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비스 1세

역대 프랑크 왕국의 왕
클로비스 1세힐데베르트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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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크 왕국의 초대 왕으로 메로빙거 왕조의 실질적인 창시자로 잘리어 [1] 프랑크[2]의 부족장. 여러 프랑크 부족들을 통합했으며 서고트 왕국과 알레만족, 부르군트 왕국등을 공격해 영토를 확장했으며 다른 게르만 군주들과는 달리 처음으로 이단인 아리우스파 대신 정통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교황을 정점으로한 가톨릭 교회의 지지를 얻었다. 여러 군소 게르만 왕국들이 난립하면서 암흑기로 불리던 서유럽에 안정된 국가를 세웠다는 점은 높이 평가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2 생애

잘리어 프랑크의 부족장 힐데리히 1세와 튀링겐의 왕녀 바신느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부왕을 따라 여러 전투에 참여했으며 부왕이 죽자 잘리어 프랑크를 이끌게 된다. 481 클로비스는 남하하여 갈리아 북부 지방을 정복하게되고 486년 수아송 전투에서 로마의 갈리아 총독이었다가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독자적인 세력을 이루게된 로마인 시아그리우스를 격파하고 솜 강에서 루아르 강에 이르는 영토를 획득한다.

이후 클로비스는 꾸준히 프랑크족 통합에 나서는데 그 과정에서 클로비스는 자신의 정치력을 여가없이 보여주게 된다. 친척이자 잘리어 프랑크의 다른 세력 지도자 지게베르트 부자를 살해했고 경쟁 상대였던 카라리크를 그의 아들들을 보물로 매수해 살해하게 한 다음 카라리크의 아들들을 제거하고 카라리크의 신민들에게 자신은 카라리크의 죽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자신이 죽은 왕의 원수를 갚았다고 맹세한다. 또 캉브레족을 이끌던 라그나카르를 그의 전사들을 금팔찌로 매수하는 앞서와 비슷한 방식으로 제거했다. 그러나 이 금팔찌는 사실 청동을 도금한 가짜였고 배반자들이 이에 대해 항의하자 주군을 배신한 자는 금팔찌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뻔뻔함을 보여준다.

클로비스의 아내는 열렬한 가톨릭 신자로 클로비스에게 예전부터 개종을 권했지만 거절하고 있었는데, 알레만족과 전쟁을 하는 도중 전멸의 위기에 놓였다가 기적적으로 승리를 거두게되는 일이 생긴다. 이를 아내가 믿는 신의 가호라 인식한 클로비스는 랭스에서 부하 3000명과 함께 가톨릭 세례를 받고 개종하게되고 이로 인해 클로비스는 로마 교회와 갈리아 현지민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고 일부 가톨릭 주교들로부터 아우구스투스(로마 황제)의 칭호를 받게되는 일도 생기게됐다. 다만 형식적으로는 동로마 제국에 복종하면서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집정관과 로마 특별 시민의 지위를 얻게된다.

세례 후에도 클로비스는 꾸준히 군사적 원정을 나서 자치를 요구하는 알레만족의 반란을 진압하거나 부르군트 왕국 일부를 공략해 프랑크 왕국의 우위를 인식시켰고 고트 왕국의 군대를 푸아티에 부근에서 격파해 아키텐 지역을 획득한다. 이건 서고트 왕국 전체를 정복하려는 의도도 있었으나 동고트 왕국의 테오도릭 대왕의 제지로 인해 아키텐만 얻는 선에서 마무리를 짓게된다. 이러한 성과를 거뒀다가 511년 파리에서 죽었으며 프랑크 왕국은 살리카 법에 따라 아들들에게 4개로 분할된다.

3 내치

클로비스는 군사적 업적 뿐만 아니라 내치에서도 훌륭한 성과를 보였다. 프랑크 왕국의 수도를 파리로 정한 그는 파리로 천도했고 파리는 오늘날까지도 유럽의 중심지 역할을 이어가게 된다. 종교면에서 오를레앙 종교회의를 개최해 교회법을 재정했으며 국내에 가톨릭의 전교를 장려하고 주교들로부터 충성서약을 받아내는 업적을 쌓았다. 그외에 성직자를 위시한 현지의 갈리아-로마계(Gallo-Roman) 엘리트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해 프랑크 왕국 내에 로마의 행정조직을 도입하여 프랑크 왕국의 기초를 마련하였으며 향후 근대까지 왕위계승에 관여하게되는 살리카법도 이 시기에 편찬되었다.

4 관련 문서

  1. 여기서 Salic이라는 표현, 즉 살리카법이 유래되었다
  2. 살리족, 살리어 프랑크등으로도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