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어: Suomen sisällissota
영어: Finnish Civil War
핀란드 내전은 1918년 1월 27일~5월 15일동안 벌어진 핀란드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1 개요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제국과 강화를 맺은 러시아가 내전에 돌입한 와중에 자치령이었던 핀란드는 독립을 선언했다. 이 전쟁에서 핀란드는 적군과 백군으로 나뉘어졌다. 핀란드 사회민주당이 이끌던 적군은 소련의 적군에게서 지원을 받으며 핀란드 남부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고, 핀란드 보수당이 이끌던 백군은 독일 제국에게서 지원을 받으며 중부와 북부를 지배하고 있었다. 내전이 백군의 승리로 끝났을 때 핀란드 전체 인구 3백만중 3만 7천명이 죽어 있었다.
2 비교
적군(핀란드 사회주의 노동자 공화국)이 지배하던 영토는 작았지만, 그 지배 영토가 핀란드의 공업지대가 몰려있던 남부해안가였기에 경제적으로는 딱히 불리할 것이 없었다. 무엇보다 수도인 헬싱키가 적군의 수중에 있었다. 백군은 대지주 출신으로 구성이 되있었기에 지배 영토는 적군의 3~4배에 달했지만 중부와 북부에 분포하고 있었기에 경제적으로는 딱히 유리할 것이 없었다. 즉 적백내전의 적군-백군의 상황과 매우 비슷했다.
병력은 양쪽 다 8만~9만으로 통계에 따라 다르지만 큰 차이는 나지 않았다. 적군은 대부분이 지원자로 구성되었고 백군은 1만 5천명 정도가 지원자였다. 나머지는 징병으로 동원된 군사였다. 적군의 가장 큰 지원 동기는 경제적 요인이었다. 돈도 없고 식량도 없으니 밥이라도 먹게 군대가자 라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참고로 이중에서 2천명은 여자였다.
둘다 14~17세의 소년병을 썼다. 나중에 핀란드의 대통령이 되는 우르호 케코넨도 소년병으로 이 전쟁에 참가했다. 애초에 1차대전시기에 소년병은 그리 드물지 않았고, 오히려 100% 성인으로만 구성된 군대가 더 드물었다. 그러나 핀란드의 경우 소년병은 거의 지원병이었고, 이들은 모두 돈을 벌기 위해서 자원한 것이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사병들의 무장은 적군이 더 나았고, 장교들의 수준은 백군이 더 나았다. 병력이 비슷하다는 걸 고려하면 똑같다고 봐도 되었다.
적군은 수도인 헬싱키를 장악하고 먼저 공세를 펼쳐서 전쟁의 초기 주도권을 잡았다. 그러나 장교의 질은 떨어지던 적군은 추가 공세를 실시하지 않으며 이렇게 확보한 주도권을 살리지 못했다. 그나마 그 장교도 투표로 선발되었기에 적정수준이 보장되지도 않았고 병사들에 대한 장악력도 좋지 않았다. 사병들도 제대로 된 군사훈련은 받지 못했고, 규율도 제대로 잡혀있지 않았다.
초반 주도권을 잡았던 시기를 제외한 적군의 승리 대부분은 러시아군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종합적으로 적군은 8~9만의 핀란드군, 7천~1만의 러시아 군으로 이뤄져 있었다.
백군에겐 적군이 절대 가질 수 없는 두가지 이점이 있었는데, 바로 만네르하임의 리더십(스웨덴에서 지원해준 84명의 장교도 있었다)과 1450명에 이르는 사냥꾼 연대였다. 이 연대는 1915~17년에 독일에서 훈련받았고, 동부전선에서 경험을 쌓을대로 쌓은 병사들이었다. 이 병사들은 2월 25일 핀란드에 지원군으로 도착했다. 사냥꾼 연대는 싸우기도 잘 싸웠지만 다른 병사들을 장악할 수 있는, 그 어느 것으로도 대체 불가능한 능력이 있었다. 사실 백군이나 적군이나 훈련수준은 비슷했고, 규율도 좋지 않았다. 이를 통제하기 위해선 경험많은 베테랑 병사가 필수였고, 이 연대는 이런 역할을 해줄 수 있었다.
백군의 약점은 병사들의 사기였다. 대부분의 병사들이 중부-북부에 농토를 갖고 있던 대지주 휘하 농노로 구성되었기에 이들이 총을 뒤로 돌리지 않을까 내내 노심초사 해야만 했다. 물론 이는 사냥꾼 연대의 통제력으로 완화될수는 있었지만 어쨌든 위험이 사라질 순 없는 노릇이었다. 따라서 백군은 적군을 상대로한 선전에 모든 여력을 기울였다.
종합적으로 볼때 백군은 8~9만의 핀란드군, 1만 3천의 독일군, 500~1천의 스웨덴 군으로 구성되어있었다.
3 진행
3.1 탐페레 전투
1918년 백군 사령관 만네르하임은 핀란드의 카렐리야 지방의 주요 도시인 비푸리와 핀란드의 핵심 공업지대인 탐페레에 대한 공세를 검토했다. 비푸리 공격의 경우, 점령시 가질 수 있는 전략점 이점은 매우 컸지만 백군의 전술적 열세와 적군의 방어-반격을 생각할때 너무 위험했다. 결국 만네르하임은 탐페레를 공격하기로 결정했고 3월 16일 탐페레에서 북서쪽으로 65km 떨어진 지역에서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동시에 백군 전체가 모든 전선에서 전진을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공세에 적군은 당황하여 패닉에 빠졌다. 오직 몇개 부대만이 방어에 총력을 다해서 백군의 진격을 조금 늦출뿐이었다. 백군은 3월 24일 적군의 연결을 탐페레 남쪽에서 차단하고 25일 탐페레를 포위했다. 이제 남은 것은 시가전을 통해서 도시를 점령하는 것 뿐이었다.
탐페레에서 16000명의 백군과 14000명의 적군이 전투에 참가했다. 핀란드에서 벌어진 첫번째 시가전이었고, 이후 헬싱키와 비푸리에서도 시가전이 벌어진다. 본격적인 전투는 3월 28일부터 벌어졌다. 시가전이다보니 전투는 길어졌고, 백군의 일부는 50%가 넘는 손실을 보기도 했다. 이에 백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4월 3일부터 총력 공세를 펼친다. 백군은 집 하나하나, 도로 하나 하나를 점거해가며 전투를 치렀다. 적군은 마을의 서쪽 절반을 4월 5일까지 잃었다. 마지막으로 적군이 점거하던 거점은 탐페레 시청이었고, 이것이 함락되자 4월 6일 퓌니키(Pyynikki)와 피스팔라(Pispala)지역의 적군이 모두 항복했다.
남아있던 적군은 수세에 몰려있었지만 상당히 의욕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에 만네르하임은 비푸리 공략에 쓰려 남겨두었던 사냥꾼 연대를 전투에 투입했다. 3월엔 러시아군도 이곳에 투입되었고, 독일군 본대도 여기에서 전투를 진행했다. 결과적으로 탐페레 전투는 핀란드 내전의 가장 격렬한 전투가 됐다. 백군은 사냥꾼 50명을 비롯해 7~900명의 사망자를 냈고, 이는 핀란드 내전동안 가장 많은 사냥꾼이 죽은 전투였다. 적군은 1000~1500명의 군사를 잃었고 포로로 11000~12000명을 잡혔다. 71명의 민간인들이 오폭으로 사망하기도 했다. 도시의 동쪽에 위치한 건물은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다.
템페레 전투 이후 백군은 비푸리로 진격했다. 비푸리 전투에 백군은 15000명의 적군을 상대로 18500명의 군사를 투입했다. 전투결과 5~800명의 적군이 사망했고 12000~15000명이 포로로 잡혔다.
3.2 독일의 개입
핀란드 민족주의자들은 1917년 핀란드가 러시아와 대립할 때, 독일에 지원을 요청했다. 당시 진행중이던 강화조약에 방해되는 것을 피하고 싶었던 독일 제국은 이 요청을 거절했다. 그러나 1918년 2월 10일 레온 트로츠키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체결을 파토낸 이후 독일의 태도는 급변한다. 소련에게 무언의 압박을 가하려 한 독일은 "도움 요청"을 승낙하고 2월 13일 핀란드 백군을 위한 군대 파견을 결정한다.
독일은 2월 18일 러시아를 공격하기 시작해서 3월 3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우크라이나, 폴란드와 발트3국등 동유럽 국가들 전체를 독일 영토로 공인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독일은 핀란드에 대한 군사 계획을 변경하지 않고 백군을 계속 지원했다.
독일의 군대는 3월 5일 도착했다. 1만이 넘는 독일군은 4월 3일부터 헬싱키를 서쪽에서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중 3천이 다른 도시인 로비사(Loviisa)를 공격했다. 독일군 주력은 4월 12~13일 경에 헬싱키 서부에 진입했다. 3천의 병력은 4월 19일 라흐티를 공격하고 점령해서 적군의 동쪽과 서쪽으로 양단하는데 성공했다. 1만 주력군은 4월 21~22일에 헬싱키를 완전 점령하고 리히매키(Riihimäki)와 해멘린나(Hämeenlinna)를 정복했다. 이 전쟁에서 독일군은 소련군과 비교해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정예도와 사기를 자랑했다.
3.3 헬싱키 전투
4월 11일 독일군과 적군사이에 강화 논의가 오고간 이후 핀란드의 수도에서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됐다. 안개가 깔려있던 새벽 5시 2~3천명의 독일군이 북서쪽에서 공세를 시도했다. 적군을 지속적으로 공격하던 독일군은 도시의 서부로 진입하는데 성공했다.
그 때 8~9천명의 적군이 도시를 방어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적군중에서도 최정예였다. 하지만 대다수는 주전선이 형성된 북쪽에서 방어선을 형성하며 버티고 있었다. 주요 방어거점은 노동자 광장, 철도역과 사령부가 위치해 있던 스몰리나(러시아 정부가 사용하던 공관)였다. 4월 12일 밤엔 독일군이 서부의 모든 도로와 집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내전동안 헬싱키에 숨어있었던 백군 몇몇이 집에서 나와 독일군과 전투를 함께했다.
4월 13일엔 독일군이 스몰리나와 시장 광장을 점령했다. 전투 후반부에 독일쪽에 늑대 여단이 가세했다. 이 부대는 북쪽에서 헬싱키 동부로 밀고 들어가는 공세를 시도했다. 독일 포병의 포격으로 노동자 광장이 완전히 파괴되었고 이와 함께 공산당이 꿈꾸던 혁명은 사라졌다. 헬싱키 동부는 4월 13일 정오즈음에 독일군이 점령했고 칼리오 교회에 백군 깃발이 꼽혔다.
이 시점에서 실질적인 전투는 종결되었지만 남아있던 몇몇 적군의 항전은 계속됐다. 이 전투에서 1~200명의 독일군과 20명의 백군이 죽었고, 300명의 적군이 사망했다. 약 8000명의 적군이 포로로 잡혔다. 독일군은 4월 14일 거리에서 승리 행진을 벌였다.
3.4 종결
헬싱키 전투에서 진 적군의 수뇌부는 병사들을 나몰라라 하며 전장에서 탈출했고, 지휘부가 사라진 병사들 중 일부는 페트로그라드로 갔지만 대부분은 백군에 맞서 싸웠다. 적군의 수중에 있던 핀란드 남서부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코우볼라와 콧카는 5월 5일 항복했다. 내전은 1918년 5월 15일 공식적으로 종료되었고 만네르하임과 백군은 5월 16일 헬싱키에서 군대 행진을 하며 승리를 자축했다.
4 결과
내전은 막 독립한 핀란드에게 재앙이었다. 37000명이 죽었고, 그중 16%인 5900명이 14~20세의 남성이었다. 이중 1만명만이 전장에서 발생한 사상자였고 나머지는 테러나 수용소에서 죽어갔다. 2만의 고아가 발생했고 전체 인구의 1%가 넘는 시민이 사망한 것이다.
전쟁 이후 핀란드의 좌파세력은 세 개로 나눠졌다. 중도좌파 사회 민주당, 핀란드 민족 사회주의당, 그리고 소련의 지원을 받는 공산당이다. 사민당은 12월 25일 내전이후 첫 공식적인 회의를 한 후 공산주의와 볼셰비즘을 부정하는 발표를 했다. 참고로 내전 패배로 소련으로 도망간 핀란드 공산주의 세력은 모스크바에서 핀란드 공산당을 만들었다.
새로운 의회는 1918년 5월에 만들어졌다. 내전에서 적군에 가담했던 의원들은 전부 제명됐다. 좌파 의원은 두명의 사민당 의원밖에 없었다.
5 적색 테러와 백색 테러
내전기에 백군과 적군은 서로가 '적색 테러'와 '백색 테러'라고 불리는 테러의 가해자였다. 1차대전이 발발했을 때부터 핀란드인들의 러시아 경찰에 대한 테러는 시작됐고,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3월엔 러시아 경찰이 6~7명 죽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러시아 경찰은 27명의 핀란드인을 죽였다.
1918년의 전쟁동안 두가지 종류의 테러가 존재했다. 군사적으로 철저히 계산된 것과 개인적이고 우발적으로 일어난 복수가 그것이다. 양측 모두에서 테러를 계획하고 이를 주문했다. 입증된 것만 따져봐도 적색 테러의 3분의 1, 백색 테러의 대부분이 중앙에서 주도한 것이었다. 내전 시작시기에 백군 정부와 적군 정부 모두 공식적으로는 테러에 반대했다. 그러나 군 수뇌부는 이 테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테러의 주된 목표는 상대의 사회기반시설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다른 효과는 상대측 시민들과 병사들에게 충격을 유발하는 것이었다. 양쪽 모두 군대의 정예도가 떨어지다보니 이런 공포에 강하지 않았고 테러는 이런 병사들의 사기를 와해시키는데 아주 적절했다. 적군과 백군 모두 상대의 테러행위를 격렬하게 비난하는 프로파간다를 사용했다.
적색 테러로 죽은 사람은 전쟁기간동안 1650명이고, 백색 테러로 죽은 사람은 무려 8250명에 달했다. 참고로 적색 테러로 죽은 사람수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