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ron Carl Gustaf Emil Mannerheim
카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하임 남작
1867.6.4 – 1951.1.28
히틀러 왼쪽에 중절모를 쓴 인물은 핀란드의 대통령 리스토 리티
핀란드를 존망의 위기에서 3번[2]이나 구해낸 구국의 영웅.
핀란드를 사랑했기에 핀란드를 떠난 사나이.
1 러시아 제국
1867년 당시는 러시아 제국 소속이었던 핀란드의 남작 가문[3]에서 태어났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니콜라이 기병학교를 졸업 후 러시아 근위대에 들어갔으며, 러일전쟁에 참전하여 봉천 전투에서 두각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후 중앙아시아를 탐험을 했다.[4] 제1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상대로 전과를 올렸다. 1917년 러시아 혁명 후 제정이 무너지고 임시정부가 들어서자 만네르하임은 제대하여 핀란드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2 핀란드 내전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가 혼란한 상황을 틈타 핀란드는 독립을 쟁취한다. 그러나 핀란드도 러시아처럼 1918년 적백내전이 일어났고 이전부터 反 볼셰비키 성향이었던 만네르하임은 백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내전 초기 러시아 백군이 만네르하임에게 연합을 제의했으나 러시아 백군이 핀란드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한 만네르하임은 연합제의를 거절하였다. 대신 만네르하임은 독일 제국의 지원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 만네르하임은 판 테레 전투에서 적군을 완파하며 승기를 잡았고 4월 13일 수도 헬싱키에 입성한다. 5월 5일, 적군의 마지막 근거지마저 함락하며 만네르하임은 내전을 단 5개월만에 끝냈다.[5]
내전이 어느정도 마무리되자 만네르하임은 핀란드를 떠났다. 자신이 핀란드에 남아있으면 자신이 끌어들인 독일의 영향력이 너무 강해질 것을 우려해서였다. 만네르하임을 핀란드의 왕으로 추대하려는 사람까지 있었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대통령 정도는 우습게 될 수 있었을테지만 조국을 위해 조국을 등진 것이다. 다행히도 몇달 후 독일제국이 붕괴하면서 만네르하임은 핀란드로 귀국할 수 있었다. 귀국 직후 만네르하임은 핀란드 임시 국가지도자가 되었고 영국, 미국으로부터 핀란드의 독립을 인정받는데 성공하며 핀란드의 독립을 공고히 한다.
1919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카를로 유호 스톨베리에게 패하였고[6] 그 직후 정계에서 물러났다. 만네르하임은 2선에서 인도주의 활동과 핀란드군 발전에 힘썼다. 그러다가 1933년 핀란드 국회는 만네르하임에게 핀란드의 원수 칭호를 수여했다. 이 칭호를 받은 사람은 지금까지 만네르하임 단 1명뿐이다.
3 2차 세계대전
3.1 겨울전쟁
1939년,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은 소련은 폴란드 반쪽과 발트 3국을 차례로 접수한 후 핀란드를 노리기 시작했다. 핀란드는 이미 독소 불가침조약 체결시 소련의 몫으로 밀약이 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핀란드를 방문한 소련의 외무장관 몰로토프는 핀란드의 카렐리야, 라플란드 지역 할양 + 항구 이용권을 요구하였다. 핀란드는 당연히 이 요구를 거절하였고 소련의 침략 의도가 명백하다고 판단한 핀란드 정부는 72세의 만네르하임을 핀란드군 총사령관으로 복귀시켜 전쟁을 준비했다.
만네르하임은 1,000km가 넘는 국경을 모두 방어한다는 건 불가능하지만 소련도 한정된 돌격로만 이용할 거라고 판단했다. 핀란드 북부는 도로 사정도 열악하고 극심한 추위 탓에 대규모 부대의 전개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소련의 주요 진격로로 예상되는 카렐리야 회랑을 중심으로 만네르하임 방어선(Mannerheim Line)을 구축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는데 핀란드 국민들도 전폭적인 협력을 보냈다. 독립한 지 20년밖에 안 된 핀란드 국민들에게 이 전쟁은 조국의 존속이 걸려있는 전쟁이었다. 자원 입대자가 줄을 이었고 진지 구축도 자발적으로 나섰다. 미국과 캐나다에 거주하던 핀란드계 이민자들도 핀란드에 돌아와 입대 신청서를 냈다. 심지어 만네르하임이 백군 총사령관일 때 때려잡던 공산주의자들까지 만네르하임과 핀란드군에 전폭적으로 협력했다.[7] 다만 혹시 모를 스파이 활동을 우려한 핀란드 정부는 공산주의 활동 경력자의 입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11월 29일, 전차 3,200여대, 항공기 3,800여기를 앞세운 26개 사단 460,000명의 소련군이 핀란드 국경을 넘어 침공을 개시했다. 당시 핀란드군의 전력은 33만명, 전차 33대, 항공기 110여기에 불과했다. 게다가 소련의 위협이 가시화되자 종류를 가리지 않고 총을 나누어준 탓에 정규군마저 개인화기가 통일되지 않은 상태였다. 누가 봐도 소련의 압도적 우세였고 12월 6일까지 소련군은 쾌속 진격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그것은 핀란드군에게 유리한 지형으로 소련군을 끌어들인 만네르하임의 함정이었다.페이크다 이 병신들아 12월 8일, 톨바야르비 전투에서 핀란드군 1개 연대의 야간 기습을 받은 소련군 2개 사단이 박살나며 전황은 급반전되었다. 무방비 상태에 기습당한 소련군은 아군끼리 총질을 하는 상황까지 벌어졌고 그 아수라장의 바깥에서 핀란드 저격수들은 공황 상태의 소련군을 하나씩 사냥했다.
만네르하임이 이끈 핀란드군은 철저하게 방어에 유리한 자연지형을 기반으로 모티 전술[8]을 사용하였다. 말 그대로 통나무를 조각내듯 소련군 부대를 각개격파 하는 방식이었는데 스키부대를 중심으로 핀란드군은 게릴라 전을 펼쳤고 여기에 말려든 소련군은 부대별로 고립되고 말았다. 거기에 12월 중순이 되면서 기온이 영하 30도 이하로 급강하하며 폭설까지 쏟아졌는데 더욱이 1939년의 겨울은 50년 만에 가장 혹독한 겨울이었다. 소련군은 혹한을 난생 처음 경험하는 남부 우크라이나 출신들이 중심이었고 너무 낙관한 나머지 월동준비조차 제대로 하지 않은 탓에 고립된 소련군은 집단 동사하기 시작했다. 고립되어 동사한 숫자가 전투 중에 전사한 수보다 더 많을 정도였다. 소련군은 진격은 고사하고 보급이나 제대로 되기를 빌어야 할 입장이 된 것이었다.
12월 9일부터 다음해 1월까지 계속된 수오무살미 전투에서 소련군은 25,000명을 넘는 사망자를 내며 대패했고 전쟁은 완전히 교착상태에 빠져버렸다. 이걸 본 세계는 소련군을 비웃었고, 핀란드에게 갈채를 보냈다. 제2차 세계대전 내내 중립을 지키던 스웨덴도 이 때만은 핀란드에게 군수품과 자금 지원을 해주었고 8,700명의 스웨덴 의용군도 핀란드를 위해 싸웠다. 외국의 여러 단체들도 핀란드에 식량과 의약품을 지원해주었다.
헬싱키 주재 외국 특파원들은 연일 핀란드의 전과에 찬사를 남기고 소련군을 조롱하는 기사를 쏟아내었다. 심지어 타임지는 손바닥만한 나라에 얻어터지고 역관광당한 스탈린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하며 비아냥과 조롱의 메세지를 보냈다.
그러나 핀란드와 소련은 애초에 국력의 규모가 달랐다. 스탈린은 총사령관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를 해임한 후 세묜 티모셴코를 새 지휘관으로 앉혔다. 티모셴코는 지난 패배에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소련군의 지휘와 전술을 바로잡았고 1940년 2월부터 날씨가 풀리기 시작하자 90만 명의 병력을 더 투입해 총공격을 개시했다. 핀란드군은 결사적으로 저항했으나 2주 만에 병력의 절반을 잃었고 결국 만네르하임 방어선이 무너졌다. 비축한 탄환마저 바닥을 드러내자 만네르하임은 핀란드 정부에 소련과 강화를 맺을 것을 요청했고 정부도 이를 받아들였다.
소련도 이미 2월 초에 스웨덴을 통해 전쟁 전 자신들의 요구만 들어주면 전쟁을 끝내겠다는 의향을 전달했다. 예상치 따위는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린 엄청난 피해 규모에 질려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핀란드의 강화 요청에 순순히 응했고 3월 6일 모스크바 평화조약이 체결된다. 핀란드는 강화 체결 당시 대부분이 핀란군 수중에 있던 카렐리야를 비롯해서 전쟁 전 소련이 요구한 대부분의 영토를 할양했지만 폴란드나 발트 3국처럼 국가가 사라지는 최악의 상황만은 면할 수 있었다. 만네르하임의 분전이 다시 한 번 핀란드를 구했다.
3.2 계속전쟁
소련은 강화조약을 맺으면서 심각한 실수를 하나 했다. 핀란드의 군비를 제한하지 않은 것이었는데 이는 소련이 굳이 제한할 필요를 못 느꼈기 때문이었다. 평화조약의 내용이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한 핀란드 국민들은 소련에 이를 갈고 있었지만 겨울전쟁에서 핀란드 병력의 절반이 사라졌고 무엇보다 핀란드가 자신들에게 시비를 걸리라 생각하지 않았기에 굳이 군비를 제한하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겨울전쟁에서 보여준 핀란드의 전투력을 보고 감명받은 히틀러가 핀란드에 동맹 의사를 타진해 왔다봉의 등장. 미국과 영국도 심정적으로는 핀란드를 응원했지만 소련의 관계 때문에 직접적인 지원은 못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핀란드가 의지할 상대는 사실상 독일뿐이었다. 강화 후에도 지속된 소련의 위협에 위기감을 느낀 핀란드는 독일의 지원을 받으며 군비를 증강하기 시작했고 독일군 2개 산악사단도 핀란드에 들어왔다.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와 함께 독소전쟁이 시작되고 3일 후, 소련을 공격하고 돌아가는 독일군 폭격기에게 유류를 보급했다는 이유로 소련 공군이 핀란드의 18개 도시를 공습하며 계속전쟁이 발발하였다. 독일군에 줄기차게 밀리고 있던 소련군은 핀란드 쪽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핀란드군은 만네르하임의 지휘 아래 빼앗긴 카렐리야 지방을 탈환하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만네르하임은 겨울전쟁 전 핀란드-소련 국경선을 넘어서는 진격은 하지 않았는데 독일이 요구한 무르만스크 공략이나 레닌그라드 공방전 참가는 핀란드군을 밍기적거리게 하는 방식으로 교묘하게 빠져나갔다.
만네르하임이 과거 영토 이상으로 진격하지 않은 것은 계속전쟁 말미 핀란드의 외교전에서 상당한 플러스 요인이 된다. 미국은 핀란드와 국교를 끊기는 했지만 선전포고는 하지 않았고 소련의 요구에 어쩔 수 없이 선전포고한 영국도 핀란드와는 단 한 번도 전투를 하지 않았고 전후에도 핀란드를 추축국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소련도 핀란드를 집어삼킨다거나 내정간섭을 할 명분도 없었고 핀란드를 건드렸다가는 미국도 가만있지 않을 게 뻔해서 전쟁 배상금을 받아내는 정도로 강화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만네르하임의 협상 능력은 1942년 자신의 75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히틀러가 핀란드를 직접 방문했을 때 그 진가를 발휘했다. 사실 생일 축하는 명목에 불과하고 히틀러는 만네르하임에게 핀란드군의 추가적 공세를 요청하고자 했는데 만네르하임도 히틀러가 핀란드에 무언가를 요구하려 왔다는 점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는 히틀러가 담배를 극도로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시가를 두 개비나 피웠으며, 히틀러는 속으로 불쾌해했지만 만네르하임의 기세에 눌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결국 그 날 회담에서 히틀러는 핀란드에 구체적으로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9]
그러나 전황을 뒤집은 소련이 1944년 바그라티온 작전의 일환으로 카렐리야에 대공세를 가해오며 카렐리야를 다시 빼앗았고 핀란드 정부는 전쟁을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선 독일과의 관계를 끊고 핀란드 내에 주둔한 독일군을 내보내야 했다.
이를 위해 꼼수를 발휘하는데, 우선 대통령 리스토 리티[10]가 독일과 동맹을 체결한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그리고 후임으로 만네르하임이 취임한 뒤 이전 대통령이었던 리스토 리티와 히틀러가 체결한 동맹은 무효라고 선언해버렸다. 이렇게 쉽게 동맹을 파기할 수 있었던 것은 국가 간의 동맹을 맺은 게 아나라 개인 자격으로 동맹을 맺었기 때문이다.[11] 그러면서 독일에서 구입한 3호 돌격포 대금을 먹튀한 건 덤.
이후 만네르하임과 핀란드 정부는 필사적인 외교전을 전개하였고 마침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제2전선이 형성되자 전후 주도권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소련도 핀란드와 전쟁을 그만두고 싶어했다. 만네르하임은 핀란드가 추축국에서 빠지는 조건으로 1944년 9월 소련과 휴전협정을 체결하였다.
단독 휴전에 반발한 핀란드 주둔 독일군과 핀란드군 사이에 라플란드 전쟁이 발발했지만 핀란드군은 기울대로 기운 독일군을 노르웨이 방면으로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4 전후
만네르하임의 외교전이 핀란드를 또 다시 구했다. 1947년 파리조약이 체결되며[12] 소련에게 배상금 6억 달러를 지불하고 추가적으로 영토를 더 할양해야 했지만 핀란드는 소련을 정면으로 적대했던 국가들 중 유일하게 공산화되지 않았다.
1946년 3월 건강을 이유로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그 후 핀란드를 떠나 스위스로 간 만네르하임은 그곳에서 회고록을 집필하며 살다가 1951년 1월 28일 사망했다.
5 여담
그는 시가(담배)를 좋아하는 애연가에 영어, 독일어, 핀란드어, 러시아어, 프랑스어를 구사 할 수 있었고 키가 190cm에 가까운 장신이었다.
핀란드가 부패인식지수, 언론자유지수 세계 1위를 먹은 데에는 이 사람이 나치와 소련으로부터 나라와 자유를 지키는데 크게 공헌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2차 대전 때의 활약상을 보자면, 독일의 만슈타인보다도 더 대단하다는 의미에서 만본좌라고 평가할 수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선 영어식으로 매너하임으로 잘못 읽는 사람들이 꽤 보인다. 2차 대전 학술서 중에도 그런게 있고 영화 겨울전쟁의 복돌 자막만 해도 그렇고...- ↑ 제복의 모양이나 철십자 때문에 독일군처럼 보일 수 있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다. 제복은 핀란드의 독자적인 스타일이며 철모만 독일식 슈탈헬름이었을 뿐이다. 물론 이웃나라인 스웨덴 철모도 사용했다.
- ↑ 핀란드 내전의 조기종결, 겨울전쟁의 분전, 계속전쟁 막바지의 외교전
- ↑ 독일계 스웨덴인 계열이다. 독일인이었던 가문의 선조가 스웨덴에 정착한 뒤 그 후 후손이 지금의 핀란드 땅으로 이주한 것.
- ↑ 옛날에 서울에서 만네르하임이 중앙아시아를 탐험하여 찍은 사진과 기록들을 모아 사진전을 개최한 적도 있었다.
- ↑ 러시아의 적백내전이 한창 벌어질 때 핀란드 내전이 조기 종결된 것은 핀란드 입장에서 다행이었다. 만약 내전이 장기화 될 경우 소련 적군이 핀란드 내전에 개입할 가능성이 높았고 그렇게 되면 핀란드는 다시 소련에 흡수되었을 것이다.
- ↑ 핀란드 내전으로 전 인구의 1%에 육박하는 사상자가 발생한 탓에 핀란드의 좌파와 우파 모두 중도 세력의 입지가 강해졌다. 이 때문에 세계적으로 보기 드물게 좌우를 모두 아우른 레인보우 내각이 탄생하기도 했고, 극우가 득세했던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도 핀란드만큼은 극우의 득표율이 5~6%에 그쳤다. 만네르하임도 백군의 총사령관이었던 경력이 오히려 발목을 잡은 셈이었다.
- ↑ 사실 이렇게 된 데는 스탈린의 책임이 큰데, 핀란드 내전 후 핀란드의 공산주의자들은 대거 소련으로 가서 공산주의 국가 건설에 매진하다가 대숙청 기간에 상당수가 죽었다. 거기에 스탈린의 우상화 작업까지 진행되면서 대부분의 핀란드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에 등을 돌린지 오래였다.
- ↑ '모티'란 큰 통나무를 장작용으로 쓰기 위해 잘게 쪼개놓은 것을 의미하는 핀란드어이다.
- ↑ 당시 히틀러와 만네르하임이 나눈 대화의 일부는 토르 다멘이라는 핀란드 국영방송(YLE) 기술자에 의해 일부가 녹음되었다. 이것은 히틀러가 특유의 강력한 연설 어투가 아닌 일상적인 말투로 발언했던 음성이 담긴 유일한 기록이다. 이 녹음본은 히틀러의 경호원들에 의해 폐기되었으나 전후 복원되어 민간에 공개되어 있다. #
- ↑ 전후 리스토 리티는 나치에 협력한 전범이라고 소련에 의해 기소되어 징역 10년을 선고받았으나 얼마 안 되어 석방되었다.
- ↑ 독일과 함께 싸운것은 영토수복과 동맹때문도 있지만 식료품이나 탄약같은걸 거의 독일한테서 수입하고 있었던 것도 컸다.
- ↑ 즉 1947년까지 핀란드는 자신들에게 선전포고했던 소련, 영국과
휴전이기는 했지만전쟁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