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리아노 1세

라틴어: Hadrianus I
이탈리아어: Adriano I
영어: Pope Adrian I

역대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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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대 스테파노 3세95대 하드리아노 1세95대 성 레오 3세
  • 생몰년: 700년 ~ 795년 12월 26일
  • 재위기간: 772년 2월 1일 ~ 795년 12월 26일

스테파노 3세 선종 후 부제였던 하드리아노 1세가 만장일치로 교황에 선출되었다. 스테파노 3세 치세 말기에 파울루스 아피아르타에 의해 쫓겨나거나 핍박 받은 귀족과 성직자를 복권시키는 한편 파울루스 아피아르타를 통해 롬바르드 왕국과의 관계 개선을 도모 했다. 롬바르드 왕국의 데시데리우스왕은 이러한 교황의 유화 제스쳐에 응하는 듯 했으나 실상은 교황령에 대한 침입을 착실히 준비해 나갔다. 화전양면전술 결국 774년 기습적으로 데시데리우스는 교황령을 침입하였다. 이에 하드리아노 1세는 프랑크 왕국의 카를루스에게 도움을 청했다.

중세 초기 최강의 명장이자 정복군주였던 카를루스는 순식간에 진격해 롬바르드 왕국의 수도 파비아를 포위했고, 결국 데시데리우스는 항복하고 만다. 카를루스는 데시데리우스를 수도원에 유폐시킨 후 자신이 롬바르드 왕국의 왕관도 차지했음을 선포한다. 이로써 로마를 오랫동안 위협했던 롬바르드 족의 침입은 일단락 되게 된다.[1]

재위 초기에 외부로 부터의 직접적인 위험을 제거한 하드리아노 1세는 이후 동로마와 프랑크왕국의 카를루스와 성화상 공경에 대한 교리적 논쟁을 이어갔다. 동로마에서 제2차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성화상 공경에 대한 핍박을 중단하자 이 공의회의 결정들은 인정하였다. 하지만 카를루스는 성화상 공경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밝히면 그에대한 논문집을 작성하였다. 이에 프랑크푸르트에서 성화상 공경에 대한 시노드가 개최되었는데 결론은 어느정도 균형을 맞추는 선에서 과도한 성화상 공경은 지양하고 동시에 '카를루스'가 성화상 공경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피력한 논문집에 대한 수용을 거부하였다.

하드리아노 1세는 72세의 고령에 교황이 되었지만 결과적으로 롬바르드족의 위협을 제거했으며, 성화상 공경에 대한 문제를 어느 정도 매듭지었다. 이러한 안정을 바탕으로 여러 성당과 건축물을 세웠고, 잉글랜드의 교회에 대해서도 세력 균형을 이루게 하는 정치적 묘수를 두었다. 하드리아노 1세는 23년간의 재위 기간을 마치고 795년 12월 26일 95세의 나이로 선종하였다. 재위기간 내내 카를루스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카를루스는 하드리아노 1세를 기리기 위해 선종 후 비석을 세우기도 했다. 이후 가톨릭교회와 프랑크 왕국의 유대 관계가 상당기간 지속되게 된다.
  1. 이후 이탈리아 북부의 롬바르드족 공국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카를루스에게 곧 진압 되었고, 동로마의 지원도 약해져 이탈리아 북부는 프랑크 왕국에 귀속된다.