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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脫亞入歐(脱亜入欧, だつあにゅうおう). 직역하면 "아시아를 벗어나 구라파(유럽)에 든다."
2 탈아론 전문
1885年3月16日、福沢諭吉が「時事新報」紙上に掲載した社説を「脱亜論」と呼んでいる。 世界交通の道、便にして、西洋文明の風、東に漸し、至る處、草も気も此風に靡かざるはなし。蓋し西洋の人物、古今に大に異なるに非ずと雖ども、其擧動の古に遅鈍にして今に活發なるは、唯交通の利器を利用して勢に乗ずるが故のみ。故に方今当用に國するものゝ為に謀るに、此文明の東漸の勢に激して之を防ぎ了る可きの覺悟あれば則ち可なりと雖ども、苟も世界中の現状を視察して事實に不可ならんを知らん者は、世と推し移りて共に文明の海に浮沈し、共に文明の波を掲げて共に文明の苦樂を與にするの外ある可らざるなり。文明は猶麻疹の流行の如し。目下東京の麻疹は西國長崎の地方より東漸して、春暖と共に次第に蔓延する者の如し。此時に當り此流行病の害を惡て此れを防がんとするも、果して其手段ある可きや。我輩斷じて其術なきを證す。有害一遍の流行病にても尚且其勢には激す可らず。況や利害相伴ふて常に利益多き文明に於てをや。當に之を防がざるのみならず、力めて其蔓延を助け、國民をして早く其氣風に浴せしむるは智者の事なる可し。西洋近時の文明が我日本に入りたるは嘉永の開國を發端として、國民漸く其採る可きを知り、漸次に活發の氣風を催ふしたれども、進歩の道に横はるに古風老大の政府なるものありて、之を如何ともす可らず。政府を保存せん歟、文明は決して入る可らず。如何となれば近時の文明は日本の舊套と兩立す可らずして、舊套を脱すれば同時に政府も亦廢滅す可ければなり。然ば則ち文明を防て其侵入を止めん歟、日本國は獨立す可らず。如何となれば世界文明の喧嘩繁劇は東洋孤島の獨睡を許さゞればなり。是に於てか我日本の士人は國を重しとし政府を輕しとするの大義に基き、又幸に帝室の神聖尊嚴に依頼して、斷じて舊政府を倒して新政府を立て、國中朝野の別なく一切萬事西洋近時の文明を採り、獨り日本の舊套を脱したるのみならず、亞細亞全洲の中に在て新に一機軸を出し、主義とする所は唯脱亞の二字にあるのみなり。 我日本の國土は亞細亞の東邊に在りと雖ども、其國民の精神は既に亞細亞の固陋を脱して西洋の文明に移りたり。然るに爰に不幸なるは近隣に國あり、一を支那と云い、一を朝鮮と云ふ。此二國の人民も古來亞細亞流の政教風俗に養はるゝこと、我日本國に異ならずと雖ども、其人種の由來を殊にするか、但しは同様の政教風俗中に居ながらも遺傳教育の旨に同じからざる所のものある歟、日支韓三國三國相對し、支と韓と相似るの状は支韓の日に於けるよりも近くして、此二國の者共は一身に就き又一國に關してして改進の道を知らず。交通至便の世の中に文明の事物を聞見せざるに非ざれども耳目の聞見は以て心を動かすに足らずして、其古風舊慣に變々するの情は百千年の古に異ならず、此文明日新の活劇場に教育の事を論ずれば儒教主義と云ひ、學校の教旨は仁義禮智と稱し、一より十に至るまで外見の虚飾のみを事として、其實際に於ては眞理原則の知見なきのみか、道徳さえ地を拂ふて殘刻不廉恥を極め、尚傲然として自省の念なき者の如し。我輩を以て此二國を視れば今の文明東漸の風潮に際し、迚も其獨立を維持するの道ある可らず。幸にして其の國中に志士の出現して、先づ國事開進の手始めとして、大に其政府を改革すること我維新の如き大擧を企て、先づ政治を改めて共に人心を一新するが如き活動あらば格別なれども、若しも然らざるに於ては、今より數年を出でずして亡國と爲り、其國土は世界文明諸國の分割に歸す可きこと一點の疑あることなし。如何となれば麻疹に等しき文明開化の流行に遭ひながら、支韓兩國は其傳染の天然に背き、無理に之を避けんとして一室内に閉居し、空氣の流通を絶て窒塞するものなればなり。輔車唇歯とは隣國相助くるの喩なれども、今の支那朝鮮は我日本のために一毫の援助と爲らざるのみならず、西洋文明人の眼を以てすれば、三國の地利相接するが爲に、時に或は之を同一視し、支韓を評するの價を以て我日本に命ずるの意味なきに非ず。例へば支那朝鮮の政府が古風の専制にして法律の恃む可きものあらざれば、西洋の人は日本も亦無法律の國かと疑ひ、支那朝鮮の士人が惑溺深くして科學の何ものたるを知らざれば、西洋の學者は日本も亦陰陽五行の國かと思ひ、支那人が卑屈にして恥を知らざれば、日本人の義侠も之がために掩はれ、朝鮮國に人を刑するの惨酷なるあれば、日本人も亦共に無情なるかと推量せらるゝが如き、是等の事例を計れば、枚擧に遑あらず。之を喩へば比隣軒を竝べたる一村一町内の者共が、愚にして無法にして然も殘忍無情なるときは、稀に其町村内の一家人が正當の人事に注意するも、他の醜に掩はれて湮没するものに異ならず。其影響の事實に現はれて、間接に我外交上の故障を成すことは實に少々ならず、我日本國の一大不幸と云ふ可し。左れば、今日の謀を爲すに、我國は隣國の開明を待て共に亞細亞を興すの猶豫ある可らず、寧ろその伍を脱して西洋の文明國と進退を共にし、其支那朝鮮に接するの法も隣國なるが故にとて特別の會釋に及ばず、正に西洋人が之に接するの風に從て處分す可きのみ。惡友を親しむ者は共に惡友を免かる可らず。我は心に於て亞細亞東方の惡友を謝絶するものなり。 『時事新報』1885(明治18)年3月16日 |
2.1 탈아론 전문 해석 요약
"서구화의 바람이 동양을 향해 불어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모든 국가는 서구사회와 더불어 이 운동에 동참하여 문명의 열매를 맛보는 것 이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문명은 홍역과 같지만, 여러 이로운 점을 가져다 준다는 점에서 홍역보다는 이롭다. 그러므로 국가는 문명에 거역할 수 없으며 이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문명화 과정에서 보수적인 정부(도쿠가와 막부)는 걸림돌일 뿐이며 이를 뒤집어야만 일본에서 문명화를 이룰 수 있다. 옛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얻는 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아시아를 벗어나는 것'(脫亞)이다. 비록 일본이 이미 정신적으로는 아시아를 벗어났지만, 이웃의 두 나라(한국과 중국)는 개혁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이 나라들의 유교적 가르침은 모두 위선적이고 뻔뻔할 뿐이다. 중국과 일본의 개혁이 실패한다면, 이들은 곧 세계 열강에게 나라를 빼앗길 것이다. 서구인들은 언제나 일본, 중국, 한국을 같은 문화를 가진 비슷한 나라들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일본에게 걸림돌이 될 뿐이다. 나쁜 친구를 사귀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마찬가지로 나쁜 인상을 주기 때문에, 일본은 이웃의 나쁜 아시아 나라들과 관계를 끊어야 한다.[1]
3 본문
일본의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가 1885년 3월 16일자 일본 신문 <시사신보(時事新報)>에 〈탈아론(脫亞論, 일본어: 脱亜論 (だつあろん))〉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기고하면서 일본의 나아갈 길을 제시한 것을 이르는 말. 저 글자를 좀 비꼬아서 말하자면 우매하고 서구 문물을 못 받아들여서 개혁을 생각하지 못하는 다른 아시아의 국가들을 깔보고 재빨리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그와 동등한 위치에 선 뒤 우월한 유럽 열강 사이에 끼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사실 여기에는 후쿠자와가 대놓고 탈아시아 선언을 한 것과 상관없이 근대 이전부터 일본의 문화가 주변 나라들과 꽤 이질적인 면이 많았던 점도 크게 작용했다. 각 지방이 하나의 나라나 다름없는 체제나 상공인의 힘이 명목상의 신분과 달리 상당히 막강한 것, 귀족 가문이 문장(Crest)을 쓰는 것 등 전통문화 자체가 이미 근대 이전 서양에 가까운 부분이 상당수 있기 때문에 이런 발상을 하기에 더 용이했다. 그리고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완전히 빼도박도 못하게 서구화한 나라로 탈바꿈했으므로 상황 자체가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저런 주장을 할 만할 상황이었다. 따라서 후쿠자와가 흥아론을 버리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나올만한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는 성급한 주장이다. 명치유신은 중앙집권화와 관료제를 확립했는데 그건 이미 동아시아에서 보편화되어있었다. 조선의 6조 이부는 관료의 선발,병조는 군대를 형조는 법의 집행과 치안을 호조는 재정과 지방행정을 예조는 외교와 관리들의 교육을 공조는 공공공사,수공업을 담당했다. 갑오개혁후에도 그 틀은 변하지 않았다.궁내부로 정치와 왕실의 분리되고 예조의 업무가 분리되었을 뿐이었다. 사실상 6조의 틀이 더 정교해진 것 뿐이었다. 조혼금지와 신분제가 폐지되긴 했으나 법과 현실에 괴리가 있었다.
아예 "나쁜 친구를 사귀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마찬가지로 나쁜 인상을 주니, 일본은 이웃의 나쁜 아시아 나라들과 관계를 끊어야 한다."라고까지 한다. 한 마디로 동양은 후진적인 것, 이제 우리는 서양문명을 따라서 근대 문명인이 되자!
이 사상에 입각하여 해군과 산업 및 은행 제도는 영국에서, 육군은 독일에서, 예술과 음식은 프랑스에서, 건축은 이탈리아에서, 법률의 초석은 미국에서 가져와 자국에 맞게 변형시켰다. 이러한 일본의 근대화 과정은 고대 일본이 중국과 한국에서 율령체제와 불교와 유학, 건축학과 음식문화와 의복문화 등을 수입해 일본식으로 변형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 이는 당시의 서양식 문명화와 근대화를 매우 당연하게 여기던 시대상을 고려하면 꽤나 선진적인 선택이었다. 그 덕택에 일본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경제적, 기술적으로 남 부럽지 않게 떵떵거릴 만한 유산도 만들어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아시아를 "벗어나서" 유럽에 끼어 유럽의 지식과 기술들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인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동양인들이 좋은 친구들인 백인들에 맞서 단합해야 한다면서 대동아 공영권을 외쳤다. 그러면서 "좋은 친구"인 이탈리아나 독일과는 편을 맺었다가 "좋은 친구들" 가운데 하나인 미국에게 개발살났다. (…) 대동아 공영권과 같은 개념은 사실 세부적인 부분은 조금씩 다르지만 후쿠자와 유키치 외에도 조선이나 청나라에서도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았으나, 후쿠자와 유키치는 처음에 동양 삼국이 근대화를 이루어서 단합으로 외세를 막아내자고 주장하다가 조선의 갑신정변이 실패하면서 방향을 바꿔 탈아입구론을 주장했다. 그는 조선과 청나라가 근대화를 이루려면 일본처럼 구체제를 쓰러뜨려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두 나라 모두 근대화를 위한 개혁 정책들이 보수파의 저항으로 실패하여 후쿠자와는 아시아 근대화에 기대를 완전히 접었다.[2]
이러한 " 탈아입구론은 입아(入亞)를 추진한 일본 제국이 멸망한 후 일본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기에 21세기에 이르러서도 일본은 동북아시아에 대한 소속감이 매우 희박하다."
반댓말로는 탈구입아(脫歐入亞)가 있다. 사실 이것도 일본에서 종종 나오는 말인데, 성장하는 아시아 대륙인가, 기존의 강대국인 서구 국가들인가를 두고 갈팡질팡하는 일본의 모습을 잘 드러낸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로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에서도 "엔화를 중심으로 아시아는 모이자~"라며 다급하게 외치는 기모노를 입은 일본인에게 아시아 국가들이 아시아를 버릴 때는 언제고? 라며 비꼬는 문장으로도 말했다.
실제로 2000년 초반, 아시안 경제회의에서 일본은 아시아끼리 뭉치자며 난데없이 일본의 엔화를 중심으로 우리도 유로화처럼 아시아 공동 통화를 만들자고 했지만, 한국이나 중국이나 아랍권을 비롯한 나라들은 대꾸조차 않고, 인도네시아에서는 유럽이나 미국 쪽과 손잡고 아시아를 벗어나자던 놈들이 지금 와서 뭔 잠꼬대냐며 비웃던 적까지 있다. 심지어 지금에 와서는 자신들이 주장했던 아시아권 내의 경제협력을 걷어차고, 미국 주도로 재편되고 있는 TPP[3]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 마디로 감탄고토.[4]
자민당 정권시에 미국과 동맹관계를 한층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려다가 민주당 정권 들어서 미국을 벗어나 독자적인 입장에서 아시아와의 관계 개선을 생각하는 모습에서 이런 일본의 혼란을 짐작할 수 있다. 끝내 이런 모습 때문에 죽도 밥도 못 만들고, 미국과 아시아 양쪽 다 일본에 차가운 시선을 보낸다. 특히 미국에 버락 오바마 정권이 들어서고 일본 민주당 정권이 들어섰을 초기에는 양국 관계가 상당히 냉각한 적이 있다.
그러나 미국과의 대등한 외교와 중국과의 관계 강화를 외치던 일본 민주당이 중국의 대국화 움직임에 밀리고, 급기야 불법 조업하던 중국인 선장을 중국의 희토류 금속 수출 압력에 풀어주자 일본 안에서도 중국에게 경계심이 팽창했으며, 끝내 일본 민주당은 미국과의 동맹 강화를 들고 나왔다. 아무래도 당분간 일본은 미국과 손을 잡으면서 중국을 경계하는 태도일 듯 하다.
일본의 유명 잡지이자 우익 잡지인 <문예춘추>에 글을 실은 어느 우익인사는 탈아초구(脫亞超毆)란 용어를 지어 쓰기도 했는데, 이것은 아시아 따위는 이미 벗어나 이제 유럽/미국의 서구를 뛰어넘겠다는 의도로 쓴 용어.[5] 이 표현은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로 응용 가능해서 상당한 바리에이션을 보인다.
입아(入亞)를 추진한 일본 제국과 2차 대전의 패전 이후에도 이 탈아입구 사상은 기어코 죽지도 않고 살아남았는데, 여기에는 정작 전후 아시아 국가들의 대부분이 공산화되거나 파시즘에 빠져버린 것이 원인이 되었다. 1970~1980년대 당시 같은 아시아 국가인 한국, 중국의 비민주적, 인권탄압적 사회 모습과 비교했을 때, 일본은 나름대로 서구 민주주의적 제도를 갖추는 데 성공했고, 또한 당시 서구권의 문물제도를 받아들이는데도 거부감이 없었으므로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일본인들의 탈아입구적 사상을 비교적 현재까지 끌고온 배경이 된 것이다.
이 문제는 다소 혼란스럽게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후쿠자와의 탈아론은 당시의 아시아주의와 대비되는 듯 하면서도 실상은 같은 뿌리에서 비롯되는 면이 강하다. 탈아론과 아시아주의는 양측 다 당시 동양인들(특히 일본인들)에게 퍼져있던 옥시덴탈리즘과 서구에 대한 열등감이 크게 작용했다. 다만 후자는 서구를 아시아에서 말 그대로 "밀어내려는" 정서에 기반해 아시아의 연대를 짖어댄 것이고 전자는 그냥 저항생각하는 것을 포기하고 (...) 아예 서구가 되자는 삼천포 주장으로 빠졌다는 게 표면적 차이일 뿐이다. 어느 쪽이든 체계성이 있는 사상이라기보다는 서구를 지나치게 의식하고 타자화한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6]
그렇기 때문에 탈아론은 후쿠자와가 처음 글을 기고한 뒤 몇년 간만 흥아론과 대립했을 뿐 그 뒤에는 그냥 흥아론과 자연스럽게 섞여서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말로 이어질 수 있었다. 즉, 탈아론과 아시아주의가 섞일 수 있었던 것은 물과 기름이 섞였다거나 하는 것과는 다르며, 둘의 본질이 결국 같은 뿌리에서 비롯된 만큼 언젠가는 벌어질 일이었다. 단적인 예로 이안 브루마(Ian Buruma)와 같은 옥시덴탈리즘 연구가들의 경우, 탈아론과 흥아론이 대립관계에서 상호관계로 전환한 것은 늦게 잡아도 야마가타 아리토모 집권기에는 벌어진 일로 보고 있다.[7]
4 다른 나라의 사례
다만 이러한 유행과 정치적 성향으로는 일본의 탈아입구 사상과는 다르지만 과거 미국이나 남아메리카의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칠레, 아프리카의 라이베리아와 모로코, 이집트, 서아시아(중동)의 터키 같은 나라들에게도 있었다. 라이베리아는 항목을 보듯이 미국의 흑인 해방 노예들이 미국 정부의 지원하에 서아프리카 땅으로 이주 잡고 국가를 건국하는 등 역사적인 원인이 있었지만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칠레는 유럽풍 문화를 더 고상하게 여기고 남미 지역 원주민들과 혼혈화가 이뤄진 남미 나라들과 달리 개국 초기부터 원주민들을 죽이고 순혈 유럽계 백인들이 땅을 차지하여 국가를 건국하고 백인들 중심으로 이민을 받아들이는 등 역사적인 이유도 있었는데다 부유층이 모국이 아메리카가 아닌 유럽으로 여겼던 점, 미국은 유럽 열강이던 영국의 식민지배에서 독립 전쟁을 통해 독립하는 등 독립 이후 정치,외교적으로 유럽과의 연결성을 부정했지만 일부 부유층이나 유행에서 유럽풍을 열망하던 역사[8]가 있다.
터키와 모로코는 지리적으로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에 속해 있지만 터키의 경우 이스탄불등 주요도시와 국가 영토의 절반이 유럽에 속해 있고 축구등 스포츠 리그에서도 아시아가 아닌 유럽 소속으로 뛰는데다 두 나라 모두 오스만 왕조와 무와히드 왕조 시절 이베리아 반도와 발칸 반도등 유럽 일대를 지배하기도 했었으며 현대에 와서는 유럽 연합 가입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또한 모로코는 1970,80년대에 스페인의 식민 지배에서 독립하려던 서사하라를 1975년 강제 병합하고 아랍권 국가면서도 중동 아랍 국가들과 적대관계에 놓여있던 이스라엘을 대놓고 정식 승인하는 등 아프리카와 중동 아랍 국가들로부터 정치적으로 왕따 당하자[9][10] 서유럽과 미국등 서방 국가들에게 의지하려는 모습도 보인 바 있었다.
유럽과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운 지중해권인 북아프리카 마그레브 지역 국가들도 연합으로의 가입로마 제국?을 모색하고 있다.[11] 이미 튀니지랑 리비아가 가입을 신청했다가 상콤하게 거절되었다.
이집트의 경우 지리적으로 아프리카 국가이지만 종교적으로 이슬람교를 믿고 인종 구성에서도 아랍계 코카소이드가 다수인 아랍 국가이고근데 이집트 말고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리비아도 이슬람교 믿는다. 냉전시대때 이스라엘과의 중동전쟁에서 4차례씩이나 참전하고 중동 아랍 세계의 맹주를 자처할 정도로 중동 아랍 일변도의 외교 정책을 펼쳤으나 제4차 중동전쟁 종전 이후인 1970년대 말 이스라엘과의 평화 협정 체결로 중동 아랍 세계 국가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아랍국가들의 지역 기구인 아랍 연맹에서도 회원국 자격을 박탈당하고 추방당하는 등 중동 밑 북부 아프리카의 아랍 국가들로부터 외교적으로 완전히 고립당하자 1980년대에 탄자니아, 모잠비크, 카메룬, 케냐, 가나, 르완다, 우간다, 잠비아 등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흑인 국가들과의 우호관계를 만들며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 지역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여 아프리카의 맹주 국가가 되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다. 실제로 앙골라나 르완다 같은 일부 아프리카 국가들의 내전에서 이집트가 무기 지원을 하며 분쟁에 개입했었다는 의혹도 있다. 물론 1989년 아랍연맹에 다시 재가입하긴 했지만 이집트는 아랍국가들치고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에 대한 경제적,정치적 영향력이 꽤 있는 편이다.
그밖에 이스라엘도 지리적으로 아시아지만 주변 아랍국가들과의 대립으로 경제 및 군사적,스포츠 등 모든 분야에서 아랍 국가들에게 따돌림당하여 국제적으로 아시아 소속이 아닌 유럽 소속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아르메니아나 조지아,아제르바이잔같은 나라도 지리적으로 아시아이지만 자국을 아시아권이 아닌 유럽국가로 생각하는 등 경제적, 스포츠,군사적인 활동은 유럽에서 활동하고 있다.
5 대한민국의 탈아입구
한국에서도 탈아입구적인 사고방식이 만연해 있다. 과거 식민시절부터 현재까지 오랫동안 그리고 현재조차도 상당부분 유럽위주의 시대였기 때문에 어느 정도 세계 전체가 유럽취향으로 경도된 탓. 이러다보니 미의 기준도 소위 "전형적 서양 백인"의 형질이 표준이 되다시피 하여, 세계의 많은 비유럽계 국가의 유색인종 국민들조차도 유럽 백인의 하얀 피부, 오똑한 코, 금발벽안, 훤칠한 체격과 뚜렷한 이목구비 등 유럽 백인의 외모를 선망하게 되었다.
또한 흑인이나 동남아 등의 다른 인종보다 선진국의 서양인에 대한 무한한 호감을 표하거나 심지어는 흑인과 동남아 인종을 더럽다 여기며 폄하하고 서양인을 우월하게 여기며 우정이나 이성간의 결혼 및 섹스 등의 교류에 있어서도 백인만을 원하면서 이를 신분상승으로 생착각하는 경우가 압도적이 되었다. 이러한 '탈아입구는 한국조차 예외가 아니다.
극단적인 부류는 서양인의 우월성을 진심으로 숭상하며 서양인으로 못태어난 자신을 원통해하며 인종개량이나 혼혈을 운운해대기도 한다.자살후 환생닥추
2011년 11월 21일자 동아일보는 한국형 탈아입구가 대한민국 대학 사회에서 얼마나 심각한지 보도했는데 대학생에다 기업이나 학부모들도 어른들도 많이 이렇다. 국내 유명 대기업들도 "'뉴요커풍/파리풍 생활은 화려하고 부유하지만 동남아풍 생활은 초라하다."'라는 투의 문구를 2010년에도 대놓고 썼으니 세계적인 망신거리다.[12] 그리고 파리풍이니 파리지앵 이런 건 일본인들이 먼저 이런 사고방식 가지고 파리에 가서 실제와 다른 모습에 쇼크를 받았던 바 있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미국 기득권에 들어가서 학교강사를 해 자격도 충분하고 백인들도 가르침을 받던 흑인 강사를 두고 백인이 아니라서 학부모들이 영어강습을 피한다는 보도도 한국에서 나온다.[13] 반대로 백인이라서 강사라고 썼더니 무자격에 미국에서 아동 성폭행을 저질러 인터폴 수배를 받던 파렴치한 아동 성범죄자[14]라는 일도 드러나서 충공깽에 빠진 때가 겨우 2000년대 중순이다. 알게 모르게 탈아입구적 사고방식이다. [15]
6 관련항목
- 메이지 유신
- 탈아론
- 후쿠자와 유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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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가와 코나미의 PC버젼 게임 지역락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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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스포츠이쪽은 원해서 탈아입구한 게 아니다. -
2015년 1월의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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