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리우스

로마의 역대 황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초대 아우구스투스2대 티베리우스3대 칼리굴라
이름티베리우스 클라디우스 네로(Tiberius Claudius Nero)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Tiberius Iulius Caesar)[1]
왕명임페라토르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Imperator Tiberius Iulius Caesar Augustus)
출생지이탈리아 로마
사망지이탈리아 미세눔(Misenum)
매장지이탈리아 로마 아우구스투스 영묘(Mausoleum of Augustus)
생몰년도BCE 42년 11월 16일 ~ CE 37년 3월 16일
재위기간CE 14년 9월 14일 ~ 37년 3월 16일

황제로서 공식 이름은 임페라토르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Imperator Tiberius Iulius Caesar Augustus)[2]로서, 로마 제국의 2대 황제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이며 상속자, 아우구스투스의 황후인 리비아 드루실라(Livia Drusilla, BC 58~AD 29)의 친아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활 당시 황제이기도 하다.[3] 한국의 개신교에서는 라틴어 탈격을 적용하여 '디베료'라 부른다.[4]

1 개괄

고대 로마가 능력본위 사회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이다.[5] 제국의 2번째 황제부터 초대 황제와 혈연관계가 없었다는 점이 로마의 특성을 한눈에 보여준다. 아우구스투스의 후임으로, 그의 정책을 받들어 로마 제국을 굳건한 반석 위에 올려놓은 인물이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제국의 기틀을 잡았고, 티베리우스는 그것을 정착시켰다고 평가받는다.

초기에는 권위를 집요하게 거부했다. 티베리우스는 콘스탄티누스 1세 이전의 로마 황제 중 유일하게 자신의 신격화를 거부했다.[6] 티베리우스는 그가 황제로 보이지 않기 위해 극도로 조심했다. 그의 인내심이 바닥나기 전인 치세 후기까지는, 그는 원로원의 제1시민을 자처했다. 그에게는 역사가들의 악평이 집중되었는데, 당시 식자층이었던 원로원 의원들에게 평이 아주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근대에 들어 티베리우스의 명령서나 속주에서의 행적[7]이 재발견되면서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아직도 그의 행적에 대한 논란은 많지만, 그가 유능한 행정가였다는 사실에 대한 이견은 이제 없다.

2 황제가 되기 전의 생애

티베리우스는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리비아 드루실라의 맏아들로, 기원전 42년 11월 16일에 로마의 팔라티누스 언덕에서 필리피 전투 때인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랑쿠스가 집정관이던 해에 태어났다. 일각에서는 그가 푼디 출신이라고 믿기도 하지만 이곳은 그의 외할아버지의 출생지라고 한다.티베리우스는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 양쪽이 모두 클라우디우스 가문에 속했기에 이중으로 클라우디우스 가문에 속했다.[8]

티베리우스의 친아버지인 클라우디우스 네로는 재무관 신분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 밑에서 알렉산드리아 전쟁 당시 함대를 지휘하기도 했다. 그 공로로 카이사르로부터 제사장 지위를 푸블리우스 스키피오 대신 받으며 감사를 받았고, 갈리아로 파견되어 아르보나 아를라테 같은 식민도시 건설을 맡아 수행했다. 그러나 그는 카이사르 암살 이후, 그는 법무관을 지냈고 임기가 끝날 무렵 레피두스와 안토니우스 사이에 권력다툼이 일어나자 합법적인 기간보다 더 오랫동안 공직에 남게 되었다.또한 그는 옥타비아누스[9]의 반대파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파에 속했던 인물이었다.

이런 까닭에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사이의 권력투쟁에서 안토니우스 파가 패하자, 젖먹이였던 티베리우스는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생애 첫 2년을 도피해야만 했다. 도피 당시, 네아폴리스에서는 몰래 항구로 도망치던 중, 티베리우스가 2차례 울음을 터뜨려 일행이 거의 죽을 뻔하기도 했으며, 그의 가문은 시칠리아, 그리스 등지를 떠돌았는데,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클리엔티스였던 스파르타인들의 공공 탁아소로 맡겨지기도 했고, 어머니와 함께 야반도주 중 불길에 목숨을 잃기도 할 뻔했다.[10]

이후 3살이 된 무렵, 사면령이 내려져 일가가 로마로 귀환하였다. 그러나 이때 옥타비아누스는 당시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아내였던 리비아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클라우디우스 네로에게 아내와 이혼할 것을 요구해 부모가 이혼하게 된다. 그 이후, 옥타비아누스는 둘째[11]임신 중이었던 리비아와 결혼하게 된다. 이 때 티베리우스는 결혼 직후, 갓 출산한 동생 드루수스[12]와 함께 아버지에게 살게 된다. 그러나 이마저도 9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병으로 사망하여 이들 형제는 옥타비아누스와 재혼한 리비아와 함께 살게 된다.[13]

9세 이후, 로마 권력자인 옥타비아누스의 집에서 성장한 티베리우스는 12세의 나이에 계부 옥타비아누스 휘하에서 정무, 군무업에 종사하였다. 그리고 B.C.29 8월,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와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연합함대를 악티움에서 격파한 이후, 계부의 조카인 마르켈루스와 함께 악티움 해전 기념 개선식에 함께 참석하였다. 이때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가 타고 있는 전차의 왼쪽에서 말을 타며 개선식에 참석했으며 수도 축제를 주재했고 키르쿠스에서 열린 트로이 경기에서 연장자 무리를 이끌었다.

티베리우스는 성년식 이후, 아그리파의 딸이자 카이킬리우스 아티쿠스의 증손녀였던 빕사니아 아그리피나와 결혼했다.이후, 그는 동생 드루수스와 함께 중용되어, 게르마니아 전선을 휩쓰는 등 출중한 군사적 재능을 뽐냈다.아울러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가 주재하는 재판정에서 아르켈라우스 왕, 트랄레스인, 테살리아인들의 변호를 통해 공적인 삶에 첫발을 디뎠다. 그리고 그는 지진으로 인한 피해 때문에 원조를 호소하는 라오디케아, 티아티라, 키오스 사람들을 위해 원로원에 탄원하는 일을 맡았다. 또한 검사로서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음모를 꾸민 파니우스 카이피오, 무레나를 대역죄로 고소하여 유죄 선고를 받아내기도 했다.

드루수스가 중간에 게르마니아에서 낙마 사고로 숨지고 난후, 그는 게르마니아에서 동생의 유해와 대면하고 동생의 시신을 직접 로마까지 운반했다. 이때 그는 가는 길 내내 말을 타지 않고 동생의 관 앞에서 걸었다.[14]

후계자 물망에 올랐던 마르켈루스[15]아그리파가 사망하자 티베리우스는 사실상 공동 황제로 아우구스투스와 책임을 나누어 지게 되며, 황제의 특권 중 하나인 호민관 특권까지 부여받았다. 당시 아우구스투스는 본래 아그리파와 율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외손자들이자 양자였던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의 후견인으로 아그리파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자신보다 건강했던 아그리파가 먼저 죽자 그는 아그리파의 아내였던 딸 율리아를 다시 티베리우스에게 시집보냈다[16]. 이는 그가 티베리우스를 사실상의 후계자이자 가이우스와 루키우스의 후견인으로 삼겠다는 의미였다. 다시 말해서,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를 자신이 갑작스러운 사망 등으로 자리를 비웠을 때 임시로 앉게 될 대타로 생각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더해 티베리우스와 율리아의 결혼은 아내 리비아의 가문(클라우디우스)와 자신의 가문(율리우스)의 결합을 더욱 공고히 하고, 만약 티베리우스와 율리아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난다면 이를 통해 후계자 후보를 늘리겠다는 아우구스투스의 계산도 담겨 있었다.

재혼 후 처음에는 티베리우스도 최대한 노력했다. 하지만 율리아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얼마 안 되어 죽고, 율리아의 사생활과 성격 차이 등으로 부부 관계는 급속히 나빠지게 되었다. 결국 품행이 좋지 않은 율리아와의 갈등 등 압박감을 견디지 못한 티베리우스는 기원전 6년 모든 공직을 내놓고 로도스 섬으로 은퇴한다.[17] 한편, 티베리우스가 로도스 섬에서 은둔 생활을 하는 동안 율리아는 간통죄를 추궁받아 티베리우스와 이혼을 당해 로마에서 추방되었다.

티베리우스가 7년간 로도스 섬에 틀어박힌 이후,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들인 가이우스와 루키우스는 성장하여 공직을 경험하였지만 두 사람 모두 황제의 재목이 아니었음이 밝혀지게 되었다. 먼저 첫 번째 손자 가이우스는 동방에서 다툼에 휩쓸려 상처를 입고 후유증으로 돌연사하였고, 루키우스 역시 마찬가지로 죽어버린다. 두 손자를 잃어버린 아우구스투스는 애당초 티베리우스에 대해 상당히 화가 나있었다[18]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가 빕사니아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소(小) 드루수스의 성년식 참석을 위해 로마 방문을 요청할 당시, 이를 허락하여 복귀가 이루어지게 된다. 하지만 그는 로마 귀환 이후에도 아들을 공적인 삶으로 인도한 이후, 곧바로 카리나이에 있는 폼페이우스의 옛 집에서 나와 에스퀼리누스 언덕의 마이케나스 정원에 위치한 저택으로 이사한 것을 제외하고는 3년 간 사적인 일을 제외하고는 공적인 일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로마 귀환 3년 후, 가이우스와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모두 죽고 말았다. 그러자 서기 4년, 로마로 귀환했던 티베리우스는 계부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로 입적되어 이름을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로 바꾸고,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문의 수장 자리를 조카 클라우디우스에게 물려주게 된다. 이때 그는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모든 특권도 포기했으며 율리우스 가문의 일원으로 들어가면서[19] 자신의 친조카이자 옥타비아의 손자였던 게르마니쿠스를 양아들로 삼게 된다[20]. 같은 해, 티베리우스는 자신의 인생에서 2번째로 호민관 직권을 부여받게 된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의 아들이자 양아들로 입적되어 있던 아그리파 포스투무스[21]는 양아들 관계가 파기되고 추방되게 된다. 이로서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유일한 아들이자 율리우스 가문의 후계자이며 유일한 정치적 후계자임이 확고히 굳혀지게 된다.

로도스 섬에서 복귀한 이후 티베리우스는 바루스의 3개 군단이 게르마니아 땅에서 궤멸당했을 때 - 아우구스투스가 말아먹은 - 라인 강을 지키면서 뒷처리를 담당했고, 달마티아의 반란 진압에서도 공을 세워 입지를 더욱 단단히 굳히기도 했다. 그리고 2년 뒤 돌아와서 미뤄 두었던 일리리아에서의 전쟁 개선식을 거행했다. 곧이어 집정관은 그에게 아우구스투스와 속주를 공동 관할하는 자격을 부여하고 다음 5년 동안 그를 도와 인구조사 임무를 맡기게 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서기 13년 로마군 총사령관과 종신 호민관 직권을 아우구스투스와 공동으로 지명받아서 공동황제가 되었다.

3 황제

티베리우스는[22] 원로원의 승인을 받아 황제 자리에 오른다. 티베리우스는 처음부터 상당한 약점을 안고 시작해야 했다. 아우구스투스가 대타라고 명시해 버렸기 때문에, 그는 정국 운영에서 자신의 뜻을 마음껏 펴기 힘든 위치였다. 특히 이 부분에 대해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 공정성을 잃을 정도로 비판적이었던 수에토니우스에게 심하게 까였다. 하지만 티베리우스는 실제로 오랜 기간 동안 황제라는 칭호를 받지 않았지만, 주저하지 않고 가장 먼저 황제의 권력을 행사하여 근위병을 부른 뒤, 자신을 호위케 했다.[23]

사실 티베리우스가 제위 이양 과정에서 조심히 행동했던 이유는 사방에서 대두되는 위험 때문이었다. 아그리파 포스투무스의 노예였던 클레멘스는 주인의 복수를 위해 대규모 군대를 조직하기도 했고, 귀족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는 비밀리에 반란을 계획하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티베리우스는 스스로를 "나는 늑대의 두 귀를 붙잡고 있다."고 종종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티베리우스는 자신이 장군으로서 공적을 수없이 쌓은 일리리쿰과 게르마니아 주둔 군대들로부터 파업을 선포받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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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리쿰과 게르마니아 땅의 군대는 봉급 인상, 복무연한 단축, 아우구스투스의 유증금 증액 등을 요구했고, 자신들이 티베리우스를 투표로 뽑지 않았기에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이에 티베리우스는 도나우 전선에서 일어난 파업은 친아들 소(小) 드루수스를 파견해 수습하도록 했고,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게르마니쿠스가 있는 라인 강에서의 파업은 심각했다. 티베리우스의 후계자로 내정된 게르마니쿠스가 파견되었지만, 군대는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게르마니쿠스를 황제로 옹립해 자신의 요구사항을 관철하려 들었다.[24]

상황이 안정되자 아우구스투스의 뜻을 이어받아 티베리우스는 귀족들과 부유층 시민들에게 지나친 사치와 향락을 하지 말 것을 촉구했으며[25], 검소한 절약생활로 국고를 풍족하게 만들었다. 아울러 본인 역시 겸손하게 행동하고 일개 시민보다 더 공손하게 굴었다. 특히 그는 자신의 생일과 겹치는 평민들의 축제일에 자신의 이름으로 신전에 봉헌하거나 동상과 흉상을 허락없이 세우지 못하게 했다. 새로운 공공건물을 만들지도 않았고, 검투사 경기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었기에 시민들은 지루해했다.

아우구스투스 시절 잠깐 중단되었던 게르마니아 정복은 게르마니쿠스의 주도 하에 계속 이어졌다. 게르마니쿠스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궤멸당했던 바루스의 군단기 3개 중 2개를 되찾았으며, 상당한 전과도 거두었다. 그렇지만 티베리우스는 원정이 진행되는 와중에 게르마니쿠스를 동방에 파견한다는 명목 하에 수도로 소환했다. 게르마니쿠스는 시간을 더 달라고 간청했지만 티베리우스는 라인강 너머로 진격하는 것을 금지했고, 게르마니아 정복은 조용히 일단락되었다.

서기 19년에 일어난 게르마니쿠스의 죽음은 -티베리우스가 게르마니쿠스의 죽음을 의도했던 것이 아니라면- 티베리우스의 치세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게르마니쿠스는 동방에 파견되어 시리아 총독인 피소와의 불화 끝에 급사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티베리우스가 피소를 사주해 게르마니쿠스를 죽인 것이 아니냐면서 의심했다. 전국적으로 게르마니쿠스 추모 열기가 일었던 것에 반해 티베리우스는 오히려 암살 혐의자들에게 관대했고,[26] 추모 열기를 진정시키는 역할을 했다. 게르마니쿠스는 민중의 사랑을 받고 있었고, 이것이 티베리우스가 게르마니쿠스를 죽였다는 소문과 결부되면서 의혹이 끊임없이 커져갔다. 이 부분은 아직도 논란거리이다.[27] 서기 23년에는 아들인 드루수스마저 급사한다.[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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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들이 벌어진 이후 서기 26년부터 티베리우스는 수도 로마에 염증을 느꼈다. 그는 근위대장 세야누스(Lucius Aelius Sejanus  ?~AD 31. 10. 18.)에게 로마를 맡기고[29] 카프리 섬에 은둔해버렸다.[30][31][32]

로마는 세야누스의 세상이 되어, 그는 많은 반대파 원로원 의원들을 처형한다. 대(大) 아그리피나게르마니쿠스의 두 아들인 네로 카이사르와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유폐시킨다. 하지만 세야누스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그의 힘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티베리우스를 제거할 음모를 꾸민다. 역모 사실을 알게 되자 티베리우스는 그답게 대처해 사전에 세야누스를 체포하여 참수형에 처해버렸다.[33] 세야누스가 죽자[34] 로마는 티베리우스가 로마로 돌아올 것이라 기대했는데, 반대파를 가차없이 제거하는 공포정치는 더욱 강화되었다. 그가 '폭군'이라는 인식은 더욱 강해졌다.

그의 말년에는 모두가 저 더러운 늙은이 왜 이렇게 안 죽어라고 한마음으로 생각했을 지경이었다. 그는 결국 서기 37년에 사망했다.[35][36][37] 손자인 게멜루스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38][39]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쿠스의 남은 아들인 칼리굴라를 차기 황제로 지명할 수밖에 없었다. 18세의 젊은 황제 칼리굴라가 온 제국의 환호에 뒤덮여 그의 뒤를 이었다. 환호하는 민중들은 "티베리우스를 테베레 강에 던지자!"라고 외쳐댔을 지경이었다. 비록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4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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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리우스는 아첨꾼을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그래서 원로원 의원들이 인사를 하기 위해서든 공무 때문이든 간에 자신이 탄 가마에 접근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또한 "주인님(도미누스)"이라는 칭호를 누군가가 아첨하며 자신에게 부르자 화를 내며 "내 앞에서는 앞으로 그런 모욕적인 말은 다시는 하지 마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반면 그는 자신에 대한 욕, 비방, 조롱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쿨하게 넘기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원하는 대로 말하고 생각하는 자유가 국가의 척도"라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은둔 이후에는 고발장에 대해서만은 예전과 달리 민감한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또 그는 신이나 종교적 문제에 대해서는 다소 소홀히 여겼지만, 점성술만은 신봉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세계가 완전히 운명에 의해 지배된다고 믿었고 천둥에 기겁하곤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하늘이 갑자기 어둠침침해지면 번개를 막아준다고 여겨지던 월계관을 썼다고 한다.

5 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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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에토니우스의 기록에 의하면 그의 외모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40]

먼저 티베리우스는 크고 건장한 체격을 가졌으며, 어깨와 가슴은 넒고 몸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균형잡혀 있었다. 왼손잡이인지 몰라도 오른손보다는 왼손을 더 잘썼는데, 손가락으로 새로 딴 싱싱한 사과를 뚫을 정도로 힘이 세고 손가락을 튕기면 소년이나 청년 머리통을 부술 수 있었다고 한다.

얼굴은 잘생기긴 했지만 피부가 희였고 때때로 뾰루지가 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뒷머리를 목덜미 아래로 길게 길렀는데 이는 클라우디우스 가문 남자들의 특징이기도 했다. 그는 눈이 상당히 컸고, 잠에서 깨어나 처음으로 눈을 떴을 때 밤의 어둠 속에서도 사물을 또렷이 볼 수 있었던 신비한 능력을 가졌다고 한다.[41]

티베리우스의 걸음걸이는 목을 쑥 내밀고 큰 키로 성큼성큼 걸어 다녔다고 한다. 평상시에는 늘 무뚝뚝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함께 걷고 있던 사람들과 대화할 때면 매우 천천히 이야기했고, 손가락을 많이 움직였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의 이런 특징을 싫어했고, 이 행동의 원인이 오만함 때문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하지만 수에토니우스는 동시에 아우구스투스가 원로원이나 민회에서 티베리우스의 태도가 원래 그런 것이고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라고 대신 용서를 구했다고 기록했다는 점에서 볼 때 어느 부분이 맞는지는 좀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추가로 티베리우스는 강철체력을 자랑할 정도로 강건했고 죽음을 맞은 마지막 날까지 건강했다. 그래서 30세가 지나서는 의사의 조언이나 도움없이 스스로 판단에 따라 건강을 관리했다고 한다. 그는 죽기 직전 병에 걸렸을 때조차 의사가 치료를 권유할 때, 자신은 이제 죽을 때가 됐다면서 치료를 거부하고 그대로 저 세상으로 갔다.

6 비판

그는 원로원 없이 통치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첫 번째 인물이다. 전임자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의 반대에 부딪치면 일을 이렇게 처리했다.

법안 제안 → 원로원의 반대 → 기다리거나 혹은 먼저 모범을 보인다 → 결국 통과

예를 들어 아우구스투스는 군단병의 퇴직금 제도를 위해 상속세를 도입할 때, 자신 역시 막대한 돈을 기부하여 재원으로 삼았다. 한마디로 해서 원로원이 반대하기 어려운 상황을 만든 다음에 합의에 의해 처리했다. 그런데 티베리우스는 법안을 이렇게 처리했다.

법안 제안 → 통과

왜 반대 프로세스가 없냐하면, 군대와 경찰의 힘을 배경으로 둔 티베리우스에게 반대할 의원은 없었기 때문이다. 행여나 반대파로 지목된 의원이 있다면, 그는 곧 숙청당했다. 티베리우스 집권 후기의 원로원은 거수기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황제가 카프리 섬으로 은둔해버린 다음에는 황제가 보낸 편지를 읽고 법안을 통과시켜주는 것이 원로원의 유일한 역할이었다. 의원들을 자괴감을 곱씹어야 했고, 속으로 반감을 키워갔다.[42][43]

그는 근위대가 정치와 황실에 개입하는 것의 선례를 만든 첫 번째 인물이다.[44] 티베리우스는 수도 로마와 이탈리아 전역에 흩어져 주둔하고 있던 근위대를 한데 모아 수도 로마를 억압하는 강대한 군대로 재편성했다.

전임자인 아우구스투스는 근위대를 수도 로마에 은근한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카드로만 활용했을 뿐이지만, 티베리우스는 실제로 근위대를 이용한 정치를 했다.[45] 이는 근위대를 이용해 반대파를 탄압하고 쉽게 정국을 장악할 수 있다는 유혹에 굴복한 것으로,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과 마찬가지였다. 근위대장인 세야누스는 반대파 숙청과 황실의 위험분자 숙청을 주도 -특히 대 아그리피나와 관련된 일파들- 을 주도했으며, 심지어는 근위대를 이용한 쿠데타까지 기도하기도 했다.[46] 한마디로 근위대의 정치 개입과 쿠데타 기도의 선례를 처음 만들었고, 이는 로마 제국의 하나의 전통과 관례와도 같은 현상이 되어버린다.[47]

물론 티베리우스는 지극히 유능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근위대를 제어하고 통제할 수 있었다. 그는 지극히 노련하게 세야누스의 반란을 사전에 뿌리뽑았고, 근위대가 제국의 일상적인 통치에까지 손을 대지 못하도록 했다. 그렇지만 모든 황제가 티베리우스와 같이 유능했던 것은 아니어서, 이들이 근위대를 잘못 건드리면...[48] 한마디로 티베리우스는 지극히 위험한 요소를 정치제도 안에 끌어들였으며, 이 대가는 로마 제국이 존속하는 내내 치르게 된다. 한마디로 그는 그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로마를 통치했고, 비록 그는 잘 해냈지만 후대 황제들에게 여러 가지로 나쁜 선례를 남겼다.[49] 제국의 첫 번째 근위부대로 이름높은 프라이토리아니는 결국 4세기에 들어서야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해체된다.

7 평가와 여담

반대파에 대한 잔인한 처벌과 카프리섬 은둔 중에 떠돌던 음란한 생활에 관한 소문이[50] 그를 '악명 높은 황제'중의 하나로 만들었다. 실상은 사치와 향락을 멀리함으로서 국고를 탄탄히 하고 아우구스투스가 구축한 로마 제국 전반의 소프트웨어/하드웨어 인프라를 안정화했던 유능한 황제이며, 민주적으로 자신에 대한 비난 연설을 받아들였던 일 등이 재평가되었다. 현재의 역사학자들은 그를 로마 제국의 초석을 더욱 단단하게 만든 사람으로 재평가했다. 행정능력은 거의 신의 경지에 오른 수준으로, 카프리섬에 은둔해 있으면서도 제국을 손금 꿰듯이 읽고 있었고 필요한 일들을 정확하게 신속히 처리했다. 그가 제국 전체에서 안 돌아다닌 지방이 없을 정도[51]라는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선대의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가 정보수집체계를 완비한 덕에 가능했다. 아우구스투스가 우편제도와 도로롤 완비하고 치안을 잡아준 덕분에 황제가 카프리섬에 은둔해도 이상이 없던 것였다. 말년에 예수에 관한 판결을 전해들었을 당시에 당시에 동방의 군대와 행정의 최고 책임자인 시리아 속주 총독이랑[52] 유대속주의 장관인 폰티우스 필라투스 즉 본시오 빌라도를 즉각 해임조치하는데 그때 당시에 로마 제국의 속주였던 이스라엘 땅에서 시리아 속주의 산하에 있던 유대장관인 빌라도가 행정능력이 너무 무능력했다는 점을 깊게 보고 내린 조치다. 그리고 그를 감시하고 항상 보고를 할 책임이 있던 시리아 총독도 행정능력이 떨어진다고 보고 해임조치를 하게된다.

지출, 팽창을 적당한 선에서 억제한 것 역시 티베리우스의 공이다.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마니아를 정복할 수 있으리라 믿었는데, 이 때문에 바루스의 3개 군단이 궤멸한 토이토부르크 전투와 같은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로마군의 역량을 생각해 보았을 때 게르마니아는 언젠가는 정복되었겠지만, 그러기 위해 로마는 값비싼 물적, 인적 희생을 감내해야 했을 것이다.[53] 게르마니아의 물산이 변변찮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세금 수입에 비해 속주를 유지하는 비용 역시 만만찮았을 것이다.[54]

전체적으로 아우구스투스는 인자한 아버지의 역할을 맡았다면, 티베리우스는 잔소리하는 어머니의 역할을 맡았다. 앞서 언급했던 재정 문제만이 아니라, 원로원 귀족들을 견제하는 것은 꼭 필요한 임무였다. 티베리우스는 반역죄로 기소된 귀족들의 재산을 국고에 넣었는데, 이는 로마 제국의 부의 집중을 해소하는 효과가 있었다. 부유층과 권력층을 억제하는 것은 인기는 없었을지 몰라도 제국에 꼭 필요한 임무였다. 그는 수도 로마에서는 피바람을 일으켰지만, 제국의 방대한 속령들은 완벽하게 관리했다. 제국의 유지라는 임무를 속주민들의 고혈을 짜내지 않고도 완수했던 것이다.

다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티베리우스가 유능한 건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현제로 평가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와 원로원과의 관계는 파탄났으며, 근위대가 정치에 개입하는 첫 선례를 만들었다. 그는 '로마 황제'의 좋은 규범만큼이나 나쁜 규범을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알루미늄의 생산을 금지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로마의 역사학자인 플리니우스의 저서에서 나오는 이야기로, 한 여행자가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진 잔을 티베리우스에게 주었지만, 티베리우스는 이 금속이 금, 은의 가치를 떨어뜨릴까 두려워 알루미늄의 개발을 금지시켰다(덤으로 알루미늄을 바친 사람을 죽였다)는 이야기이다.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사실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데, 19세기 전기분해법이 개발되기 전까진 순수한 알루미늄을 제련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워서 금, 은보다 더 귀하게 여겨졌다. 구두쇠인 티베리우스가 생산을 금지하게 한 것도 이해가 갈 것이다.

도미티아누스가 무엇보다 열심히 읽었던 것이 티베리우스가 남긴 기록들이었다[55]는 사실은 흥미롭다. 그는 지나치게 엄격한 통치로 동시대인들의 불만을 샀지만 통치방식 면에서는 후대 황제들의 모범이 되었다.

8 기타

미디어에는 까메오로 많이 나오는 편이다. 영화 벤허에서 개선식 때 등장하는 황제가 바로 티베리우스, 영화 성의에서의 로마 황제도 티베리우스. 이 두 영화에서는 잠깐 등장하지만 1950년대 당시의 인식으로는 의외일 정도로 개념찬 황제로 나온다. 반면 틴토 브라스의 살색영화 칼리굴라에서는 피터 오툴이 연기했다. 경비병을 술고문해서 배를 갈라버리는 장면이 흑역사 명장면.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에서는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에 따라 독살과 방탕에 빠져서 몰락하는 인간으로 그렸다. 애완동물이 벌레에게 먹히는 것을 보고 자신의 운명을 생각하고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살아나서 음식을 달라고 요구하다 칼리굴라에게 살해당한다.. BBC의 드라마판의 1화에선 원하지 않는 권력싸움에 어머니의 등쌀에 고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동생인 드루수스에게 자신이 사랑한 사람은 오직 셋뿐이라고 얘기하는데[56], 아버지는 사망, 빕사니아는 주변 인물의 강요로 이혼했기에 드루수스에게 제발 조심하라고 얘기하는 나름 인간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후에도 빕사니아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빕사니아의 재혼 소식을 듣고 그녀에게 따지러 왔다가 이혼을 후회하며 차라리 같이 죽자고 얘기할 정도로 절망한다[57]. 그리고 이후에는 권력에 의해 더더욱 차가운 인물로 변한다.

9 대중문화 속의 티베리우스

모 종교집단 지도자는 황제의 이름을 따서 타이베리움을 타이베리움이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광물이 지구상에 나타나기도 전에, 등장을 예견하면서.[58] 하필 타이베리움이 처음 지구에 나타난 곳이 테베레 강이어서 그 이름이 무난히 받아들여진다.

Fate/Grand Order에서는 로물루스 스토리에서 불완전 소환된 역대 황제 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 인게임에서는 그냥 고스트지만.

9.1 데몬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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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마대성 데몬베인에 등장하는 악의 세력 블랙롯지의 간부, 안티 크로스 중 한 명. 왠지 얼굴이 킹 크림슨 닮았다.

성우는 ZZ건담의 주인공, 쥬도 아시타와 초수기신 단쿠가의 주인공인 시노부로 유명한 야오 카즈키.

키워드는 광대촉수

마도서 벌레의 신비에 그의 육체는 이미 썩어 문드러진 시체이며 네크로맨시에도 일가견이 있는데다 뭣보다도 능욕과 살해를 사랑하는 미치광이. 페니스라고 쓰고 육창이라 읽는 걸로 여성을 꿰뚫어죽이는게 취미다.

이미 죽어있기 때문에 그를 죽일 수 없다. 또한 벌레의 신비가 부여하는 불사의 권능으로 그의 몸은 무한히 무한히 재생한다. 설사 육편 하나 남지 않았다고 해도... 재생의 방식을 보면 재생 당시에는 살아있는 인간의 몸으로 복원되지만 복원의 마지막에 순식간에 부패해버리는 듯. 주로 장비하고 있는 긴 강철손톱으로 육탄전을 벌이며 이 강철손톱은 마술처리되어 있어 강도와 예리함이 뛰어나며 공격을 피할 이유가 없기에 무조건 공격 일변도.

또한 벌레의 신비의 권능으로 인해 육체 자체가 무기화된다. 몸안의 내장은 촉수화해서 적에게 덤벼들며 뼈는 총알의 속도로 적에서 쏘아진다.

약점이란 게 거의 없다. 그를 죽이려면 그의 육체를 완전히 소멸시킬 때 잠깐 보이는 벌레의 신비. 마도서 본체를 완전히 소멸시켜버리는 방법밖에 없다.

그런 성격 때문에 데몬베인과 여러 차례 맞붙었으며, 그때마다 강력한 공격과 무시무시한 재생 능력을 통해 데몬베인을 압도했다. 하도우 재벌 총공격의 때에도 좀비나 촉수...를 통해 민간인을 학살하는 등 가장 골칫덩이였던 적. 하도우 저택 습격사건 당시 하도우 루리를 거의 겁탈하기 일보 직전까지 갔었고, 심지어 같은 안티 크로스였던 클라우디우스의 시체마저도 좀비로 부활시켜 써먹기까지 했다.

게다가 라이카 루트에선 레거시 오브 골드의 지구황제포에 의해 파괴되었던 데몬베인을 몰래 회수, 고쳐서 다시 써먹기까지 했다(!) 티베리우스가 기동하는 데몬베인은 레무리아 임팩트를 사용할 수는 없지만, 대신 티베리우스 고유의 원령주법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 결국 산달폰의 지원에 힘입은 쿠로에게 빼앗기긴 하지만.

그러나 결국 알 아지프 루트에서 부활한 알 아지프가 모든 단편을 되찾으면서 결국 완전해진 데몬베인-쿠로-알 삼위일체가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를 다룰 수 있는 위계에 올라서게 되고 처음 다루는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의 첫 희생양이 된다. 그곳에만은 끌려가기 싫다고 차라리 죽여달라고 애원하는 그에게 쿠로가 타인을 짓밟고 얻은 불사의 몸이라면 끝까지 책임지는게 도리다.라고 대꾸하는 대목은 절품.

(하도우 루리 루트에선 에셀드레다가, 라이카 루트에선 산달폰이 레무리아 임팩트에 맞아 승멸된 후 남은 벌레의 신비를 태워버려서 사망. 코믹스에선 뒷치기하려다가 티투스에게 벌레의 신비가 찔려서 사망.)

소유 마도서는 벌레의 신비 De Vermis Misteriis, 소환하는 데우스 마키나벨제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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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이지만 니트로 플러스 직원들의 낙서장에 원화가 니시씨가 그린 생전의 모습(?) 메로네

9.2 테일즈 오브 데스티니

테일즈 오브 데스티니에 등장하는 아쿠아베일의 대왕.
토우케이 령의 영주였으나 그레밤의 아첨에 넘어가서 아쿠아베일의 실권을 장악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킨다.

이전에 죠니와 페이트의 소꿉친구인 엘레노아를 강제로 데려와서 그녀가 자살하는 계기를 제공한적이 있다.

물 속성의 요도를 사용하며 기스 하워드님의 진공 던지기를 연상시키는 천지 던지기(천지 뒤집기)와 위력이 강한 와봉섬, 갖가지 가드 불능기술로 일행을 괴롭힌다. PS1판에서는 리온 매그너스가 입막음을 위해 살해, PS2판에서는 죠니 시덴과 정정당당하게 1 VS 1 승부를 치루다가 패배해서 사망한다.

9.3 하드 코어: 업라이징

여기에서는 제국의 황제로 등장. 주변 국가들을 침략하는 원흉이자 최종보스로 등장한다. 황제 아니랄까 다양한 공격과 함께 일반 탄알은 잡아내기까지 하는 위엄을 선보인다. 나머지는 항목 참조.

9.4 벤허

1959년작 영화 벤허의 배경 자체가 티베리우스 황제 시대의 로마라서 간간히 언급된다. 영화 초두에서 벤허가 친구 메살라와 우정이 금이 가게 되는 언쟁 중에 메살라가 티베리우스를 '진짜 신'이라며 찬양하는 말을 한다. 그 외에 로마인들 사이에서 유일신처럼 언급되며 절대적인 존재처럼 묘사되지만 모습은 보이지 않는데. 후에 로마 집정관 아리우스가 해적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장면에서 모습을 드러내는데 이 때의 위엄과 존재감이 압도적이다. 새하얀 백발의 노인이지만 로마인들이 작중에서 그렇게 추켜세우는 것이 이해가 될 정도의 인물. 아리우스의 탄원에 대해 벤허의 위험성을 언급하면서도 그의 요청을 들어 벤허를 사면해준다.[59]
  1. 양자 입적 후
  2. 태어날 당시 본명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아우구스투스에게 양자로 입적된 이후에는 스스로를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로 서명했다.
  3. 다만 의외로 그리스도교에서는 티베리우스에 대한 악평은 하지 않는다. 성경의 본문에서 티베리우스는 공생활 당시의 시대적 배경으로 '티베리우스 황제 치세 때의 일이다'라고 언급되고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간접적으로 언급된 것도, 예수 그리스도가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라며 유대인들로부터 로마 제국의 권위를 옹호한 사례 정도가 있을 뿐이다.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황제에게 돌리는 것은, 예수 자신의 사상으로 볼때도 복음서 저자의 의도로 볼때도 굉장히 어긋난 생각이다.
  4. 한국의 개신교 성경에 등장하는 라틴어 인명 대부분이 그렇다. '아우구스투스'를 '아구스도'로, '클라우디우스'를 '글라우디오'로 '폰티우스 필라투스'를 '본디오 빌라도'로, 코르넬리우스'를 '고넬료'로... 등등. 전부 들어맞는 것은 아니지만, 흔히 알고 있는 라틴어 인명의 '-us'를 '-o'로 바꾸고, 'ㅋ, ㅌ, ㅍ' 등의 격음을 'ㄱ, ㄷ, ㅂ'등의 평음으로 바꾸면 대충 개신교 성경에서의 표기가 나온다.
  5. 물론 아우구스투스는 그의 직계 후계자가 모두 사망해 버려 어쩔 수 없이 티베리우스에게 제위를 물려준 것이다. 티베리우스 사후 아우구스투스의 혈통을 후임으로 하는 것까지 조건으로 붙여버렸다. 애초에 유언장 자체가 가이우스와 루키우스가 사망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티베리우스에게 제위를 물려준다는 식으로 시작하니...
  6. 7월 율리우스, 8월 아우구스투스에 이어 9월을 티베리우스로 바꾸자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황제가 12명을 넘어서면 어쩔건데?라고 티베리우스가 일갈하자 흐지부지되었다.
  7. 보통 통화나 비석 등에 새겨진 금석문들.
  8. 반면 티베리우스는 혈연적으로는 아우구스투스와 어떤 연관도 없다.
  9. B.C.27 1월 13일,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에게 정권을 이양하겠다고 제의했고, 4일 뒤에 원로원은 그에게 아우구스투스(존엄한 자)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10.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에 의하면 리비아는 티베리우스를 데리고 야반도주 중 숲 속에서 갑자기 불길에 휩싸여 머리와 옷이 모두 불에 그슬리면서 죽을 뻔했다고 한다.
  11. 대 드루수스, 혹은 네로 드루수스.
  12. 옥타비아누스와 리비아가 결혼했을 당시 리비아의 뱃속에 있었다. 드루수스가 아우구스투스의 아이가 아닌가 하는 소문도 파다했다.
  13. 티베리우스는 9세의 나이에 로스트라에 올라 클라우디우스 가문을 대표하여 아버지를 기리는 추도 연설을 했다. 또한 생부를 기려 검투사 시합을 개최하고(포룸 로마눔) 할아버지 드루수스를 기념하여 또 한 차례의 검투사 경기를 열었다(로마 원형 경기장). 그리고 이때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는 티베리우스에게 막대한 자금을 지원했다.
  14. 이야기에 따르면 드루수스는 낙마 당시, 의사로부터 다리 절단을 권유받았지만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아울러 드루수스가 죽어 유해가 이탈리아에 당도했다는 소식을 듣자 아우구스투스는 말을 타고 이를 마중나가 함께 로마로 들어왔다.
  15. 마르켈루스는 아우구스투스의 누이 옥타비아의 아들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조카로서, 아우구스투스의 외동딸 율리아의 첫 남편이기도 했다.
  16. 그런데 티베리우스는 이미 아그리파의 첫번째 아내가 낳은 빕사니아와 결혼한 상태였다. 즉 형식상으로는 티베리우스는 장인의 딸과 이혼하고 장모와 결혼하게 된 셈이다. 그리고 티베리우스는 상당한 애처가였다. 이혼 후 티베리우스가 로마의 거리에서 빕사니아를 만났을 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빕사니아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고.
  17. 말년에 티베리우스가 은둔 - 이라고 하기에는 티베리우스는 제국의 모든 일을 처리하고 있었지만 - 했던 곳이 카프리 섬이었다는 것을 볼 때, 그는 섬을 어지간히 좋아했던 모양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원래 그는 비프사니아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는데, 아우구스투스의 딸인 로마에서 가장 바람난 여자인 율리아와 결혼하기 위해 강제로 이혼당했고 다시는 빕사니아와 재회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후계자조차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었으니, 은둔해서 조용히 살자는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18. 자신의 명령을 거부하고 로도스 섬으로 은퇴해버렸다는 괘씸함도 있었을 것이다.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의 능력을 인정했지만 그를 유쾌한 드루수스보다 좋아하지는 않았다.
  19.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아들이 되었기에 율리우스 가문의 가장이 아닌 피보호자가 되었다. 따라서 이전처럼 클리엔테스들에게 선물을 하거나 노예들에게 자유를 줄 수가 없었으며, 다른 사람의 유산을 함부로 상속받을 수도 없게 되었다.
  20. 단, 다음 황제 자리는 게르마니쿠스에게 물려줘야 한다는 것을 명시했다.
  21. 성격이 본래 난폭하고 제어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힘이 장사여서 아우구스투스가 죽기 전 그를 죽이기 위해 유배지에 병사를 보냈을 때 죽이기 아주 힘들었다고 한다.
  22. 티베리우스는 공화정 시대를 대표하는 귀족인 클라우디우스 가문 출신이다. 그는 나름 공화정의 전통을 계승하려고 애썼고(적어도 초기에는), 원로원을 거수기로 만들고 싶어하지 않았다. 원로원의 진정한 동의를 통해 원로원으로부터 주권을 부여받고 싶었는데,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가 지명했으니 어쩔 수 없이 지명한다. '마음에 안 들지만 어차피 너는 황제고 우리는 거수기잖아? 너 마음대로 해.'라는 식으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해버린다. 티베리우스와 원로원의 끊임없는 충돌은 아마 여기서부터 시작할 것이다.
  23. 훗날 조선 태종도 이와 비슷했다. 그리고 황제나 왕에게 위협이 될 것은 싹부터 제거했다. 그리고 이 덕에 후계자들이 먹을 욕을 본인들이 받으면서 왕위를 안정시켰다는 놀라운 공통점이 있다.
  24. 게르마니쿠스는 군인들의 요구를 받아들인다는 식으로 황제의 명령서를 위조해 일단 군인들의 불만을 가라앉혔다. 그래도 불만을 품은 군사들을 한밤중에 야습해 살해하고, 반란의 주모자들을 체포해 처형했다. 이어 군대를 이끌고 라인 강 너머로 쳐들어가 피로 피를 씻은 다음에야 반란은 잦아들었다. 군대의 불만은 이로써 적당히 수습되었지만, 군사들이 게르마니쿠스를 황제로 옹립하려 했던 것과 게르마니쿠스가 황제의 명령서를 위조했던 일은 뒤에 불화의 불씨가 된다.
  25.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상당히 많은 지출 - 그는 시민들의 제정에 대한 지지를 확고히 하기 위해 이런저런 지출을 많이 했다. 게르마니아와 도나우 강 일대의 군사작전으로 인한 군사비 지출도 만만치 않았다. - 이 있었다.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지출을 수습해야 했고, 긴축 재정은 필연적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점이 그가 시민들에게 인기가 떨어지게된 주요 원인이었다. 티베리우스 시절의 긴축재정이 결국에는 로마를 구하게 되는데, 티베리우스가 상당한 돈을 남겨놓지 않았다면 아마 로마는 칼리굴라의 과소비에 파탄났을 것이다.
  26. 피소의 아들은 관대한 처분을 받았고, 아내인 플랑키나는 무혐의 처리되었다.
  27. 티베리우스가 게르마니쿠스를 탐탁찮게 보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는 게르마니쿠스와 정책적인 면에서 충돌이 있었고, 게르마니쿠스의 높은 인기를 우려했던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렇지만 게르마니쿠스를 굳이 죽였을 때 티베리우스가 잃을 것도 많았다. 이 사건 이후 티베리우스는 더더욱 민중의 지지를 잃어버렸으며, 대(大)아그리피나의 끊임없는 반항에 직면해야 했다. 게르마니쿠스 사후 황실 내부에서 내분과 불화가 끊이지 않았으며 통치의 안정성이 떨어졌다는 것을 감안했을 때, 티베리우스가 굳이 위험을 감수해가면서까지 게르마니쿠스를 죽일 이유는 없었다.
  28. 드루수스의 아내인 리빌라가 세야누스와 결탁해 드루수스를 독살했다. 세야누스와 라빌라는 불륜 관계였으며 세야누스가 티베리우스의 후계자 자리를 노리고 범행을 저질렀던 것이 틀림없다. 이 사실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세야누스가 체포되어 살해당할 때 세야누스의 아내인 아피카타가 자살하면서, 티베리우스에게 편지를 보내 이 사실을 알린다. 이후 티베리우스는 리빌라에게 자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다만 수에토니우스는 드루수스가 급사한 것이 독살이 아니라 가지고 있던 과일을 던져서 받아먹기 장난하다가 질식했다는 소문을 싣고 있다.
  29. 원로원과 황실에 대한 대처만 맡긴 것이다. 실제 행정은 전부 티베리우스가 처리했다.
  30. 이는 치세 끝까지 이어진다. 심지어는 어머니 리비아가 사망했을 때에도 코빼기 하나 비추지 않았다.
  31. 황제가 장기간 부재하는 상황이었고, 긴축재정 때문에 지루해진 시민들이 그가 어린 소년, 소녀들과 성관계 등을 즐긴다는 소문을 퍼트리기도 했다. 수에토니우스가 이를 받아들여 자세히 기록해 두었지만, 그가 가십을 주로 기록했던 것을 감안하면 신빙성은 높지 않다. 심지어 티베리우스에게 비판적인 타키투스조차도 이런 이야기는 싣지 않았고 거기다가 티베리우스 자신은 무척 자기절제가 뛰어난 인물이었다.
  32. 티베리우스는 카프리 섬에 방대한 시설을 갖춰 두었다. 사실상 이 곳은 황궁이나 다름없었으며, 이탈리아와 연락선으로 연결되어 있어 통신에도 불편함이 없었다. 다만 바다가 험해지는 겨울에는 티베리우스도 본토로 돌아왔다.
  33. 대처가 참 티베리우스다웠다. 세야누스가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티베리우스는 평소처럼 원로원에 편지를 보내서 원로원 회의에서 낭독하게 하고, 세야누스에게는 곧 집정관에 임명할 테니 근위대장직은 후임자인 마크로에게 넘기라는 편지를 보내서 군사권을 뺏고 원로원 회의장에 참석하게 했다. 황제는 편지에서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다가 세야누스를 언급하고, 기대감에 부풀어 있던 세야누스에게 무자비한 비난을 퍼부었다. 원로원 의원들은 환호했고 세야누스는 즉각 사형에 처해졌다. 세야누스가 믿던 근위대도 신임 근위대장 마크로가 티베리우스의 이름으로 많은 보너스를 주었기 때문에 세야누스를 돕지 않았다.
  34. 세야누스의 가족도 역시 참살되었는데 아직 처녀였던 딸의 경우는 "로마의 법도상 처녀를 처형할수 없다"는 관습 때문에 처형 직전에 망나니들이 검열삭제한 후에 처형했다고 타키투스가 기록한다
  35.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기술은 참으로 후덜덜한데 그 내용은 이렇다 : 경기장에서 창을 던지는 시범을 보여달라는 요청을 받은 티베리우스는 어깨가 탈골되면서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황제가 혼수상태가 되는 일이 길어지자 로마 원로원은 칼리굴라를 황제로 추대했는데, 갑자기 티베리우스가 정신을 차리고 식사를 요구하자 로마와 칼리굴라 모두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모두가 황제가 무슨 광태를 벌일 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상황에 빠진 것을 구원한 것은 근위대장인 마크로였다. 그는 잠자고 있던 티베리우스를 베개로 눌러서 질식사시켰다. 브리태니커의 기술에 사용된 자료는 타키투스의 기록에 의거한다.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은 타키투스의 기록을 참조한 이야기. 다만 타키투스와 한세대위의, 티베리우스 치세 당시의 로마인이었던 박물학자 대(大) 플리니우스는 그냥 노화에 의한 자연사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티베리우스를 굉장히 혐오했던 타키투스의 기술이었던 만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곤란하다.
  36. 타키투스에 따르면 티베리우스가 죽은 줄 알고 칼리굴라가 티베리우스의 인장 반지를 빼내려 하는데, 혼수 상태일 뿐이었던 티베리우스가 갑자기 깨어나 물을 달라고 하자 놀라서인지 일부러인지 베개로 눌러 질식사시켰다카더라
  37. 박광순 번역의 타키투스 연대기에 따르면 황제가 혼수상태에 빠져 모두 죽을 줄 알고있고 칼리굴라는 로마에서 사람들의 환호를 받고 있었는데, 황제가 갑자기 일어났다 해서 칼리굴라가 망연자실하자 그의 정치적 지원자인 근위대장 마크로가 사람들을 보내 티베리우스에게 베개와 이불을 되는대로 모두 집어던지도록 시켜서 질식시켰다고 한다.
  38. 거기에 더해 부모 양쪽에서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받은 칼리굴라에 비해, 게멜루스의 정통성은 희박했다. 심지어는 그가 세야누스의 아들이라는 루머까지 돌았다.
  39. 말년의 스탈린을 다룬 영화 <붉은 황제>에서 스탈린의 죽음 부분은 티베리우스의 죽음에 얽힌 소문과 매우 흡사하게 묘사된다. 죽은 줄 알고 다가갔는데 눈을 번쩍 뜨길래 목을 졸라 살해...
  40. 수에토니우스가 워낙 안티였기 때문에 과장도 많고 뻥도 많다는 평이다.
  41. 수에토니우스는 그러면서도 초능력이 1~2분 뒤에 사라졌다고 기록했다.그냥 밤눈이 밝았던 거 아닌가
  42.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의 대표적인 차이점이다. 티베리우스는 통치만 유효하다면 원로원 같은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접근했는데, 아우구스투스가 중시했던 것이 통치체제의 안정성과 지속성이었다고 하면 티베리우스는 이를 무시한 독선적인 통치를 했다. 문제는 티베리우스와 같은 인물이 정치를 한다면 그래도 노련한 행정이 되지만 칼리굴라와 같은 폭군이 정치를 했을 때는 그런 거 없다. 로마 황제는 티베리우스 하에서 수도 로마를 비워도 통치할 수 있는 견제받지 않는 권력이 되어갔고, 칼리굴라가 집권해서 벌인 짓을 생각하면... 티베리우스도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다.
  43. 사실 이렇게 된 건 원로원의 잘못도 크다. 티베리우스도 치세 초기에는 원로원과 협력하려고 상당히 노력했다. 문제는 원로원이 티베리우스에게 어려운 일들을 몽땅 떠넘기고는 "우리는 거수기인데 뭐하러 물어보냐?"는 식으로 책임회피를 해버린 것. 사실상 원로원이 제 기능을 못 하는 상태였다. 칼리굴라가 "내 애마를 원로원 의원으로 임명해야 겠다"고 비꼴정도였다. 여러차례 비난과 힐책을 해도 별로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티베리우스가 이럴바에 그냥 나 혼자 통치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다만 이에 대해 어차피 원로원은 실권을 가지지 못했고, 유력 원로원 의원은 황제의 견제대상이 되거나 음모에 휘말릴 수도 있었으며, 야심있고 능력있던 원로원 의원들은 제정 전복을 꾸미다 사형당하는 등 아우구스투스 시절부터 원로원의 정치 참여에는 여러 제약이 있었다. 그리고 군단을 거느린 속주 총독직의 경우 어차피 원로원의 유력 귀족들은 임명되지 못하였고 대개 신진 가문이나 비유력 가문 출신들이 임명되었다. 네로 시절까지 고위 귀족 및 황실과 혈연이 있던 귀족들은 종종 음모를 꾸미거나 연루되어 숙청당하는 일이 잦았다.
  44. 이후 근위대가 로마 제국에 미친 해악을 생각하면 이 사실은 진부한데다가 번역투이지만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45. 칼을 칼집에 꽂아두고 은근한 협박을 가하는 것과 이것을 실제로 휘두르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이야기이다.
  46. 물론 낌새를 눈치챈 티베리우스가 재빨리 세야누스를 숙청해버리지만.
  47. 베스파시아누스 때 근위대를 해체하고 무력화시킬 수 있는 기회가 한번 찾아왔는데, 그 역시 정권 강화를 위해 근위대를 유지해야 한다는 유혹에 굴복했다.
  48. 갈바, 비텔리우스, 페르티낙스가 어떤 최후를 맞았는지 생각해보자. 아우구스투스는 먼 미래까지 내다보고 정책을 세웠다고 평할 수 있지만, 티베리우스는 이런 점에서 일급 정치가라고 볼 수 없다. 권모술수에 능하기는 했지만, 그보다 못한 사람이 통치하더라도 제국이 유지될 수 있도록 하는 배려는 부족했다.
  49. 사실 이렇게 된 것은 황제의 지위를 애매모호한 상태로 만든 아우구스투스의 책임도 있다. 본인이야 만렙 정치력으로 별 문제없이 통치했지만 그만한 정치력을 갖고 있는 사람은 세계 역사를 모두 뒤져도 흔치 않다. 제국 운영에 대하여 티베리우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을 택한 것이었는데 그게 나쁜 선례가 되어버린 셈.
  50. 한 일화에 따르면, 자신에게 커다란 게와 숭어를 바치려는 어부를 휴식을 방해했다면서, 숭어를 어부의 배에 문지르게(숭어 비늘은 따갑다고..)한 다음, 게로는... 수에토니우스의 황제열전에 나온 이야기이긴 한데, 이 어부가 온 방향이 하필 영 좋지 않았다. 들어 가지를 못하게 막으니까 절벽을 타고 올라와서 황제에게 바쳤는데 티베리우스는 이 어부가 휴식을 방해한 것만큼이나 절벽에서 나타난 것에 더 식겁했다고.간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XX야
  51. 아우구스투스 시절 이곳저곳 원정을 다녔기 때문이다. 아마 그가 가보지 않은 제국의 중요 지역은 이집트와 아프리카 정도일 것이다.
  52. 분명하지 않다.
  53. 티베리우스의 긴축정책에 대한 정당화는 위의 각주를 참조할 것.
  54. 돈을 통크게 쓰면 인기가 유지되지만 재정에 빨간불이 켜지고, 돈을 아끼면 재정이 건전해지지만 인기가 꽝이 되는 것은 모든 로마 황제들의 딜레마였다. 의외로 로마 황제는 그렇게 돈을 마음껏 쓸 수 있는 부유한 존재는 아니었다. 제국군의 수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고 이로 인한 낮은 선방어의 병력 밀도는 훗날 국경선에서의 압력이 가중되고 내부 역량을 뒤떨어지는 시기에 선방어의 한계를 노출시키지만, 이런 적은 수조차도 그리 좋은 대우를 받고 잘 관리되지 못하는 현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적자를 보며 속주를 운영한다? 그리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55. 두 황제는 여러 모로 비슷한 점이 많았다. 행정에 세심하게 관심을 기울였고, 특히 원로원과 지속적으로 마찰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그렇다.
  56. 하나는 친아버지, 둘째는 아내였던 빕사니아, 셋째가 드루수스.
  57. 이때 "당신이 없으면 내가 어떻게 변할지 두려워"라고 얘기하는데 그의 우려대로 티베리우스는 점차 권력의 괴물이 되어간다
  58. http://www.youtube.com/watch?v=15u7gDUo-VE&feature=related 에서 확인 가능. http://games.ea.com/cncmovies/tiberium.html 의 C&C-Nod campaign-Kane provides extensive insight on tierium 에서도 확인 가능하다.
  59. 작중에서도 나이가 많게 나오지만 당시 배역을 맡은 배우 조지 렐프도 나이가 매우 많았는데 그 다음해인 1960년에 숨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