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국보 | ||||
220호 청자 상감용봉모란문 합 및 탁 (靑磁 象嵌龍鳳牡丹文 盒 및 托) | ← | 221호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平昌 上院寺 木造文殊童子坐象) | → | 222호 백자 청화매죽문 유개항아리 (白磁 靑畵梅竹文 有蓋立壺) |
1 개요
平昌 上院寺 木彫文殊童子坐像. 조선 세조 12년, 1466년에 왕명에 따라 만들어진 동자상. 상원사에 소장되어 있으며, 현재 대한민국 국보 제221호이다.
2 내용
보물 제793호인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복장유물의 내용에 의하면 세조의 둘째딸 의숙공주 부부가 왕실의 지원을 받아 1466년에 문수동자상을 만들어 모셨다고 한다.
삼국시대와 고려 때 성행했던 문수신앙은 조선 개국 초에도 이어지고 있었다. 태조실록에 의하면 태조 2년 3월과 4월, 태조 3년 2월조에 개경 연복사에서 태조 이성계가 직접 문수법회에 참여하였으며, 직접 오대산에 사자암(獅子庵)을 중건하였는데 이는 지혜의 문수보살이 동물의 왕인 사자를 타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오대산이 곧 왕이 인정한 문수보살의 주처임을 상징했다. 이는 삼국시대 때부터 이어진 문수신앙의 명맥이 이때까지는 이어져 왔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태종때부터 폐불정책이 시행되면서 자장율사 이래 1000여년간 이어져오던 한국의 문수신앙은 궤멸되기 시작한다. 태종은 국가의 명으로 승려를 시켜 복을 비는 불사를 모두 폐지하였고 산릉의 곁에 사찰을 세워 명복을 빌게 하는 옛 관습 또한 폐지하였다. 이에 따라 불교행사가 점차 소멸되고 천여년동안 이어져내려오던 수많은 도심의 사찰들이 허물어지게 된다.
그러다 7대왕 세조대의 흥불정책에 의해 문수신앙 또한 다시 발현하게 되고 조선 왕실에서도 적극적으로 불상 제작과 사찰 지원을 시작했는데 그중 상원사에 있는 목조문수동자좌상 또한 이시기에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발원하여 조성한 것이다. 조선왕조 500여년 동안 몇 안되는 관찬 불상 조성 사례이다.
이 불상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세조는 말년에 부스럼병을 얻어 치료차 오대산을 방문하였고 오대천의 맑은 물에 몸을 담그던 차에 지나던 한 동자에게 등을 밀어줄 것을 부탁하였다. 목욕을 마친 세조는 동자가 등을 밀어줘 몸이 날아갈 듯이 가벼워지자 기뻐하였지만 한편으론 부끄러워 동자에게 임금의 옥체를 씻겨주었다는 말을 하고 다니지 말라고 하였다. 이에 동자가 미소를 지으며 대왕도 문수를 친견했다고 전하지 말라고 하였고 놀란 세조가 돌아보자 이미 동자는 홀연 듯 사라지고 자신의 몸이 씻은 듯이 나은 것을 알게 되었다.
문수보살의 도움으로 병을 치료한 세조가 크게 감격하여 화공을 불러 이때 만난 동자의 모습을 그리게 하였는데 수많은 화공이 거쳐가도 제대로 그리지를 못하였다. 그러던 중 하루는 누더기를 걸친 노스님이 와서 자신이 그려보겠다고 하였고 이에 세조는 노스님의 몰골에 속으로 탐탁치 않아하면서 믿지를 않았으나 일단 그 모습을 설명해주려 했다. 그러나 노스님은 자신이 알아서 그리겠다며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곧 그려온 문수동자의 모습이 자신이 봤던 것과 너무 똑같아 세조가 놀라게 된다. 급히 어디서 왔냐고 묻자 노스님은 영산회상에서 왔다고 하고는 곧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즉 세조는 동자와 노스님으로 화현하여 나타난 문수보살을 두번 친견한 것이다.
문수가 부스럼병에 효험이 있다는 것은 중국 당나라 이후부터 동아시아 민간에 널리 퍼진 것으로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은 세조의 문수감응 설화는 세조시대에 다시 재생한 문수정토의 오대산과 문수화현사상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3 의의
조선시대 불상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며, 세조 때의 숭불의식에 의해 왕실에서 직접 조성한 완성도 높은 예술적인 불상으로 조선시대 불교 미술사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매우 섬세한 수인(手印)과 옷주름, 독특한 자세나 착의법 등 조선시대 고유한 불상 문화에 대해서도 알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