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누스 1세

로마의 역대 황제
제2차 사두정치콘스탄티누스 왕조콘스탄티누스 왕조
52대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53대 콘스탄티누스 1세54대 콘스탄티우스 2세
이름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아우렐리우스 콘스탄티누스
(Flavius Valerius Aurelius Constantinus)
출생지모이시아 수페리오르 속주 나이수스
생몰년도272년 2월 27일 ~ 337년 5월 22일 (65세)
재위기간306년 7월 25일 ~ 337년 5월 22일

그의 얼굴을 조각한 대표적인 상. 포로 로마노의 막센티우스 바실리카 내진에 놓여 있던 거상의 파편으로 현재 로마 카피톨리니 미술관 콘세르바토리 궁전 뜰에 놓여 있다. 근데 이상하리만치 분위기가 섬뜩하다.(…) 인간적인 개성보다 황제로서의 권위를 강조해 조각했다. 예전 흑백판 세계사 교과서에 실려있던 저 모습은 진짜 그로테스크. 현존한 파편을 토대로 원래의 크기를 추정한 결과, 12m 높이의 좌상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1] 추정 복원도

그러한 불경스러운 태도가 인류에게 만연하고 국가는 파멸의 위협을 맞았으니, 하느님께서는 어떤 대책을 강구하셨겠는가? ······ 나 자신이 바로 하느님께서 택하신 도구였다. ······ 그리하여, 해가 자연의 법칙에 순종하여 수평선 아래로 가라앉는 먼 브리타니아의 바다에서부터 시작하여 나는 하느님의 도움으로 당시 만연한 온갖 형태의 악을 내쫓고 없앴다. 그것은 바로 인류가 나를 통해 깨달음을 얻고 하느님의 성스러운 법에 제대로 순종토록 하기 위해서였다.

ㅡ 콘스탄티누스 대제, 에우세비우스의 <콘스탄티누스의 생애(De Vita Constantini>에서 인용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완성되자 다른 도시들은 거의 모두 벌거벗은 상태가 되었다.

ㅡ 성 예로니모

1 개요

로마 제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황제 중 하나로(재위 306년-337년), 그리스도교 공인으로 인해 후세에 미친 영향이 가장 크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황제. 하지만 그게 아니라도 그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체제를 재정비하여 제국을 안정화시킨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그의 업적이 로마 제국 전체를 장기간 존속시키지 못한 것은 내외부적인 문제가 겹친 결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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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제의 칭호를 얻은 네 황제(콘스탄티누스, 테오도시우스, 유스티니아누스, 마누일) 중 하나며, 정교회오리엔트 정교회(단성론 교회들)랑 경교에서 성인으로 시성(성 콘스탄티노스 대제, Μέγας Κωνσταντίνος)하기도 한 황제다.

4두 정치의 혼란으로 내전에 빠졌던 제국을 평정했고, 옛 비잔티움 자리에 훗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더 유명해진 로마 노바를 건설했다. 학자들 중 일부는 동로마 제국 즉, 비잔티움 제국의 시초를 이때로 잡기도 한다.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교를 공인하고 니케아 공의회를 열어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지목했다.

사진의 흉상은 공화정이나 오현제 시절의 흉상에 비해서는 조잡하고 기괴해 보이지만, 동방의 전제군주제를 받아들여 나름 보통 사람들을 초월한 모습을 담고있는 모습이라고 한다. 그리고 미술학계의 추정으로는 저 조각은 원래는 정면으로 보는 것만을 고려하고, 조각의 뒷부분이 소실되었기에 비례적으로 안 맞아 보이는 것뿐이라고 한다. 머리가 조금 크고 과장된 것 외엔, 그냥 정상적인 조각상이 맞다.

최초로 대제 칭호를 받은 황제기도 하며, 이는 그리스도교 를 공인한 것도 이유지만 그 전에 확립한 이런저런 획기적인 업적도 무시하지 못함을 반드시 알아둬야 한다. 콘스탄티누스가 제시한 그리스도교 제국으로의 길이 이후의 역사에 끼친 영향은 원수정기의 황제들을 능가하며,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체제 개편 작업을 완성했고, 사회 다방면에서 개혁을 주도했으며, 비잔티움으로의 천도를 단행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제국의 역사를 천 년이나 연장시켰음은 아주 중요하다. 그리스도교 공인을 등에 업고 대제가 된 것만은 아니며, 설령 그렇지 않았어도 그가 제국에 끼친 거대한 영향을 고려하면 대제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한국인들의 로마 역사 인식에 많은 부분에서 바람직하지 못한 영향을 미친 시오노 나나미 여사의 로마인 이야기에서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이 황제를 부당하게 이상한 측면만 부각한 바람에 듣보잡 황제보다 조금 나은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서구는 물론이고 학계에서도 대단히 중요하게 여겨지는 황제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본격적으로 체계를 잡기 시작한 후기 로마 제국의 제도와 정치 그리고 군사 개혁은 콘스탄티누스 때 와서 완성되어 제국이 이후로도 여러 세월 동안 버틴 저력을 불어넣었다. 시오노 나나미는 카이사르는 이후 로마 제국의 300년 번영기의 초석을 놓았다고 극찬했는데, 정작 콘스탄티누스는 이후 동로마 제국이 천 년간 버틸 수 있게 한 국가체제를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도 시오노가 콘스탄티누스를 듣보잡 황제보다 조금 더 나았을 뿐이라고 하는 건, 일본 신토에 대한 근거 없는 우월감과 기독교에 대한 혐오[2]가 겹친 심각한 왜곡이다.[3]

다만 균형을 잡기 위해 언급하자면, 이 황제가 기독교측 탓에 이런저런 과대평가된 면은 분명히 있다. 기독교 입장에서는 박해를 종료해준 황제이기에 "크고 아름다운 믿음을 보여준 성인(聖人)"으로 미화를 한 역사가 있는데, 특히 이런 경향은 비잔티움 제국과 동방교회에서 강했고 정교회에서는 아예 공식적으로 성인(聖人)이다. 그러나 실제 인물과는 백만 광년 정도 거리 있는 서술.[4] 한마디로 항우나 삼국지연의의 여포형에 매우 가까운 맹장형 군주한테 공자 같은 이미지를 뒤집어씌운 것이다.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도 그가 보인 태도는,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시끄러우니까 어떻게든 빨리 결론 좀 내라"에 가까웠다. 또한 콘스탄티누스의 개혁 조치들을 보면 대체로 스스로가 뭔가를 창의적으로 고안한 건 거의 없으며, 주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만들어놓은 궤도를 주로 따라갔기에 정치가로서의 창의성은 높이 쳐줄 수 없다. 기독교를 다룰 때도 영 서툴렀는데 이는 나쁘진 않지만 그렇다고 썩 뛰어나다곤 볼 수 없는 학식이 주로 이유다.[5] 황제로서 그만하면 괜찮은 편이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나 하드리아누스 같은 이들과 비교할 때는 떨어진다는 얘기.

장군으로서의 재능이 뛰어났고 그만한 전공을 세운 건 분명하지만, 카이사르나 스피키오처럼 후대에서도 충분히 참조가 가능한 창의적인 전략전술을 보이는 유형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일신의 엄청난 개인 전투력과 그 옆에서 수족처럼 따라다니는 최정예들을 데리고 무식무모한 정면돌파를 통해 대장부터 격살하거나 적 대열 중 가장 강한 부분부터 초반부터 무너뜨려 승리를 얻어내는 맹장이었다. 또한 게르만 야만족들에게도 필요이상으로 대단히 잔혹한 조치[6]를 취했는데, 그런데도 게르만 동맹 야만부족장들에게 큰 경외를 받은 바 있었다. 항우나 삼국지연의의 여포에게 매우 익숙한 한국인들이라면 오히려 콘스탄티누스가 대강 어떠한 인물이었는지 감이 오겠지만, 이런 유의 맹장에게 그렇게 익숙하지 않았던 당대 로마인들에겐 몹시도 불가사의하게 여겨졌던 부분이고, 전략전술에 관심이 있는 입장에선 딱히 이론화하거나 분석할 여지가 적게 여겨진다.

그의 진가는 굉장히 탁월한 조직력, 제국의 복잡한 행정을 여간하면 혼자서 다 감당했던 강한 책임감과 열정[7], 한 번 마음먹은 건 포기하지 않고 밀어붙이는 뚝심, 당장 해야 할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면 그 후엔 흔들리지 않는 결단력 등에 있다. 이런건 통치자로서 기본 아니냐고 하겠지만, 기본이 다 되어 있는 통치자가 드문 것 또한 인류 역사의 현실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시작한 제국 개편을 끝까지 뚝심 있고 일관되게 밀어붙여 끝장을 보는 것도, 말로는 쉽지만 콘스탄티누스가 아닌 다른 누구라도 할 수 있었다곤 결코 장담할 수 없다. 또한 정치나 군사, 행정, 종교 분야에서 콘스탄티누스보다 뛰어난 황제는 적지 않지만, 저 분야들을 그럭저럭 문제없이 다 커버할 수 있었던 황제는 드문 게 사실. 로마사에서 꽤 특이한 유형인 콘스탄티누스 같은 맹장형항우형군주는 이후 약 650여년이 지나서야 다시 등장하게 된다.[8]

2 생애

2.1 즉위 이전

4세기에 만든 흉상

272년(또는 273년) 2월 27일 로마 제국의 모이시아 수페리오르 속주(현재의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의 나이수스에서 장군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와 그의 첫째 부인 헬레나[9] 사이에서 태어났다. 모친이었던 헬레나의 출신은 불분명하며, 콘스탄티누스 대제에게 적대적인 측의 자료에선 창녀였다고 폄하하지만 정치적인 반대편에서 활용한 적도 없기에 이 설은 콘스탄티누스가 단독 황제가 된 이래로 나온 헬레나도 귀족 집 딸 자손이었다는 얘기와 맞먹는 낭설이다. 때문에 헬레나가 선술집 딸이었다는 전승이 현재로서는 가장 설득력이 높다.

292년 4두정치의 수립으로 인해 부제에 오른 그의 아버지는 정략적 이유로 인해 헬레나를 버리고 제국 서방 구역의 정제인 막시미아누스의 딸인 테오도라와 결혼하자, 자신은 일종의 인질로서 동방 정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휘하로 들어가 복무하게 된다. 콘스탄티누스는 이 동안 디오클레티아누스 밑에서 고급 장교까지 승진했고,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상당한 활약을 했었으며,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퇴위 후 새로운 부제 후보가 들먹여지자 사람들 사이에서 잠시 이름이 오르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의 동반 은퇴 이후 부제였던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가 정제의 위치에 오르자 부제가 된 건, 갈레리우스의 부하 장교인 세베루스와 갈레리우스의 생질인 막시미누스 다이아였다. 콘스탄티우스의 장성한 아들이긴 했으나 이혼당한 처의 아들이란 이유 탓에 상당히 취약한 위치였음에도 당시부터 은근히 주목을 모으던 콘스탄티누스에게 갈레리우스가 상당한 경계심을 보였고,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아나톨리아 지역을 갈레리우스에게 넘겨주는 바람에 콘스탄티누스는 갈레리우스 밑에서 군생활을 해야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갈레리우스가 콘스탄티누스를 몹시 괴롭혔다는 일화들은 신빙성이 그다지 높지 않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갈레리우스가 콘스탄티누스를 콘스탄티우스에게 보내는 걸 대단히 꺼려할 수밖에 없었던 개연성은 대단히 높다.[10] 그러나 어쨌거나 명목상으론 선임 정제인 콘스탄티우스의 아들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갈레리우스가 언제까지나 거부할 순 없었고, 때문에 콘스탄티누스 1세는 갈리아에 있는 아버지 휘하로 돌아가 복무할 수 있었다. 1년 뒤 부친이 브리타니아 원정에서 병사하자 군인들의 추대를 받아 제위에 올랐고, 이때 남아 있던 유일한 정제인 갈레리우스는 콘스탄티누스 1세를 서방 부제로 인정하고 갈리아-브리타니아(갈리아 군관구)의 지배권을 공식 인정하기에 이른다.

콘스탄티누스의 영역이 된 이 지역은 지역적으론 넓어보이나 경제력에선 떨어지고, 동시에 다수의 이민족들이 노리는 곳이었다. 그러나 1차 4두정치때도 이 지역을 담당한 건 서방 부제였고, 콘스탄티누스도 우선 4두정치 안에 들어가는 공인받은 황제가 되어야 하므로 정제에서 부제로 강등되는 것을 일단 받아들였다.

2.2 4두정치의 혼란

라인 강 방어선 지역을 담당하게 된 콘스탄티누스 1세는 306년부터 316년까지 이 지역의 안정화에 힘쓰며 게르만족의 침입을 방어했다. 이때 그의 수도는 트리어였다. 이민족들에게 상당히 잔혹하게 굴어 포로로 잡은 이민족들을 죄다 원형경기장에 던져넣어 산채로 사자밥이 되기도 했고, 필요하다면 학살도 주저하지 않았으며 로마사에선 쉽사리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경관 비슷한 모양도 연출했다.

그동안 다른 지역은 4두정치가 그 한계를 드러내며 혼란에 빠져 있었다.

발단은 막시미아누스의 아들인 막센티우스였다. 오랫동안 정제였던 황제의 적자였던 자신은 제위에 오르지 못했는데 잠깐 정제였던 황제의 서자인 콘스탄티누스가 황제 중 하나가 되자 불만을 품은 막센티우스는 307년과 마찬가지로 4두정의 수립 이후 소외된 데 불만을 품은 로마 원로원과 근위병단의 지지를 받으며 봉기, 그의 아버지인 막시미아누스까지 이를 지원하고자 황제로 복귀하면서 로마 제국의 황제가 6명이 되는 상황이 초래된다.

서방 정제였던 발레리우스 세베루스[11]가 이를 진압하기 위해 달려왔지만 막센티우스를 지원하고자 황위로 복귀한 막시미아누스에게 참패, 로마로 압송되어 자결을 강요당하는 형태로 처형, 4두정치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와진다. 이런 사태에 직면해 처리하기 위해 동방 정제였던 갈레리우스까지 이탈리아 원정에 나섰으나 막시미아누스는 이 또한 격퇴한다.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308년 동방 정제인 갈레리우스는 전대 황제인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를 카르눈툼 군단기지로 초청, 회담을 가진 후 서방 정제로 갈레리우스의 친구였던 리키나우스를 올리게 된다.

여기에 불만을 품은 막센티우스는 막시미아누스와 심한 다툼을 벌이게 되고, 막시미아누스는 근위대가 도열해 있을 때 아들의 자줏빛 망토를 힘으로 벗겨 퇴위를 시도하지만 근위대는 막센티우스의 손을 들어주었다. 때문에 막시미아누스는 심하게 눈치를 보는 상황에 몰렸고, 트리어로 달아나서 자신의 딸인 파우스타와 콘스탄티누스 1세를 결혼시킨 후 콘스탄티누스를 아우구스투스로 선포하여 아들에게 빅엿을 먹인다. 콘스탄티누스는 이때 부제에서 정제로 승격된 셈이지만, 당시에 콘스탄티누스가 이를 대대적으로 선포한 바는 없으며, 막센티우스를 물리친 후 로마 원로원에게서 정제로 선포받는 절차를 공식으로 또 거친 것을 볼 땐 그렇게 이 조치에 무게를 두진 않았던 것 같지만, 이탈리아에서 황제를 자처하던 막센티우스의 입지를 지극히 흔들어놓기엔 충분했다. 막시미아누스는 이후 콘스탄티누스의 궁정에서 대단히 존경 받으며 영향력 있는 위치에 있게 되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콘스탄티누스 1세가 라인강을 침범한 이민족을 처리하기 위해 진격한 사이 쿠데타를 시도한다.(310년) 그러나 이를 눈치챈 콘스탄티누스의 역공으로 마실리아(마르세이유)에서, 자결을 강요받고 사망한다.

이후 311년 동방 정제 갈레리우스가 병사하자 리키니우스가 동방 정제로 취임하고, 콘스탄티누스는 그런 리키니우스와 동맹을 맺은 후 막센티우스를 제거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남하한다.

2.3 제국 재통합

군사적 재능에서 막센티우스보다 뛰어났던 콘스탄티누스는 우선 에스파니아 속주[12]를 손에 넣은 다음, 312년 초 알프스를 넘어 리노 전투, 베로나 전투에서 막센티우스 군을 연파한 후 밀비우스 다리 전투[13] 막센티우스를 전사시키고 제국 서부의 내전을 진압한다. 다만, 콘스탄티누스가 로마시에 입성하여 막센티우스의 어린 두 아들을 처형하도록 명령했다는 기번, 그리고 시오노 나나미의 서술은 그냥 틀린 얘기다. 막센티우스의 큰 아들은 밀비우스 다리 전투 훨씬 전에 죽었고, 둘째 아들은 콘스탄티누스측이 죽였는지가 확실치 않다.

콘스탄티누스가 밀비우스 다리 전투를 앞두고 십자가 꿈을 꾸는 중세의 기록화. [14]

제국 서부의 유일한 황제로 군림하게 된 콘스탄티누스는 마찬가지로 313년 초 자신에게 반항적이던 동방 부제인 막시미누스를 패사시킨 리키니우스와 정략결혼을 감행했는데, 콘스탄티누스의 여동생 콘스탄티아와 리키니우스가 결혼함으로서 혼인동맹을 맺고 공식적으로 제국을 양분해 통치하게 되며, 그 대표적인 결과가 그리스도교 공인으로 유명한 제국 관용 칙령, 즉 밀라노 칙령(313)이다.

그러나 이 제국 분할 또한 오래가지 못했다. 정략결혼에도 불구하고 314년부터 양측은 대립하기 시작해 결국 315년 동서 내전이 벌어진다. 315~316년에 펼처진 내전에서 콘스탄티누스는 리키니우스에게 우세를 점했고, 결국 317년 리키니우스의 통치영역에서 유럽 지역의 대부분을 할양받는 것으로 재차 평화협약을 맺는다. 이후 양측은 7년여 동안 평화를 유지하며 이민족의 공격을 방어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는데, 이때 콘스탄티누스 1세의 큰아들인 크리스푸스가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324년 양측은 다시 맞붙는다.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15]는 콘스탄티누스의 승리로 끝났고, 우세한 해군력을 통해 아시아 지역으로 건너오는 걸 막으려 했던 리키니우스의 계획은 크리스푸스에게 해군이 격파당하면서 무효화된다. 이후 소아시아에서 재차 지상전을 붙었지만 이 역시 콘스탄티누스의 승리로 돌아가면서 내전은 콘스탄티누스의 승리로 돌아가고, 리키니우스는 강제로 은퇴당했다가 1년여만에 고트족과 밀약을 맺었다는 이유로 처형된다.

이러한 장기간의 내전 끝애 콘스탄티누스는 4두정치의 실패로 인해 초래된 장기간의 내전을 끝마치고 324년, 제국 유일의 황제로 군림하게 되었다.

2.4 단독 황제로서의 통치와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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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전역을 통틀어 유일무이한 황제의 직위에 오른 콘스탄티누스는, 이후 13년 동안 로마 제국의 체제를 시대에 맞게 개혁하면서 통치한다.

그의 통치 기간에 주목해야할 사건들은 아리우스파를 공식적으로 부정하여 이후 그리스도교 역사의 큰 물줄기를 바꿔놓은 [16] 니케아 공의회(서기 325년)가 있었으며 공의회 직후인 326년에는 황실 내부의 큰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큰아들이자 내전 승리의 일등공신인 크리스푸스가 무자비한 고문 끝에 처형당하게 된 것. 공식적인 크리스푸스의 처형 사유는, 콘스탄티누스의 아내인 파우스타와 불륜 관계. 크리스푸스 사후 몇 개월 뒤에 파우스타 역시 뜨거운 욕탕에서 처형당했다.

단, 당시 세력을 키워가던 두 사람 모두를 제거하고 후계자를 새로 세우는 한편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콘스탄티누스가 직접 기획한 것으로 추정하는 건 대단한 무리다. 왕정 시대에 성년이 된 아들은 아버지에게 있어 후계자임과 동시에 정적이라지만 이 당시 로마 제국의 공동 황제 제도는 어느 한 쪽 방면에서 능력이 있는 부황제를 절실히 요구했고, 단독 아우구스투스가 된 콘스탄티누스는 그후 제국 운영에서 아들들에게도 상당 부분 권력을 위임했다. 따라서 크리스푸스가 경쟁자로 보일 것 같아서 처리했다는 이론은 설득력이 없다.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헬레나가 크리스푸스를 상당히 총애했고, 자신의 남편을 빼앗은 테오도라의 씨다른 동생 파우스타와는 대단히 불화가 심했던 건 사실이므로 기번이 서술한 대로 파우스타가 크리스푸스를 모함하고, 크리스푸스의 처형을 집행했지만 죄책감에 시달린 콘스탄티누스가 헬레나의 선동과 고발에 파우스타를 죽인 상황 자체는 대단히 개연성이 높다.

한편 콘스탄티누스는 이런저런 가정사의 불행에도 불구하고, 스케일이 크고 아름다운 웅장한 대업을 콘스탄티누스는 계획하고 있었다. '새로운 로마(Nova Roma)[17]'라는 이름의 신 수도를 건설하는 일이었다.

이미 324년 콘스탄티누스는 비잔티움 시를 신 수도로 삼겠다 공언한 바 있었고, 330년 그의 즉위 25주년 기념일에 맞춰 이를 완성시킨다.(덕분에 상당히 날림 공사가 이루어져 건물들이 꽤 자주 무너졌다고 한다. 원래부터 지진이 잦은 지역이므로 건물을 더 튼튼하게 지어도 모자랄 판국에… 실제로 아틸라가 콘스탄티노플 근처로 접근했을 때 지진에 성벽이 무너져서 동로마 고관들의 심장을 쫄깃하게 만들어 주는 일도 있었다.) 이것이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시초였다.[18]

이후 331년 사르마티아족과 고트족 사이의 분쟁에 개입해 재차 고트 전쟁이 벌어졌으며, 초기엔 모에시아 속주 일대가 약탈당하고 전투에서 패하기도 했지만 다시 이를 역전해 고트족을 격파하고, 원정대를 크림 반도로 파견해 케르소네수스인들의 협력을 받아 고트족의 본토라 할 수 있는 우크라이나 일대까지 공세를 가한 후 332년 평화협정을 맺었으며, 사르마티아족 역시 마찬가지로 굴복시키고 334년 이들을 속주 일대에 사민했다.

콘스탄티누스는 336년 재위 30주년 기념 축전을 열었으나 10달 후인 337년 5월에 사망했다. 죽기 직전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오에게 세례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당시 그리스도교인들의 전례를 따른 것으로 죽기 직전까지 세례를 받는 것을 미루어서 현세의 죄를 씻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를 두고 "일찍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었다면 그리스도교 특유의 역학관계에 따라 교회 지도층의 간섭을 받을 게 뻔해, 이를 피하기 위해 세례를 되도록 늦춘 게 아닐까"라는 해석을 했으나 이는 틀린 생각이다. 평신도라고 해도 황제 앞에서는 그 어떤 성직자도 결국은 신하였고, 훨씬 후대에 국세가 크게 떨어진 동로마 황제들이 로마 교황을 라벤나 총독부로 꼭두각시마냥 부렸던 것을 생각하자면 어불성실이다. 게다가 콘스탄티누스가 교회 지도층에 휘둘릴 정도로 만만한 인물은 아니었고, 암브로시오의 예를 들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정치적이었던 주교들도 훗날 가면 오히려 그리스도교 신자 황제들 밑에서 처형당하거나 고문당하거나 투옥당하거나 유배간다거나 사지 절단을 당한다면 이런 생각은 상당히 무리다.

사망할 때 그는 제국을 자식들에게 나누어 통치하게 했는데, 4두정치의 장점인 업무의 분담은 유지하면서 결점인 제국이 분할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피해 보려고 했던 것 같다. 허나 그가 계획했던 사후대책은 그가 죽자마자 일부 지역의 통치권을 인정받았던 그의 조카들이 그의 세 아들들에게 피살되고 뒤이어 세 아들들까지 내전을 벌이면서 상당히 차질을 빚는다.

그의 사후 제국 황제의 직위는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스,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상속된다.

3 체제 개혁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정책의 뒤를 이어 콘스탄티누스 1세 역시 개혁정책을 지속한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개혁은 기본적으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기조를 이어갔다고 평가된다.

3.1 행정 체계 개혁

우선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 이후에도 아직 지역에 따라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았던 군정분리를 확실히 한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 이후에도 지역에 따라서는 문관인 프라이팩투스나 프로콘술이 군대를 이끄는 경우가 많았으나 콘스탄티누스는 이를 더 철저히 분리하였다. 또한 이전까지는 불분명했던 각 관료들의 위계질서도 정리하였다.

즉, 민정 관료 체제는 황제 ← 프라이펙투스 프라토리오 ← 비카리우스 ← 프라이토르[19]이란 형태로 일종의 질서가 형성된 것이다. 이중 로마의 프라이펙투스는 다른 지역의 프라이펙투스 프라토리오보다 좀 더 높은 위상을 지녔다.

이러한 일은 군정 관료들에게도 일어나는데, 황제 ← 둑스 ← 프로콘술 ← 프라이펙투스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던 원수정시기 군정 체계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으로 프로콘술과 프라이펙투스가 민정 관료쪽으로 넘어가게 되자 둑스가 군단을 담당하고, 그 위에 코메스라는 체제가 나타나면서 코메스 둑스의 지휘를 받게 되었었다.

그리고 콘스탄티누스 시기에 드디어 로마 제국 말기의 주인공들이란 이름을 얻게 되는 관직인 마기스테르(군사령관)란 관직이 코메스 둑스 위에 나타나게 된다. 즉, 콘스탄티누스 이후 로마 제국의 군정 체계는 황제 ← 마기스테르 ← 코메스 둑스 ← 둑스의 체제가 되게 된다. 이시기에는 마기스테르가 보병기병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이것이 하나로 통합되는 것은 테오도시우스 1세 시기에 들어서서이다.

또한 옛 로마 시대부터 내려오던 가부장의 처벌권을 크게 제한하였고, 노예에 대한 십자가형을 전면 금지하였다. 십자가형은 그전부터 유명무실화되고 있었으나 결정적으로 없어진 거나 마찬가지가 된 건 이 조치가 원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20]

원로원 의원과 기사 계층 의원에 대한 공직 임명 제한을 완전 철폐했으며, 이에 따라 계급 고려 없이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치할 수 있게 되어 행정 체계에 큰 진보가 왔다. 또한 원로원 의원 수를 대폭 늘려 이 시기에 원로원 의원의 수효는 2,500명에 달하게 되었으며, 그전까지 주욱 하강세였던 원로원의 권위와 명망은 실권은 다 잃었어도 간신히 반등세에 돌아서게 되었다.

3.2 군제 개혁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군제 개혁 이후에도 로마 제국에는 아직 과거의 군단체제 수준에 달하는 규모를 지닌 군단이 지역에 따라 존재했다. 그리고 이것이 4두정의 혼란을 증폭시킨 원인 중 하나다.

콘스탄티누스는 카라칼라 개혁으로 공식적으로는 하나로 통합되었던 레기온을 나누어 중앙 예비군인 코미타텐세스(comitatenses)와 국경 주둔병인 리미타네이(limitanei)를 창설하는데 이는 디오클레티아누스 때부터 이어졌던 군제 상황을 공식화한 동시에 보다 짜임새 있게 개편한 것이었다. 또한 과거의 군단 체제를 유지하던 나머지 군대 또한 죄다 코미타텐세스/리미타네이 체제로 바꾼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 때부터 전통이 내려오는 근위대인 프라이토리아니는 폐지했다. 로마 레기오가 후기 로마 시대를 거치면서 완전히 사라졌거나 혹은 리미타네이만 로마 레기오의 후예라는 잘못된 편견은 그냥 틀린 소리지만[21], 이렇게 해산된 사실이 명확하기 때문에 적어도 근위대에 한해서는 그 말이 맞다.

콘스탄티누스는 스콜라이 팔라티나이와 팔라티나이 코미타텐세스를 만들어서 프라이토리아니의 역할을 대체한다. 전자는 황제 호위를 맡았고 후자는 야전 기동군인 코미타텐세스 부대들 중 최정예 부대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렇게 확립된 군제는, 나중 서로마 제국 멸망 때까지 그리고 동로마 제국에서는 적어도 마우리키우스가 훗날 테마제의 선구가 되는 군정과 민정을 총괄하는 체제를 선보일 때까지는 큰 변화 없이 이어진다.

즉 이후의 로마 제국 군제는 팔라티나이/코미타텐세스/리미타네이의 형태가 된다. 여기에 야만족 부족 전사집단을 한꺼번에 그대로 로마군으로 기용하는 포이데라티가 이 시기에 나타나 보조적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단, 콘스탄티누스가 창설했던 팔라티나이 코미타텐세스들은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 때 발렌스 황제와 함께 궤멸되면서 사실상 붕괴했다.

포이데라티의 등장과 이러한 군제개혁의 결과, 이 시기 로마는 기록에 따라서는 60만 이상 되는 거대한 상비군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제국에게 지나친 부담이였기에 이후 군 규모는 차츰 축소되었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애초에 처음부터 이런 대규모 상비군은 실제보다 과장된 장부상의 것이였고, 실 규모는 이의 2/3 수준이였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도 40만인데!

3.3 사회 개혁

콘스탄티누스 1세의 사회개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교 공인과 니케아 공의회라 할 수 있다. 로마 제국의 기존 사회체제와 이념을 신봉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와는 달리 콘스탄티누스는 그것으로는 로마 제국을 안정적으로 끌고 갈 수 없다 생각했고, 그 결과 새로운 사회 질서, 즉 그리스도교를 택해 이를 공인하고 그리스도교의 분열을 정리하는 공의회를 열었다.

또한 이미 제국 방위에는 부적절한 수도로 판명된 로마 시를 버리고 새로운 수도로 비잔티움을 택해 개발, 로마 노바를 창건하게 된다. 다만 이 도시는 당대부터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더욱 자주 불렸으며, 도시 구조는 로마 시의 그것을 복제해서 만들었다고 선전했다.
  1. 매우 크기가 크다보니, 얼굴을 강조하기 위해, 비율상 얼굴이 실제보다 크게 제작한 것이다. 눈 또한, 아래서 올려봤을 경우를 생각해 보다 크게 제작했기에, 얼굴상만 떨어진 저 얼굴은 괴상해보이는 것이다.
  2. 기독교를 싫어하는 건 자유지만, 그렇게 하려면 지혜 있게 해야 한다. 아예 틀린 역사적 근거를 갖고 반기독을 하면 이렇게 웃음거리가 된다.
  3. 다만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택한 것 자체에 대해서 완전 부정하지는 않고 권력자를 '리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可知)'한 존재인 인간이 아니라 '불가지(不可知)'한 존재인 신에게 맡겨버림으로써 권력 토대를 강화하고 중세 왕권신수설의 논리적 토대를 마련했다고 해석하면서 이런 점에서 콘스탄티누스의 정치감각을 극찬했다.
  4. 물론 중세가 끝날때까지 비잔티움과 동거동락했던 동방교회의 입장을 감안해줘야 할 것이다. 또한 서방의 경우는 서로마가 붕괴한 뒤 동로마의 눈치를 볼 필요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기에 콘스탄티누스의 인기가 동방보다는 떨어졌다. 동방교회와는 달리 시성은 커녕 시복도 안 된것을 생각해보자.
  5. 콘스탄티누스가 모친의 영향 등으로 인하여 기독교에 호감이 있었고 어느정도 믿기는 믿었던건 확실하다. 종합적으로 말하자면, 모친 따라 어릴때부터 성당 다닌 동네 아저씨(...) 정도의 믿음이라 보면 얼추 맞을 것이다.
  6. 부족장들을 마구 격투장에 쳐넣어 산채로 사자밥으로 만들거나, 강가에 산더미 같이 쌓인 적의 시신을 묻지도 못하게 한 다음 그대로 썩어가게 해서 주변 게르만족에게 두려움을 심어주고자 했다.
  7. 누군가는 지독한 권력욕으로도 폄하하지만
  8. 요안네스 1세
  9. 가톨릭과 정교회의 성인이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가 못박혔던 바로 그 십자가를 발굴해낸 것으로 유명하다.
  10. 굳이 말하면, 중국 중세사에서 석륵이 석호를 쉽게 포기할 수가 없었던 이유와 비슷했다.
  11. 막시미아누스의 퇴임 이후 서방 부제로 임명되었다가 콘스탄티우스의 병사로 정제로 승격
  12. 본디는 콘스탄티우스가 아우구스투스로 승격할 때 받았던 속주였는데, 콘스탄티누스가 콘스탄티우스를 승계하는 과정에서 그 속주는 세베루스에게 넘겨줘야 했다. 막센티우스가 세베루스를 죽이면서 그 속주를 도매금으로 집어삼켰던 만큼, 콘스탄티누스로선 불법 카이사르 따위가 차지하던 거긴 원래 내꺼였다는 명분도 있었다. 어차피 콘스탄티누스는 막센티우스의 영역을 다 집어삼키는 게 목적이었지만
  13. 콘스탄티누스가 십자가의 환상을 보았다는 전승으로 유명하다. 이 일화에 따르면 전투를 치르기 전 어느날 밤, 콘스탄타누스 황제가 막사에서 꿈을 꾸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빛나는 십자가가 나타나더니 '이 표시로 너는 승리할 것이다(In hoc signo vinces)'라는 글자를 보게 된다. 꿈에서 깬 황제는 이 꿈에서 본 십자가 모양의 군기를 만들어 앞장세워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이 전승이 기록된 '콘스탄티누스 황제전'을 쓴 에우세비우스는 황제 본인으로부터 이 이야기가 진실이라는 맹세까지 받았다고 증언했다. 후에 17세기 계몽 시기에 이르러 이 일화의 사실성에 대해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
  14. 그래서 콘스탄티누스가 샤를마뉴풍으로 그려져 있다. 의외로 제관과 복식등의 고증은 봐 줄 만한 수준.
  15. 고트족에게 발렌스 황제가 패사한 전투와는 다르다.
  16. 근데 정작 콘스탄티누스 자신은 말년에 아리우스파에 기우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17. '새로운 로마'는 공식명칭이고 그보다는 애칭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영어 콘스탄티노플이 훨씬 유명하다.)
  18. 다만, 후세에는 크게 평가받을진 몰라도 제국 재정상 이유로는 상당한 낭비였다. 콘스탄티누스가 바라던 조건으로는 기존에 디오클레티아누스가 4분 통치 시절 상당히 규모를 키워놓은 니코메디아도 여러모로 부합했었다.
  19. 다만, 비카리우스 밑의 관리들이 프로빙키아들을 통치하는데 이 프로빙키아의 수장들의 명칭은 각 지역마다 제각기였다. 프라이토르도 그 중 하나다. 주의.
  20. 노예한테도 못하는 걸 자유민이나 상류층한테 막할 수는 없으니까.
  21. 의외로 상당히 반복되는 오류다. 전기 로마사에만 정통하고 후기는 잘 모르는 서구 학자들 또한 자주 이런 실수를 저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