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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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보이는 군복 안입은 수염기른 사람은 러시아 대표 레프 카메네프이다. 레닌 사후 스탈린-지노비에프와 함께 3두정치를 구성하여 트로츠키를 몰락시키는데 일조했으나, 스탈린은 트로츠키가 몰락하자 재빨리 부하린과 손을 잡고 지-카를 공격했고, 이들은 실각했다가 대숙청 때 처형된다.

# 리투아니아의 영토를 좀더 넓게 그린 지도

1918년 2월 9일 독일 제국우크라이나 민족 대표들이 브레스트-리토프스크(지금의 벨라루스 브레스트)에서 맺고, 3월 3일, 신생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가 추인한 조약. 소비에트 러시아는 전쟁 종결의 대가로 독일 제국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약조하였다.

1 초기 협상

러시아 혁명의 여파는 제국 전역에 퍼졌다. 블라디미르 레닌4월 테제에서부터 주장했던 '무병합 무배상의 민주적 강화' 논리에 따라 1917년 12월부터 소비에트 러시아는 독일과 협상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제국 곳곳에서 러시아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있던 민족들은 제정이 무너지기가 무섭게 독립을 외치기 시작했다. 사실 러시아도 1917년 11월 '전 러시아 내 민족의 권리 선언'을 통해 민족들의 자결권[2] 및 자치권을 인정하기는 했으나 이만큼 일이 커지리라고 예상하지는 못했다.

독일은 이러한 독립 운동을 도와 러시아의 힘을 완전히 빼 놓으려고 했는데, 애초에 전쟁 중이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소비에트 러시아는 공산 정권 수립 이후 레닌의 저서 『국가와 혁명』의 원칙에 따라 군대의 동원을 해제하고 이를 자발적인 '민병대' 조직으로 재편하겠다는 계획을 실현했는데 당연하게도 군인들은 참전보다는 전쟁에서 빠져나가기를 원해서 군대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당시 소비에트 러시아가 굴리는 군대 중 그나마 쓸만한 것이 라트비아 소총 연대[3] 정도였다. 이들은 나중에 적백내전에서 맹활약했다.

특히 주요한 철강과 석탄 산지였던 우크라이나의 의회가 독립을 선언하자 소비에트 러시아와 독일은 다시 충돌하게 된다. 독일의 입장에서는 우크라이나의 풍부한 자원이 필요했기에 적극적으로 우크라이나를 도운 반면 소비에트 러시아 입장에서는 자기네 영토가 멋대로 떨어져 나가는 꼴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러시아 내에서도 입장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레닌은 15만 ㎢ 정도의 영토와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한 초기 조약을 받아들여 한 숨 돌릴 여유를 가질 것을 요구했으나, 부하린과 트로츠키 등은 전쟁의 종결은 노동자들의 세계 혁명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오죽하면 트로츠키가 "우리는 인민들 앞에서 몇 건의 성명서만 발표한 후, 이따위 곳(외무성)은 폐쇄해버릴 것이다.라고까지 했을까... 말 그대로 이상에 젖어있던 상황.

마침내 트로츠키는 무전쟁-무평화라는 유명한 병크 선언을 하며 독일의 최후협상 요구를 거부했고, 최후 통첩일인 2월 10일까지 끝내 소비에트 러시아는 협상에 응하지 않았다. 그 동안 독일은 우크라이나와 이미 조약을 맺고 있었고, 전쟁은 재개되었다. 2월 21일 레닌은 「위험에 처한 사회주의 조국!」이라는 선언을 발표하며 적군의 소집을 요구했고, 2월 23일 적군이 곳곳에서 소집되었다.

2 소비에트 러시아의 참패와 굴욕적 협상

그러나 러시아 혁명 자체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지쳐버린 군대와 국민들의 항명으로 벌어진 사건인 데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아직 제대로 성립되지도 않은 국가라[4] 힘이 너무나 부족했다. 독일은 훗날 2차대전 당시의 전격전을 연상시키는 속도로 우크라이나 등 러시아의 지배 하에 있던 동구권 국가들을 세력권 내로 넣으며 파죽지세로 동쪽을 향해 진군했다. 당시 독일군의 전략은 기관총병을 기차에 태운 후 수시로 내려서 해당 지역의 공산당 간부들을 사로잡고 다시 기차 타고 진군하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철도 진군. 소비에트 러시아는 이 정도의 군대(?)조차 요격해 섬멸하기는 커녕 당장 수도를 지킬 군대도 없었다. 철도라도 끊어보지...

# 1917년과의 영토 변화(핀란드 등 제외)
이 결과 소비에트 러시아는 약 200만 ㎢의 영토를 상실했다. 참고로 한반도가 약 22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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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계획된 독일령. 막되먹은 이 레벤스라움은 가히 독소전쟁 전성기와 맞먹는다. 사실 캅카스 지역까지 독립시킨 것을 생각하면 사실상 이를 실현했다고 봐도 된다. 그게 독일 통제 안에 있던 건 아니었지만...

독일은 동유럽에 완충지대를 만들 것인가, 소비에트 러시아를 최대한 약화시키고 동유럽을 관할할 것인가 고민한 끝에 결국 후자를 선택하여 소비에트 러시아에게 굴욕적인 조약을 강요했다. 그러는 동안 레닌을 위시한 즉시 강화파가 소비에트 러시아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소비에트 러시아는 독일의 요구 조건을 모두 수용하는 조약을 맺게 되었다. 그러나 워낙 조약 내용이 치욕적이였던지라 볼셰비키 중 트로츠키 같은 고위 인사들은 조약에 자신들의 이름을 넣는 것을 거부해 실제 조약에 서명한 러시아 인물들은 급이 낮은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볼셰비키들은 여전히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뒤에서 몰래 전 세계를 향해 공산주의 홍보활동을 벌였고 전쟁이 길어지면서 지친 사람들이 속출해 당시에는 러시아 뿐만 아니라 유럽에 전체적으로 사회주의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던 때였다. 이에 고무된 볼셰비키들은 어차피 우리가 혁명 일으킨 걸 보면 다른 나라들에서도 공산 혁명이 일어날테니 이 조약은 금방 무효가 될 것이라 생각하였다.

이 조약이 얼마나 가혹한 것이었냐면, 러시아 유럽 영토의 반 이상[5], 인구는 5600만, 석탄과 철강 산업의 70% 이상, 산업의 30 ~ 40%를 넘기는 것이었다. 산업 비중이 석탄과 철강에 비해 적다고는 하지만 저 정도면 나라 하나 망하는 수준인데다가 근대의 핵심인 석탄과 철강이 70% 이상 빠진다는 것은 그냥 너 망해라라는 소리와 다름 없었다. 독일 패전 뒤 베르사유 조약에서 연합국이 독일에게 강요한 조건도 가혹하다지만 이 조약은... 연합국: 나는 관대하다

사실 트로츠키 등의 예상이 아주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독일의 국력도 당시 거의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으며, 결과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 말기에 이르면 독일이나 헝가리에서도 혁명이 일어나 각지에서 러시아 식의 소비에트가 생겨나게 된다. 문제는 그게 조약 이후 반 년 후라는 것이고, 또 얼마 안 가 실패했다는 것이다.

정작 독일은 이 조약으로 동부전선에서 많은 것을 챙겼지만 이 과정에서 동맹국들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불가리아의 협의없이 독단적인 조약을 맺은 데다 조약 내용도 독일에게만 콩고물이 떨어지는 내용이 많아서 오히려 결속에는 악영향을 가져왔다. 게다가 군 수뇌부가 생각없이 동유럽에 영향력을 확대하려 한 결과로 독일군은 동부 유럽의 광대한 영토의 치안까지 책임져야 했고, 원래 계획했던 것보다 많은 병력이 이 지역에 묶였다.[6] 이 모양이니 동부전선을 정리한 후 남는 잉여병력으로 서부전선을 보강하려는 계획도 크게 틀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정작 춘계 공세에서는 병력들을 제대로 동원하지 못했다.

3 조약 파기, 그러나...

바로 그 해 독일 제국이 패망하면서 11월 13일 소비에트 러시아는 조약의 무효화를 선언했다. 그러나 연합국은 볼셰비키가 주동이 된 러시아 혁명정부를 인정하길 거부했다. 당시 연합국은 볼셰비키들의 정부 전복과 선동활동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으며 혁명 이전 레닌이 독일의 지원으로 러시아에 온 것 때문에 이들이 독일의 첩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게다가 러시아 항만에는 철도가 마비되어서 수송되지 못한 엄청난 군수물자가 쌓여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볼셰비키나 독일군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했다. 또한 연합군은 볼셰비키만이 전쟁을 종결되길 원할 뿐 러시아 국민들은 전쟁을 지속할 의지가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공산 혁명에 대해 적대적이었던 건 연합국이나 동맹국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중에는 러시아를 자신들의 영향력 안에 넣기 위해 적백내전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러시아는 적백내전으로 몸살을 앓았으나, 다시 세력 확장에 나서 외국의 간섭과 백군의 내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하고 우크라이나를 병합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1920년 폴란드에서 참패하며 중부유럽 진군이 멈추고, 핀란드발트 3국은 이 때를 기점으로 완전히 독립했다.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의 시대까지 러시아는 1920년에 얻은 선에 만족해야 했다.

그래도 카프카스 일대의 국가들은 회복하는 데 성공해서, 이 지역의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등을 묶어 카프카스 지역에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을 성립시키고 소련의 구성원 중 하나로 편입시키는 데 성공한다.

4 의의

이 조약의 가장 큰 의의는 폴란드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가 독립하는 계기였다는 것. 이들은 1919년(폴란드), 1920년(핀란드)과 1921년(발트 삼국)에 차례로 국제 연맹에 가입한다.

이 조약의 두번째 의의는 트로츠키를 위시한 '세계혁명론자'들의 생각이 망상일 뿐이었음을 완벽하게 보여주었다. 그들은 유럽의 전쟁 상황을 이용해 일거에 유럽을 공산화시키고 그 힘으로 전세계를 적화시키려 하였으나, 현실의 공산 세력은 서부 전선에서 연합군의 맹공을 겨우 견뎌내던 독일에게 쪽도 못 쓰고 당하는 신세일 뿐이었다. 반대로 독일은 러시아의 군사력을 더욱 경시했고 동유럽을 '한 때' 평정했던 시대의 향수가 히틀러의 망상과 겹치며 뒷날 독소전쟁을 벌였다.

당 내부와 정치적인 여파로도 이 협정을 통해 독일에게 당장의 팔 한쪽을 내주고, 당장의 백군을 격파하는데 집중하여 혁명을 굳힌다는 전략을 완전히 침몰시켰다. 애초에 다른 곳도 아니고 협정에 들어간 키예브 등의 우크라이나 드네프르강 동쪽, 벨로루시 동부 등은 러시아 입장에서는 1500년대부터 오스만 제국, 스웨덴, 폴란드, 프로이센 등의 수많은 '서방에서 온 침략자'들에게서 방어해 가며[7] 가꾸어 온, 수백 년 지난 자국의 합당한 영토였는데 이걸 조약 하나로 내준다니 이데올로기적 문제를 넘어 감정적 차원에서 수많은 러시아인들이 못 받아들였다.

당장 좌파 사회 혁명당, 아나키스트 등 러시아의 많은 비-볼셰비키계 좌익 혁명 세력들이 10월 혁명 때만 하더라도 '볼셰비키들 하는 것은 마음에 안 들지만 일단 혁명은 같이 싸워야 한다'라는 입장으로 볼셰비키와 협력했으나, 이 조약 때문에 결정적으로 반목이 극에 달해 이제까지 볼셰비키의 우당으로서 행보를 같이하던 사회 혁명당 좌파와 아나키스트들이 반-볼셰비키 세력에 가담해 레닌은 이제 멘셰비키, 왕당파, 공화주의자, 등의 '우익' 백군 뿐만 아니라 볼셰비키 식 수직적인 국가 주도의 사회주의 자체에 반발하는 좌익 또한 세력을 적으로 돌렸다. 사회 혁명당 좌파와 아나키스트들은 이전부터 도시 내부의 테러 활동과 선동, 침투 등에는 이골이 굳은 전문가들이라[8] 많은 수의 볼셰비키 핵심 당원들이 이런 저런 식으로 암살을 겪고, 레닌 본인 또한 사회 혁명당 좌파의 암살 공작으로 죽을 뻔하다가 중상을 입어 골골거리며 비교적 단명하는데 가장 핵심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또한 이 사건과 적백내전을 겪으면서 신생 소련은 우리는 자본주의자들에게 포위당하고 있다는 편집증적 공포에 시달린다. 연합군이나 동맹군이나 공산주의를 타도하고 러시아로부터 콩고물을 떼어먹겠다는 데에는 의견이 비슷했다. 끝내 이러한 이미지는 냉전 종결까지 소련에 계속 남았고, 지금도 그 잔재가 있다. 러시아가 동유럽NATO 가입에 민감하게 반응함은 다 까닭이 있다. 사실 러시아 입장에서는 현재 러시아의 국경선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내줄 거 다 내준 영역과 가까우니 당연히...

5 후일담

조약이 맺어진 브레스트-리토프스크는 폴란드의 영토로 들어갔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는 "리투아니아의 브레스트"라는 뜻이었기 때문에[9] 1920년대에 "브제시치 나드 부기엠"[10]으로 개칭되었다. 그러다 소련과 독일이 폴란드를 나눠먹기로 한 1939년의 폴란드 침공 이후에는 독일과 소련의 세력의 경계지점이 되었다. 1939년에는 여기서 독소 양군이 합동 퍼레이드까지 벌이는 등 화기애애했으나, 2년후에는 독소전쟁의 첫 포화가 터진 곳이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2차대전 이후 브레스트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소련의 최서단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가, 지금은 벨라루스에 있게 되었다. 브레스트는 소련의 영웅 도시 중 한 곳이다.

한편 훗날 이오시프 스탈린의 팽창 정책도 넓게 보면 결국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서 양보한 영토를 재건하기 위한 것에 가까우며, 루마니아에게 베사라비야 지역을 반환받은 것, 발트 3국을 강제 병합한 것 모두 그 일환이었다. 그 결과 소련은 2차대전 후, 폴란드 절반과 핀란드 4/5를 제외하고는 제정 러시아의 영토를 거의 수복했다. 폴란드 핀란드 대신 이전에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영토였던 우크라이나 서남 5주와 독일 제국의 동프로이센을 얻었다
  1. 적위군(Red Guard)은 붉은군대(Red Army)의 전신이다. 볼셰비키당의 사병이었다.
  2. 독립을 포함한다.
  3. 연대라고 하지만 규모는 일반적인 연대보다 훨씬 컸다.
  4. 소련은 볼셰비키의 내전 승리 이후 1922년에 건국되었다.
  5.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전쟁 전의 모든 영토와 비슷했다.
  6. 조약 실행과 치안 유지를 위해 주둔시켜야 했던 병력이 약 150만 명으로 추정된다.
  7. 물론 폴란드, 오스만 제국 등의 입장에서는 여기에 할 말이 더 있겠지만, 이 당시 러시아인들의 시각에서는 그랬다. 게다가 현대적 민족 국가의 범위에서 이 영토들을 확실하게 러시아 땅이라 못한다면, 적어도 역사적 의미에서는 러시아와 서방의 경계 지대로서 큰 역할을 했으며, 모든 러시아계 국가들의 원류로 숭상받는 키예프 루스 문화권의 발상지 또한 여기다.
  8. 이 때만 하더라도 볼셰비키, 멘셰비키로 대표하는 러시아 사회 민주당, 즉 정식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 세력들은 이러한 테러 활동과 산발적 혁명 활동을 '좌파 모험주의'로 보고 오히려 배격했다.
  9. 참고로 프랑스 북서부에도 브레스트라는 도시가 있다.
  10. Brześć nad Bugiem, 부크 강 연안에 있는 브레스트라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