脫亞論
아시아(동양)에서 벗어나 유럽(서양)의 사회문화를 받아들이고 지향한다.
1 개요
일본의 계몽가이자 우익의 뿌리격으로 불리우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제창한 것으로 1885년 일본의 언론에 기고문을 투고하게 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특히 오랫동안 네덜란드 학문에 익숙해져 왔던 후쿠자와 유키치의 영향과 반영을 그대로 받아들였던 점이 있으며 자세히 말하자면 그 당시 서구문명을 거부한 동양의 보수적인 성향을 벗어나 서양의 진보적인 성향으로 나가야 한다, 고리타분한 옛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지향한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네덜란드 학문에 익숙해져 있는 자신의 관점을 통해서 일본과 일본인은 이제 구시대적인 풍습과 인습에서 벗어나 서양의 새로운 문화에 눈을 떠서 문명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을 하였고 이를 통해 구시대 막부 정치에 오랫동안 물들었던 일본이 적극적으로 개혁과 개방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입장을 주장하였다.
2 비판
그러나 그가 제창한 탈아론에서는 특히 조선과 청 등이 언급되어 있기도 했는데 후쿠자와 유키치는 이들 두 나라를 문명을 거부하고 보수적인 사상과 망상에 빠진 나쁜 친구이자 민족 이라며 일본과 일본인은 이들 나쁜 친구와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당시 메이지 유신을 맞이하였던 일본인 세대 사이에서는 우상적이고 적극적으로 영향을 끼쳐왔으며 조선에서도 일부 개화파와 친일파를 통해서 우상숭배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조선과 청을 나쁜 친구, 구시대 유교사상에 빠진 위선을 가지고 있다 는 대목이 문제가 되어서 특히 조선과 청의 유교계 및 위정척사파의 입장에서는 매우 불쾌스러운 입장으로 악평을 받아왔다.
이런 탈아론의 영향 때문에 일각에서는 일본이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청에 대한 침략을 꿈꾸었던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었고 오늘날까지 한국과 중국에 대한 냉대적이고 보수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볼 때와도 연관이 있다는 주장을 하였다.
일본인들은 자국의 빠른 근대화에 비해 정치사상적 문제로 개혁이 좌절되고 있던 당시의 청과 조선에게 전혀 배울 것이 없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고 일본이 주변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서 어떠한 이점도 없음에도 주변국들은 자신들을 여전히 상국으로 여긴다고 불만을 품었다. 일본인들은 유교 문화권인 아시아를 부정하고 서양을 모방하고 추종하는 것으로 그들의 불쾌감을 해소하려고 했다.
이러한 주변국의 반응에도 일본에서는 이런 탈아론을 제창한 후쿠자와 유키치를 일본은행 1만엔 모델로 선정하기도 하였다.
- 참고항목 : 탈아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