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카법

Lex Salica, Salic Law

1 설명

프랑크 왕국 메로빙거 왕조의 법전. 살리(Salic)라는 표현은 당시 프랑크 왕국의 주종족이었던 살리어족에서 나왔다. 클로비스 말년에 만들어진 법전으로 게르만족관습법을 성문화했다. 라틴어로 쓰였지만 게르만적 관념이 많이 들어가있다.

이 법전 자체를 가리키는 고유명사이면서 '여성의 왕위 계승'이나 '여계 왕손'을 인정하지 않는 제도를 통틀어 가리키는 일반명사이기도 하다.

2 연혁

2.1 유럽

살리카 법의 민법 규정 가운데 '딸은 토지를 상속받을 수 없다'는 것이 있다. 그리고 게르만 족 전통에 따르면 작위는 토지에 붙어다니는 것이었다. 이 얘기대로라면 '딸은 작위를 상속받을 수 없다'. 이는 토지의 주인이 그 토지에서 얻은 수입을 바탕으로 자신의 무장을 갖추고 병력을 부양하며 전시에 그 병력을 지휘해 전투에 참여해야 했기에(즉 군 복무를 해야 했기에), (군 복무에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진) 여성의 토지·작위 계승을 막은 것이고, 프랑크 왕국 메로빙거 왕조 시대에 이미 모계를 통한 계승이 나타나기 때문에 이 조항은 만들어진 지 100년도 안 지나서 사문화된 것으로 보인다.[1]

그러다 1316년 프랑스 카페 왕조의 왕 루이 10세가 사망하고 그의 유복자 장 1세마저 5일만에 죽자 문제가 시작되었다. 루이 10세의 동생이자 장 1세의 삼촌이었던 섭정 필리프는 즉시 국왕 필리프 5세로 즉위했다. 하지만 루이 10세의 딸 잔이 살아있었기에 그의 정통성은 떨어졌다. 이에 1317년 랭스에서 그는 서둘러 자신의 위치를 강화하기 위해 도유식(塗油式)[2]을 행한 후 귀족, 고위 성직자, 파리 대학의 박사, 법학자들과 회의를 진행했다. 그들은 파리 대학을 뒤져 먼지투성이 법전 속에서 이 조항을 발굴했고 이 조항을 확대 해석하여 모계를 통한 왕위 계승권을 폐지했다. 즉, 그의 조카이자 왕위 계승자였던 잔의 계승권을 박탈하고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시킨 것이다. 이것 때문에 잔은 즉위하지 못하고 그 뒤로 프랑스에서 발루아 왕조, 부르봉 왕조는 이 조항에 따라 여왕이 즉위하지 못했다(대신 잔은 샤를 4세 사망 후 살리카 법이 미치지 않는 나바라의 여왕이 되었다).

더 큰 문제는 1328년 샤를 4세가 죽고 카페 왕조의 직계가 단절되자 발생했다. 가장 가까운 혈족으로 루이 10세의 딸 잔이 있었지만 이 조항으로 왕위 계승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결국 필리프 4세의 조카(필리프 4세의 동생 샤를 드 발루아의 아들) 필리프 6세, 필리프 4세의 외손자(필리프 4세의 딸 이사벨라의 아들) 잉글랜드의 왕 에드워드 3세, 필리프 4세의 또 다른 조카(필리프 4세의 동생 루이 데브뢰의 아들) 나바라의 왕 펠리페 3세[3]가 왕위 계승을 주장했다. 결국 필리프 6세가 발루아 왕조를 개창하고 일단 에드워드 3세는 인정했지만 나중에 이걸 취소하고 백년전쟁을 일으켰다. 에드워드 3세의 어머니 이사벨라가 필리프 4세의 딸이었으니 모계 계승을 주장한 것이다.

필리프 5세 때 해석한 이 법은 다시 말하지만 확대 해석이다. 오리지널 살리카 법에서는 딸은 토지를 상속받을 수 없지만 외손은 토지를 상속받을 수 있었다(전쟁에만 나갈 수 있으면 문제가 없으니까). 만약 외손도 토지를 상속받을 수 없었다면 외손자의 자격으로 토지와 작위를 상속받은 전력이 있는 카페 왕조나 부르봉 왕조의 성립 자체가 정통성이 다소 취약해진다.[4] 즉, 오리지널 살리카 법은 여성의 계승만을 금지한 법이라서 잔이나 에드워드 3세나 모두 계승이 가능했지만 프랑스가 확대 해석한 버전의 살리카 법은 모계 계승 자체를 금지하는 것으로 변질(?)된 것이다. 당장 급하다고 자기들 조상까지 디스하는 저 패기를 보라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나라에도 이 해석이 퍼지게 되어 온갖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이 조항으로 훗날 부르봉 왕조 루이 16세루이 17세가 프랑스 대혁명 와중 사망하고 유일하게 남은 루이 16세의 혈육이었던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가 여왕이 되지 못하고 그의 숙부 루이 18세, 샤를 10세가 즉위했다.

이러한 해석은 국가의 안정성 측면에서 이점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국내에 봉토가 주어지는 왕자들은 상속이 진행됨에 따라 영지가 해외로 유출되는 경우가 적은 데 비해 외국 왕가로 시집가는 공주들의 경우, 상속된 영토가 해외로 유출되는 문제가 생긴다.[5]

또는 공주가 왕위를 상속받되 남편이 처가살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해외에서 통치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하며,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남편이 처가의 언어와 문화에 적응해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6]

그러나 적응을 해야 했던 것은 외국인 왕비들도 마찬가지였을진대 딱히 부군에게만 문제가 될 이유는 없다. 또한 역사적으로 공주나 상속녀들이 반드시 해외의 왕족과 혼인한 것은 아니며 국내의 귀족과 혼인한 경우도 많다. 여계 상속이 안정화되어있다면 오히려 추정 상속인에게 영토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혼인을 미리 준비할 수 있다. 여왕으로 즉위한 후 부군을 얻을 경우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배우자를 찾았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반면 오히려 국가의 안정성에 해가 되기도 했다. 왕들이 아들을 낳지 못 하거나 아들이 일찍 죽었을 때 직계의 딸이 있음에도 살리카 법 때문에 계승하지 못 하는 바람에 친척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계승권을 주장하고 나섰던 것이다. 프랑스 카페 왕조 말기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 백년전쟁의 명분이 되었고, 영국의 장미전쟁도 따지고 보면 비슷한 이유로 상속 계보가 불투명해지면서 일어났다.

이러한 문제는 남녀가 불평등한 당대의 결혼제도에 기인한 것이다. 만일 중세 결혼제도가 데릴사위제였다면 '아들은 토지를 상속받지 못한다'는 상속법이 널리 퍼졌을지도 모르는 일.

약 300년 후 이 조항 덕분에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라는 거의 역사상 최초의 세계 대전이 시작된다. 요제프 1세 사후 즉위한 그의 동생 카를 6세는 젊은 시절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을 겪었다. 이에 여성의 왕위 계승을 완전히 배제함은 후에 나라를 혼란스럽게 만들 수도 있다는 걸 깨달은 그는 일찍부터 살리카 법을 없애려고 노력했다.[7] 마침내 그는 딸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확실히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1713년 국사조칙(Pragmatic Sanction, 프라그마티셰 장크티온)을 내려놓고 승하하였지만 그것을 지키지 않으려는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프리드리히 2세였다. 프리드리히는 슐레지엔의 계승권을 내세워 국사조칙을 파기하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일으키며, 이는 7년 전쟁으로 이어진다.

프랑크 왕국의 법률이므로 유럽 국가라도 그 기원이 다른 나라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잉글랜드가 '어디서 듣보잡 법을 가져와서 지랄이냐'고 나서면서 백년전쟁이 벌어졌다. 세월이 흐르면서 살리카 법이 적용되기 시작한 나라들도 몇 있다. 대표적으로 오스트리아[8]가 있고, 스페인도 (그 기원이 프랑크 왕국과는 별개이기 때문에) 본래는 살리카 법이 없었다가 부르봉 왕가가 왕위를 차지하면서[9] 살리카 법이 도입되었다. 나중에 이 조항을 두고서 왕위 계승 분쟁이 벌어지는데, 이를 카를리스타 내전이라 한다.[10] 스페인에 정식으로 살리카 법이 적용된 건 카를 5세 이후다. 러시아도 원래 살리카 법이 적용되지 않았지만 로마노프 왕조의 여제 시대가 끝나고 표트르 3세의 아들 파벨 1세가 즉위한 이후부터 적용되기 시작했다. 한편, 대영제국하노버 왕조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하면서 하노버와의 동군연합이 끝났다.[11]

2.2 아시아

아시아에서는 고대[12]의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여성의 왕위 계승 자체를 인정한 적이 거의 없었기에[13] 유럽에서는 살리카 법과 같은 계승법으로 간주한다.

유럽과의 중요한 차이는 '가문'이 아니라 '혈통'을 더 중시한다는 것. 살리카 법으로는 사위나 외손자가 계승을 할 수도 있었지만, 아시아에서는 Y염색체가 일치해야만 계승권이 주어졌다. 그래서 동생에게 계승권을 주는 경우도 많았다는 것.[14] 살리카 법에서는 딸이 자신의 남편이나 아들이라는 대리인을 내세워 상속을 받을 수 있었지만 아시아에서는 아예 상속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성립 근거가 다르다고 봐야 할 것이다.
  1. 그냥 딸이 토지를 상속받고, 병역은 남편이나 아들에게 맡기면 땡이라 금방 사문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어쨌건 토지·작위 주인 입장에서는 조카나 형제, 또는 더 먼 친척보다는 딸에게 땅을 주고 싶었을 테니까.
  2. 성경에서 예언자나 왕을 책봉할 때 하느님에게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 해서 신성한 권위를 받은 것으로 여긴 것에서 유래한다. 프랑크 왕국 클로비스 왕이 처음 받은 연고로 프랑스 왕은 랭스에서 이 의식을 치러야 정당한 왕으로 인정받았다.
  3. 나바라의 여왕 잔(후아나 2세)과 결혼했다.
  4. 부르봉 왕조는 부르봉 영지와 작위부터 원래 외조부의 소유였다. 또 카페 왕가와 부르봉 왕가는 토지 상속은 모계였지만 왕위 계승권은 부계로부터 기인한 것이기 때문에 왕위 정통성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카페(그리고 그 후계) 왕조는 왕자들을 유력 영주들의 상속녀와 결혼시켜 영토를 통합했는데, 당시로서는 일반적인 경우였다. 오스트리아는 국제결혼으로, 프랑스는 국내결혼으로 땅부자가 되었다!
  5. 역사적으로 프랑스 왕 루이 7세의 봉신이자 부인인 아키텐 공작령의 상속녀 엘레오노르(아키텐 공작 기욤 10세의 딸)가 남편과 이혼하고 잉글랜드 왕 헨리 2세와 결혼하는 바람에 프랑스 왕보다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 땅을 더 많이 가지는 기현상이 발생하기도 했다.
  6. 예를 들어 영국이 독일의 하노버 왕가에 시집간 공주에게 왕위를 계승했을 때 영국 왕과 궁정이 영어를 전혀 하지 못 하는 상황이 발생한 바 있다. 초기 영국 왕들 중에는 영어를 못 하고 프랑스 어만 하던 왕들도 있었지만
  7. 다만 마리아 테레지아 이후로는 도로 살리카 법으로 회귀…애시당초 카를 6세가 살리카 법을 폐지하려고 했던 가장 큰 이유는 합스부르크 가문에 남자 후계자가 더 이상 없었기 때문이다.
  8.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카를 6세는 비록 이름뿐일지언정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다)였기 때문. 신성 로마 제국이 프랑크 왕국에서 갈라져나온 나라라는 건 중·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 졸지 않은 이상 기본상식.
  9.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2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먼 친척인 앙주 공작 필리프에게 후사를 맡겼는데, 그가 하필이면 프랑스 왕 루이 14세의 손자였다. 당시 프랑스와 신나게 전쟁을 벌이고 있던 영국과 네덜란드(명예혁명으로 네덜란드 공화국 원수 빌렘 3세가 영국 왕 윌리엄 3세로 즉위)는 당연히 이게 무슨 소리야 하며 반대했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도 이에 가담.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졌다. 그 결과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프랑스 출신의 필리프가 스페인 왕으로 즉위하되, 이후 무슨 일이 있더라도 프랑스의 왕관은 착용 금지(…)하기로 합의했다. 스페인 왕위를 거저 먹으려던 루이 14세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10. 조카딸 이사벨 2세가 즉위하자 삼촌 카를로스가 왕을 자칭한 것인데, 카를리스타 내전은 여러 번 있었고 전부 다 카를리스타들이 졌지만 여전히 세력이 막강해 자기들만의 소왕국을 스페인 내부에 건설했다. 그리고 이 카를리스타들은 스페인 내전에서 우파들의 주요 세력으로 참전한다.
  11. 하노버는 살리카 법이 있었기 때문. 빅토리아의 숙부가 하노버 왕가의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로 즉위했다.
  12. 당나라측천무후, 신라선덕여왕, 진덕여왕, 진성여왕, 일본에서는 9명의 여성 덴노가 있었다.
  13. 그나마 몇 번 있었던 여왕들 역시 '모계'를 통한 계승은 금지되었다.
  14. 특히 국시격인 훈요 10조에서부터 형제 상속의 가능성을 대놓고 열어둔 고려는 이 사례가 아주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