레 병에 걸려 죽어가면서 콘스탄티우스 2세는 자신을 치러 오는 부제 율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목했다. 그는 자기 후계자를 얻기 위해 결혼을 세 번이나 하였으나, 그가 죽고 난 뒤에서나 태어난 유일한 아이는 여자아이였다고 한다. 이 여아는 이후 그라티아누스 황제 대에 황후가 된다.
5 정제 율리아누스
제위 찬탈자로 나섰다가 졸지에 정통 황제가 되어버린 율리아누스는 자신의 확고한 지위를 이용하여 로마 제국을 개혁하기 시작한다. 그 첫번째는 황궁의 입을 줄이는 것. 재정이 부족해서라기 보다는, 그 때 당시 황궁의 사치가 장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발사를 불렀더니 고관 대작의 행렬이라도 되어보이는 화려한 행차를 할 정도였다나. 그래서 쓸데없이 많은 고용인들을 모조리 쳐내고, 특히 환관들은 모조리 쫓아냈다고 한다. 물론 쓸모없는 인원들을 쳐내면서 이들에 들어가는 비용에 대해서도 손을 보았다. 또한 갈리아에서 했던 것과 같이, 재정 지출을 대폭 감소하고 정리한 다음 세금 감면책을 펼치고 복잡해져 있던 세금 체계를 간소화시키는 등의 세제 개혁을 펼쳤다.
5.1 배교자 율리아누스
하지만 무엇보다도 율리아누스를 유명하게 만든 개혁은, 바로 배교자 율리아누스라는 별명을 그에게 붙여준 반기독교 정책이다. 예전 황제들의 박해처럼 대놓고 사람을 잡아다 죽이는 식은 아니었지만, 한창 기독교화 되고 있는 로마 제국에 정반대 방향의 정책을 펼쳤다. 어쩌면 이 때문에 율리아누스가 죽었다고 봐도 될 정도로 그의 정책은 커다란 반발을 불러왔으며, 그가 만약 좀 더 오랫동안 통치했다면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기독교를 혐오하는 시오노 나나미 할머니가 그렇게도 이 사람을 이뻐하는 이유기도 하다. 그런데 기독교도 의 입장에서 봐도 오히려 불쌍하다는 느낌이 더 크다
우선 그는 모든 종교를 공인하는 칙령을 내린다. 이는 밀라노 칙령 이후로 한창 성장하는 기독교에 밀리고 있던 다른 종교에 숨통을 트여줬을 뿐만 아니라, 니케아 공의회 이후로 이단으로 몰리고 있단 기독교 내 다른 종파들에게도 믿음의 자유를 주었다. 이로 인해 기독교 내부로는 종파 간 다툼을 부추기고, 외부로는 다른 종교들의 재기를 노린 조치였다. 게다가 밀라노 칙령 이후로 사실상 면세였던 교회의 재산에도 세금을 매겼다. 밀라노 칙령 이후로 세금 감면을 받기 위해 교회에 재산을 바치거나 성직자가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러한 사례들을 끊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기존의 방치된 타 종교의 신전과 도중에 중단되었지만, 오래 전에 불타버린 예루살렘 신전들을 복구하고 지원을 해주어 다른 종교들의 제의를 부활시키고자 하였다.
하지만 단순히 기독교와 다른 종교 간의 균형만 맞춘 것이 아니라, 기독교에 대한 탄압도 열심히 가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기독교 교사들이 교재로 그리스 고전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률. 기독교도이면서 어떻게 이교도의 신들을 다룬 책으로 교육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인데, 이런 대놓고 벌이는 차별에 반대하는 이교도들도 많았다고 한다. 그 외에도 기독교도들을 공직에서 내쫓고, 황제 자신이 옛 로마 방식대로 희생제를 지냈으며, 교회가 불타고 주교가 추방되는 일도 빈번히 일어났다고 한다. 옛날에 이교도들의 성지였다는 이유로 교회에 우상을 세우고 성유물을 치워버리기도 했다고 하니, 율리아누스가 기독교에 얼마나 이를 갈고 있었는지 알 법 하다. 이러한 반기독교 정책은 이미 제국 내에서 상당한 기반을 구축한 기독교 세력의 거센 반발을 일으켰고, 로마의 기독교화를 부정적으로 보았던 에드워드 기번조차도 율리아누스가 좀 더 오래 살았다면 로마는 대규모 종교내전에 직면했을 것이라고 <로마제국쇠망사>에서 주장했다.
반기독교 정책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부분은, 전문 성직자와 교리를 갖춘 로마 종교의 창설이다. 아이러니한 이유는 신만 그리스 로마 신으로 바뀐 기독교 짝퉁였다. 거기에 황제 자신이 매우 금욕적인 사람이었고, 이런 까탈스러운 삶을 새로 생긴 종교의 성직자에게 강요했으며, 이런 건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게 그리스 로마 시절의 종교였다.[5] 그렇다보니 기독교를 싫어하는 만큼 율리아누스를 사랑하는 시오노 나나미도 이 부분은 로마 문명을 알기는 하냐면서 대차게 깐다.깔 건 깐다 치더라도 한참 후의 동방 변두리인이 그 시대의 로마인에게 로마 모른다고 까는 병크
5.2 동방 원정 그리고 전사 혹은 암살
363년 율리아누스는 전임 황제인 콘스탄티우스 2세가 준비하다가 끝내 이루지 못한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원정을 떠났다. 안티오키아에서 9만명의 병력을 모아 그중 3만명을 프로코피우스에게 주어 아르메니아로 보내고 거기서 아르메니아 동맹군과 합세해 북쪽에서 사산제국의 수도로 진격하게 했다. 율리아누스 자신은 직접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사산제국의 영토로 쳐들어가 몇번의 전투에서 승릭하고 사산의 수많은 도시들을 함락시키고 진군하였으며 트라야누스 황제가 250년 전에 만든 운하까지 이용하였다. 그러나 사산 왕조의 수도인 크테시폰에서 사산조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였다 게다가 프로코피우스의 제2군은 갈라진 지 50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율리아누스는 퇴각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퇴각의 행군중이던 6월 23일 사산 병력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율리아누스는 갑옷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전위와 훙위를 돌아다니며 용맹하게 싸우다가 적의 창에 복부를 깊숙이 찔렸다.[6] 율리아누스의 개인 주치의이자 친구였던 오리바시우스가 모든 조치를 다 취했으나 결국 부상을 치료할 수 없었고, 율리아누스는 향년 33세로 세상을 떠났다.
율리아누스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로마의 사산 제국 원정은 실패했고 로마 군단은 후임으로 율리아누스의 근위 대장 출신인이자 기독교인인 요비아누스를 황제로 세웠다. 요비아누스와 그 뒤를 이은 발렌티니아누스 1세, 발렌스의 치세에 율리아누스의 모든 반 기독교적인 정책은 폐기되었고, 로마 다신교적인 로마제국의 역사는 율리아누스를 끝으로 막을 내린 셈이 되었다- ↑ 율리아누스의 호위대장 출신으로, 제위에 오른지 7개월만에 사망한다.
- ↑ 기록으로 남은 정확한 이유는 없지만, 콘스탄티우스 2세가 손을 쓴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받는다. 하필 숙청이 있었을 때 그가 콘스탄티노플에 남아있었다는 이유도 있고, 황제의 혈육과 고관 대작이 죽은 커다란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처리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 ↑ 혹시나 해서 추가하자면 항복한 도시다. 게다가 아무리 로마군이라지만 성이 저항 끝에 함락되었다고 적군도 아니고 저항하지도 못하는 시민들을 무조건 죽이지는 않았다. 노예로 팔긴 했지만.
- ↑ 이 당시 율리아누스의 병력이 2만 가량인데, 그 중에서 부대(1000명)당 정예 300명을 차출하고 야만족 용병 4개 부대와 부제의 근위대에서도 인원을 차출해서 보내라고 요구했다. 그러니까 정예로 병력 반을 내놓으라고 했다.
- ↑ 원래 그 시절 종교는 과장 좀 섞어 하루 걸러 축제를 벌이는 게 종교 의식이다.
- ↑ 기독교도 로마 병사의 공격에 의해 배후에 창에 찔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율리아누스의 근위병은 갈리아에서 데려온 심복들이었기 때문에 확실치는 않지만, 당시 황제 근위대 가운데에는 기독교도도 상당히 많았다. 애당초 율리아누스가 갈리아에서 지휘하던 병력은 상술된 것처럼 2만이었지만 이때는 9만이었고, 심복들만 황제 근위대에 넣었다는 보장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