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의 역대 황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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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 티베리우스 2세 콘스탄티누스
그리스어: 티베리오스 2세 콘스탄디노스
생 540 경 ~ 몰 582, 재위 574 ~ 582.
전임 황제 유스티누스 2세 치하에서 황제 친위대인 엑스쿠비토레스 병단의 코메스였다. 574년에 잇따른 외교적 실패와 군사적 실패에 절망한 유스티누스 2세가 심각한 정신 이상 증세를 보여 더 이상 제국을 통치할 수 없게 되자 유스티누스 2세의 황후 소피아와 공동 섭정을 맡다가, 578년에 유스티누스 2세가 죽자 즉위하였다.
전임 황제들인 유스티누스 1세,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유스티누스 2세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3~4세기의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누스 1세와 마찬가지로 일리리아 출신의 황제였다.
다만 이름이 하필이면 그 때까진 이미지가 좋지 못했던 티베리우스와 같은 게 영 부담이 되었는지, 즉위하자마자 이름 뒤에 콘스탄티누스를 붙여서 '티베리우스 콘스탄티누스'가 되었다. 하지만 역시 티베리우스란 이름이 워낙 인상이 깊었던 탓에 당대인들이나 현대인들이나, 그를 그냥 티베리우스 혹은 티베리우스 2세로만 부른다.
유스티누스 2세 때 재정 상황이 극도로 나빴다지만 여러모로 현명한 운영을 하여 최악의 파산 상황에 빠지는 것만은 막았으며 그 상황에서도 꾸준히 비축금 예산까지 편성하는 운영의 묘를 보였다.
다만 유스티누스 2세의 실수로 시작된 페르시아 전쟁은 여전히 부담이었으며, 페르시아에게 여러 차례 큰 타격을 주어 조기 평화 협상을 벌이려 하였으나 페르시아의 당시 왕중왕 호르미즈드 4세는 국내에 대한 체면 문제와 자존심 때문에, 전쟁을 끝내지 않는 옹고집을 보여주며 양국 모두의 재정과 군사를 고갈시키는 치킨 게임을 벌이려 하였다.[1]
어떤 의미에서는 약 칠십 년 후 벌어질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가 벌일 양패구상의 전조였으며 티베리우스 2세는 이 문제를 결국 해결하지 못하고 병사하고 만다. 그가 미처 해결하지 못한 재정 파탄과 대 페르시아 평화 조약의 문제는, 그의 사위이자 후임 황제로 제위에 오른 마우리키우스가 인수받게 된다.
다만 티베리우스 2세도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명백한 실책이 있었는데, 마우리키우스가 주도한 페르시아 원정 실패의 책임을 가산측으로 몰아붙여 그동안 동로마측의 충실한 신민 역할을 하던 가산 연맹의 붕괴를 초래했다는 점이다. 당시 가산의 왕이었던 문히르 3세는 당대 최고의 명장으로 꼽히며 사산측과 그 동맹인 라흠족(사산을 따르던 아랍의 대표부족으로 비슷한 입장인 가산족과 대립하였다)를 여러차례 격파한 군지휘관이었다. 그런 문히르 3세를 박대하였으며 크테시폰 원정 실패 후 마우리키우스는 그것이 문히르 3세의 배신 때문이라는 모함을 티베리우스에게 보냈는데 진상규명도 없이 문히르 3세를 체포함으로서 향후 이슬람 세력의 부상을 막을 훌륭한 방패를 알아서 없앤 셈이다.- ↑ 로마 측이 입은 막심한 피해가 강조되지만 실인즉슨 사산조 측도 계속되는 군사와 재정의 고갈로 큰 고통을 당했으며, 사산조 측이 동쪽 국경에서 가해지는 압력에 취약해진 것도 실은 이 원인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