콤소몰

러시아어 : Всесоюзный Ленинский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ий Союз Молодёжи (ВЛКСМ), Комсомол (레닌전연방공산주의청년연합, 콤소몰)

콤소몰은 소련의 청년정치조직이다. 1918년 10월 29일 러시아공산주의청년연합으로 처음 창설되었다.
원래라면 어느 유럽 정당에나 흔히 있는 청년조직일 수도 있었겠지만,[1] 공산주의 국가였던 소련 내에서 인정된 유일한 청년조직이었으며,[2] 소련 공산당에 가입하려면 무조건 거쳐야 하는 필수조직이기도 했다. 보통 소련에서는 (공산당에 가입한 어린이일 경우) 9살까지 어린 10월단원(Октябрёнок), 14살까지 피오네르(Пионер, 피오네르) 단원을 거친다음 28살까지 이 단체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소련 공산당의 통제를 받던 조직인 만큼 권력자의 입김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어서, 대숙청 당시 창립자 대다수가 스탈린에게 밉보이면서 굴락에 가거나 총살되는 운명을 겪었다.

하루는 라자르 카가노비치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모든 콤소몰 중앙위원회의 첫 서기들을 세보세요. 그들은 어딨습니까?" 제가 말했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물으신다면 그들이 어딨는지는 당신이 잘 아시겠죠." 그들의 이름을 하나씩 세보니 모두 체포되었습니다. 리브킨, 샤츠킨, 체이틀린, 스모로딘, 차플린...

알렉산드르 밀차코프, 콤소몰 총서기[3]

2차대전 당시에는 소련에서 전황이 급박해지자 콤소몰 단원들을 징병해 전선에 투입시키기도 했고, 독일 점령지에서 콤소몰 단원들이 파르티잔에 참여하는 경우도 있었다. 독소전 이후 소련은 이러한 점에 주목해 군사훈련을 강화시켜 유사시 준군사조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4]

스탈린 사후 소련의 분위기가 완화되면서 콤소몰은 공산당의 청년조직 및 교육기관, 인재풀 역할을 했다. 콤소몰 단원의 경우 미개발 지구를 돕는다는 명목 아래 시베리아로 노동봉사를 나가는 경우도 종종 있었고, 정기적으로 열리는 공산주의 이론 수업 등에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했다. 또한 타국 공산당들과 교류를 위해 해외로 파견되기도 했다. 이 중 활동 실적이 좋은 단원들의 경우, 공산당의 추천을 받아 공직에 진출하거나 직장에서 유리한 가산점을 얻을 수도 있었다.

오늘날 러시아에서 친푸틴 성향의 조직으로 알려진 우리들(Наши, 나시)와 젊은 근위대(Молодая гвардия, 말라다야 그바르디야) 모두 청년들을 정치에 동원시키던 콤소몰의 운영방식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1. 실제 유럽의 정당들은 청년조직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이들 청년당원 중에서 정치에 진출해 정계에 발을 디딛은 경우도 많은데, 대표적인 예가 빌리 브란트.
  2. 실제로 소련 내에서 단순한 개인목적에서 벗어나 사회적 움직임이나 정치색을 띄는 사적단체일 경우 사회적 통제를 위해 제제를 가했다. 나치 독일 시절 활동한 히틀러 유겐트하얀 장미을 보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3. 대숙청 시기 굴락으로 보내져 15년 동안 수감되었다.
  4. 소련에서 스포츠를 우선시하고 권장한 이유 또한 건강 관리 측면보다는 평상시 국민들의 체력을 단련시켜 노동력과 국방력에 동원하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