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브란트

역대 독일 총리
3대4대5대
쿠르트 키징어빌리 브란트헬무트 슈미트
< 1970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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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 - 중산층빌리 브란트[1]1971 - 리처드 닉슨
< 1971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
1970 - 노먼 E. 볼로그빌리 브란트1972 - 수상자 없음
풀네임Herbert Ernst Karl Frahm (헤르베르트 에른스트 카를 프람)[2]
출신 정당사민당
생몰년1913년 12월 18일 ~ 1992년 10월 8일 (만 78세)
재임 기간1969년 10월 21일 ~ 1974년 5월 7일 (만 8년 4개월 16일)
(독일어) "Unter der Last der jüngsten Geschichte tat ich, was Menschen tun, wenn die Worte versagen. So gedachte ich Millionen Ermordeter."

(영어) "Under the weight of recent history, I did what people do when words fail them. In this way I commemorated millions of murdered people"
오늘의 역사의 무게 아래서, 나는 사람들이 그 무게를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때 행하는 바로 그런 행동을 했다. 수백만명의 사람의 죽음을 나는 그렇게 기렸다.

"우리는 더 많은 민주주의를 감행하고자 한다."

1 개요

독일연방공화국(당시 서독)의 제4대 총리를 지낸 독일 정치인. 본명이 아닌 망명중 생긴 이름이란 것이 흥미롭다.

인생이 꽤 굴곡지기로도 유명한데, 나치스의 득세와 2차 세계대전, 독일의 분할, 독일 통일역사적 사건 4개의 정면에 있었다.

1913년 - 12월 18일, 독일 북부 뤼베크에서 사생아로 태어남.
1928년 - 인문계 고등 학교 요하네움에 들어감. 이 시절, 사회주의 청년 활동에 참여함.
1930년 - 17세의 나이에 독일 사회 민주당(SPD)에 들어감.
1931년 - 신당인 사회주의 노동당(SAP)에 들어감.
1932년 - 대학 입학 자격 시험에 합격함. 선박 중매소에서 일하면서 사회주의 노동당원으로 계속 활동함.
1933년 - 나치 정권의 탄압을 피해 노르웨이망명하여, 반나치스 운동과 노동 운동을 함.[3]
1937년 - 스페인 내전(1936~1939)에 특파원으로 참여해, 반파시스트 운동에 뛰어듦.
1938년 - 독일 나치 정부에 의해 시민권을 빼앗김.
1940년 - 2차 세계대전(1939~1945)이 일어나, 노르웨이가 독일에 점령되자, 스웨덴으로 탈출함. 이 때, 노르웨이 국적을 얻음.
1942년 - 유럽 사민당계 망명 인사들을 주축으로 결성된 '세계 민주 사회주의 단체'의 서기가 됨.
1944년 - 사민당의 재건에 힘쓰고, 다양한 단체들을 사민당에 통합시키려고 노력함.
1945년 -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노르웨이로 돌아가 활동을 계속함.
1947년 - '베를린 연합군 관리 위원회'의 노르웨이 대표단 공보 담당으로 서베를린에 들어옴.
1948년 - 독일 시민권을 다시 얻고 사민당 지도부의 베를린 대표 취임.
1949년 - 5월, 독일 연방 공화국(서독) 성립. 10월,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 성립. 브란트, 독일 연방 의회의 베를린 시의원으로 선출되어, 정계에 들어감.
1957년 - 베를린 시장으로 선출됨. 이후 베를린 위기를 극복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음.
1961년 - 8월 13일, 베를린 장벽이 세워짐.
1964년 - 독일 사민당의 당수로 선출됨(~1987).
1966년 - 우파 기민당과 손잡아 대연정 정부를 탄생시키고(~1969), 부수상 겸 외무 장관이 됨.
1969년 - 9월, 자민당과 연립 정부를 구성하여, 연방 수상이 됨. 동방 정책을 공식화하고 동독, 동유럽의 공산 국가들, 소련과 관계 개선을 추진함.
1970년 - 1월 22일, 동독에르푸르트에서 동독 수상인 빌리 슈토프와 회담을 가짐.
1971년 - 평화 정책의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받음.
1974년 - 5월 6일, 보좌관 귄터 기욤동독 스파이로 밝혀지자, 수상직에서 물러남.
1976년 -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I)'의 의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함.
1977년 - '국제 개발 문제 독립 위원회' 의장을 맡아, 제3세계 발전을 위해 노력함.
1979년 - '유럽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유럽 통합을 위해 애씀.
1987년 - 사민당 당수직을 사임하고, 명예 당수로서 후배 정치인들의 정신적 지주로 남음.
1989년 -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이듬해 독일 통일이 이루어짐.
1992년 - 10월 8일, 세상을 떠남.

(출처 : 만화로 만나는 20세기의 큰 인물, 웅진출판주식회사, 1996년)

2 활동

2.1 언론인

나치스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유럽 각국을 망명하면서 모국인 독일국적 및 망명국가의 국적까지 모두 박탈당하는 바람에 무국적자였던 기록이 있다. 사회주의 활동을 하느라 이곳 저곳을 왕래[4]했는데, 노르웨이에서 붙잡혔으나 높으신 분들의 힘으로 무사히 풀려났다.[5] 이후 사회민주당 당원이 되고서 언론인 겸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덧붙여 말하자면 이 당시의 활동으로 인해 추후 정치계에 입문한 후에도 독일 유권자들에게 상당한 의심의 눈초리를 받곤 했다. 나치 당원이라는 의심을 받은게 아니라 노르웨이 군 소속으로 독일군과 교전했다는 의심. 한국에서는 독일이 전후 바로 나치청산을 끝내고 주변국에 사과했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지만, 전후 상당수의 독일인들은 "히틀러건 나치건 뭐건 어쨌든 우리는 조국을 위해 싸웠다"라는 인식으로 당당한 경우가 많았다.[6] 그래서 브란트 역시 정계입문 초반 "도망치는 도중에 노르웨이 군으로 신분을 속였을뿐이지 진짜 노르웨이 군 소속으로 독일군과 교전하진 않았음여 ㅠㅠ"라고 변명해야할 정도였다.[7] 이런식의 침묵과 부정을 걷고 독일이 제대로 과거사에 대한 재인식과 자기 비판을 시작한 것은 68혁명 이후의 일이었고 바로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서 아래 서술되어 있듯이 빌리 브란트가 수상이 되고 주변국과의 관계 개선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2.2 서베를린 시장과 야당 당수

독일 분단 이후 서베를린의 시장을 맡기도 했으며, 이 때 연방(미국, 영국, 프랑스 등)과 소련 사이의 관계를 조정하면서 서독과 동독의 관계를 해소, 결합시키는 데 애썼다. 당시 라이벌(?)이었던 당시 총리 콘라드 아데나워는 힘으로 밀어붙이려고 했는데, 그렇게 되면 전쟁이 터질 위험이 있다고 본 것. 브란트는 먼저 서독동독의 위치를 동등하게 끌어올린 후 미국-소련으로부터 독립시켜 통일시키려는 입장을 지향했다.

서베를린의 위기(1961년 베를린 장벽 건설로 인하여 서로 불안이 가중되는 상황)를 극복하는 데도 애를 썼다. 미국의 병력 지원을 약속받기도 하고, 자신이 국가를 위해 뭘 할 수 있는지 물어 보라던 대통령이 베를린까지 날아와서 자신이 도넛이라는 명연설을 하기도 했다.

이 때 브란트는 사민당 당수 후보가 되었음에도 선거 운동 따위 접고 시민들을 진정시켰는데, 아데나워 총리는 반대로 브란트의 과거사를 들먹이면서 선거 운동을 했다. 덕분에 시민들과 시 의회 직원들이 항의 시위를 벌이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이 노력이 노벨 평화상을 탄 것에 기여한건 사실이다. 선거에서 의석이 늘어난 사민당은 과반에 미달하게 된 기민/기사련과의 대연정을 거부했고[8], 다시 기민/기사련-자민 연정이 성립되었다[9]

빌리 브란트는 1963년 사민당의 당수로 선출되어 여러 대중적인 정책을 내세워서 당 지지율을 끌어올렸다. 1965년 총선에서도 역시 기민/기사련에 뒤지는 2당이었으나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내각의 인기가 떨어지고 자유민주당(독일)과도 갈라서면서 결국 1966년 11월, 제1당 기민련 쿠르트 키징거 총재와 제2당 사민당 빌리 브란트 총재의 협상에 의해서 독일 역사상 최초의 대연정이 성립하였다. 자그만치 90.1%(447/496석)의 의석이 내각에 참여한 것이다. 제1당 기민련의 키징거 총재가 수상을 맡고, 제2당 사민당에서는 빌리 브란트 외무장관을 포함해서 총 9명의 장관이 내각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이 내각의 참여로 사민당은 집권 역량을 충분히 얻게 되었다. 그러나 대연정은 1969년 기존의 공산권에 대한 강경정책을 고수하는 기민련과 공산권과의 적극적인 화해/협력을 주장하는 동방정책을 내건 사민당의 충돌로 무너진다.

2.3 총리 재직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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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9월 총선 결과, 사민당은 불과 13석 차이로 제2당이 되었다. 또다시 콩라인에 머무르나 싶었지만 브란트의 결단이 사민당을 여당으로 이끌었다. 정국의 캐스팅 보드를 쥐고 있던 독일 자민당은 당시 키징어 총리와 사이가 극악이었고[10] 이 틈을 이용해자민당과 연정을 구성하는데 성공하며, 빌리 브란트는 서독이 수립된 이후 첫 사민당 출신 수상으로 취임했다. 다만 자민당의 몇몇 의원들이 반란표를 때려서 총리인준이 부결될 뻔 했다.[11]

그는 아데나워 이래로 독일 정부가 고수하고 있던 "동독과 수교를 맺고 있는 국가와는 상대안한다"는 기존의 '할슈타인 원칙'을 폐기하고, 적극적으로 공산권과의 교류협력을 추진하는 '동방 정책'을 표방하였다. 이로 인해 소련 및 동구권 공산권 국가와의 긴장관계를 완화시키고, 커다란 외교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1970년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 유대인추념비에서 참회의 무릎을 꿇은 사건으로 유명하다. 일명 브란트의 무릎꿇기(Brandt Kniefall)라고 불리는 사건이다. 당시 헝가리의 뉴스 캐스터는 "무릎을 꿇은 것은 브란트 한 사람이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 민족이었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2년 뒤에 열리는 1972 뮌헨 올림픽을 앞두고 유대인들과 동구권 국가 등을 의식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사실 브란트 총리가 추념비를 방문할 때까지만 해도 폴란드인들은 서독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내내 나치독일에게 점령당해서 엄청난 고초를 겪은데다가, 참혹한 독일과 소련의 전투 와중에 전국토가 쑥대밭이 돼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2차대전 종전 이후에도 폴란드와 독일 간의 국경선은 여전히 쟁점이었다. 그러나 브란트가 추념비에서 무릎을 꿇은 장면을 생방송으로 지켜본 뒤에는 서독에 대한 감정이 많이 좋아졌다. 폴란드 수상이 브란트에게 감사의 말을 할 정도. 일설에 의하면, "무릎을 꿇을 필요가 는데도 꿇지 않는 독일국민들을 대신하여 무릎을 꿇을 필요가 는 그가 무릎을 꿇었다"라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때문에 브란트는 일부 보수우익 세력들에게 매국노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이들이 내세운 이유는 자기 멋대로 과거 영토의 소유권을 포기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거센 반발에 있었지만, 높은 인기 때문에 계속 할 수 있었다. 영토 문제에 대해서는 2차대전 후 독일과 폴란드의 영토 문제 항목 참조할 것.

독일통일의 기틀을 다진 사람이기도 하다. 물론, 독일통일은 1990년 기독교민주연합 헬무트 콜 총리의 재임 시절에 이루어졌지만, 빌리 브란트가 시작하고 헬무트 슈미트가 계승한 동방정책과 동독과의 끊임없는 교류 추진이 없었다면 절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대외정책으로 인해 연정 파트너 자민당 내 일부 세력의 반발로 하마터면 불신임 받을뻔 했지만 2표 차이로 극적으로 총리직을 유지하게 된다. 다만 이 과정에서 뇌물로 상대당 의원을 매수했다는 스캔들이 불거진건 흑역사 1972년 승부수를 건 의회 해산 총선거에서 사민당이 1당이 되는 역대적인 기록을 올렸다.

2.4 사퇴와 퇴임 후

그러나 얼마 못간 1974년 자신의 비서 귄터 기욤과 그의 부인 크리스텔 기욤이 동독의 간첩이었던 것으로 드러나 많은 독일 사람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다. 그래서 빌리 브란트 본인도 동독의 간첩이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었지만, 비서만 그랬을 뿐 그와는 무관한 것 같다. 물론, 기밀의 유출은 있었겠지만(...) 조사 결과 귄터 기욤이 동독에 넘긴 자료들은 국가 안보에 위해가 될만한 정보는 없어서 브란트의 지위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연방범죄청의 수사과정에서 브란트의 음주 행각, 섹스스캔들 등이 추가로 드러났다. 브란트의 섹스 중독을 만족시키기 위해 귄터 기욤이 수시로 브란트에게 섹스 파트너를 공급했던 것이다. 이에 소속당인 사회민주당 수뇌부는 브란트의 실추된 이미지로는 다음 선거에서 승리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브란트를 내치고 슈미트를 차기 총리로 내세우기로 내부적으로 결정했다. 사민당은 동독이 섹스 스캔들 자료를 압박 수단으로 삼을 것이라며 브란트에게 사임 압력을 가했고, 결국 이를 버텨내지 못한 브란트는 5년만에 총리직을 사임했다. 표면적으로는 브란트의 우울증도 사퇴의 한 원인이라고 언급되고 있다.[12] 물론 섹스중독 자체는 개인 사생활의 영역이기 때문에 브란트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여론이나 정치평론가들에 의한 평가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 듯 보인다.

1976년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I), 즉 국제 사민주의 정당 모임의 의장으로 활동했다. 이 당시 10월 유신 독재를 비판한 통일사회당김철 당수와도 인연이 있어서, 프랑스 사회당프랑수아 미테랑과 함께 김철을 지원했다고 한다. 도쿄에서의 SI 대회에서는 김철의 귀국을 위해 일본 사회당, 일본 민사당 의원들을 대동하라고 부탁하기도 했다고.#

본격 2차세계대전 만화에서 빌리 헤링턴으로 출현한다. 오 마이 숄더 대신 오 마이 폴트(fault)란 대사를 한다(...)

2.5 김대중 노벨평화상 수상 추천

흥미로운 것은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노벨상을 수상하기 전 1987년부터 꾸준히 매해마다 노벨평화상 후보 명단에 올랐는데 그 중 처음 노벨평화상 후보로 오른 것은 빌리 브란트가 1987년에 추천하면서부터이다.

3 어록

독일에 2개의 국가가 존재한다 해도, 서로에겐 외국이 아닙니다. 그들의 관계는 그저 "특별한 관계"일 뿐입니다. -1969년 10월 28일, 정부의 정책 발표회 때.[13]
우리는 신이 아니라 투표자들에게 선택받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민주주의에 공헌한 모든 사람들과 대화를 해야 합니다.
올해 여름에 신문을 다시 내려놨습니다. 베를린은 살아남을 것이며, 은 무너질 것입니다.

-1989년 11월 10일, 베를린 시청에서. 그리고 장벽이 무너지고 독일은 통일되었다.

4 트라비아

  • 골초였다. 총리 재임 시절 주치의의 권고로 금연을 했는데 그로 인해 우울증이 심각하게 악화됐다. 브란트가 금연을 하던 시기에 그의 측근이자 후임 총리였던 슈미트는 내각 회의에서 무심코 담배를 입에 물었다가 브란트의 비서에게 '총리 각하가 힘들어하는데 굳이 그 앞에서 흡연을 했어야 하냐'며 잔소리를 들었다고 전해진다.
  • 보기와 다르게 울보였다. 선거에서 질 때마다 보좌관 앞에서 눈물을 쏟은 일이 잦았다고.
  • 사생활은 그리 깔끔하지 않았다. 망명생활 중이던 1941년 노르웨이에서 안나 카를로타(Anna Carlotta)와 결혼했으나, 1948년에 이혼했다. 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4년 노르웨이 여류 작가이자, 사회주의 정당에서 활동하고 있던 루트 헤센(Rut Hansen)과 처음 만났다. 2년 후 루트의 남편이 죽자, 브란트는 안나와 이혼하고 루트와 재혼했다. 브란트가 총리직을 사임한 후, 루트는 섹스 스캔들로 만신창이가 된 그를 위로해주고 보살펴 주었다. 그러나 1980년 브란트는 그때 자신을 지켜주고 위로했던 루트를 배신하고 총리 시절 비서였던 35세 연하의 브리기테 제바허(Brigitte Seebacher)와 재혼했다. 루트는 죽을 때까지 브란트를 만나지 않았으며, 브란트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1. 합성이 아니다. 진짜 타임지에 이런 모습으로 나왔다.
  2. Frahm이라는 성과 관련된 가족사가 매우 슬픈데, 후술하듯이 그는 사생아로 태어났고 그로 인해 아버지의 성을 물려받을 수 없어 외할아버지의 성인 프람을 물려받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외할아버지도 사생아 출신. 즉 프람이라는 성은 그와는 아무런 관계조차 없었던 성이었다.
  3. 빌리 브란트라는 가명을 쓰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였다.
  4. 이 중에는 스페인 내전을 취재하거나 나치 치하의 베를린에 잠입하는 것도 있었다.
  5. 노르웨이어를 기똥차게 잘해서 신분을 속이고 포로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6. 물론 연합국에게 패전국 대접을 톡톡히 당하는 동안에 입밖으로 그런말을 내진 않았겠지만...
  7. 이런 변명은 독일에 위치한 빌리 브란트 기념관에서 지금도 찾아볼 수 있는 내용이다. 다시 말해 나치와 싸운 독일인은 여전히 스스로를 배신자가 아니라고 변호한다는 것.
  8. 연정 거부에는 1962년 12월 19일의 "슈피겔 스캔들"'이 주요한 빌미가 됐다.
  9. 이 선거에서 정치적 위신이 크게 손상된 아데나워는 결국 1963년 경제부 장관 에르하르트에게 총리직을 넘겨주고 퇴임한다.
  10. 키징어는 대놓고 선거 기간에 "자민당을 원내에서 쫓아버리겠다"라고 공언하고 다녔다. 게다가 이 시기 키징어 내각이 내세운 핵심공약 중 하나가 독일식 비례제를 철폐할 것이었기 때문에 지역구로 의원을 배출할 능력이 없던 자민당 입장에서 키징거의 재집권은 사실상의 사형 판결이었다.
  11. 몇몇 무효표에도 그에 대한 인신공격이 적혀 있었다. 가령 '프람(브란트의 본명. 브란트는 사생아였기때문에 그를 프람이라는 본명으로 부르는 것은 대단한 비방이었다.)은 절대 안됩니다.'
  12. 당시 서독에는 동독 정보기관 슈타지에서 파견한 다량의 간첩이 사회 각계각층에 깊숙히 침투해 있었음이 통일후 슈타지 재판에서 드러났다. 통일 당시 서독내에 최대 30.000명에 이르는 고정간첩과 정보원이 있었다는 추정도 있다. 물론 통일은 서독 주도로 이루어지긴 했지만. 하지만 이들의 대부분은 동독측에 가족이 살고 있던 경우가 많았다. 슈타지는 서독내 계층별 인사들을 파악한 후 가족들이 동독에 남아있는 사람들에 접근 가족을 인질로 협박하였다고 한다. 가족들의 안위 때문에 스파이가 되긴 했지만 타의적인 것이기에 자발적인 스파이들에 비해서 그 효과가 크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없는 것 보단 낫겠지만
  13. 이 개념 자체는 대한민국북한의 관계, 중국대만(중화민국)과의 관계와도 같다. 물론 실상 내용은 다르지 무엇보다 자국을 서독과 별도의 국가로 주장하고 외교부로 대화했던 동독의 입장에 반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는 할슈타인 원칙에서 한 발짝 물러선 것이며, 또한 상대를 국가로서 존중하지 않겠다는 의미는 아니기 때문에 위 비교는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1민족 2국가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 듯, 국가로 존중하되, 특수한 관계를 인정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